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word priest reincarnated as a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11)
검공가에 환생한 검제 (111)
“오? 당신이 왜 여기에…라는 얼굴은 아니구만. 내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맞서싸우고 있었다는 건가?”
허먼의 두 눈동자가 드물게 색을 머금었다.
멀고 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같이 어렴풋하던 존재감이 그 무게를 키워나간다.
제 의지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자연현상을 통제하는 자다. 스쳐지나가던 바람이 뚝 멎고, 고요하다못해 스산해진 공기가 마치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살의(殺意)도, 적의(敵意)도 아니다.
〈권역(圈域)〉.
무기가 아닌 영역에서 사정거리를 경합하는, 무학의 최상승 경지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던 것이다.
레너드는 그 범위를 파악하고서 몸을 긴장시켰다.
‘타원형으로 이십 장(60m) 정도인가.’
생사결에 돌입한 태극검선과 같은 범위를, 발검조차 안 한 상태로 장악하고 있다.
‘전력을 다 끌어올린 상태라면 삽십 장 이상까지 늘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강하다.’
권역의 범위가 곧 강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상관관계가 전무한 것도 아니었다.
검제 연무혁의 권역이 사십 장 남짓했으니,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천초지적(千招之敵).
공수교환을 천 번 이상 주고받아야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적수였다. 지금의 레너드에겐 검제보다 더 나은 점도 있었으나, 부족한 점도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는 뜻이다.
“내 영역까지 인식했냐? 나도 그럭저럭 천재로 떠받들렸던 몸인데, 널 보고 있으니 자신감이 사라지는구만. 아직 스물도 안 된 꼬맹이가 턱 바로 아래까지 쫓아와있다니.”
허먼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레너드가 대답했다.
“그딴 게 무엇이 중요한가?”
“응?”
전생의 그 역시 실감해본 감정이었으나, 털어내고 난 후에 되돌아보니 그것보다 더 멍청한 말이 없었다.
두 자루의 검을 들어올린 레너드가 쏘아붙였다.
“칼날은 어리다고 해서 기다려주지 않는다. 늙었다고 해서 피해가지도 않는다. 때(時)와 운(運)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앞서가는 자와 발 빠른 자가 더 멀리 간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너, 정말로 애새끼 맞냐? 말본새가 나보다 두 배는 먹은 노인네 같았는데.”
“그쪽이 나잇값을 못한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고?”
푸핫! 하고 웃음보가 터진 허먼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 제기랄. 이렇게 마음에 드는 놈은 죽이고 싶지 않은데. 파블로 그 개자식이 간만에 하기 싫은 일을 가져다줬구만.”
아무래도 파블로와의 관계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모비딕 모험단의 2인자로 취급받으면서도 그 활동량이 거의 없었던 건, 허먼 본인의 의사였을지도 모른다.
레너드는 그걸 간파하면서도 두 자루의 검을 들어올렸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겠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고, 안 하고 싶은 것도 해야하고.”
어느샌가 허먼의 두 손이 허리춤까지 올라가있었다.
곡검(曲劍).
커틀러스라고 불리는 칼이 두 자루 동시에 뽑혀나온다.
통상적인 도검보다 한 자(24cm) 정도 짧고, 칼날이 휜 것이 여러모로 특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좁은 곳에서 싸우는 것을 전제한 무기지만, 소드마스터의 손에 잡혔다면 단검도 장검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직검에 비하면 찌르기의 힘이 뭉개지겠으나, 베기의 위력은 한층 더 예리해진다. 도(刀)와 검(劍)을 구분하지 않는 세외의 병장기에서 나오는 특징이었다.
두 자루와 두 자루.
거울이라도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두 명의 검객이 네 개의 칼날을 치켜세운다.
“자, 그럼 한바탕 놀아보자고.”
허먼이 먼저 움직였다.
보법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발놀림.
——카앙!
한 걸음으로 수십 미터를 주파한 허먼의 커틀러스가, 그걸 마주한 레너드의 검과 부딪히면서 불티를 만들었다.
‘빠르다.’
눈을 가늘게 뜬 레너드가 단숨에 그 원리를 파악했다.
‘뒷발길질 한 번으로 가속하여, 지면에 닿지 않고서 스치듯 이동하는 건가? 빙판을 미끄러지는 것과 비슷하군.’
신체능력보다 기의 운용에 의존하는 보법.
이쪽 세상의 무인들보다 무림인의 방식에 더 가까운 수법을 구사해온다.
기교파(技巧派).
