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516)
무공 쓰는 외과 의사-516화(516/540)
제101장 계획대로(2)
다음 날 오전, 신경외과 컨퍼런스가 끝났다.
“천 교수 잠깐 나 좀 봐요.”
김한상이 천석영을 따로 불러냈다. 천석영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며 그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춘 곳은 창가가 보이는 복도 끝이었다.
바깥 날씨가 흐렸다.
아침 햇살 대신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독차지했다.
먹구름에 손만 대면 소나기가 쏟아질 듯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부교수님.”
천석영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젠장.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딴 식으로 꼬이는지.”
김한상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천석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서 과장이 수술 숙련도도 전근 시킨다는 거, 진짜입니까? 허세가 아니었나요?”
“그래.”
“맙소사!”
천석영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혹시나 했던 일이 역시나가 되어버렸다.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천석영이었다.
“진료부원장님께 살짝 운을 띄워 봤거든? 진료부원장님 말씀으로는 서 과장, 그 미친놈이 정말 자기가 뇌전증 클리닉까지 맡을 속셈인 것 같아.”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천석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김한상만 철썩 같이 믿고 태업에 나섰던 천석영이었다.
지난 나흘간.
그는 준후의 로봇 수술 수업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사이 라이벌인 정민재는 착실하게 수업을 들었고.
이미 둘 사이에 무시 못 할 격차가 벌어졌을 것이다.
“뭐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부교수님만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오리발이라니. 자네 말이 좀 심하군.”
“제 입장도 헤아려주세요.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하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김한상이 한참 뜸을 들였다.
그사이 애꿎은 천석영의 마음만 까맣게 탔다.
준후만 아니었다면 신경외과 과장이 되어 있을 인물.
진료부원장과 인맥이 깊게 닿은 인물.
능구렁이의 대명사.
김한상이라면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두지 않았을까.
천석영은 한 가닥 희망의 동아줄을 부여잡았다.
“물이 엎질러진 이상 방법은 딱 하나뿐이야.”
“그게 뭡니까?”
“자네가 정 교수보다 더 열심히 수술 로봇을 익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김한상의 무책임한 말이 천석영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 갈겼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덮쳐왔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나라고 별수 있나. 병원장님마저 서 과장을 눈감아주겠다는데. 흠흠. 진료 시간이 돼서 슬슬 내려가 봐야겠군.”
김한상이 도망치듯 자리를 내뺐다.
천석영은 작아지는 김한상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빠드득 이를 갈았다.
꽉 움켜쥔 두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빌어먹을! 저 병신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내가 병신이야.”
한편 집무실로 향하던 준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가는 길에 내공으로 청력을 증폭했다.
김한상과 천석영의 대화를 모조리 엿들었다. 둘 사이에 생긴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을 확인했다.
이번 사건으로.
김한상은 하나 남은 왼팔마저 준후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 * *
그날 저녁.
정규 스케줄을 마친 준후가 느지막하게 10번 수술방을 찾았다.
“오셨습니까, 과장님.”
먼저 와 있던 천석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180도 변한 태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로봇 수술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웬일이세요?”
준후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제가 정위 신경외과 교수 아닙니까. 제 전공 분야에 클리닉이 생기는데 그걸 모른 척하는 건 아무래도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요?”
콧방귀를 끼는 준후.
그 쌀쌀맞은 태도에 천석영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봇 수술 배우기 싫은 티를 팍팍 내시던데.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솔직히 그때는 의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있고요?”
“네. 지금은 의욕이 팔팔 넘칩니다.”
천석영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했다.
뭐, 놀리는 건 이쯤하면 될 듯싶었다.
뇌전증 클리닉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천석영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물론 그 진실은 준후만 아는 것이었지만.
정보의 격차는 이래서 중요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까.
“정 교수는 오늘 안 왔나 보죠?”
“부모님 생신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천석영이 은근히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루를 벌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세레브럴, 진짜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과장님이 좀 도와주세요.”
“전근이 어지간히 가기 싫은 모양입니다?”
“집과 자식이 다 부산에 있는데 이 나이에 저 혼자 어디를 가겠습니까.”
천석영이 준후의 바짓가랑이도 붙잡을 태도로 말했다. 이만큼 절실하다면 교육 효과를 기대해 볼 만했다.
“사실 제가…… 정 교수님 편은 아닙니다. 제 편은 두 분 중 실력이 더 좋은 사람이에요.”
“역시 공평하십니다.”
“본격적인 교육에 앞서 간단하게 머리라도 풀어드리죠. 가만히 서 계세요.”
준후는 정민재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천석영에게도 두뇌점혈법을 펼쳤다.
내공을 담은 검지로 혈맥을 자극하고.
다양한 부위의 뇌신경을 활성화시켰다.
“…….”
천석영이 말문을 잊었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후도 자신에게 두뇌점혈법을 자주 해봐서 알았다.
지금 천석영이 느끼고 있을 기분이 어떤 것인지.
머리가 탁 트인 느낌.
좁은 동굴에 갇혀 있다가 광야로 뛰쳐나온 느낌.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양자역학조차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게 뭔가요? 마사지 한 번 받은 걸로 이런 감각이 생길 수 있는 건가요?”
천석영이 눈을 깜빡거리며 준후를 응시했다.
“글쎄요. 천 교수님이 워낙 절박해서 하늘이 도운 게 아닐까요?”
준후가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럼 하늘은 제 편이군요. 죄송하지만 첫날 가르쳐주셨던 기본 조작법부터 다시 가르쳐주세요.”
천석영이 뜨거운 학구열을 내비쳤다.
아주 바람직한 학습 태도였다.
