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520)
무공 쓰는 외과 의사-520화(520/540)
제102장 뉴페이스(1)
준후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수술방을 나왔다. 폐기물 수거함에 훌렁 벗어 던진 수술복이 피와 땀으로 축축했다.
모든 수술 복장을 제거한 후에도.
준후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우뚝 지키고 서 있었다.
현기증과 함께 머리가 울렁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귓가에서 위이잉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제천공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막강한 무공이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강력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뒤따라 나온 우현이 물었다.
준후는 대답 대신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였다.
사실 손톱만큼도 괜찮지 않았다.
준후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수술실을 빠져 나갔다.
방금 막 교통사고로 실려 온 아이의 응급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수술은 어려웠다.
뇌출혈, 뇌부종, 뇌탈출증.
악마와 같은 병명 3종 세트를 물리치는 일이 간단할 리 없었다. 그래도 악전고투를 통해 아이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선생님. 진아는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실 앞 대기실 벤치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후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안 그래도 늙은 얼굴이 몇 시간 만에 더 늙어 보였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중환자실에서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회복에 별 지장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노부부가 안 그래도 고부라진 허리를 더욱 굽혔다. 준후도 그들만큼 허리를 굽혔다.
“흐흐흑.”
할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가냘프게 어깨를 떨었다. 잔잔한 비애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진아 괜찮다고 하시잖아. 청승맞게 왜 울고 난리야?”
할머니 보호자를 타박하는 말투였지만 할아버지 보호자는 그녀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우리 진아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부모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는데.”
이번에는 할아버지 보호자도 대꾸를 못했다.
문득 그와 눈을 마주쳤다.
준후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오물거렸다.
의술을 펼치다 보면 종종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위로조차 상대를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민진아.
병아리 같은 8살짜리 아이는 오늘 부모를 동시에 잃었다.
아이가 극복해야 할 마음과 몸의 상처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회복이 된다 한들.
평생의 흉터로 남을 것이다.
준후는 목례를 하고 노부부를 지나쳤다.
그들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퇴원할 때 가정에 보탬이 되라고 몇 푼을 쥐어주는 일만 가능할 것이다.
병원 밖에서는 의사도 무능력했다.
“참 딱하게 됐어요. 저 환자 집안만 박살 났잖아요.”
“트럭 기사에 대해 들은 건 없니?”
“경찰서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준후가 쓰게 웃었다.
한 가족의 인생을 짓밟은 트럭 기사가 미웠지만 생각해 보면 마냥 그를 증오하고 저주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주운전과 졸음운전은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음주운전은 머저리가 하는 것이었다.
반면 졸음운전은 가난한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운전으로 먹고 사는데 잠을 줄여가며 운전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졸음운전자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장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뇌종양 수술 중이신 걸로 알았는데 홍길동처럼 나타나셔서 집도를 해주셨잖아요.”
우현이 준후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우현아.”
“네. 과장님.”
“나도 전지전능하지는 않단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도 딱 여기까지야. 이 이상은 나도 감당 못 해.”
“그래도 과장님이라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어떻게든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녀석. 대체 나를 언제 어디까지 굴려 먹으려고 그러니?”
준후가 힘없이 웃었다.
우현의 머리를 꽁 쥐어박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우현은 그래도 실실 웃었다.
병동 업무가 있는 우현이 먼저 병동으로 떠났다.
준후는 복도 끝에 있는 의사 전용 휴게실을 찾았다.
정규 수술 시간이라서 그럴까.
휴게실은 텅 비어 적막했다.
준후는 캔커피를 뽑아 단숨에 마시고 가죽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 기회에 소아 파트를 아예 닫아버리는 건 어떨까요?
오전에 최진구가 했던 제안이 불쑥 떠올랐다.
준후도 간절하게 그러고 싶었다.
그러는 편이 훨씬 속 편했다. 제천공을 써가며 발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는가.
무공을 사용하는 신경외과의라고 해도 모두를 살릴 수는 없었다.
그건 헛된 욕심이었다.
다만 아는데도 쉽게 포기가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오늘만큼은 준후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간신히 들어 올리고 있던 눈꺼풀에게 굴복했다.
까만 어둠이 찾아왔다.
신경외과의 처지도 여전히 암울했다.
외국에서 외과의를 수입해야 한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외과의들의 곡소리가 퍼지고 있는데 정부도, 의료계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남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본인들 가족이나 지인이 똑같은 참사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외과의가 살기 좋은 세상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듯싶었다.
안 돼.
포기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야.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준후는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운기조식을 펼쳤다.
들숨과 날숨.
호흡과 호흡 사이에는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 그것들은 전부 자아가 만들어내는 허상이었다.
운기조식은 20분 만에 끝났다.
소파에서 일어난 준후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개운했다.
팔다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자 결심했다.
누군가는 이런 준후를 비웃을지도 몰랐다.
당신은 지금 희망 고문에 당하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기왕 인생이 고문당하는 것이라면.
준후는 희망에게 고문당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 * *
그날 저녁.
외래 진료가 끝나면서 지하 1층 식당가가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준후는 최진구, 황정훈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황정훈은 부산 신경외과 의국에서 단 한 명뿐인 소아 신경외과 전공자였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를 보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어려운 수술을 하셨더군요.”