기(氣)가 아니라 기(技)에 중점을 둔 움직임이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왔던 초월경들과는 달랐다. 파비안도, 크루지스의 다섯 번째 그림자도 그 검술보다는 기공술(氣功術)에 더 깊게 파고든 느낌이었는데.
오상류(五象流) 이검(二劍)
아직 두 사람은 진심으로 싸우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면, 검기가 아닌 강기를 사용했을 터. 어느 쪽이든지 흥미와 호기심으로 검을 부딪히고 있었다.
레너드가 먼저 손패를 한 장 내려놓았다.
백호일식(白虎一式)
단악(斷岳)
두 자루의 검이 패도적인 기세로 교차했다.
쩌어어엉—!
십자(十字)를 그리듯이 벤 참격이 충격파마저 만들어내면서, 커틀러스와 함께 허먼을 튕겨냈다.
내상을 입기는커녕 그 위력에 입꼬리를 잡아당긴 허먼이 한 걸음으로 다시 돌진해왔다. 일순간이지만 손아귀가 떨릴 만큼,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하하하하! 이거 좋은데!”
초월경을 돌파하고서 그 삶이 한층 더 지루해졌던 그였다.
소드마스터에게 함부로 시비를 걸 미친놈은 없고, 그렇다고 동급의 모험가에게 먼저 싸움을 걸기에는 파블로에게 묶인 제 신세가 문제였다.
이대로 몇 년이고 계속 썩어가리라고 체념했건만.
“너무 성급하게 뒈지지 마라! 흥이 다 깨지니까!”
레너드의 검격이 그의 무료함을 산산조각냈다.
몇 년이나 굳어있었던 몸에 활기가 돌고, 끓어오르는 피가 안 그래도 강력했던 검을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난무(亂舞).
검의 특성상, 직검보다 더 유연할 수밖에 없는 커틀러스가 불규칙한 흐름을 만든다.
초월경과 동등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 레너드조차 다 파악할 수 없는 검격의 연쇄. 눈을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수십 번의 참격이 온 사방에서 짓쳐들어온다.
오상류(五象流) 이검(二劍)
어설프게 막으려다간 그 방어째로 토막이 난다.
그걸 직감한 레너드가 두 자루를 모두 방어에 투입했다.
현무칠식(玄武七式)
귀갑빙천벽(龜甲氷天壁)
허먼의 검격이 어지럽다면, 레너드의 검격은 정결하다.
흑색 검기로 물들어있는 칼날이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적의 공격으로 압도당하던 공간이 제자리를 찾는다.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둥글게 형성되는 기의 보호막.
수십 차례의 검격이 그 위를 소나기처럼 두들겨댔지만, 금 하나 만들지 못하고 스러졌다. 〈귀갑빙천벽〉의 방어력은 양에 치중한 공격방식에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차례다.’
검막이 흐트러지면서 그 너머로 당황한, 그러면서도 희열로 일그러진 낯을 한 허먼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레너드도 제 얼굴에 번진 웃음기를 알아차렸다.
무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오상류(五象流) 이검(二劍)
청룡일식(靑龍一式)
허먼의 검에 존재하는 강점은 그 유연함과 신속함에 기인한 변화,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선수(先手).
그렇기에 한 수만 내주더라도 세 수를 손해보게 된다.
한 발 앞서 움직이지 않으면 계속 불리해지는 것이다.
쌍벽진뢰(雙璧震雷)
수직베기와 사선베기, 오직 속도와 예리함에 치중한 검격이 두 줄기의 벼락으로 변한다. 외력경 10단 수준의 무인이라도 이 간격에선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러나 초월경의 강자, 허먼을 따돌리기엔 너무 느렸다.
반 박자 늦게 뻗어나온 검격이 〈쌍벽진뢰〉의 각 측면을 한 번 두드려서 궤도를 틀어버린다.
오상류(五象流) 이검(二劍)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레너드가 즉시 반응했다.
청룡십육식(靑龍十六式)
풍랑뇌전(風浪雷電)
허먼의 방해로 탈선했던 검로가 다시 그 힘을 되찾는다.
거친 바람과도 같이.
거센 우레와도 같이.
두 줄기의 푸른 섬광이 어지럽게 뒤엉키면서, 그 사이에 낀 것을 찢어발길 기세로 물어뜯는다.
검격무도(Blade Dancing)
그에 맞서서 허먼 역시 손패를 한 장 뒤집었다.
폭풍의 장(Chapter of Storm)
검보다 먼저 발끝이 움직인다.
지면에서 아주 미세하게 떠올라있는 허먼의 발목이 몇 바퀴 회전하고, 뒤늦게 그걸 따라서 몸과 칼날이 회전하면서 말도 안 되는 가속을 선보였다.
