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word priest reincarnated as a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287)
검공가에 환생한 검제 (287)
“——음.”
수천 합, 아니 만 단위로 부딪혔을지도 모르는 격검 도중에 데클렌이 제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조 카르데나스와의 합일로 신화경까지 올라서게 된 지각능력이, 전장 곳곳에서 흩어지던 생명을 다 읽어낼 정도로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무저갱으로 떨어져내리고 있는 탈로스의 안에서 드레이크가 마지막 한 호흡을 내쉬었다.
[모네가름]을 구속했던 결계를 폐쇄하면서, 안토니우스마저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사라져갔다.마도인형 아인소프와 함께 제 존재를 바쳐버린 시몬의 마법 [아담카드몬]이 사신 [발로르]와 맞서싸우고 있었다.
그 인식을 공유하는 카르데나스가 쓰게 웃어보였다.
―자랑스러운 전우들이 먼저 떠나가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데클렌은 그 말에 공감하면서 눈앞의 강적과 마주했다.
‘가능하다면 이놈을 얼른 베어버리고 레너드를 돕고 싶은데, 생각했던 것처럼 안 되는군요.’
―하! 아스가르드의 파멸자로서 악명이 높은 괴물이다. 신족 하나를 단신으로 절멸시킬 수 있으리라고 경외된, 전사로서의 급만 따지자면 [발로르]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존재지. 뒷일은 생각하지 마라. 놈을 살려보내면 나머지도 다 죽는다.
카르데나스의 경고에는 한 푼의 과장도 섞여있지 않았다.
수르트(ᛋᚢᚱᛏᛦ).
서리거인 따위보다 몇 배나 위험한 화염거인의 군주로서 그 왕위를 지켜온 괴물이었다. 멸신전쟁으로 인해서 깨진 예언에 따르면, 아스가르드가 종말을 맞이하는 날에 강림해서 세상을 불살라버리는 마왕이라고 할 정도였다.
놈의 강함을 체감해본 데클렌 역시 그 평가에 토를 달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몸, 권능의 출력이나 격 따위로 압도해오는 외신과 달리 [수르트]는 ‘기사’다웠다.
‘요툰치고는 왜소하기까지 한 10미터의 체격은 그 압도적인 힘을 극도로 압축시켜놓은 형태, 터무니없는 밀도와 기동력을 지닌 것도 모자라서 무예의 경지마저도 심후하다. 마법사에겐 천적이나 다름없는 유형이로군.’
데클렌과 시조 카르데나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저것을 상대했다면 1분도 못 버티고 토막났으리라.
한 마디의 주문도, 한 동작의 수인도 용납하지 않고 생명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거신 탈로스의 방어력 또한 저 대검의 밀도만큼은 감당하기 어렵다. [히드라]처럼 그 출력에 의존하는 권능이라면 모를까, 장갑판의 이음매만 정교하게 벨 수 있는 괴물에게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카르데나스의 조손(祖孫)만이 놈에게 대적할 수 있었다.
―온다.
시조의 목소리가 다 사그라지기도 전에, [수르트]는 단숨에 수백 미터를 뛰어넘어서 데클렌의 눈앞에 나타났다.
레너드가 그걸 봤다면 축지(縮地)라고 표현했을테지.
이전에 불카누스를 그릇으로 모방했던 것과는 격이 다르다. 중간계 태생이었다면 신족 하나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었던 화염신이자 검신, 그 도달점이 검을 내리긋는다.
———————.
소리가 없다.
그 무시무시함을 깨닫는 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런지.
‘이런!’
반사적으로 그 참격을 흘려넘긴 데클렌의 배후로, 지표면이 쩍 갈라지면서 협곡이 태어났다. 쿠구구궁, 하고 땅이 울리는 소리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저항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공간의 틈새를 포착해서 그 사이로 벤다. 분자라든가 원자라든가의 단위보다 근원적인, 인류의 문명이나 지각능력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에 맞서서 데클렌도 한 걸음 나아갔다.
본래의 역량이었다면 조금 전에 두 동강났다. 카르데나스의 검경(劍境)으로 간신히 놈을 따라붙었다.
———. —————. ————.
데클렌의 칼날에서도 곧 소리가 사라져, [수르트]와 대등한 영역에서 다시 격검이 시작된다. 10미터와 2미터, 체격적으로 대등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진신급의 영역에선 몸의 크기를 따져봤자 별 의미도 없다.
괄목해야할 것은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이치, 세계법칙이 한 박자 늦게 따라붙어오는 무예의 극지(極地).
두 명의 검신이 만들어내는 참살지옥.
키잉.
찰나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불협화음이 목숨을 위협했다.
다 흘려내지 못한 참격이 관자놀이를 스치고 귓바퀴를 길게 찢어버리며, 그 뒤에 서있는 언덕까지 양단해버렸다.
