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52)
무공 쓰는 외과 의사-452화(452/540)
제88장 끝나지 않은 혹한(3)
“혹시 성함하고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철민이 준후에게 물었다.
“그건 왜…….”
“아마 모르시겠지만 우리 구에서 이달의 시민을 한 명씩 뽑고 있습니다. 괜찮으면 선생님을 후보로 올리고 싶어서요.”
“괜찮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준후가 휘휘 손을 저었다.
솔직히…….
준후의 행동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대단한 일이었다.
독사를 맨손으로 잡아 죽였다.
환자가 뱀에 한 번 더 물리는 것을 막아냈다.
그것도 모자라 ‘신선한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그 방식이 아니었다면 환자는 결코 지금처럼 멀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티를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준후에게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표였다.
‘무기력’이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물리치는 일이기도 했다.
“겸손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요.”
철민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행은 널리 알리면 알릴수록 좋은 겁니다. 사람은 나쁜 일에만 자극을 받는 게 아니라 좋은 일에도 자극을 받잖아요.”
철민의 말에 준후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달의 시민으로 뽑히면 나중에 한 번 더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구급대원이 환자를 들 것에 눕히고 떠날 준비를 했다.
안경 노인도 보호자로 구급대원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팔자에도 없던 헬기를 타게 됐다며 중얼거리면서.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떠나기 직전 환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걷던 길을 되짚어 집 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호수처럼 맑았다.
머리 꼭대기에 걸린 햇살이 눈부셨다.
역시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있어.
길이 없으면 길은 만드는 거야.
귀가 도중.
준후는 중독된 환자를 살린 방법을 되새김질했다.
환자를 치료하기로 마음을 굳힌 직후.
이런 저런 생각이 준후의 머리를 스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내공이었다.
내공으로 독을 치료하자!
내공은 자연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공이 심오한 고수들이 남들보다 빨리 회복되고 나아가서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공이 만능 치료제는 아니었다.
우선 본인이 중독됐을 때.
운기조식으로 독을 몰아내는 건 별 문제가 없었다.
다만 내공으로 다른 사람의 중독을 치료하는 건 문제가 되었다.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내공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독이 오히려 활성화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아까 그 노인 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환자에게 ‘내공 수액술’을 사용했다면 오히려 독이 더 빨리 전신으로 퍼졌을 것이다.
이를 치료하겠다고 내공을 더 쏟아부었다간 무림인이 아닌 노인의 몸에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기댈 장소라고는 내공밖에 없는데 정작 내공을 쓸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준후는 역발상을 했다.
그 역발상이란 무엇이냐 하면…….
혈교인들이 사용하는 ‘흡성대법’이었다.
흡성대법은 타인의 내공이나 정기를 흡수하는 사악한 무공이었다.
정파인들도 사용할 줄은 알았지만 금기로 정해놓고 쓰지 않았다.
흡성대법으로 독기만 빨아내면 어떨까?
준후는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을 그대로 따랐다.
환자를 안심시키는 척하면서.
환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곧바로 흡성대법을 펼쳤다.
내공 수액술은 파(波, 물결파)자 결을 사용하는데 흡성대법에서는 이와 정반대인 흡(吸, 빨아들일 흡)자결을 사용했다.
준후는 환자의 몸 안에서 날뛰고 있는 독 기운을 전부 빨아들였다.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쭉쭉!
직접 압박을 빨리 한 덕분일까.
독은 천천히 퍼지고 있었으며 이미 퍼진 독의 양도 많지 않았다.
준후는 환자에게서 빨아들인 독을 자신의 단전으로 몰아넣었다.
단전에 내공의 폭풍을 만들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소용돌이치는 내공의 폭풍 속에서 독은 완전히 해독되었다.
이것이 바로…….
환자가 살모사가 물리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기적의 뒷면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네.
사파 무공으로도 환자를 살릴 수 있을 줄이야.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사실 그동안 무공과 내공에 한계를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더 이상 무공을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의심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자신의 판단은 지극히 얕고 좁았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무공을 치료에 응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한지도 몰랐다.
흡성대법의 중독 치료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농약을 음독한 환자도 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중독 치료 말고 다른 분야에 응용할 수는 없을까.
생각이 무수한 가지로 뻗어나가는 가운데 집에 도착했다. 준후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다시 집을 나왔다.
아영을 만나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 * *
그날 오후 신촌.
딸랑!
벨소리를 앞세우며 준후가 역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주말 오후라서 카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빈자리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삼삼오오 모인 손님들이 떠들썩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
한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준후가 창가 쪽 자리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 되겠어? 이게 얼마만이지? 거의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사내가 씽긋 웃으며 준후의 어깨를 토닥였다.
“거의 그쯤 되는 것 같네요.”
준후도 웃으며 대답했다.
“음료는 뭘로 할래?”
“저는 따뜻한 라떼로 할게요. 뭐 드실 거예요? 제가 살게요.”
“내가 보자고 했는데 내가 사야지. 라떼라고 했지? 가만히 자리 지키고 있어.”
사내가 계산대 쪽으로 이동했다.
사내의 이름은 이준혁으로 준후의 외삼촌이었다.