〈풍랑뇌전〉에 잡아먹힐 것처럼 그 기세가 약해졌던 쌍검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가속하는 타이밍 자체가 늦었기에 압도할 순 없었으나, 한 호흡 빼앗겼던 기세를 복구하는 건 가능하다. 네 자루의 검이 서로를 튕겨내면서 다시 두 사람의 간격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먼과 레너드의 입술에서 웃음소리가 작게 새어나왔다.
“하.”
“흐.”
검객으로서 이 즐거움을 모른다면, 절대로 높은 곳까지 갈 수 없으리라.
칼날 위에 목숨을 올려놓고 그걸 주고받는 환희.
막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닌, 정교하게 쌓고 단련한 기술을 선보이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공략하는 전투. 한쪽만이 그러했다면 지금 느끼는 즐거움이 반감되었겠으나, 둘 모두가 그렇다보니 몇 배로 늘어났다.
“탐색전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래.”
허먼과 레너드는 이미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처럼, 허물도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터무니없었지만, 두 명의 검객에게 있어서 방금 전 같은 응수는 어디까지나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강기는 물론이고, 서로 제 명줄을 걸어야하는 수법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에 앞서 긴장감이 높아진다.
초월경과 외력경.
상식대로라면 전투가 성립하지 않아야할 차이였으나, 한 번 검을 맞부딪혀본 허먼은 전혀 방심하지 않았다. 레너드가 그 목을 떨어트릴 수 있는 기량을 갖췄음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알게 된 탓이었다.
하지만.
“음?”
어딘가를 본 허먼이 검을 늘어트리자, 레너드도 제 팔뚝에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그 방향에서는 모비딕의 모험가 한 명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레너드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뜻을 알아들은 허먼은 칫 하고 투덜거렸다.
“망할 놈이. 싸우라고 보낼 때는 언제고, 이젠 돌아오라고? 오랜만에 제대로 한 판 붙어볼 참이었는데.”
“판이 깨졌나보군.”
조금 전까지 생사결을 준비하던 게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기를 거두고서 말했다.
“아, 그렇게 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계속하자.”
레너드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 한 번 턱짓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고 가라. 너 같은 성격으로 파블로와 잘 맞을 것 같진 않은데, 왜 그를 따르고 있는 거냐?”
“시답잖은 이유가 있지. 그놈한테 한 번 지고,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거든. 그걸 쓸 때까지는 그놈 밑에서 적당히 일해주겠다는 조건이었어.”
“그럼 8년 전의 사건에도 가담했었나?”
“8년 전?”
아, 하고 무언가를 떠올린 허먼이 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빠졌어. 그런 식으로 다구리치는 건 여러모로 내 신조에 반하거든. 뇨르드나 덴투소, 에이허브 같은 놈들과 한 번 싸워보고 싶긴 했지만….”
“그렇군.”
그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레너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시원스럽게 등을 돌렸다.
허먼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납득하는 태도였다.
“내 말을 믿어주는 거냐?”
“그래.”
정확히는 그 말이 아니라 검을 통해서 알게 된, 허먼이라는 인물에게 납득한 것이었다.
검의 구도자(求道者)로서 살아가는 자에게, 제 기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파블로가 때려죽인다고 협박해도 안 움직였을 터다.
그 통찰을 알 리도 없이, 적으로 만난 소년에게 아군보다도 더 크게 신뢰받은 허먼은 허탈해보였다.
“옘병, 기분이 좋다가 나빴다가 아주 지랄같은 날이군.”
그러고는 더 말하지 않고 모비딕의 잔존인원과 함께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모비딕 모험단과의 첫날밤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수도 아틀란티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의 어딘가에서, 은밀하게 그 만남을 약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연합의회〉의 2인자면서 8위계의 대마법사, 고든 헤이우드.
옛 시대의 전설을 상징하는 ‘아쿠아마린’의 단장으로서 그와 마주앉은 소녀, 프란시스 레르 폰 오케아노스.
무력과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현재의 프란시스가 감히 고든 앞에 설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 이야기는 또 달라지는 법이었다.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중년인처럼 보이기도, 노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분위기를 한 대마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뱀처럼 가늘어진 눈동자가 제 눈앞의 소녀를 관찰한다.
뇨르드의 딸.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았던 어린애가, 그를 협상장으로 불러들일 정도의 미끼를 던질 줄이야.
“자세히 설명해보게, 프란시스 단장.”
고든 헤이우드가 말했다.
“8년 전의 사건, 그 배후와 실행범을 모두 특정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