하나하나가 곧 죽음에 직결되는 위력.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피의 뜨거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다. 검공의 수준에서 닿을 수 없다면, 검신의 영역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데클렌의 움직임이 점점 카르데나스에게 가까워졌다. 한 걸음으로 공간을 뛰어넘고, 시공간의 틈을 볼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한다.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수르트]의 앞에선 호각, 아니 열세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놈…설마?!’
―즐기고 있네. 우리들과의 칼부림이 제법 유쾌한가보다.
카르데나스가 한 말대로였다.
[수르트]의 공세가 조금만 더 가열찼다면, 이해득실을 따질 것 없이 들어왔다면 데클렌은 이미 궁지에 몰렸을 터. 손속에 티끌만한 여유를 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함이었다.―빈틈이로군.
신화급 존재와의 투쟁을 처음 경험해본 데클렌과 다르게 그 잔뼈가 굵었던 카르데나스는 직감했다.
이걸 노려야한다고.
생각해보면 [수르트]의 분위기는 놈 이외의 외신들과 달리 무미건조한 느낌이 상당했다. 악의와 살의로 점철되어있는 게 아닌, 기계적으로 할 일을 수행하러왔던 것처럼. 아스가르드의 파멸을 성취하지 못한 대신에 중간계의 침공을 도우러왔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안 될 것도 없어보였다.
멸신전쟁으로 투쟁을 즐길 수 있는 신족들이 모두 사라져서 흥미를 잃어버렸던 게 [수르트]라면, 놈의 흥미를 자극한다면 더 유리한 상황에서 승부수를 띄울 수 있었다.
―데클렌, 할 수 있겠니?
‘훗, 처음부터 다 각오하고서 전장에 나온 몸입니다.’
사지(死地)로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카르데나스의 말에,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답한 데클렌이 달려들었다.
수싸움이 전부 무용지물로 변해버리는 악수(惡手).
일순간이지만 [수르트]의 반응속도가 한 박자 늦었다.
푸화악!
화염거인의 옆구리 가죽이 쩍 갈라지면서, 용암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뿜어져나왔다. 도박수로 겨우 성공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수르트]에게 처음으로 칼이 닿았다.
상처는 얕다. 뼈나 근육은커녕 가죽조차 다 베지 못해서, 그 살갗에서 피가 배어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
데클렌을 바라보는 거인의 눈빛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호적수’까진 아니더라도, ‘놀이상대’가 아닌 ‘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었다. 진지해진 [수르트]의 태도에 따라서 공간의 압박감은 몇 배나 증가하고, 조금 전까지 거침없이 내딛을 수 있었던 영역마저 필살공간으로 변해버린다.
여기서부터다.
시조의 필살기를 적중시키려면, 놈이 스스로 받아들이게 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흥미를 잃어버린다면 [수르트]는 그 여흥에 어울려주지 않을 터였다.
“후우——.”
마지막이 될 날숨을 뱉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데클렌의 발이 필살공간으로 들어서고, 이내 경계를 넘었다.
[수르트]는 그 만용에 보답하듯이 대검으로 응수해왔다.오싹, 하고 등골이 얼어붙는다.
7대3의 구도. 유리하더라도 한 수 앞서기가 어려운 상대를,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맞이해야하는 난국(難局). 그 십중팔구의 죽음을 돌파하는 것이야말로, 시조의 검. 카르데나스 가문에서 무형의 검식으로 전승해왔던 원형의 검.
‘〈카르데나스식 무형검〉…이, 아니었던 거군요.’
어떠한 상황에서나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범용성이 큰 장점으로 알려져있는 검술이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였다.
초대황제 라그나와 함께 건국전쟁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었던 카르데나스는 수많은 적을 마주했고, 하나하나가 반신급 중간 수준에서 진신급 하위 수준까지 넘보고 있었던 드래곤들을 다 베어넘기면서 제국의 주춧돌을 쌓아올렸다.
그녀 자신이 처음부터 신화경이었던 것도 아니다. 약자로서 투쟁에 임해야했던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범용성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경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 내 검술의 본질은 범용성이 아닌 특수성에 있지.
돌파구의 형태가 바늘 모양이라면, 바늘로 변하면 된다.
돌파구의 형태가 제 머리카락처럼 가늘다면 머리카락보다도 가늘어지면 된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무형(無形)으로 오해받고, 그 후손들조차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다. 이길 수 있다면, 죽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상관없다는 결론이 만들어낸 만형(萬形).
전투가 길어질수록 그 공략법을 완전하게 다듬고, 필살기가 될 수 있는 수법을 만들어내는 검식.
