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527)
무공 쓰는 외과 의사-527화(527/540)
제103장 거두절미(3)
현종, 아니, 권태혁이 절을 떠나 속세로 돌아왔다.
권태혁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승려가 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승려가 됐다는 사실을.
그가 이산을 알렸을 때.
주지 스님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드디어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직면한 게지.”
“…….”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그때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도 볼 줄 알게 된단다.”
“끝까지 야박하시군요. 그래도 붙잡는 시늉은 한 번 해주실 줄 알았는데.”
아직 현종일 때 현종이 토라진 척했다.
주지 스님이 껄껄 웃었다.
“이게 네 본질이란다. 말투도 그렇고 감정 표현도 그렇고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럽지 않느냐.”
현종은 주지 스님을 따라 희죽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직면하고 받아들이자마자 걸치고 있던 무쇠 갑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했다.
깨달음이란 가볍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파계승이 아닌 불자로.”
“그건 얼마든지 환영이다. 올 때마다 두 팔을 벌려주마.”
주지 스님과의 대화는 웃음꽃 속에 마무리 되었다.
이산은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집에 돌아가자 부모님도 권태혁을 반겼다.
그동안 속을 썩여드린 것이 부끄러웠으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었다.
미래는 개척할 수 있어도.
과거는 개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권태혁은 앞으로 부모님께 잘하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부모님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같이 울지 않으려고 권태혁은 부단하게 노력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준후는.
권태혁의 복귀 소식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본가가 대전에 있기에 부산에 권태혁의 자취방을 얻어주면서까지 말이다.
무려 사비를 써서 말이다.
“과장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원래 다른 사람을 부려 먹으려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해요.”
권태혁이 미안해하자 준후가 농담조로 말했다.
수술방에서는 얼음장 같던 사람이 수술방 바깥에서는 따뜻한 봄볕 같은 사람이었다.
권태혁은 사람들이 왜 준후를 존경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자취방에서 지내는 동안.
권태혁은 최신 논문과 전공 서적을 복습했다.
준후의 도움을 받아 수술을 참관하며 녹슬어 있던 서전으로서의 감각도 되살렸다.
실력은 눈부신 속도로 복구되었다.
소명의 회복도 경이로웠다.
수술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의식을 되찾고 일반 병실로 내려왔다.
“스님. 제 혹은 어디 갔어요?”
“응? 무슨 혹?”
“제 머릿속에 혹이 있어서 뗐다고 했잖아요. 그 혹이 보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주지 스님이 뇌종양을 혹이라 설명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지지라서 보면 안 돼.”
“혹부리 영감처럼 좋은 혹 아니에요?”
“아니. 그건 소명이 너를 괴롭히던 나쁜 혹이었어. 선생님이 아주 혼쭐을 내줬지.”
“네. 근데 스님은 왜 승복을 벗었어요?”
“절을 떠나서 소명이처럼 어리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로 결심했단다.”
“와. 관세음보살이네요? 멋있어요.”
소명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권태혁을 쳐다보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었다.
권태혁의 마음가짐만 올바르다면 병원에서도 불법을 따르고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절과 절 바깥은 엄밀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명은 열흘 만에 건강하게 퇴원했다. 그러나 권태혁은 여전히 병원에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부산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가 권태혁의 거처였다.
* * *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가 진료부원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진료부원장은 창가 앞에서 골프 스윙을 하고 있었다. 발밑에 인조 잔디로 만든 스윙 매트가 깔려 있었다.
톡!
골프채가 골프공을 건드렸다.
골프채에 맞은 골프공이 직선으로 뻗어 나가 홀에 쏙 들어갔다.
“나이스 샷입니다.”
“흠흠. 요즘 내 퍼팅에 물이 오르긴 했지.”
진료부원장이 씽긋 웃으며 골프채를 벽에 기대두었다. 안락한 가죽 소파에 앉고 준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골프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준후가 골프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나이 많은 간부급 인사들은 왜 그렇게 골프에 환장하는가.
이는 준후가 오래 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흐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
진료부원장이 턱을 쓸어내리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몸에 무리가 덜 가는 운동이고. 푸르고 탁 트인 필드를 보면 기분도 좋지.”
