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geon who uses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528)
무공 쓰는 외과 의사-528화(528/540)
제103장 거두절미(4)
인사 발령이 발표된 후.
일주일 만에 김한상은 부산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전에 진료부원장을 찾아가 통 사정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를 이렇게 버리시는 겁니까?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요.”
동정심에 호소했으나 진료부원장의 표정은 차가웠다.
계절은 가을인데 그의 표정은 벌써 혹독한 겨울이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고. 배는 이미 떠났어. 이 지경이 되기 전부터 잘했어야지.”
진료부원장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하소연이 길어지면 오히려 더 반감을 살 것 같아서 김한상은 집무실을 나왔다.
그 뒤로는 처참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자신의 편이던 교수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준후 쪽으로 붙어버렸다.
오전 컨퍼런스 때 그 누구도 김한상의 곁에 앉지 않았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고 일부는 눈이라도 마주치면 전염병이라도 옮는 것처럼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실로 박쥐 같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때쯤에서 김한상은 그들을 욕하고 저주할 힘도 없었다.
새파란 애송이인 준후에게 왕좌를 빼앗겼다는 허탈함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한상은 열흘 동안 진료와 수술을 정리하고 바람처럼 떠났다.
그 흔한 송별회조차 없었다.
김한상이 떠난 후에도 준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앓던 이를 마침내 제거했다는 기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외래 진료는 무려 8개월 가까이 밀려 있었다.
수술 스케줄은 5개월 가까이 밀렸다.
외래 환자 중에서도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고 아닌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 여유 시간에는 틈틈이 뉴튜브 영상을 촬영했다.
주말에는 보통 응급 환자를 보기 위해서 병원에 붙어 있었지만 스케줄이 있으면 TV방송에 출연 하거나 강연을 나갔다.
준후의 열풍은 멈출 줄 몰랐다.
출판한 에세이도 어느새 100만부나 팔렸다.
세간에서 준후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힘들고 바빴지만 순탄한 나날이었다.
유례없는 한파가 닥친 12월.
준후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 *
신경외과 집무실.
준후는 방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었다.
요즘 펼치는 운기조식은 피로회복보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조화경의 끝자락인 준후는 아직 닿지 못한 현경을 추구했다.
현경(玄境)
무림에서 단 두 명만이 오른 극 최상승의 경지.
현경에 현자는 검을 현자로 검다는 뜻 이외에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깊다, 오묘하다, 신비롭다, 통달하다, 아득하다, 아찔하다, 크다, 짙다, 하늘 등등.
오만가지 의미가 다 있으므로.
오만가지 해석이 다 옳으면서도 다 틀린 모순적인 경지였다.
그래서일까.
이미 현경에 도달한 무림맹주조차 현경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것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불현듯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하지.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그곳에 도착한 길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길을 알려주십시오.
-사람이 가는 곳에는 길이 있지만 마음이 가는 곳에는 길이 없단다. 네 마음이 방랑하고 방랑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깨달음은 그때 비소로 찾아올 것이야.
언젠가 무림맹주와 나눴던 대화에 일부였다.
무림맹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후는 조만간 현경에 경지에 접어들어야 했다.
식물인간 환자.
그리고 뇌사 환자.
이들을 회복시킬 유일한 방법이 현경에 도달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린 이후.
준후는 깨달음을 얻고자 발버둥을 쳐왔다.
그 세월만 벌써 십년이었다.
“휴우.”
준후는 한숨 쉬며 가부좌를 풀었다.
오늘의 명상도 허탕이었다.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진심으로 무(無)를 깨달아야 현경에 도달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아니다.
장담컨대 무(無)는 현경으로 향하는 다리가 아니었다. 무(無)와는 이미 놀 만큼 놀아보았다.
준후에게는 다른 키워드가 필요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준후가 번호를 확인하고 받았다.
반가운 목소리에 귀가 밝아졌다.
“의원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주셨습니까?”
-아침부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구나. 둘이 통화할 때는 의원님이라고 하지 마렴.
상대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스승 박재현이었다.
-요즘 사방에서 준후 너 때문에 난리도 아니더구나.
“스승님과 약속한 게 있으니까요. 스승님이 글씨를 쓰면 제가 떡을 썰고…… 아니. 스승님이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 동안 저는 스타 서전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로 약속했잖아요.”
몇 년 전 재현과 했던 약속을 준후는 잊지 않고 있었다.
쇠락하는 외과계를 되살리려면 정치만으로도 부족했고 대중의 관심만으로도 부족했다.
둘이 한꺼번에 시너지를 일으켜야 했다.
그 역할을 두 사람이 나눠서 책임지고 있었다.
-넌 제 역할을 200퍼센트 하고 있는데 내 역할이 너무 모자라서 부끄럽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건 정치 쪽이지 않습니까?”
-…….
“CCTV 의무화 법안도 변형해서 잘 통과시키셨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물론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준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끊이지 않는 대리 수술.
수술방에서의 방만한 태도로 환자를 죽게 만든 사건.
엉터리 수술 은폐 등등.
일부 외과에서 수술과 관련된 비리가 터지면서 수술방 CCTV 설치이슈가 점화되었다.
