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word priest reincarnated as a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77)
검공가에 환생한 검제 (77)
‘고래잡이’ 갈라노는 한때 귀족이었다.
영지라고 할 만한 땅도, 가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없는 몰락귀족이었지만 제 부모님은 그걸 자랑스러워했다.
그들과 비슷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우리는 푸른 피를 가졌노라고 으스댔다. 형 덴투소도, 갈라노도 그걸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무예를 단련하지도, 지혜를 쌓지도 않는 사람들이 피 하나로 우월해지는가?
하나밖에 안 남은 가문의 유산, 창술조차 제대로 연마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이다.
―덴투소! 갈라노! 짐을 챙기거라! 우리들이 다시 귀족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단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들의 먼 친척에 해당하던 자작가에서 온 손님은 부모님과 두 형제를 정중하게 초청했다.
그리고 그들 전부를 산제물로 삼아서, 이웃 영지와 전쟁을 할 명분으로서 죽이려고 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두 형제는 살아남았으나, 부모님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마차 안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니까.
―……형,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해?
―글쎄.
덴투소는 아주 조금의 슬픔과 엄청나게 큰 분노가 담겨있는 눈동자로 숲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레고리오 자작가.
달콤하기 그지없는 거짓말로 두 사람을 속여, 이웃 영지의 습격자로 위장한 병사들에게 죽이게 한 가문. 갈라노와 달리 덴투소는 그 두뇌가 비상하여, 얼마 안 되는 단서로도 진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엄마는 허영심으로 사치하는 것밖에 몰랐고, 아빠는 술에 만취해서 허풍을 늘어놓는 것밖에 할 줄 몰랐지. 분에 넘치는꿈을 꾸었다지만, 이렇게 죽어야할 이유는 아니었을 텐데.
―복수하려고?
―그래.
덴투소는 제 등에 걸려있는 단창을 꼬나쥐면서 말했다.
―그렇게 어려워보이는 일도 아니었거든.
천재(天才).
몰락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기에는 너무 큰 재능이, 마침내 자유롭게 풀려나면서 그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문의 유일무이한 유산, 〈마엘스트롬(소용돌이)〉을 터득한 덴투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갈라노 역시 그에게서 창술을 가르침받아, 남들보다는 몇 발 빠르게 진전을 볼 수 있었다.
형 덴투소가 혼자 깨우치고 나아가는 천재였다면, 갈라노는 스스로 걸을 줄은 모르더라도 이정표를 따라가는 재주만큼은 뛰어난 영재였다.
그로부터 제법 긴 시간이 흘러지나갔다.
―크아아악!
―그 사이에 백작까지 올라갔더군. 재주도 좋아, 그레고리오 자작. 우리들이 누군지 알고 있나?
―…모, 모른…다…!
―그렇겠지. 정략으로 한 번 써먹고 버린 친척들의 얼굴이나 이름 따위를 기억할 리가 없을테니.
뭣, 하고 경악하던 그레고리오 백작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장장 15년에 다다른 복수행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머리통을 걷어찬 덴투소가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귀족을 죽여버렸으니,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겠구나. 어디로 갈까?
―형!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아틀란티스라고 불리는 곳이 나온대! 그곳에는 귀족도, 왕도 없다는데?
―신분의 구분이 없는 땅이라, 여기보단 자유롭겠군.
두 형제는 스스로의 걸음이 이끄는대로 먼 길을 가로질러, 아틀란티스 해상연합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거기서부터는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이었다.
실력 하나로 제 값어치를 증명해야하는 바다에서의 삶. 그 자유와 모험으로 가득한 생활은 두 사람에게 잘 맞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덴투소가 A등급 모험단 ‘아쿠아마린’의 권유로 정식 모험단원이 되었다.
갈라노는 언젠가 형을 따라서 ‘아쿠아마린’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열심히 창을 수련했다.
