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494)
무공 쓰는 외과 의사-494화(494/540)
무공 쓰는 외과 의사 494화
제96장 천고만난(5)
그날 저녁.
병원 인근의 고급 한우집.
준후와 병원장은 룸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치이이익!
빨간 한우가 뜨거운 불판 위로 올라갔다. 황홀한 소리가 후각부터 먼저 자극했다. 고소한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고기는 금세 노릇노릇 익었다.
몇 번 씹지도 않았거늘 고기 한 점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입안 아니, 목구멍까지 진한 육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쪼르르르.
준후가 병원장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저도 한잔 따라주시겠습니까?”
“자네가…… 술을 마신다고?”
병원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기보다는 안 마실 줄 알았으니까. 자나 깨나 환자 생각만 하잖아? 응급 수술을 대비해서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을 줄 알았지.”
“오늘만큼은 즐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가끔은 스스로를 풀어주는 것도 좋아.”
병원장이 준후에게 소주병을 건네받았다. 준후의 잔에 맑은 이슬을 따라 부었다.
준후는 단박에 잔을 비웠다.
오랜만이었다.
소주가 설탕처럼 달게 느껴진 것은.
고난이도 수술.
환자의 생명과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수술.
실패했다간 병원장 눈 밖에 나서 과장 자리가 위험했던 수술.
부담의 끝판왕 같던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마시는 술이라서 더 달았으리라.
“병원장님. 너무 일찍 은퇴하신 것 아닙니까? 최소 5년은 더 현역으로 뛰어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요.”
“쯧쯧쯧. 젊은 것이 노인네를 부려 먹을 생각만 하고. 말세야 말세.”
병원장이 혀를 차며 끌탕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은근히 유쾌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준후가 뛰어난 서전으로서의 병원장을 치켜세우고 있었기에.
“앞으로는 자작하겠습니다.”
“그러든가.”
준후는 스스로 잔에 술을 채운 후 연거푸 들이켰다.
목젖이 두 번의 능선을 그렸다.
“병원장님. 아시죠?”
“뭘?”
“제가 병원장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예전부터 알았지. 자네 연기력은 형편없으니까. 발연기도 아니고 발가락 연기쯤 되려나?”
병원장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환자밖에 모르는 준후였다.
스승이 박재현인 준후였다.
그렇다면 태생적으로 병원장과는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고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섭섭하긴 했습니다. 병원장님이 속물이긴 해도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였으니까요.”
말을 하는 준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병원장님이 없었다? 그럼 수술은 분명 반쪽짜리가 됐을 겁니다.”
“알면 됐어.”
“감사합니다. 이것만큼은, 오늘만큼은 진심입니다.”
준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주 간덩이가 부었어. 감히 나를 어시스트로 부릴 생각을 하더니.”
병원장이 피식 웃었다.
준후가 따라준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무슨 생각?”
“어쩌면 저나 과장님이나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자네는 날 혐오하고 난 자네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우리가 닮았다고?”
“네.”
준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빈말이 아니었다.
괜히 친한 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준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준후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 병원장을 어시스트로 사용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자.
그런 모습은 병원장도 마찬가지 아닌가.
병원장도 본인의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목적지가 다를 뿐.
목적지로 향하는 방식은 판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병원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조화경의 경지를 뛰어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현경에 오른 무림맹주는…….
은근히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탈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는 은근히 자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정(正)과 사(邪)라는 모순된 이치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정(正)과 사(邪)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이 답답한 현 상태에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따르기에, 깨달음은 너무 버겁고 불편했다.
이타적이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신이 병원장과 똑같다고 하면 그건 준후 자신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준후가 느낀 점을 간단하게 병원장에게 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장이 코웃음을 쳤다.
“술에 취한 게 확실하군.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픽픽 해대는 걸 보니.”
“정말 취했나 봅니다.”
준후의 혀가 살짝 꼬부라졌다.
동공도 어느새 은은하게 풀려 있었다.
“병원장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봐.”
“신경외과에는 일부러 신경을 끄고 계신 겁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김한상 부교수 텃세가 말도 못하던데요?”
“아! 그거?”
병원장님이 한우 한 점을 낼름 집어 먹고서 말을 계속했다.
“서 과장한테 힘을 안 실어줘서 섭섭했나?”
“네. 솔직히 병원장님이 한마디만 해주시면 싹 정리될 문제 아니었습니까?”
준후가 노골적인 불만을 토해냈다.
서 과장은 내 사람이다.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병원장이 이렇게만 말해두었다면.
준후가 지금은 그림자 오른팔이지만 과거에는 앙숙이었던 최진구와 피터지게 싸울 일도.
준후가 원무과에서 의료 통계 자료를 뽑아서 교수들을 협박(?)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권력 교체는 물 흐르듯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일 아닌가.
기왕 스카우트까지 해서 데려왔으면 준후에게 든든하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그런데 웬걸?
병원장은 준후의 취임부터 현재까지 뒷짐만 진 채 신경외과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남의 집 불구경이 재미있다는 듯.
병원장은 한참 입을 다물었다.
준후의 위아래를 간교하게 훑었다.
침묵이 불편해서 준후는 잇달아 잔을 비웠다. 지금까지 마신 술만 무려 소주 2병이었다.
