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49)
무공 쓰는 외과 의사-449화(449/540)
제87장 한파(5)
서울 신원대학교 병원.
연구동 701호실에서 아영은 당직 근무 중이었다.
교수라고 해서 당직 근무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외과의 특성상 레지던트가 감당하지 못할 응급환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실제로 아영은 3달 전 당직 근무 도중 대동맥 박리 환자 응급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휴우~”
아영의 한숨이 연구실에 퍼져 나갔다.
눈이 뻑뻑하고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문득 바라본 창가는 까만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출근하기 전.
준후가 ‘내공 수액술’을 펼쳐주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뻗어버렸을 것이다.
아영은 자리에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가볍게 스트레칭도 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맑아졌다.
아영은 올여름까지 한국 흉부외과 협회에 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다른 교수들은 펠로우와 레지던트를 잘도 부려 먹었지만 심성이 고운 아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아영이 어렸을 때부터 지키고 있는 황금률 중 하나였다.
올바른 가치관을 지키는 건 뿌듯한 일이면서 동시에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응급수술인가? 지금은 곤란한데.’
아영이 가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를 확인하니 준후였다.
이 시간에 전화 거는 일은 자주 없었기에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응. 준후야. 무슨 일이야?”
-아영아 미안한데 환자 노티 좀 할게.
“얼마든지.”
-조금 길 수도 있어.
준후의 설명이 이어졌고 아영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노티를 듣고 보니 전화를 걸 만했다 싶었다.
“그러니까 루틴 검사랑 심전도에서는 이상이 없는데 내공으로 검사했더니 심장이 이상하다는 거잖아?”
-그렇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상한데?”
-좌심실 비대(두꺼워짐)가 느껴져. 정도가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고.
“하긴 심하지 않았으니까 흉부 엑스레이에서도 이상 징후가 없었겠지.”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의 내공 검사술에 새삼 감탄하면서.
처음 준후가 무림이라는 곳에서 초능력 같은 것을 익혔다고 했을 때, 아영은 믿지 않았다.
얘가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를 하나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준후가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심장 판막은 어떤데?”
-판막은 전부 정상.
“고혈압도 없지?”
-없어. 그래서 미치겠어. 왜 좌심실 비대가 생겼는지.
준후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환자밖에 모르는 건 병원에서나 군대에서나 똑같았다. 준후는 환자를 향한 해바라기였다.
“잠깐 환자 좀 바꿔줄래?”
-오케이.
아영은 준후가 바꿔 준 환자와 휴대폰으로 문진을 했다. 가족력과 병력과 증상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쓸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
지병이 없는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좌심실 비대가 있다는 사실은 아영에게도 큰 난제였다.
대체 왜 좌심실 비대가 생겼는가.
또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준후가 부탁한 환자라서 더더욱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아영은 깊게 고민하다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준후야. 환자 상의 좀 올려봐.”
-갑자기?
“응. 일단 시키는 대로 해봐.”
-알았어. 어? 뭐야? 이건?
준후가 당황한 것이 휴대폰 너머에서 생생하게 전해졌다.
-검붉은 딱지 같은 게 배꼽 주변에 퍼져 있어. 환자한테 물어보니까 다친 건 아니라는데?
“당연히 다친 게 아니겠지. 그거 혈관 각화종이거든.”
정답을 찾았다는 확신에 아영이 미소를 지었다.
혈관 각화종.
피부 표면에 일어나는 검붉은 피부 발진이다.
혈관 기형, 혈관 압박, 만성 자극등이 원인이지만 해당 환자의 원인은 조금 달랐다.
“준후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 *
2시간 뒤 한국 도수 병원 응급실.
준후는 성태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심장내과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이건 저도 생각 못 했네요.”
심장내과의가 혀를 찼다.
방금 막 심초음파와 특수 혈액 검사, 유전 검사가 끝났다.
그 결과 정상인 줄 알았던 성태는 비정상으로 판별이 되었다.
성태는 희귀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국내에서 앓고 있는 사람이 200명이 채 안 되는 희귀 질환이었다.
“그동안 논문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모니터를 바라보던 심장내과의가 성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선생님께도 죄송하고 너한테도 미안하다.”
심장내과의가 준후와 성태에게 사과했다.
고개가 아니라 허리가 숙여졌다.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준후가 심장내과의를 다독였다.
심장 내과의는 본인이 할 만큼 했다. 단지 성태가 앓는 질환이 워낙 희귀해서 놓쳤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준후는 심장내과의의 태도가 좋았다.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인정하고 사과를 구하지 않았던가.
웬만한 의사였으면 희귀 질환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신경외과 선생님이 어떻게 ‘그 질환’을 진단하셨죠?”
“애인이 흉부외과 서전이라서요. 덕을 좀 봤습니다.”
“멋있는 커플이네요. 일단 발병 초기라서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심장내과의가 설명을 계속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외래 진료를 정기적으로 볼 것.
치료는 약물로 진행할 것.
의병제대를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혹한기 훈련은 열외하는 게 좋다는 것 등등.
당부사항을 듣고 치료약을 챙겨서 준후는 응급실을 떠났다.
