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58)
무공 쓰는 외과 의사-458화(458/540)
제89장 최종결전(4)
오피스텔은 구조적으로 특별할 게 없다.
우선 현관에 들어서면 옆에 장롱형 신발장이 있다.
건너편에는 화장실이 있고 세탁기와 일체형 냉장고가 퍼즐처럼 붙은 싱크대가 있다.
평수는 보통 4-5평 정도.
오피스텔에서 차이를 둘 요소라면 현관과 방 사이에 중문이 있느냐.
복층이냐 아니냐.
원룸이냐 투룸이냐 정도였다.
하지만 ‘그 방’은 조금 달랐다.
그 방은 한낮임에도 암막 커튼이 쳐져서 깜깜했다.
벽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이 젊고 잘생긴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휴우.”
샤워를 마친 시호가 욕실에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벽 앞에 서서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일자로 다물어졌던 입가에 곡선의 미소가 번졌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르겠지.”
시호가 보물을 만지듯 한 장의 사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진 속 인물은 준후를 촬영한 것이었다.
사진 중에는 일상복 차림도 있었고, 군복 차림도 있었고 의사 가운을 걸친 차림도 있었다.
단독샷도 있었고 단체샷도 있었다.
“사람이라는 건 참 모순덩어리야. 내가 파괴하고 싶은 사람이 나를 구원하게 되고.”
십 년 가까운 감옥 생활에서.
시호를 구해준 사람은 바로 준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저급한 범죄자들과 무리 생활을 하고, 자유를 속박당하고, 급식 따위를 먹을 때마다.
시호는 늘 준후를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준후에게 갚아줄 복수를 생각했다.
그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없었던 힘이 샘솟았다.
그 힘이 시호를 버티게 했다.
구치소 안에서 매 순간이 지옥이었지만 그 지옥들도 결국 흘러가 추억이 되어버렸다.
시간은 그 무엇보다 강했다.
시호는 한참 그 자리에서 서서 준후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준후의 외모는 변한 게 없었다.
어떻게 옷을 입느냐에 따라 대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리어로는 정점을 찍었다. 메이유 대학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수석 졸업하면서 신경외과 세부 전공을 마스터했다.
그래서 부럽냐고?
천만의 말씀!
시호는 오히려 준후가 불쌍했다.
준후가 가진 모든 것이 곧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준후 인생을 깨부술 망치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준후, 저번처럼은 안 될 거다. 나도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했거든.’
준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호도 평범하지 않은 작전을 짜두었다.
계산은 철저했고 승산은 충분했다.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시호가 마음먹는 그날이 실행 일이었고 준후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날이었다.
사실 시호의 계획은 이랬다.
준후의 부모를 납치하고 아영을 납치한다.
그리고 준후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부터 1시간을 줄 테니 부모님을 구할지, 아영을 구할지 선택해라.
둘 다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넌 어떻게 할 거냐.
“크크크크.”
상상만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원망할 준후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뭐지?”
지이이잉.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려서 번호를 살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쪽’의 전화인가 싶어서 얼른 받았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망했던 목소리였고.
그리워했던 목소리였고.
다시 보고 싶은 목소리였다.
“역시 너와 나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어. 안 그래? 서준후?”
시호가 씨익 웃었다.
* * *
준후는 인천에 위치한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번화가와 떨어진 곳으로 구식 다세대 주택이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인근에서 신축 빌라 공사를 하는지 시끄러운 공사음이 들렸다. 가뜩이나 좁은 길은 주차된 차 때문에 더 비좁았다.
“여기구나.”
도로명 주소를 훑으며 걷던 준후의 발걸음이 한 집 앞에 멈췄다.
저 파란 문 너머의 1층집에 시호가 살고 있었다.
순간 시호와의 악연들이 떠올라 머릿속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준후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시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준후는 생각이 많았다.
당연히 점잖게 타이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적당한 악인이라면 갱생이 가능했지만 시호처럼 뼛속까지 악에 물든 인간은 고쳐서 쓸 수도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앞서.
준후는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CCTV는 없었다.
역용술을 펼치고 있는 중이니 만에 하나 정체가 들통 날 일도 없었다.
준후가 손에 장갑을 꼈다.
끼이이익!
대문을 열고 1층으로 들어섰다.
1층집은 한 곳뿐이었므로 냅다 초인종부터 눌렀다.
안쪽에 반응은 없었다.
정말 자리를 비운 걸까, 없는 척을 하는 걸까.
덜컹! 덜컹!
문손잡이를 당겨보니 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
준후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금나수를 펼치며 문고리를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어락의 잠금장치를 힘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준후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 안의 기척을 살피며 준후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방 2칸에 화장실이 있는 평범한 다세대 주택.
내부를 살피던 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성 하나는 알아줘야 한단 말이지.”
준후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 안에 시호는 없었다.