황정훈이 혀를 차며 말했다.
“차트만 보면 테이블 데스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출혈 관리와 뇌압 관리가 환상적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이에요? 뇌종양 수술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끝내고 급하게 맡은 수술이었죠.”
수술을 한 건 준후인데.
정작 거드름은 최진구가 피우는 기묘한 상황.
준후는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최진구는 은근히 광대 같은 면모도 있었다.
“과장님은 보면 볼수록 철인 같군요.”
“어떤 점에서요?”
“다 아시면서. 오늘 집도한 수술만 6건입니다. 다른 교수들은 1-2건 소화하기도 바쁜데 말입니다.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는 거 아닙니까?”
황정훈이 준후를 걱정했다.
빈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는 한때 중립파 교수였지만 일찍부터 준후에게 호감이 있었다.
비록 준후의 나이는 어렸지만 환자를 위할 줄 알았고 의국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갖췄다.
황정훈은 오래 전부터 준후 같은 과장을 기다려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네요. 젊어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과장님 나이에도 수술 대여섯 개씩은 못 했는데요?”
“그나저나 저를 보자고 하신 용건이 뭡니까?”
황정훈이 준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물었다.
짚이는 바가 없지 않았다.
뇌전증 클리닉의 기세가 하늘에 새도 떨어뜨릴 만큼 강성한 반면.
소아 신경외과 파트는 궁핍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수익률은 흑자는커녕 본전도 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준후가 정리를 한다고 해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고 소아 신경외과를 한 명 더 영입하고 싶은데요. 괜찮은 사람 없습니까?”
“네? 진심이세요?”
“아무렴 거짓말을 하려고 황 교수님을 불렀겠어요.”
“저는 꼼짝없이 잘리는 줄 알았는데요.”
“자르자고 한 건 여기 최 교수님이고요.”
“허허. 여기서 고자질을…….”
최진구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굳이 소아 파트에 애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소아 파트 환경이 더 열악하니까요. 황 교수님을 더 굴리고 싶어서 도와드리는 겁니다.”
준후가 농담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 진의를 알았기에 황정훈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원래 준후는 약자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제가 돕는 게 최선이겠지만 아시다시피 기존 예약 수술로도 벅차서요.”
“…….”
“오늘 진아 집도도 어느 정도 시간이 맞아 떨어져서 가능했던 겁니다. 뇌종양 절제술 초반에 콜을 받았으면 못 들어갔어요.”
“당연히 그랬겠죠. 과장님이라고 해서 몸이 2개인 건 아니니까요.”
“서울 본원에 연락해 봤는데 그쪽도 소아 신경외과의가 고작 세 명이랍니다. 이쪽을 도와줄 형편이 아니더군요.”
“한 명을 더 데리고 온다라…….”
황정훈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한때 소아신경외과 파트에 샛별이라 불렀던 ‘그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허락할까.
그는 이미 의료계를 등졌다.
“적임자가 있는데 영입은 불가능할 겁니다.”
“실력은 어떤가요?”
“과장님만큼은 아니지만 최소한 저보다 2배는 나은 친구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네. 제 이름을 걸고 확신합니다. 그 친구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천군만마가 따로 없을 겁니다. 영입이 가능만 하다면…….”
황정훈이 강조하며 단서를 달았다.
“제가 또 설득에는 일가견이 있죠. 저만 믿으세요. 그분 지금 어디 있나요?”
준후가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 * *
선선한 초가을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는 세 사람이 있었다.
준후와 최진구.
그리고 황정훈이었다.
준후가 가장 선두에 서서 걸었고 그 뒤에 황정훈, 제일 꼬리에 최진구가 있었다.
체력이 약한 최진구는 아까부터 혀를 내민 채 개처럼 헥헥 거리가 바빴다.
준후는 모처럼 하는 등산이 좋았다.
병원과 집만 오고 간 지가 벌써 몇 년 째였다.
푸르른 초목을 보며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그동안 가슴에 쌓인 찌꺼기들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이었다.
무림에 있을 때도 준후는 산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하고 간지러운 산바람.
새들의 경쾌한 지저귐.
단단하게 때로는 무르게 밟히는 흙바닥.
초록의 싱그러운 풀 냄새.
산은 준후의 오감을 즐겁게 만들었다.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됩니까?”
결국 최진구가 먼저 휴식을 제안했다.
일행은 나무 그늘 아래서 숨을 골랐다.
“최 교수님은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늘 가는데 어떻게 실이 안 갑니까? 당연히 따라가야죠.”
힘든 와중에도 딸랑이 멘트는 잊지 않는 최진구였다.
최진구가 모처럼 허리를 펴고 팔짱을 끼었다. 황정훈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아니, 소아 신경외과의를 소개 시켜준다고 했으면서 왜 산을 타게 만듭니까?”
“하하하. 이 친구가 워낙 독특한 친구라서요.”
“병원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잠적했나 보죠?”
“네.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 친구가 저와 절교할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본인에게 직접 들으면 되죠.”
준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시 그분이 자연인인가요?”
준후의 질문에 황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