“중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덕분에 빨리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태가 준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게 군의관이 할 일이야.”
“그래도 중대장님이 없었으면 아주 나중에 질병을 발견하지 않았겠습니까?”
“…….”
“나중에 발견하면 손쓰기 힘든 질환이라고 들었습니다.”
성태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장내과의에게 진단 받은 질환의 이름은 바로…….
‘파브리병’이었다.
파브리병은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는 희귀질환으로 방치할 경우 신장 및 심장의 기능이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증상이 심해져서 진단받았을 때는 이미 큰 수술을 피할 수 없다고 들었다.
만약 중대장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성태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뭐, 네가 정 그렇게 고맙다면 보답할 방법이 있긴 하지.”
“말씀해 주시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별건 아니고.”
준후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뉴튜브를 운영하거든? 구독하고 영상이나 잘 봐줘. 기왕이면 다른 사람한테 추천도 좀 하고.”
“정말 그거면 됩니까?”
“왜 내가 돈이라도 달라고 할 줄 알았니?”
준후가 웃었고 성태도 준후를 따라 웃었다.
* * *
부우우웅.
준후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부대를 빠져나왔다.
연대에 복귀해서 연대 입원실에 성태를 입원시키고 다시 혹한기 야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에 병원을 찾은 데다가 병원에서 긴 시간을 소모하고 부대까지 방문한 탓일까.
지평선에서 노란 동녘이 떠오르고 있었다.
‘역시 아영이네.’
준후는 아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심장내과의 조차 놓친 파브리병을 아영은 기어이 잡아냈다. 이번 치료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것이다.
준후가 메이유에서 수련하는 동안 아영도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그러고 보니 희귀 질환 쪽은 공부가 덜 됐어…….’
준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성태가 심초음파와 유전자 검사를 받는 동안, 준후도 파브리병에 대해 검색해 봤다.
놀랍게도 파브리병은 신경외과와도 연관이 있었다.
드물긴 하지만 유전적 기형이 뇌혈관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만약 성태가 신경외과 외래로 진료를 보러 왔다면 자신은 파브리병을 진단할 수 있었을까.
준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검사 결과 뇌에 이상이 없다며 돌려보냈을 것이다.
확실히 의료의 길은 바다처럼 넓었다. 부지런한 공부와 겸손한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준후는 모처럼 반성했다.
메이유에서 7년 동안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수료한 후.
내심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자만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물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들어야겠어.’
준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뇌사 및 식물인간 환자의 치료법을 연구하는 한편.
희귀 질환 쪽을 더 파고들면 좋을 듯 했다.
운전하던 도중.
준후는 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림 출신이라서 운전 중에 통화한다고 한들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았다.
준후는 아영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노티했다.
아영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영이, 네 덕분에 나도 체면 좀 세웠네?”
-나야 숟가락만 얹었지. 내공 심장 초음파 술로 환자의 심비대를 알아낸 건 너잖아.
“…….”
-심장내과의 진료만 믿었으면 파브리병은 10년 뒤에나 밝혀졌을 걸?
아영이 준후를 치켜세웠다.
겸손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준후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준후가 내공과 무공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고 확신할 것이다.
하지만 아영은 생각이 달랐다.
준후의 진짜 무기는 환자에게 늘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실력’이 있다고 해도 환자를 향한 ‘관심’이 없다면 일류가 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의 중에 환자를 돈벌이 수단이나 본인의 명예를 채워줄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퇴근 안 해?”
아영이 물었다.
“훈련 중에는 퇴근 없어. 병사들하고 같이 지내야 해.”
“아쉽다. 내공 수액술 받아야 하는데.”
아영의 대답에 준후가 피식 웃었다.
“요새 내공 수액술에 맛들렸네?”
“응. 맞아. 빵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내공 수액술이야. 아침에 한 번 받으면 효과가 저녁까지 가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잡담을 나누다가 준후는 문득 ‘그 인간’을 떠올렸다.
‘그 인간’을 화제로 꺼내면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될 텐데…….
해야 할까 vs 말아야 할까.
고민 끝에 준후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영아. 몸조심하고 있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시호 때문에.”
“아…….”
휴대폰 너머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영도 시호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원래 시호는 아영을 죽일 계획이었다.
준후를 죽이는 것보다 준후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준후가 더 고통 받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림에서 수많은 악인을 상대한 준후가 아니던가.
시호의 계획은 이미 준후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래서 준후는 아영 대신 흉부외과 컨퍼런스룸에 대기했다.
그때 칼부림이 벌어졌고, 칼부림이 영상에 찍히면서 시호의 죄질은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의외로 칼부림의 순기능도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준후가 자신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아영에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아직 이상은 없어.”
“항상 조심해야 돼. 특히 오피스텔 들어갈 때 누가 뒤를 쫓나 확인하고.”
“설마 아직까지 원한이 남아 있을까?”
“있어. 분명. 더하고도 남을 놈이야.”
준후가 빠드득 이를 깨물었다.
“나도 최대한 빨리 녀석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볼게.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쳐야 해.”
준후의 목소리가 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