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84)
무공 쓰는 외과 의사-484화(484/540)
제94장 텃세(5)
오전 회진.
터벅. 터벅.
준후가 앞장서고 그 뒤를 교수와 레지던트들이 뒤따랐다.
얼핏 보기에는 준후가 권력의 중심인 듯했지만 이는 표면상의 권력이었다.
교수들 대다수는 김한상 곁에 있었다.
중세 호위 기사들이 왕을 보필하는 것처럼.
신라시대로 비유하자면.
김한상은 성골이었다.
레지던트부터 부교수가 되기까지 부산 신원대학교 병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
김한상이 나이가 제일 많으므로.
김한상의 역사가 곧 신경외과 의국에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풋내기 돌멩이가 굴러왔다.
박힌 돌인 김한상을 빼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한상 입장에서는.
준후가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이따금 귀엽게 보일 따름이었다.
준후 나이에서는 아직 ‘개혁’ 같은 쓸모없는 가치가 찬란하게 보일 수 있었으니까.
“계획이 무너졌다고 너무 상심할 필요 없어.”
김한상이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최진구에게 속삭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과장 수술이 성공했다고 세상을 잃은 것처럼 굴지 말란 뜻이야. 진짜 재밌는 건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김한상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스태프들이 병실을 나왔다가 들어오기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병실’ 차례였다.
“허리는 좀 어떠세요?”
준후가 안병태에게 다가가 물었다.
최진구가 오진했던 환자.
최진구에게 오점을 남긴 환자.
동시에 준후가 재수술을 했던 환자였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오래 앉아 있거나 오래 누워 있으면 허리가 쑤셨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준후가 싱긋 웃었다.
화제를 돌렸다.
“수술이 끝났다고 방심하지 마시고요. 재활치료 꼭 받으시고 집에서도 틈틈이 운동하세요.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암요. 선생님이 죽으라고 해도 최소한 죽는 시늉까지는 할 겁니다.”
환자의 익살에 몇몇 레지던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았다. 얼마 전 고성과 증오가 오갔던 분위기는 사르르 녹아 있었다.
‘친한 척하는 것도 지금뿐이지.’
김한상은 새까만 속으로 웃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두 사람이 진심으로 가까워질 일은 없었다.
“그럼 퇴원 잘하시고 2주 뒤 외래 진료에서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환자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회진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교수와 레지던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김한상은 티타임을 가지다가 오전 수술에 들어갔다.
뇌하수체 종양을 집도하고 나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후 1시가 되어 있었다.
꼬르르륵.
배 속의 거지가 밥 달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김한상의 목적지는 식당이 아니었다.
5층 병동에 위치한 간이 입퇴원 원무과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원무과 직원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반가워요. 김 선생. 환자 한 명만 검색해 줄래요?”
“말씀하세요.”
“안병태라고 퇴원 수납 좀 확인해 줘요.”
김한상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며 물었다.
병원의 꽃이 수술이라고?
바보 멍청이 같은 소리!
병원의 꽃은 수납이었다.
병원이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는 전부 환자에게 돈을 받기 위해 제공하는 것이었다.
오늘 일정이 끝나는 대로 진료부원장님께 간다.
준후가 공짜 수술을 해서 병원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고 고자질한다.
준후 평판이 곤두박질친다.
이게 김한상이 그리고 있는 시나리오였다.
비슷한 작업을 두세 번 해주면.
준후는 과장에서 잘릴 테고 그 자리를 김한상이 차지하면 됐다.
알아서 똥볼을 차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크크크.
김한상이 속으로 웃었다.
“교수님. 오늘 신경외과 병동에서 퇴원한 환자 맞죠?”
“네.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문제가 없어서 여쭤본 겁니다. 퇴원 수납 다 됐는데요?”
원무과 직원이 김한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김한상의 미간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좁아졌다.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꿈틀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람?
병원 측의 과실을 인정하고, 환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해서.
준후는 기존 수술 및 재수술 비용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입·퇴원비는 미수금으로 잡혀 있어야 했다.
“방금 검색한 환자. 신경외과 환자 맞아요?”
“네. 틀림없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겠어요?”
“그럽시다.”
김한상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며 원무과 직원 곁으로 이동해 모니터를 살폈다.
“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탄식.
실수가 아니었다.
안병태는 그 안병태가 맞았다.
김한상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뒷목을 잡았다.
뒷목이 빳빳하고 차가웠다.
“입·퇴원 비용이 총 얼마나 돼요?”
“1,200만 원입니다.”
“혹시 수납을 누가 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어요?”
“현금으로 안 했으면 알아볼 수 있죠. 잠시만요.”
원무과 직원이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윽고 결제창에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입을 틀어막을 사이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기쁨의 웃음은 아니었다.
하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터진 웃음이었다.
“이거 의국에 미친개가 들어왔군.”
“의국에 개가 들어왔습니까?”
원무과 직원이 덩달아 놀랐다.
비유를 단단히 오해한 모습이었다.
김한상은 직원이 알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정정했다.
그리고 뚫어져라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1,200만원의 거금.
이를 지불한 사람은 바로 준후였다.
* * *
그날 오후 6시.
준후는 정규 수술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로비로 향했다.