“…….”
“라운딩을 하는 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좋고. 주변에 적당히 잘난 척도 할 수 있고.”
“…….”
“이거, 하나하나 꼽다가는 열 손가락이 부족하겠는데?”
“그렇군요.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습니다.”
“자네도 슬슬 골프를 배워보는 게 어때? 출세에도 도움이 될 텐데?”
진료부원장이 대뜸 골프를 권했다.
준후는 1초 만에 손사래 쳤다.
골프를 칠 시간에 응급 환자가 병원을 찾으면 어쩌란 말인가.
안 그래도 응급 외상센터로 지정된 부산 신원대 병원이고 가뜩이나 인원도 부족한데 말이다.
애초에 제천공을 익힌 것도 시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무공으로 아낀 금쪽 같은 시간을 골프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 안부가 궁금해서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고. 용건이 뭔가?”
진료부원장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역시 눈치 하나는 일품이었다.
“다음 주에 대대적으로 인사이동이 있지 않습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준후가 가운 속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서 내밀었다.
진료부원장이 돋보기를 쓰고 종이를 훑기 시작했다.
미묘하지만 표정 변화가 있었다.
“일단, 소아 신경외과의를 추가로 영입하고 싶다?”
“네. 능력 있는 서전입니다. 저희 과에 꼭 필요합니다.”
준후가 미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권태혁이었다.
권태혁이 있어야만 병원 뺑뺑이를 돌다가 목숨을 잃는 소아가 줄어들 것이다.
“서 과장도 알다시피 신경외과 교수 T.O는 이미 꽉 차 있어. 이 사람을 받아주면 다른 외과에서 말이 나올 것 같군.”
“…….”
“형평성이 중요한 거 알지?”
“신경외과가 타 외과에 비해 진료하는 환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전국에서 저를 보고 오는 환자들이 많으니까요.”
“…….”
“뇌전증 클리닉이 성공한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고요.”
진료부원장은 침묵을 지켰다.
검지로 손에 들고 있는 인쇄물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만 먹으면 준후의 제안을 단박에 반려할 수 있었다. 병원에 2인자로서 그 정도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
이쯤해서 찍 소리 못하게 한 번 눌러줄까.
아니면 반대로 준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까.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진료부원장은 판단을 뒤로 미루고 인쇄물의 다음 장을 넘겼다. 진짜 충격적인 내용은 다음 장에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쇄물을 노려보았다.
“이거 살생부로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어야죠.”
“이대로 밀어붙이면 반발이 크지 않겠어?”
진료부원장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는 담담하게 시선을 받았다.
“의국은 이미 제가 장악했습니다.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군.”
“자신 없이 진료부원장님을 찾아뵈면 진료부원장님께 실례 아니겠습니까?”
“나와 김 교수의 관계를 알고도 당돌하게 이런 일을 벌이는 건가?”
진료부원장이 쓰게 웃었다.
준후가 건넨 인쇄물의 두 번째 장은 인사이동을 다루고 있었다.
김한상 부교수.
진료부원장과 지연과 학연으로 엮인 인물.
준후만 없었으면 과장이 되었을, 부산 신원대 신경외과의 성골 출신 서전.
준후는 그를 인천으로 발령해 달라고 적어놓았다.
한마디로 걸리적거리니까 치워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최진구에게 맡겨 달라고 적어놓았다.
“김 교수. 슬슬 버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준후가 공격적으로 나섰다.
혀를 검처럼 사용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과장 부임한 이후 내내 눈엣가시였던 김한상.
그를 뿌리 채 뽑아내야만 준후는 의국을 온전히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서 과장, 말이 좀 심해.”
진료부원장이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본인을 방어하듯 팔짱도 꼈다.
“까놓고 말해서 김 교수가 진료부원장님께 부탁만 했지. 진료부원장님께 무엇을 해드렸습니까?”
“…….”
“알량한 골프 라운딩 말고 또 뭐가 있습니까?”
준후는 한 번 잡은 공세를 놓치지 않았다.
“재단 이사장님이 쓰러졌을 때 수술을 한 사람은 누구였죠? 김 교수였나요? 저였나요?”