룸 조명 아래서도 준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왜 그랬을 것 같나?”
“제 기를 죽여 놓겠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날 너무 과소평가했군.”
“제가요?”
“그래. 자네는 호랑이 새끼야. 신경외과 의국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힌 다음 네 목덜미를 물어뜯을 생각이잖아. 안 그래?”
“…….”
“박재현이 있던 제원대 병원에 가지 않은 것도, 굳이 서울을 떠나 부산에 온 것도 그 때문이고.”
병원장의 통찰에 준후의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올랐다.
팔뚝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독심술이라도 사용한 듯.
병원장이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았기에.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속내를 내비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저는 병원장님처럼 권력욕이 없습니다. 윗사람한테 아부하고 골프 칠 시간에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보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그런가?”
“네. 그래서 신경외과는 계속 못 본 척 하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야. 앞으로도.”
병원장이 돌직구를 날렸다.
함께 수술을 했다고 해서 미약하게나마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생각했거늘.
전부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대화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술자리는 별 소득 없이 끝났고 준후는 휘청거리며 고깃집과 멀어졌다.
그런데!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준후의 발걸음은 균형을 되찾아갔다.
굽었던 허리와 어깨가 펴지고.
걷는 속도도 빨라졌다.
내공으로 취기를 완전히 날려 버린 것이다.
사실 병원장 앞에서 취한 척 연기했을 뿐이었다.
이 기회에 병원장의 진심을 간 보고 싶어서.
역시 상종 못 할 인간이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손톱만큼도 진화를 못 했어.
병원장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동안.
준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저 역겨운 인간과 자신이 동급이라고 인정해야만 현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차라리 평생 조화경에 머물겠다.
준후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수술이 끝나고 열흘이 지났다.
헬기를 타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이 몇 년 전 일인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준후였다.
열흘 안에 그만큼 많은 일이 벌어져서였다.
가장 큰 변화라면.
준후가 한동안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다는 점이었다.
이유라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준후가 투신한 고현철 의원을 치료한 일 덕분이었다.
고현철 의원이 정치 거물이다 보니 그를 살린 준후에게 사방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수술 과정은 어땠는가.
수술 후 경과는 어떤가 등등.
거의 모든 뉴스 매체에서 준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여름모기처럼 성가신 인터뷰를 준후는 순순히 다 받아주었다.
‘나는 정치에 뛰어들어 의료시스템을 바꾸마. 준후 너는 스타 서전이 되어라. 의대생들이 너를 길잡이로 삼아 사명감을 가진 신경외과 서전이 되도록 길을 열어주는 거다.’
스승 박재현과의 약속을 준후는 1초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다 내밀었다.
뉴튜브를 통해 젊은 세대에 인지도를 높여놓은 상황 아닌가.
그런데 매스컴에 얼굴을 도배하자 어른 세대 역시 준후를 급속도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원 로비를 걷다 보면 어른 세대들이 준후를 두고 수근거렸다.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비록 고현철은 쉽사리 의식을 되찾지 못했지만.
상태는 꾸준히 호전되고 있었다.
하얗게 질렸던 안색이 붉게 돌아왔다.
바이탈은 파도 없이 잔잔한 호숫가였다. 각종 피 검사 수치 또한 정상을 되찾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고현철의 회복에 준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으니까.
준후는 바쁜 시간을 쪼갰다.
제 집 드나들 듯 외상외과 중환자실을 찾았다.
고현철에게 내공을 불어 넣어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했다.
그러니 고현철의 경과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질 수밖에…….
그런데.
가뜩이나 뜨거운 준후의 인기에.
한 드럼 기름을 붙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준후가 집도를 했던 거대 뇌동맥류 환자.
그가 준후에게 TV 프로 출연을 제안한 것이다.
본인이 공영 방송 건강 프로그램 PD인데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준후는 단칼에 거절…… 을 할 이유가 없었다.
스타서전이 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기로 작정했으므로.
그래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촬영을 찾아갔다.
훈훈한 외모.
재치 있는 말솜씨.
전문적인 지식.
최근 매스컴에 마주 얼굴을 비춰 생긴 친근감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준후는 한 달 연속 패널로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외래 예약은 밀물처럼 들어오고.
수술은 하루에 5-6개를 처리하고.
출판사를 찾아가 자서전 집필에 필요한 녹음 인터뷰를 하고.
뉴튜브를 촬영하고.
또 뭐를 하고 저거를 하고…….
바늘 하나 들어가기 힘들 만큼 준후의 스케줄은 빡빡했다.
하지만 준후는 버텼다.
운기조식을 통해 피로를 싹 지우고 활력 있는 삶을 살았다.
침몰이 임박한 신경외과를 꿋꿋하게 일으켜보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술은 없고 외래 진료만 있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진료실에서 샌드위치로 허기를 때우고 있던 날이었다.
지이이잉.
의사 가운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었다.
번호를 확인하니 중환자실이었다.
“네. 서준후입니다.”
-과장님, 급하게 노티 드릴 게 있어서요. 통화 괜찮으시죠?
간호사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쫓기듯 빨랐다.
살짝 굽어 있던 준후의 허리가 펴졌다.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에 힘이 들어갔다.
-정치인 환자 노티인데요. 방금 의식을 회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