외래 진료가 끝난 시간이라.
로비는 비교적 한산했다.
대학병원 특유의 북적거림, 시끄러움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슬슬 자리는 잡고 있네.’
과장으로 부임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외래 진료는 환자들로 미어터졌고 수술 일정도 빈틈없이 잡혔다.
오늘만 해도 준후는 무려 5개의 수술을 집도했다.
신경외과 수술이 평균 4-6시간 정도 걸린다고 치면.
교수들은 하루에 1-2건의 수술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준후는 이를 까마득하게 초월했다.
내공과 무공.
메이유에서의 고된 수련이 뒷받침되어서였다.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될까.
수술 실력과 속도가 너무 압도적이면 여기저기서 의심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곧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준후의 목표는 무엇인가.
더 많은 환자에게 건강한 삶을 돌려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세상에는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물론 준후는 괴물 그 자체였지만.
압도적인 솜씨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포장하면 어떻게 해서든 넘어갈 수 있었다.
로비를 거닐던 준후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불쑥 귀가 간지러웠다.
누군가가 준후 욕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주인공이 최진구인가.
김한상인가.
둘 다인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인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준후가 상대에게 큰 엿을 선물했다는 것이었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겠지.’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안병태 환자의 입·퇴원비가 미수금으로 잡힌다. 이를 꼬투리 삼아 준후를 공격한다.
부교수 쪽은 분명 그런 계략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찮은 계략을 준후는 보기 좋게 격파해 버렸다.
어떻게?
준후가 직접 환자의 입·퇴원비를 결제하면서!
메이유에서 받은 거액의 연봉.
(사실 이때는 수련하기 바빠서 돈을 거의 쓰지도 못했다.)
뉴튜브 수익.
지금 부산에 받는 연봉 등등.
티를 안내서 그렇지 준후는 이미 대한민국 상위 0.5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부자였다.
개인적인 후원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하는데 안병태의 입·퇴원비를 지불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안병태 환자 건으로 준후는 본인이 결코 호락호락한 물 과장이 아님을 증명했다.
앞으로 할 일이라면.
김한상과 그 일당을 하나하나 깨부숴나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숱한 역경과 고난이 있겠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과제였다.
잡념에 빠진 사이 도착한 원무과.
똑. 똑. 똑.
준후는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경외과 서준후라고 합니다. 과장님을 뵈러 왔어요.”
“네. 과장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원무과 직원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응접실.
원무과장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 믹스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아휴. 직접 오실 필요 없었는데.”
“그래도 찾아뵙는 게 도리죠.”
준후가 원무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 달에 유독 갑작스럽게 일이 밀려서.”
“괜찮습니다. 급한 일도 아니었는데요.”
손사래를 치는 준후.
“일단 이거 받으시고요. 과장님 메일에 파일로도 보냈습니다.”
원무과장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준후에게 들이밀었다. 준후가 서류 봉투를 끌어와 내용물을 살폈다.
내용물은 다름 아닌 의료 통계였다.
신경외과 의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한 수치로 알고 싶어서.
준후는 과장 부임 첫날.
원무과를 찾아 신경외과 의국의 다양한 통계를 부탁했다.
병상 회전율이라든가, 수술 성공률이라든가, 설문으로 진행한 환자 만족도라든가 등등.
그게 오늘 따끈따끈하게 준비된 것이다.
준후는 그럴싸한 분위기만 풍겨서 의국을 장악할 생각이 없었다.
데이터, 근거, 수치로.
기존 교수들의 숨통을 옭아맬 계획이었다.
“있는 대로 다 정리해달라고 하셔서 다 해드리긴 했는데…….”
원무과장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너무 두꺼워서 보기 힘들지 않겠어요?”
“아뇨. 이 정도면…… 하루 이틀 걸리겠네요.”
“네? 하루 이틀이요?”
너무 놀란 나머지 원무과장의 목소리에 삑사리(?)가 났다.
원무과에서 사흘 동안 피땀 흘려 만든 데이터를 하루 이틀 만에 다 본다고?
그게 가능한가?
“예전에 속독을 배워서요. 어쨌거나 힘든 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답을 드리고 싶은데 법 문제도 있고 하고.”
“…….”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소매 바짝 걷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면야.”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종료되었다.
준후는 서류 봉투를 챙겨 곧바로 신경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집무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팟! 팟! 팟! 팟!
준후의 검지가 전전두엽과 해마.
언어를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을 짚었다.
‘두뇌 자극 점혈법’을 펼친 것이다.
혈자리가 뻥 뚫리면서 또 강렬한 자극을 받으면서 신세계가 펼쳐졌다.
펄럭!
준후는 서류철을 꺼내 첫 장을 읽었다.
눈길 한 번에 세 문단의 내용과 수치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보통 글을 읽으면 단어에서 문장으로 나아가기 마련인데 준후는 글을 인식하는 범위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글을 뭉텅이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해당 내용은 해마에 도장을 찍듯 각인되었다.
의미별로 착착 분류가 되었다.
날 너무 과소평가했네.
오늘 저녁이면 다 보겠어.
준후는 동화책을 넘기듯 술술 통계자료를 넘겼다.
내일 컨퍼런스가 무척 흥미로울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