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60)
무공 쓰는 외과 의사-460화(460/540)
제90장 벗어나다(1)
‘전혀 상상을 못 했다는 표정이군.’
시호의 반응을 확인한 준후가 피식 웃었다.
시호 입장에서는 길을 걷다가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마른하늘에서.
시호가 눈치챌 수 없도록 준후가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았으니까.
이번 함정의 핵심은…….
바로 역용술이었다.
무공으로 얼굴을 변형시켜 진짜 정체를 숨긴 것이었다.
준후는 무려 200만 유튜버 아닌가.
본래 얼굴로 돌아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었다.
만약 준후의 정체를 시호가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이 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처음에야 고분고분 말을 들었겠지만 일이 끝난 후에 준후가 내린 지시를 꼬투리 잡아서 협박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우리에게 냄새나는 지시를 내렸다면서 말이다.
역용술이 없었다면…….
준후의 함정 소식이 벌써 시호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용술이 준후의 정체를 지켰다.
지금부터 벌어질 대사건도.
앞으로 벌어질 대사건에서도 역용술은 준후를 보호할 것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발악하듯 물었다.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네가 아영이에게 붙인 용역 직원들을 역으로 이용했다. 그 녀석들은 이제 내 팔다리야.”
“젠장! 머저리 같은 놈들이 배신을 했구나.”
“사람 관리 못 하는 것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안 그래?”
준후가 빈정거렸다.
“너도 입만 살아 있는 건 여전해.”
“글쎄. 입만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으으으.”
시호가 모멸감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미치도록 복수하고 싶었던 준후에게 오히려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흥이 깨져 버린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시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열기가 두 뺨에서 귓불까지 퍼져 나갔다.
“…….”
“…….”
두 사람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
무너진 외벽 틈으로 한 줄기 빛살이 새어 들어왔다. 공기 중에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듯 나풀거렸다.
팽팽한 분위기를 먼저 깨뜨린 이는 시호였다.
“뭐 하나만 묻자.”
“좋을 대로.”
“만약 아영과 부모님.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릴 거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
뜻밖의 질문에 준후가 혀를 찼다.
인간이 삐뚤어서 그런지 질문도 삐뚤어졌다. 준후는 그런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조커 흉내라고 내고 싶었어?”
“내겐 진지한 문제다. 구치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 생각만 했기 때문이지. 어서 답해!”
시호가 성난 표정으로 준후를 재촉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으로 내 머리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다. 못 들은 걸로 하지.”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단 한 마디면 되는데?”
시호가 끈질기게 굴자 준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들썩거렸다.
“나라면 말이다.”
“그래. 너라면?”
“평생 입을 다물고 있을 거다. 평생 네가 궁금해 미치게 만들려고.”
“개자식!”
시호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이 퍽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준후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호의 출소 소식을 듣고 선수를 쳐서 다행이었다.
만약 대응이 미지근했으면.
시호의 끔찍한 실험은 현실이 되어 준후를 찾아왔을 것이다.
준후는 부모님과 아영을 잃고 평생 후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상상만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네가 나를 궁지에 몰았다는 건 순순히 인정하지. 하지만 사실 그건 아무 문제도 아니야.”
시호가 광인처럼 낄낄낄 웃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양손에 쥐었다. 총구를 준후의 가슴에 겨누었다.
총구 안쪽의 구멍이 블랙홀처럼 새까맸다.
“난 아직 널 괴롭힐 방법이 많아.”
“…….”
“순서가 꼬인 거지. 일이 꼬인 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부터 산탄총으로 널 반병신으로 만들겠어.”
“…….”
“다른 용역업체 직원을 불러서 아영과 네 부모님을 다시 납치하고. 그러면 모든 게 본래 궤도대로 돌아가겠지?”
시호가 희죽 웃었다.
준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다.
무림 출신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평소에 이를 갈고 칼을 갈아왔다.
그 피땀의 결정체가 시호 손에 들린 산탄총이었다.
준후를 제압하기 위해 사격 연습을 하고 총기 보유 허가증도 획득했다.
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총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너무 걱정 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철컥! 탕!
시호가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천둥 같은 소리가 집 안에 터졌다.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니?”
시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준후의 모습이 한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놀라운 점은 준후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조준은 완벽했다.
빗나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산탄총이 빗나갈 거리가 아니었다.
일단 다리부터 못 쓰게 만들 작정으로 발목 쪽을 노리고 격발했지만 그게 오발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철컥!
시호는 재빨리 총열을 열었다.
산탄총 탄알집을 재장전하고서 재차 준후의 왼쪽 발목을 노렸다.
탕!
거대한 격발음이 다시 한번 집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웬걸?
결과는 아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시호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
그것은 준후가 맨몸으로 총알을 피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두 번 연속으로 총이 빗나간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거 불쌍해서 어쩌나? 난 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거든.”
