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62)
무공 쓰는 외과 의사-462화(462/540)
제90장 벗어나다(3)
스승의 넋두리가 길었다.
맛집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1시간짜리 대기열처럼.
이야기를 듣는 내내.
준후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스승이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신세 한탄을 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장이 아닌…….
의사 가운을 입었던 과거의 스승은 이러지 않았다.
스승은 늘 스마트하게 본인이 할 말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했다. 말을 많이 한다기보다는 말을 잘 들어주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 변했다.
약간은 수다쟁이가 되었다.
이게 부정적인 변화일까?
아니, 준후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확신했다.
스승은 외과의사에서 국회의원으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보여주는 면모는.
국회의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덕목일 것이다.
사람이란 게 때로는 앓는 소리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자신이 힘들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 때문이다.
의과의사야 쓰러지지 않는 철인처럼 굴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이라면 본인이 의정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얼마나 고생하는지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남의 이야기라고 아주 즐기면서 듣고 있구나.”
스승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후의 미소를 뒤늦게 발견한 눈치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준후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변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습니다. 지금 입법 중인 법안이 있나요?”
“각 대학병원에 소아과 전담의를 필수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 중이란다.”
“소아과에 먼저 접근하시는군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야. 아이들이 미래니까.”
스승의 말에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과만큼이나 곡소리가 나오는 전공이 바로 소아과였다.
아이들은 보통 성인보다 진찰이 까다로웠다.
보호자로 같이 오는 어른들 중에서 진상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의료 수가는 저 밑바닥이었다.
의사들은 점점 소아과 전공을 기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소외받는 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힘든데 돈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흉부외과, 신경외과, 수부외과, 산부인과도 다 마찬가지였다.
“일단 소아과 관련된 법을 만지고 그다음에 외과 쪽으로 넘어갈 생각이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법안 자체는 모두가 동의하는 게 마땅할 만큼 좋은데 의외로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아.”
스승이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스승의 이마에 잡힌 주름은 펴질 줄 몰랐다.
커피도 슬슬 바닥을 보였다.
이야기할 때마다 목도 타고 속도 타는 듯 했다.
“다른 전공하고 형평성이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의원도 있고.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의원도 있었지.”
“…….”
“병원에서는 나만 잘하면 어느 정도 극복이 됐는데 국회는 아니더구나.”
“그래도 지면 안 됩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스승님이 시스템을 고쳐주셔야 저희들도 살맛나서 진료를 보죠.”
“그래. 네 말도 맞다. 그동안 까맣게 있었어.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스승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이 눈빛만큼은 준후가 예전부터 익히 보던 눈빛이었다.
이 눈빛을 한 스승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네 이야기를 해볼까?”
스승이 화제를 돌렸다.
“전역도 했으니 이제 슬슬 행선지를 정해야겠구나. 내가 제원대 쪽에 좋은 조건으로 넌지시 이야기를 해두었단다.”
“…….”
“네 경력도 있으니 신경외과 과장 자리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떠니?”
스승의 말에 준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제원대 신경외과 과장.
분명 지금의 준후에게 있어 최고의 자리일 것이다.
제원대는 스승이 근무하던 병원이면서 빅5 병원 중 하나였다.
신원대 병원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스승이 근무했던 만큼 교수나 스태프들 또한 수준 높을 것이다.
심지어 과장으로 대우해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준후는 선뜻 가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준후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제원대 병원 vs ‘그곳’
준후의 가슴 속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허…… 의외로 생각이 많구나. 나는 당연히 응할 줄 알았는데.”
“스승님.”
“그래.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거라.”
“일주일 전부터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다른 병원으로 가봐야겠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준후의 대답에 스승이 눈썹을 정수리까지 치켜떴다. 입은 바보처럼 벌어졌으며 희미하게 다리를 떨기도 했다.
“제대로 알아보고 선택한 게 맞니? 거기는 호랑이 아가리 속이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죠.”
준후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 * *
그날 오후.
집무실로 돌아온 재현이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준후와 모처럼 수다를 떨었더니 속이 후련했다.
사실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주변 사람들 만나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다.
주변에 영향을 받는 것도.
주변에 영향을 주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처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을 듯 했다.
재현은 아직 국회의원 배지가 무거웠다.
‘그나저나 한 방 먹었군.’
재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재현이 제안한 제원대 신경외과 자리를 뿌리치고 준후가 선택한 장소가 의외였다.
신원대를 택했다는 점은 예상 범위 안에 있었지만…….
설마 부산에 내려간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랬다.
준후의 목적지는 부산 신원대학교 병원이었다.
물론 재현이 신원대나 부산에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재현이 부산 신원대를 싫어했던 건 그곳에 병원장 때문이었다.
병원장은 뼛속까지 속물이었다.
자기 잇속을 챙기기 바빴으며 스태프들을 거즈 같은 소모품으로 여겼다.
병원장이 그 모양이라면.