불안에 떨던 국민들은 수술방 CCTV를 환영했고 외과계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고의나 실수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집도에 최선을 다해도 수술 도중 환자가 죽을 수 있는데.
그때마다 유족 측이 소송을 걸면 외과의가 어떻게 수술을 계속 하냐는 주장이었다.
진퇴양난이구나.
이건 어떻게 봉합할 수가 없겠는데?
대체 어떻게 결론이 날까.
준후도 이 문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양쪽 입장이 다 이해가 갔다.
굳이 따지자면 CCTV 설치 반대에 마음이 살짝 더 기운 정도였다.
해외 사례가 반드시 옳은 건 아니지만, 준후가 알기로 CCTV 설치를 의무화한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론에 의해서 CCTV 설치 의무화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스승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의과의에게 돌려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CCTV 설치를 의무화하되.
외과 수술에 관련된 수가를 전반적으로 소폭 인상하는 게 어떻겠냐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채찍만 있었던 기존 법안에 당근이 하나 추가된 셈이었다.
다행히 여야와 외과계가 합의하면서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만약 스승이 나서지 않았다면.
외과계는 무거운 짐만 짊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의견은 다른가 보구나.
“그게 누군가요?”
-딱히 한 명을 꼬집을 수는 없고……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아.
스승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회의원이 되더니 본인 잇속만 챙기는 돼지가 됐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
“…….”
-국회의원이 됐으면 목숨 걸고 수술실 CCTV 설치를 막았어야지 어중간하게 타협을 봐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웃기는 사람들이네요.”
준후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스승님 혼자서 막을 수 있는 법안이 아니었잖아요. 수술 수가를 엮어서 올린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건데.”
-너라도 좋게 봐줘서 고맙구나.
“전 언제나 스승님 편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힘내세요.”
준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스승이 걷는 길이 가시밭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환자야 서전의 재량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했지만 정치는 그렇지 않았다.
법안 하나에도 울고 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각자의 셈법이 다 달랐다.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란 꿈속에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물며 스승은 초선 의원 아닌가.
-조만간 부산에 내려갈 일이 있을 것 같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하자꾸나.
“네. 스승님 건강하세요.”
준후는 통화를 끊고도 한참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스승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 * *
오전 컨퍼런스는 평소처럼 무난하게 끝났다.
준후는 컨퍼런스 룸에 남아서 최진구, 권태혁과 믹스 커피를 마셨다.
“머리는 정말 안 기르실 겁니까?”
준후가 권태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소아 신경외과에 복귀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었다.
그런데도 권태혁의 머리는 새파랬다. 승려 시절의 민머리를 유지했다. 동그란 민머리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비록 파계했지만 절에서 배운 가르침을 잊고 싶지는 않더군요. 이 머리는 앞으로도 유지할 생각입니다.”
“캐릭터 확실하고 좋은데요, 뭐. 혹시 아이들이 빡빡이 선생님이라고 안 합디까?”
최진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권태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맞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과장님, 오늘 오후에 시간 어떠세요?”
“오후요? 왜요?”
“신규 레지던트 면접 일정이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지원자는 얼마나 되죠?”
준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요즘 준후는 의국 실무를 최진구에게 일임하고 진료와 수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부교수가 된 이후로 최진구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김한상에 붙었던 교수들을 입맛대로 요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준후를 대신해서 영리하게 실무를 도맡고 있었다.
최진구를 오른팔로 삼은 건 신의 한수였다.
“한 15명 정도 됩니다.”
“와! 15명이나요?”
준후보다 권태혁이 먼저 놀랐다.
설령 대학병원이라고 해도 신경외과 레지던트 지원자는 한 명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속칭 피안성 정재형에 속하는 전공이면 또 모를까.
“우리 과장님 끗발이 어디 보통 끗발입니까? 요즘이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걸요?”
“비행기 그만 태우시고요. 레지던트 면접은 부교수님이 알아서 진행해 주세요.”
“다들 과장님을 보고 싶어 할 텐데요?”
“시간을 뺄 여유가 안 납니다.”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전에 외래 진료가 있었으며 오후에 잡힌 수술만 세 건이었다.
티 타임은 10분 만에 끝났다.
준후는 서둘러 1층 외래 진료실을 찾았다.
그런데 첫 진료부터 만만치 않았다.
만삭인 여성과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수상하게도 둘 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차트를 보니 환자가 임산부 쪽이라는 점이었다.
산부인과 쪽 환자가 신경외과로 잘못 접수한 걸까?
그 경험 많은 준후조차 산모를 진료하고 수술한 경우는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
그래서 어리둥절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앉으시죠.”
준후가 의자를 권하자 두 사람이 앉았다.
자리에 앉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둘 다 미남미녀, 선남선녀였다.
“두 분 다 배우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준후가 농담조로 인사하자 이번에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했다.
잠자코 있던 우현이 그제야 나섰다. 우현은 오늘 준후의 진료를 돕는 보조였다.
“과장님. 이분들 정말 모르세요?”
“왜? 누구신데?”
“연예계 앙꼬 부부 김남준 서보영 커플을 모르시냐고요.”
“모르는데? 왜? 내가 알아야 해?”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김남준·서보영이 킥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