준후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공을 쓰고 정신 집중하면 총을 피할 수 있다는 건 예전에 시험해 봤지. 실탄 사격장에서.”
“그……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상식을 벗어난 인간이니까 상식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던 거야.”
“닥쳐!”
탕! 탕! 탕!
계획을 바꿨는지 시호가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후는 현란한 발재간으로 총탄을 전부 피해냈다.
솔직히 시호를 제압할 방법은 100가지도 넘게 있었다.
격공섭물로 총을 빼앗거나, 총구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거나, 총을 쏘기 전에 달려들어서 시호를 쓰러뜨리거나 등등.
하지만 준후는 일부러 사격을 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시호가 본인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아영과 준후가 시호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 순간을 물 버리듯이 버리긴 아까웠다.
“하아…… 하아…… 하아…….”
사격을 마친 시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몸을 사용한 것도 아니거늘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젠장! 왜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 왜!”
시호가 울부짖었다.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
“네가 마음을 곱게 써야 하늘도 널 돕는 법이다. 네 오염되고 타락하고 썩어빠진 정신머리는 하늘이 돕지 않는다.”
“크크크.”
별안간 광소를 터뜨리는 시호.
시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젖혀 웃어댔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X. 오늘 대체 몇 번이나 엿을 먹는지 모르겠군.”
쿵!
시호가 들고 있던 산탄총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설마 총알을 피해 버릴 줄이야. 오늘은 내 완패다.”
“비단 오늘만일까?”
“그래. 내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았거든.”
“비장의 무기?”
불길한 어휘에 준후의 의식이 곤두섰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산탄총 말고 보여줄 게 더 남았다고?
승기를 잡은 건 분명 자신이거늘 준후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시호가 가진 어둠의 깊이는 감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내 비장의 무기는…… 바로 너다.”
“나라고?”
“서준후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의식머리가 바로 내 무기란 말이지.”
시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데?”
“…….”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서준후가 사람을 죽인다고?”
“…….”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지. 총알은 피해도 날 죽이지는 못할 거다.”
시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준후가 총알을 피한 직후.
시호의 확신은 더욱 단단해졌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을 갖춘 녀석이 과거 레지던트 시절에는 왜 자신을 내버려 뒀을까.
천성이 곱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살릴 줄만 알지, 죽일 줄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시호가 준후 입장이었으면.
자신을 골백번이라도 죽였으리라.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었기에.
“넌 누군가를 죽일 깜냥이 못 돼. 설령 그게 나 같은 쓰레기라도.”
“…….”
“왜? 정곡을 찔리니까 할 말이 없나?”
시호가 낄낄낄 웃었다.
한편 시호의 도발에도 준후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굳게 다문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두 주먹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등에 힘줄과 핏줄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시호의 지적이 맞았다.
준후는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
레지던트 시절 시호를 몰래 불러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난 왜 그랬을까.
준후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 준후에게 타인을 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림 출신 아니던가.
자신의 검으로 수많은 마두의 목을 베어내고 사지를 잘라냈다.
그러면서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경험이 없으면 모를까.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시호에게도 똑같이 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준후는 망설였다.
결국 행동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껴서 그랬다.
준후가 살아가는 장소는 무림이 아니라 현대였다.
현대에서 살인은 정당화되기 힘들었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본능적으로 혐오를 느끼게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림에서의 준후는 검객이었지만.
현대에서의 준후는 의사였다.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해친다?
설령 그게 악독한 범죄자라고 해도?
무림의 자아와 현대의 자아가 충돌하는 바람에 준후는 시호를 즉결 심판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넌 날 못 죽여. 그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다.”
“…….”
“네가 날 죽이지 못한다면 난 평생 그림자가 되어 너를 쫓겠지. 언젠가 아영도 네 부모도, 너조차도 내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비록 오늘은 졌다고 해도 길게 봤을 때 난 승자가 될 수밖에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후가 고개를 들었다.
이채가 서린 눈빛으로 시호를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준후가 시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준후의 접근에도 시호는 끄떡하지 않았다.
오히려 준후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껏 해봐야 고문 정도겠지. 어디 해봐. 난 고문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으니까.”
“네 말이 맞아.”
준후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람을 못 죽여.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의사가 됐으니까.”
“크크크. 솔직해서 좋군.”
“근데 그거 알아?”
준후가 씁쓸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뻗었다. 준후의 손바닥이 시호의 왼쪽 가슴에 얹혔다.
순간 강렬한 전류 같은 것이 시호의 심장을 강타했다.
“크으으윽!”
시호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서 불안했다. 이대로라면 심장이 풍선처럼 빵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숨 쉬는 것조차 벅차졌다.
시호의 벌어진 입술에서 침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사람은 못 죽여도 짐승은 죽일 수 있지.”
준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와중에 시호는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넌 짐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