카르데나스식 승룡검
초식이나 오의도 없이 검리(劍理)만이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필승의 검. 데클렌은 제 몸으로 재현되는 검술의 이치에 그저 감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화경의 벽 앞에서 체념했던 남자의 좌절감마저 한 조각도 남김없이 날려버리는, 검신의 일섬.
예리하다못해 그 궤적째로 공간이 잘려나가는 [수르트]에게 맞서, 검면으로 흘려보내며 반 걸음 전진한다. 10초 안팎으로 찾아와야할 죽음의 필연성을 부정해버리는 검무.
—■■■!
[수르트]도 그 검리에 흥이 솟았는지,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힘을 드러낸 검격으로 카르데나스를 압박해갔다.어머어마한 출력을, 극한까지 정제한 효율로 발휘하는 검식. [수르트]의 검이 철저하게 정석적이라면 카르데나스의 검술은 철저하게 변칙적이었다.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것이 활로가 될 수 있다던가, 천문학적인 확률로 나타나는 허(虛)를 확신한 것 같은 움직임으로 돌파해버린다.
하지만.
…쩌적…쩍….
데클렌과 카르데나스는 제 체내에서 울려퍼지는, 외면할 수 없는 파멸의 발걸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 무예를 감당하지 못한 데클렌의 육체가 마침내 붕괴하기 시작했어도, 〈승룡검〉의 조건도 거의 다 충족되어갔다.
생사결의 필승공식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회피할 수 없는 순간에, 막을 수 없는 상태에, 살아남을 수 없는 공격을 때려박는다.
―지금.
수천 년만에 검객으로서 즐길 수 있는 상대를 만나서, 흥이 올라있는 [수르트]의 검이 단순해졌다.
그 단순함마저도 절세의 영역이지만, 카르데나스라면 한 번 돌파할 수 있다. 이것도 막아보라며, 이것도 받아보라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화염거인을 죽여버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르카디아 제국 최강의 검신.
시조 카르데나스의 필살기.
빅토리아(VICTORIA)
건국제 라그나가 승리의 여신이라고 찬사했던, 필승의 검이 문자 그대로의 섬광으로 뻗어나왔다.
————————————!!
지하세계의 천장까지 갈라버리면서 지상으로 내려온 검광이 [수르트]의 화염대검을 절단하고, 검 뒤에 있었던 화염거인의 몸뚱이까지 좌우로 양단했다.
0에 가까운 확률로 수렴하는 승기(勝機)를 구현화하는, 검신 카르데나스의 권능이었다.
—■■…? ■■■■■.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동강이 난 채로, 미간으로부터 용암 같은 선혈을 분출시킨 [수르트]가 미소지었다. 화염거인 특유의 흉신악살 같은 외모가 그리 일그러지니 위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중간계의 점령이나 파멸 따위는 [수르트]에게 있어서 별 것 아닌 용건이었으며, 심심풀이로 즐기고자 온 게 분명했다. 그 목적을 성취했으니 패배조차 달갑게 받아들인 것이다.
10미터 남짓한 화염거인의 몸뚱이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곧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버린다.
패배자의 울분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운 퇴장이었다.
“…이기셨군요.”
―이겼다고 하렴, ‘우리’가 한 일이었잖니?
데클렌의 말에 그 존재감이 옅어진 카르데나스가 대답했다.
다 죽어가는 몸에 깃들어서 필살기까지 쓴 반동으로 잔혼이 부스러져간다. 끝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녀만이 아니라, 몸을 빌려주었던 데클렌도 마찬가지였다.
―레너드, 그 아이가 내 검을 지켜봤을까? 마지막에 한 수만 더 가르쳐주고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봤을 겁니다. 드래곤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오히려 내 쪽이 더 걱정이구나. 가야할 때를 천 년 가까이 놓쳤으니, 길을 헤매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어.
그녀답지 않은 푸념에 미소지었던 데클렌이 화답했다.
“안심하십시오. 제가 수행할테니.”
―풋, 너도 초행길이잖니? 잘 따라오기나 하거라.
카르데나스의 웃음소리가 다 흩어지기도 전에 목소리가 뚝 끊어지고, 검공 데클렌의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 어느샌가 두 다리로 설 힘도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아쉽게도 해가 떠오르거나 지는 광경은 볼 수 없는 명계라, 어두침침한 먹구름만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 하늘은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빅토리아〉가 남겨놓은 상흔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태양과 같은 황금빛을 늘어트리고 있었으니까.
‘하, 하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마지막에 겨우 손아귀로 쥘 수 있었던 신검을 향하여, 데클렌은 그 손끝을 뻗어내다가 이내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몸 전체가 재로 변하듯이 푸스스 무너져내렸다.
시체는커녕 영혼의 잔재조차 남겨두지 못하는 최후.
그럼에도 그 입가만큼은 잘게 부스러질 때까지, 만족스러운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