“……자네였지.”
“사람이란 게 도움을 줬으면 도움을 받을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
“그런데 얌체같이 도움만 받는 사람을 우리는 기생충이라고 부르죠.”
준후는 은근하게 김한상을 기생충으로 몰았다.
딱히 비열한 악담은 아니었다.
김한상이 준후와의 권력 싸움에서 뒤쳐질 때마다 진료부원장을 찾아가 애원하고 읍소했던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나보고 선택을 하란 소리군. 김 교수와 자네 둘 중에.”
진료부원장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부터 곤란한 일에 휘말렸다.
양쪽 관자놀이가 지끈 아파왔다.
사실 진료부원장에게는 지금 상황이 베스트였다.
이사장 건으로 김한상에게 정나미가 떨어져가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김한상을 쉽게 내치는 것도 불안했다.
준후의 힘이 너무 세지고 있었다.
준후를 견제할 세력은 김한상밖에 없었다.
그러니 김한상은 의국에 남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준후의 청을 거절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준후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뇌전증 클리닉의 대성공 이후 병원장은 준후에게 홀딱 빠졌으며 이사장은 준후에게 명함까지 건넸다.
이 상황에서 준후를 적으로 돌린다?
고생길을 사서 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공기가 집무실을 짓눌렀다. 진료부원장도 준후도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 다 상대의 속셈을 속으로 셈하느라 바빴다.
영겁과 같았던 찰나가 지났다.
탁!
진료부원장이 결심했다는 듯 인쇄물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준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전.
컨퍼런스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어수선했다.
인사이동에 관한 발표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인사이동이 있다고 해서 소란스러울 이유는 실낱만큼도 없었다.
교수들은 보통 철밥통이었다.
타 지역 병원으로 발령을 받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이 했다.
직급의 경우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본인이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인사이동이라고 해봐야 레지던트들이 다른 병원에 파견 가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준후가 이번 인사 발령 때 칼춤을 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다들 잔뜩 긴장했다.
준후는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곧 준후의 주도 하에 컨퍼런스의 막이 올랐다.
준후는 입원 환자 브리핑과 수술 스케줄을 정리하기 전에 인사이동에 관한 이슈를 먼저 꺼냈다.
첫 번째 바람이 불었다.
권태혁이 소아 신경외과의로 새롭게 의국에 합류한 것이다.
권태혁은 아직 새파란 머리로 수줍게 자기소개를 했다.
짝. 짝. 짝.
교수들과 레지던트들이 박수를 보냈다.
“서 과장이 슬슬 야욕을 드러내는 군요. 본인 사람을 꽂기 시작했습니다.”
“저러다가 한번 당해봐야죠.”
김한상 곁에 있는 교수들이 김한상 편을 들었다.
김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적지만 아직 그의 편은 남아 있었다. 역전의 기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더 아픈 법.
준후가 실수를 하는 순간.
김한상은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붙잡고 과장 자리를 탈취할 것이다.
“다음으로 승진 소식입니다. 최진구 조교수님이 부교수님으로 승진했습니다. 나오세요.”
준후의 호명에 최진구가 단상에 올랐다.
특유의 넉살을 떨며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김한상은 최진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비열한 배신자 놈.
넌 반드시 내가 찍어낸다.
“의국에 하나뿐인 조교수로서 의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상에서 내려오기 전 최진구가 한마디 했다.
순간 김한상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최 교수.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젠 나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겠다는 거야?”
김한상이 발끈했다.
그 역시 부교수였으니까.
“뭘 착각하고 계시네요. 의국에 부교수는 저 하나뿐입니다.”
“뭐라고?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김한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진구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최진구는 재수 없게 방긋방긋 웃을 뿐 대꾸가 없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김한상의 불길한 예감에 준후가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부로 김한상 부교수님께서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다들 아쉬움을 담아서 박수를 쳐주세요.”
준후의 충격적인 발언에 김한상은 귀를 의심했다.
나를 쳐낸다고?
내 뒤에 진료부원장이 있는데?
그리고 뭐, 아쉬움을 담아 박수를 쳐?
이 새끼가 나를 놀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