준후는 꼼꼼하게 천석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본 조작법을 알려주고 천석영이 직접 조종간을 잡게 했다.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천석영은 꼬마 아이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로봇 수술은 촉감을 느낄 수 없는데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각기 다른 네 개의 페달을 헷갈리지 않고 밟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준후만 가진 로봇 수술 요령은 무엇인지 등등.
천석영의 공부 자세는 오히려 정민재보다 적극적이고 치열했다.
쉬는 시간 없이 3시간을 연달아 교육을 받기도 했다.
천석영은 궁지로 몰아넣을수록 강해지는 타입처럼 보였다.
최진구가 정치질과 계략으로 김한상의 오른팔이 되었다면 천석영은 특유의 저돌성과 실력으로 김한상의 왼팔이 된 듯싶었다.
중요한 건…….
클리닉이 성공하는 즉시 두 사람 다 준후의 왼팔과 오른팔이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흘렀다.
뇌전증 클리닉 리모델링 공사가 끝났고 본격적인 외래 진료가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뇌전증 로봇 수술을 원하는 환자들이 벌떼처럼 부산 신원대로 몰려들었다.
하나둘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에 성공한다면 부산 신원대는 뇌전증 환자를 위한 성지가 될 것이고.
수술에 실패한다면 환자들의 악몽이 될 것이다.
* * *
부이사장 정현정과 병원장이 2층 수술용 참관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대망의 첫 뇌전증 로봇 수술이 있는 날이었다.
라인업도 화려했다.
첫 번째 수술을 준후가, 두 번째 수술을 천석영이, 세 번째 수술을 정민재가 맡았다.
일정은 쇼케이스와 같았다.
정현정에게 뇌전증 클리닉의 미래를 보여주는.
곁에 앉은 지 몇 분이 지났지만.
정현정과 병원장은 서로 말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각자의 셈을 치르고 있었다.
“부이사장님도 내심 클리닉에 기대가 크셨던 모양입니다.”
먼저 말문을 연 건 병원장이었다.
“생각보다 지원이 빵빵했더군요. 리모델링도 고급스럽게 됐고. 광고도 많이 하고.”
병원장의 입장에서는 부이사장의 태도 변화가 의아했다.
뇌전증 클리닉을 운영하네 마네를 두고 준후와 대판 싸우다시피 했거늘.
막상 사업을 시작하니 준후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던 것이다.
이틀 전.
병원장은 직접 뇌전증 클리닉을 찾아갔다.
인테리어가 예술이었다.
바닥이며 천장이며 벽이 5성 호텔처럼 고급스러웠다.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달까.
병원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꼽으라면 병원장은 주저 없이 뇌전증 클리닉을 꼽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광고도 왕창 때렸다.
라디오, 신문, 뉴튜브 등등.
의료 쪽에 관심이 있다면 부산 신원대에서 뇌전증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게 만들었다.
“최소한 받은 만큼은 해줘야죠.”
“받은 만큼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건데 세레브럴, 서 과장 사비로 들여왔어요.”
“미…… 믿을 수가 없군요.”
병원장은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려는 것은 간신히 바꿔냈다.
돈을 많이 버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사비로 세레브럴을 들여왔을 줄이야.
돌아이도 이런 돌아이가 없었다.
“충분한 수익구조를 확인하면 그때 병원에서 서 과장이 구입한 세레브럴을 원가로 재구입하고 새 기기를 한 대 더 들여놓기로 했어요.”
“그런 당돌한 제안을 받아주셨습니까?”
“재단이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냉혹하기로는 정현정도 준후 못지않았다. 역시 인간은 끼리끼리 노는 법이었다.
“병원장님이 보시기에 클리닉의 사업성은 어때 보여요?”
정현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병원장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통계 자료를 뽑아봤습니다. 사건만 안 터지면 몇 년 안에 흑자 전환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로봇 수술은 일단 비보험이라 수술비가 셉니다. 절개창이 작아서 환자 회복이 빠르고 따라서 병상 회전율도 높고요.”
“…….”
“게다가 서 과장이 전국구 서전이 됐지 않습니까? 서 과장 이름값 덕분에 진료를 문의하는 환자가 폭주하고 있어요.”
병원장은 흥겹게 장밋빛 미래를 떠들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한 건 준후지만 그런 준후를 부산으로 데려온 건 병원장 자신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만 잘 풀리면.
병원장도 얻어먹을 콩고물이 있었다.
혹시 또 아는가.
병원장 중에서도 최고봉이라는 서울 본원 병원장으로 부임할지.
“병원장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시네요?”
정현정의 질문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병원장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음 마녀가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이러는 걸까.
“서 과장은 사실 간판이고 실제로 클리닉이 운영되면 다른 교수들이 로봇 수술을 하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죠. 서 과장이야 기존 수술이 워낙 밀렸으니까요.”
“로봇 수술을 보유한 병원도 별로 없고 배우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던데.”
“…….”
“다른 교수들이 수술하다가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수습할 건가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현정은 뇌전증 클리닉의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사실 병원장도 예전부터 그 점이 걱정이었다.
제 아무리 준후라고 한들.
로봇 수술을 어떻게 두 달 만에 완벽하게 가르친단 말인가.
지나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지만.
교수일수록 오히려 수술에 보수적인 편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데 애를 먹곤 했다.
배우는 사람이 교수라고 해서 안심할 때가 아니란 소리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병원장은 준후보다 베일에 싸인 천석영과 정민재의 로봇 수술 실력이 더 궁금했다.
클리닉의 성패는 사실 두 사람에게 달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첫 수술의 집도인 준후가 수술방으로 입장했다.
“만약 서 과장이 수술에 실패한다면 뒤는 보지도 않을 거예요. 말썽꾸러기를 데려온 병원장님도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거고요.”
정현정이 살벌한 으름장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