싱크대며, 탁자며, 가구 위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시호가 한참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증거였다.
이곳은 공식적인 거처일 뿐.
비공식적인 거처에서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집 안에서는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시호는 준후가 이렇게 나올 것을 어느 정도 예측했는지도 몰랐다.
허탕을 친 준후가 바깥으로 나갔다.
번화가로 이동해 아까 봐둔 공중전화기 쪽으로 이동했다. CCTV가 공중전화기를 비추고 있었으므로 사전에 작업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척!
준후가 사각지대에서 CCTV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CCTV가 고개를 들듯이 위로 움직여 하늘을 촬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격공섭물.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 내공으로 움직이는 무공을 응용해서 펼친 것이다.
준후는 그제야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다.
흥신소 직원은 시호의 주소뿐만 아니라 전화번호도 알려주었다.
띠이이이. 띠이이이.
건조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장갑을 낀 준후의 손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여보세요.
마침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준후는 상대가 시호임을 확신했다. 순간 온몸에 피가 들끓었다. 근육과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너 어디냐?”
-역시 너와 나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어. 안 그래? 서준후?
뭐가 그리 좋은지 시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시호도 준후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도 마침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닥치고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헤어진 애인에게 매달리듯이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우린 끝난 사이라고.
“농담할 기분 아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지?”
수화기를 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출소한 시호가 얌전하게 산다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간다는 말보다 더 믿기 힘들었다.
시호에겐 분명 사악한 꿍꿍이가 있었다.
-천하의 서준후도 급하긴 했나 봐? 날 찾으려고 혈안이 된 걸 보면.
“…….”
-내 연락처를 알아낸 걸 보면 흥신소에 의뢰라도 했나 보지?
“그래서?”
-그냥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그 사건 이후로 부모님도 나를 안 찾거든. 근데 너만은 날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주니까 말이야. 크크크.
시호의 웃음에 광기가 섞여 있었다.
역시 이놈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림에서 무공을 익혔다면 필시 대 마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무슨 짓을 해도 넌 그에 대한 죗값을 열 배로 치러야 할 테니까.”
-무서워 죽겠네. 당장 오줌이라도 지리겠어.
“빈정거리지 마. 이건 내 마지막 경고니까.”
수화기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기 싸움이 팽팽했다. 어느 쪽도 먼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역시 말싸움은 재미가 덜하군. 조만간 즐거운 이벤트로 직접 만나자고. 장담컨대 뭘 기대하든 네 기대 이상일 거다.
시호가 먼저 통화를 끊었다.
쾅!
준후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들고 있던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지이이잉.
그런데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공교롭게도 전화를 건 사람이 아영이었다.
방금 막 시호와 통화를 한 탓일까.
걱정이 배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솟아오르고 목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아영아. 무슨 일인데?”
준후가 급하게 용건부터 찾았다.
-주…… 준후야. 미안한데 우리 집에 와줄 수 있어?
아영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들렸다.
* * *
택시에서 내린 준후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용술을 풀었기에 얼굴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계절이 봄에서 겨울로 향하고 있었지만 해는 아직도 일찍 떨어졌다.
오후 6시밖에 안 됐음에도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아영의 오피스텔은 번화가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오피스텔이 가까워질수록 인적이 드물어졌다.
‘수상한데?’
준후가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영의 오피스텔과 조금 떨어진 곳에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못 보던 차였다.
최근 준후는 군의관 근무 시간이 끝나면 아영의 오피스텔로 퇴근했다.
그래서 주변 지리에 빠삭했다.
준후가 아닌 척하면서 승용차 내부를 자세히 살폈더니 두 명의 남자가 차 안에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준후는 일단 승용차를 지나쳐 아영의 오피스텔을 찾았다.
아영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초조한지 다리를 떨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흉부외과의로 심장 수술을 할 만큼 각종 응급 상황에 통달했을 아영인데 말이다.
“준후야.”
아영이 준후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준후의 품에 안겼다.
준후가 아영을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영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전화로 말을 못했어?”
“저…… 저거 때문에…….”
아영이 벌벌 떨리는 검지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에 가려져서 인지 아영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이젠 내가 왔잖아. 아무도 널 해칠 수 없어.”
“응. 알아.”
다행히 준후가 도착한 후 아영이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준후는 그제야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아영은 여전히 화장실 쪽으로 얼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체 화장실에 뭐가 있기에.
아영이 이토록 겁을 먹었을까.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준후가 화장실 문을 활짝 열었다.
화장실 바닥 타일 위에 택배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뭔가 배치가 뜬금없었다.
“준후야. 너무 놀라지 마.”
“걱정 마.”
아영의 걱정을 뒤로 하고 준후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닫혀 있던 택배 상자의 위쪽 종이를 위로 젖혔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침착함의 대명사인 준후조차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시호.
개새끼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