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89)
무공 쓰는 외과 의사-489화(489/540)
제95장 딜레마(5)
병원장은 안절부절 집무실을 맴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고현철 의원.
보수 집권당의 5선 의원이자 핵심의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가 떨어져 버렸다.
그것도 자기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서 말이다.
얼굴을 보고 식사한 지 6개월이나 지나긴 했지만 그때 투신의 낌새라곤 전혀 없었다.
고현철은 평소와 같이 점잖았고 말을 아꼈다.
신중하게 고른 단어와 문장에서 품위가 느껴졌다.
오랫동안 의원직을 유지하고 보수 정치인이면서 진보 정치인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은 확실히 때깔부터 달랐다.
그런데 그가 왜!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병원장은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의원 비서가 전해준 투신 소식이 꿈결 같았다.
‘고 의원님. 이렇게 세상을 떠나면 안 되지요. 암 그렇고말고요.’
병원장이 검지 끝으로 톡톡톡 책상을 두들겼다.
그는 자그마치 10년 동안 고현철에게 공을 들였다. 의료계를 은퇴하면 정치계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박재현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주변을 놀라게 할 변신을 꿈꿔왔다.
그런 의미에서 고현철은 죽어선 안 됐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서.
정치인으로 변모할 병원장의 앞길을 밝혀주어야 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하자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서준후는 어떻게 됐지?”
병원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비서가 병원장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내 지시를 거부한 모양이군. 환자밖에 모르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병원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비싼 돈을 주고 데려왔더니.
정작 필요할 때 쓸모가 없었다.
준후는 멍청이였다.
지금 수술하고 있는 환자보다 고현철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인가.
인간의 목숨에 감히 어떻게 가치와 등수를 매길 수 있느냐.
누군가는 병원장에게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병원장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
정말 인간의 목숨값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이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고.
“내가 직접 가지.”
“30분 후에 진료부원장님과 미팅이 있지 않으십니까?”
“취소해. 사정이 생겼다고.”
병원장은 의사 가운을 걸치고 저벅저벅 집무실을 떠났다. 뛰는 것처럼 걸으며 집무실을 향했다.
만약 자신이 직접 찾아갔음에도 준후가 VIP 치료를 거부한다면…….
세상에 쓴 맛이란 쓴 맛과 세상에 매운 맛이란 매운 맛은 다 보여줄 작정이었다.
병원장은 그럴 심보와 능력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서준후 선생. 몇 번 방에서 수술 중이지?”
“6…… 6번 방입니다.”
질문은 받은 간호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병원장 때문일까.
느슨했던 수술방 분위기가 위태롭도록 팽팽해졌다.
스태프들은 병원장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이이잉.
6번 수술방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수술방에서 나와 수술 복장을 전광석화로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준후였다.
준후는 병원장을 발견하고 한걸음에 다가왔다.
뭐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본인 환자를 택한 게 아니었나?
어떻게 벌써 수술방에서 나오지?
“설마 마중 나오셨습니까? 영광이군요. 병원장님의 마중도 다 받아보고.”
준후가 너스레를 떨었다.
속내를 읽기 힘든 능구렁이 같은 태도였다.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나 싶었다.
“내 말을 귓등으로 안 들은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의외군.”
“그럴 리가요. 제 담력이 남다르긴 하지만 병원장님의 지시를 무시할 만큼 간이 크지는 않습니다.”
“그럼 하던 수술은 포기한 건가?”
병원장이 6번 수술방을 힐끔거렸다.
수술방 위에 ON이라는 글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준후가 수술 중간에 뛰쳐나왔다는 뜻이었다.
“아뇨. 포기 안 했습니다.”
“말장난 할 기분 아니야. 그래서 VIP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병원장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적어도 병원장 판단에 부산 신원대 최고의 서전은 준후였다.
고 의원을 살릴 수 있는 서전이 있다면 그건 분명 준후일 것이다.
다른 놈들은 믿기 힘들었다.
“당연히 치료하러 가야죠. 그래서 나왔잖습니까?”
“환자는 포기 안 하겠다며?”
“당연히 포기할 수가 없죠.”
준후가 빙긋 웃었다.
“수술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 * *
그 시각. 6번 수술방.
준후가 떠나면서 방 분위기가 다소 가벼워졌다.
준후의 자리를 4년 차이자 치프인 종원이 자치했다.
종원의 자리는 우현이 차지했다.
우현의 자리는 급하게 호출한 신경외과 병동 인턴이 차지했다.
“와! 과장님 폼 미쳤습니다. 사람이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우현이 오두방정을 떨며 말했다.
미세 현미경에 눈을 얹은 채 수술부위를 감상했다.
흉부외과에 CABG(관상동맥우회술)가 있다면.
신경외과에는 뇌혈관 우회술이 있었다.
난이도를 따지기 힘들 만큼 두 수술 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렵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수술 중 사망률은 줄어들었지만 그런데도 혈관 우회술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수술 중 하나였다.
비록 사망률은 줄었어도.
수술 중 문제가 터져 환자가 평생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위험천만한 수술을 준후는 못에 망치질하듯 뚝딱 해치워 버렸다. 직접 보고도 눈이 의심스러울 만한 퀄리티로.
“나도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하네.”
종원이 맞장구를 쳤다.
우현처럼 미세 현미경으로 수술 부위를 살폈다.
넓적다리에서 채취한 대퇴동맥이 호선(∩)을 그리며 전대 뇌동맥과 연결되어 있었다.