의대 다닐 때까지만 해도 가끔 봤는데 레지던트 근무를 하고 메이유에서 부스트업 과정을 거치면서 얼굴을 못 보다시피 했다.
주문을 마친 준혁이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본 준혁은 후덕해져 있었다.
얼굴은 그대로였는데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입고 있는 셔츠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준후 너는 어째 늙지를 않는 것 같다? 예전 그대로인데?”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요. 삼촌도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군식구만 하나 늘었지.”
준혁이 피식 웃으며 검지로 본인 배를 찔렀다.
“군의관 생활은 좀 어때?”
“솔직히 편한 편이죠. 제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예요.”
의무대에서 수술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환자가 연신 밀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당직 근무 또한 없었으며.
오후 6시가 되면 땡하고 부대 바깥으로 퇴근하면 됐다.
이런 호화로운 시간은 분명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준후는 다른 군의관에 비해 시간을 알뜰하게 쓰고 병사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꿀인 건 사실이었다.
“삼촌은 연예 매니지먼트 쪽에서 일한다고 하셨죠?”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누나한테 이야기 못 들었나 보구나. 3년 전부터 혜성 엔터테이먼트에서 일하고 있다.”
“혜성이면 5대 기획사 중 하나 아니에요?”
“맞아. 중소 기획사에서 일하다가 운 좋게 스카우트 됐지. 지금은 대리 달고 있다.”
“축하드립니다.”
준후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씀 드리는데 저는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녀석,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준후의 농담에 준혁이 깔깔깔 웃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진동벨.
준후는 진동벨을 들고 계산대로 이동해 커피를 받아 왔다.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이 올라왔다. 대화의 맥이 끊기는 바람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혁은 왜 갑자기 자신을 보자고 했을까.
잠시 잊고 있었던 질문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물론 삼촌이 조카를 보고 싶어 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보자고 한다면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삼촌이 어디 아픈 걸까.
아니면 삼촌의 지인이 아픈 걸까.
그것도 아니면 좋은 병원이나 의사를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일까.
수많은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뒤엉켰다.
준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돌직구를 던졌다.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다른 게 아니고 의학적으로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그거라면 제 전공이죠. 뭐가 궁금하세요?”
“뇌전증이라는 질환이 있다면서?”
“있죠.”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뇌전증이란 과거 ‘간질병’이라고 불렸던 질환이다. 조현병이 과거에 ‘정신분열증’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말이다.
뇌전증의 원인은 유전, 외상, 뇌손상 병력 등등으로 많았다.
주된 증상으로는 발작이 있었다.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거나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전신 발작도 있고.
정도가 약한 소발작이나 부분 발작도 있었다.
“뇌전증은 보통 어떻게 진단받니?”
“EEG(뇌전도, 뇌파검사)가 가장 정확해요. 뇌전증 환자에게서 특유의 뇌파가 감지되거든요.”
“…….”
“MRI로 진단하는 경우도 많은데 MRI 결과에 이상이 없어도 뇌전증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치료는 어떻게 하고?”
“보통은 약물로 치료하고 뇌에 뚜렷한 병변이 있으면 그때는 수술을 하죠.”
“그 뇌전증에 젊은 사람도 많이 걸리니?”
“아주 어리거나 노년에서 발생하긴 하는데 청년층에서도 꽤 있죠.”
“그렇구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말은 준후가 더 많이 했는데 어쩐지 준혁이 더 목이 타는 눈치였다.
“삼촌 주변에 뇌전증 환자가 있어요?”
“휴우. 사실은 말이다.”
준혁이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준후에게 부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쳤던 준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돌파구가 없었다.
준혁이 맡은 레이블에서 새로 민 아이돌은 쫄딱 망해 버렸다.
미니 앨범 2개가 망하고 얼마 전 야심차게 런칭한 정규 앨범까지 망했다.
지금 기댈 만한 아이돌이라고는 ‘세븐 울프’뿐인데 세븐 울프의 상황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준혁은 세븐 울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후에게 특별히 만나자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내가 관리하는 아이돌이 있어. 근데 그중에서 소위 ‘입덕 멤버’라고 중요한 녀석이 있단 말이지.”
“네. 그래서요?”
“그 멤버가 군대를 가야 하는데…….”
준혁은 차마 준후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힘겹게 말라붙은 입술을 떼었다.
“그 ‘뇌전증’이라는 걸로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브로커를 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고.”
“…….”
“마침 네가 신경외과 의사니까 너한테 부탁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
“삼촌이 웬만해서 이런 부탁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잖니? 딱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준혁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준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준후는 말이 없었다.
감정을 읽기 힘든 눈으로 준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촌이 돼서, 오랜만에 조카를 불러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거 나도 잘 알아…….”
“…….”
“하지만 너무 급한 일이란다. 이번에 일이 잘 안 풀리면 삼촌 회사에서 잘릴지도 몰라. 너도 그걸 바라는 건 아닐 거잖아. 응?”
준혁은 최대한 좋게좋게 준후를 타일렀다.
그리고 마침내 준후가 입을 열었다.
“삼촌.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