형의 발자국만 따라밟으면 지금까지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믿음은 언제까지나 깨어지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대균열 〈카리브디스〉의 봉합을 성공시킨 ‘아쿠아마린’에서 대규모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신앙과도 다름없었던 믿음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멋지고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던 바닷속으로 집어삼켜져서, 갈라노에게 두 번 다시 이정표를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
〈연합의회〉가 꾸민 음모라든가, 〈버뮤다〉가 개입했다든가. 온갖 음모론이 돌아다녔지만 갈라노는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형.
대답해주는 목소리가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해?
갈라노의 앞에는 이제 발자국도, 믿음직했던 등도 없었다.
나아갈 곳을 잃어버린 남자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둡고 흐릿하기만 한 미래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느샌가 8년이나 된 날의 기억이었다.
* * *
―꾸에에에엑!
―끄에에에엑!
―부훼에에엑!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온 괴성에, 갈라노는 제 눈살을 힘껏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반 정도 마시고 올려놓은 술병이 쓰러져, 카펫을 축축하게 적시면서 번져나간다. 지독한 술 냄새였으나, 이미 후각이 다 적응해버린 상태라서 그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다.
외력경 9단의 실력자답게 안개가 짙게 낀 것처럼 혼탁하던 머릿속은 빠르게 맑아져간다.
“…이게 뭔 소리야? 돼지라도 잡고 있나?”
언제부턴가 그를 형님이니 두목이니 하면서 따라다닌 놈들, 그놈들이 어디서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온 모양이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마당까지 끌고 와서 멱을 따야할 이유가 있나?
숙취 때문에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으로 변한 갈라노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몇 걸음만에 저택 입구까지 뛰어온 그가 거칠게 소리쳤다.
“시끄럽다고, 이 새끼들아! 돼지를 잡을 거면 좀 멀리 가서 잡던지! 아니면 한칼에 멱을 따야할 거 아니—이잇?!”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갈라노가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의 입장에서나 못 미더운 놈들이지, 그럭저럭 힘 좀 쓰는 덩치들이 곱상한 애송이한테 두들겨맞고 있었다.
주먹으로, 발로, 팔꿈치로, 무릎으로.
몸 전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쉴 새 없이 두드려팬다.
치명상은커녕 중상이라고 할 만한 상처도 안 보이지만, 그 충격이 누적된다면 의식 정도는 끊어진다. 두 눈이 몽롱해진 떡대들은 곧 맞기 시작했었던 차례대로 널브러졌다.
“멱을 따줘야하나?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혹시 갈라노의 패거리가 아니었나 싶어 물어본 레너드에게, 갈라노는 다급히 제 고개를 도리질했다. 알게 모르게 정이 든 놈들이다보니 죽이라고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너무 놀라서 술기운이 다 날아가버린 그의 시야에, 레너드 뒤에서 쓴웃음을 짓던 프란시스가 들어왔다.
그녀를 본 갈라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프란시스? 너냐?”
프란시스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갈라노 아저씨. 8년만인가요?”
“그런가. 벌써 8년이나 지나버렸구나.”
덴투소가 제 동생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보니 프란시스와도 나름대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나간 세월을 공유했다.
8년.
누군가에게는 그 삶이 송두리째 뒤집혀버릴 정도로 길었고, 누군가에게는 그날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갈라노의 얼굴에서 무엇을 본 건지, 조금 어두워진 표정을 한 프란시스가 말했다.
“아쿠아마린에 새 단원이 필요해요. 제 휘하에서, 모험단의 재건에 동참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일순간 갈라노의 눈동자에서 수많은 흔들림과 번뇌가 떠올랐다가 곧 가라앉았다.
프란시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뇨르드와 덴투소를 한 입에 집어삼켜버린 바다와 흑막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고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켜서 싸워보고자 하고 있었다.
“나는….”
스무살도 안 된 아이보다도 용기가 없어, 그날부터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남자가 머뭇거렸다.
회갈색 머리카락에 흉터투성이인 몸. 누가 보더라도 강인한 용병이나 모험가처럼 보이는 생김새인데도, 그 내면에는 형의 뒷모습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아이가 남아있었다.
제 입으로 거론하기에는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억지로 발을 떼어봤자 제대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갈라노는 도망치기로 했다.