클립으로 중요 뇌동맥류가 결찰됐지만 뇌 혈류에 이상은 없는 것이다.
“근데 과장님이 혈류 테스트를 안 하고 나가셨지?”
“네.”
“이거 큰일이네. 혈관에 누수 있으면 우리 힘으로 감당 못 할 텐데.”
“과장님이 어련히 잘하지 않으셨을까요?”
“만약은 모르는 거니까.”
준후 팬심으로 무장한 우현과 달리 종원은 걱정이 한 바가지였다.
준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 말인즉.
혈관에 누수가 발생한다면 X된다는 뜻이었다.
준후를 다시 불러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종원이 한숨을 내쉬며 혈류 테스트에 들어갔다.
딸칵!
딸칵!
우회 혈관에 양옆을 헤모스탯(혈관 겸자)로 잠시 차단했다. 그리고 주사기로 형광물질을 주입했다.
“…….”
“…….”
고요하고 거룩한 침묵이 이어졌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눈치 없는 환자감시 장치만 기계음을 토해내느라 바빴다.
우현만 빼고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혈류 테스트의 결과가 마침내 드러났다.
형광 물질은…….
정확하게 우회로에만 고여 있었다. 누수 없는 완벽한 우회로가 형성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아…….”
종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전 과장님이 성공하실 줄 알았어요. 이제 수술 부위만 원복하면 되는 거죠?”
우현이 신난 아이처럼 물었다.
종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회로가 건강한 이상.
수술 부위를 원상 복귀하는 건 종원의 힘만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과장님.
실력은 정말 끝을 모르겠어.
종원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종원은 과거 다른 교수의 뇌혈관 우회술을 보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는 뇌혈관 우회술을 1시간 가까이 집도했다.
그런데 준후는.
고작 10분 만에 뇌혈관 우회술을 처치해 버렸다. 그 속도와 완성도 또한 경이로웠다.
그래서일까.
투신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지만.
준후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준후는 믿음을 넘어서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젠 그 확신에 종원이 보답할 차례였다.
“수술 부위 원복 들어간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 * *
‘간만에 무리했군.’
준후는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목과 손바닥과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공의 후유증이었다.
정규 스케줄 환자 VS 병원장이 엄포를 놓은 VIP 환자.
준후는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둘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둘 다 치료하겠다고 다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수술의 일등공신은 일륜명월이었다.
일륜명월(一輪明月)
이것은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준 무공 중 하나인 ‘호월십이수’의 최종 초식이었다.
(양수호박기술은 양손 숙련도를, 호월십이수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손 사용법을 터득하게 해주었다.)
일륜명월의 뜻을 풀이하면 하나의 밝은 달이었다.
단전에 있는 내공을 손에 모아 단번에 터뜨린다.
동시에 이를 정교하게 통제한다.
일륜명월은 서로 다른 이치를 동시에 운영해야 해서 힘들었다.
호월십이수를 대성한 준후조차 이따금 실수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달이 더 환하듯.
준후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일륜명월을 기막히게 운용했다.
일륜명월을 통해서.
준후는 월아지경에 빠졌다.
내가 달이 되고.
달이 내가 되고.
달이 손이 되고 손이 달이 되는 경지에 접어들었다.
무영등 환한 불빛 때문에 스태프들은 몰랐겠지만 뇌혈관 우회술을 하는 준후의 손은 휘영청 빛나고 있었다.
손목과 손가락은 항상 달처럼 둥근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고작 인간에 불과한 준후가 자연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 파급력은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었다.
준후는 다른 교수라면 1시간 가까이 소모했을 뇌혈관 우회술을 고작 10분 만에 소화했다.
다만 후유증으로 잠시 손 떨림을 얻게 되었지만.
“돌아이짓을 하고 다니는 건 과장이 되어서도 여전하군.”
앞서 걷던 병원장이 한마디 했다. 말은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쨌거나 본인이 원하는 전개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배만 부르면 타인은 신경을 안 썼다.
“세상을 바꾸는 건 원래 돌아이입니다.”
“본인이 돌아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지?”
“뭐,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지만요.”
준후의 뻔뻔한 대답에 병원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미친 놈.
뇌혈관 우회술을 10분 만에 끝내고 내 환자를 볼 줄이야.
병원장이 봤을 때.
준후는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였다.
그것도 환자에 미친 망나니.
“그런데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VIP 환자가 수술방에 있는 게 아닙니까?”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환자는 아직 현장에 있어. 원래 구급차로 우리 병원에 이송할 예정이었는데 인근에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꽉 막혔다고 하더군.”
“…….”
“별수 있나. 헬기타고 현장으로 이동해야지.”
“외상외과 업무를 제게 맡기겠다는 거군요.”
“왜 자신 없어?”
“자신이 없을 자신이 없습니다.”
준후의 대답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메이유에서 외상외과 수련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외상외과 역시 신경외과에서 뻗어나가는 세부 전공이었다.
“환자가 어지간히 중요한가 보군요. 수술 중인 저를 빼낼 정도면.”
“이참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줄까?”
병원장이 준후를 돌아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 환자, 무조건 살려야 해. 환자가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
“염라대왕을 반쯤 패서라도 무조건 데려와. 환자가 죽으면 자네도 죽는 거야. 어때? 이제 좀 감이 오나?”
병원장의 엄포에 준후는 티 나지 않게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여전한데.
당신도 여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