병원 운영 또한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실제로 들리는 소문도 하나 같이 흉흉한 것들뿐이었고.
하지만 준후는 부산 신원대 병원을 고집했다.
재현의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결심을 끝낸 준후를 막는 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세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재현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왜 굳이 험지를 택했냐고.
네 꿈을 펼치기에는 제원대 병원이 좋은 거 아니냐고.
최소한 서울 신원대 병원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돌아온 준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지금도 그 대답만 떠올리면.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확실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었다.
준후도 예전에 재현이 알던 준후가 아니었다. 준후는 어느새 어엿한 ‘전사’가 거듭나 있었다.
내가 의료 환경을 개선하고.
준후가 스타 서전으로 활약해 준다면 신경외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
혼자라면 불가능해도.
둘이라면 가능하겠지.
지금은 그 꿈을 믿고 나아가는 게 정답이다.
재현은 올려다보고 있는 천장에 장밋빛 청사진을 그렸다.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어 보았다.
* * *
그날 저녁.
준후는 양손에 홍삼 박스를 장착하고 아영의 집을 찾았다.
용건은 단 하나뿐.
바로 결혼 승낙이었다.
메이유에서 7년 동안 수련하고 또 곧바로 군의관 복무를 한 탓에 결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었다.
아영은 준후의 평생 짝꿍이자 소울 메이트였다.
그동안이야 바쁜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영과 같은 집에서 눈을 뜨며 같은 음식을 먹고 싶었다.
“자네, 아주 빨리도 오는군.”
장인이 팔짱낀 채 준후를 노려보았다.
준후를 영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좀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준후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의사 일이 그렇게 좋으면 병원이랑 결혼하지. 왜 우리 아영이랑 결혼하려고 하나?”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장모가 장인을 타일렀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준후, 이 친구 말이야. 본인 병원 일 때문에 아영이는 항상 뒷전이었잖아.”
“…….”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있어?”
“그야 공부하고 수술하느라 바빠서 그렇죠. 아영이도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 친구는 너무 심했어.”
장인이 쯧쯧쯧 혀를 찼다.
장인이 계속해서 준후를 타박했고 준후는 나 죽었다는 심정으로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장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준후가 다른 커플에 비해 아영을 챙겨주지 못한 건 팩트였다.
준후는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쌓인 게 한 포대였을까.
장인은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준후를 훈계했고 그다음 술상이 펼쳐졌다.
“자네. 그거 알아?”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사람은 말이야.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취했을 때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지. 그래서 내가 오늘 자네 본성을 꼭 확인 해야겠어.”
장인이 소주병을 들었다.
쪼르르르.
준후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그리고 장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오늘은 코가 입이 되고 입이 코가 될 때까지 마셔. 아영이와 함께 하고 싶다면 그 정도 각오는 해.”
“여보. 요즘 친구들한테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해야 아버님의 섭섭함이 풀릴 수 있다면.”
“이 사람 술고래인데…… 앉은 자리에서 소주 3병을 마셔요. 서 서방이 못 견딜 텐데.”
“술이라면 저도 좀 마십니다. 장모님은 아영이와 쉬고 계세요.”
준후가 타이르자 장모와 아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방에 들어갔다.
준후는 장인과 함께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다.
세상에 누군들 사연이 없겠냐만.
장인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
그러니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영의 남동생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성현이,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그 어린 것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을 때 얼른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는데.”
“…….”
“그깟 치료비 푼돈 아끼겠다고 그걸 모른 척하고.”
장인은 급기야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준후가 아영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남동생이 살아 있던 시절.
아영의 집안은 경제 형편은 형편없었다고 했다.
장인의 창업이 실패하면서 단칸방을 전전했다고 들었다.
“그건 장인어른 탓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어요. 저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봤습니다.”
“자네도?”
“네.”
준후는 건강 팔찌를 내려다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뇌사로 세상을 떠난 성호를 문득 떠올렸다.
준후가 성호 이야기를 하자 장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공유할 수 있는 아픔이란 유대감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술자리는 새벽 2시에 끝났다.
쓰러진 장인을 거실 소파에 눕히고 준후는 아영의 동생 방에서 잠을 청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꿈에서 아영의 어린 동생이 나타난 것 같았다.
아영을 잘 부탁한다고 했던 것 같았다.
다음 날 오전.
“엄청 피곤해 보이네?”
아영이 방으로 돌아와 꿀물을 건넸다. 준후는 십 년이 늙은 얼굴로 아영이 건넨 준 꿀물을 쭉 들이켰다.
“죽을 맛이야.”
“내공으로 알콜 기운을 날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대학교 OT때도 그랬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할 수 있는데 안 했지. 장인어른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었거든.”
준후가 검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대답했다.
숙취로 고통 받고 있었지만.
어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준후는 장인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기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는 아영과 장인 장모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장인이 뽀얀 북엇국을 떠먹으며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우리 아영이, 잘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