“…난, 이제 모험단에 들어가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를 일별했다.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길을 잃었는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레너드가 한 마디를 툭 던지자, 갈라노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그의 심마를 정곡으로 찌르다못해 푹 꿰뚫어버리는 말이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길이 무너져내려, 어디로 가야할지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나? 그러면서도 다 내려놓지는 못한 채로 창이나 휘두르고 있으니 우스꽝스럽다. 진정으로 포기한 인간이라면, 창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애새끼가, 내 무엇을 안다고 그리 떠들어대나!”
스스로의 속내가 훤히 밝혀져버린 갈라노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느샌가 등 뒤에서 손아귀로 끌어당겨온 작살창이 달라붙어왔다.
당장이라도 놈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어버리자고 외친다.
갈라노가 그 충동에 굴복하려던 찰나였다.
“창날은 지저분하게 손질되지 않은 반면에, 자루 부분만은 매끈하게 보일 정도로 닳아있더군. 대적할 용기는 없으나, 제 무용(無勇)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일테지.”
“…그래서?”
“누군가는 제 발로 걸어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줏대 없는 놈이라고 비웃겠지만, 난 아니다. 선두에서 이끌어나가는 자가 있다면, 후미에서 뒤따라가는 자도 있는 법이니까.”
대부분의 인간은 당연하게도 후자에 속해있다.
무림인이라는 부류는 특히 더 그러했다.
무공을 새로 만들어서 그 기틀을 잡고, 상승경지까지 갈 수 있는 대종사(大宗師)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다수는 문파와 가문에 전해져오는 구결과 스승의 가르침대로 별 생각도 없이 선인들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보리달마(菩提達磨)나 원원자(元元子) 같은 인물이나 전자로 살 수 있고, 나머지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밟는다.
“새로운 길을 찾아내라. 이 세상에 길은 많고 많다. 가만히 주저앉아서 이미 사라진 길을 더듬어봤자, 손바닥에 붙잡히는 건 풍진(風塵)밖에 없다.”
“쉽게도 말하는군…!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거다!”
무기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상처를 입은 맹수처럼 두 눈을 부릅뜬 갈라노가 으르렁댔다.
외력경 9단.
그 경지에서 뿜어낸 살기가 대기마저 이지러지게 한다.
레너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말만 쉬울까. 원한다면야 내가 새로운 길을 보여주지.”
“…프란시스를 믿고 그렇게 지껄여대는 거라면, 여기까지다. 한 마디만 더 해봐라!”
“못할 것 같은가? 아니, 말보다는 이게 더 낫겠군.”
갈라노의 위협을 무시해버린 레너드가 제 발치에서 구르는 작살 하나를 차올렸다.
창(槍)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날의 형태와 길이부터가 많이 달랐으나, 창술로 다루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칼날을 떼어내면 봉(棒)이, 측면에 날을 달아놓으면 과(戈)가, 월아를 결합한다면 극(戟)이 되는 것이다.
검객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 중 하나가 창이었던 만큼, 그 대응방법은 물론이고 창술 자체도 깊게 수련해보았다.
이 몸뚱이로는 처음 잡아본 것이었지만, 레너드는 간단하게 작살의 무게중심을 파악하고 붕붕 돌려대기 시작했다.
사악.
몇 바퀴만에 작살의 날이 공기를 날카롭게 베어내는 소리를 내자, 갈라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창잡이로서 그 실력을 몰라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달인의 경지에서나 보여줄 수 있는 기예였다.
여덟 가지의 기본동작이 순서대로 뻗어나오다가, 그 흐름을 깨고 뒤섞이면서 알아볼 수 없는 연계식을 만든다. 순식간에 갈라노조차 다 간파할 수 없는 창격이 미쳐날뛰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오랜만에 붙잡은 창이라서 조금 어색했지만, 심지가 흔들린 얼간이를 교육하는 수준으로는 너무 과분할 정도다.
양가육합팔모창법(楊家六合八母槍法).
배꽃이 흩날리는 것 같은 모양새로 인해서 이화창(梨花槍), 더 간략하게는 양가창(楊家槍)이라고 불리는 창법이었다. 초식 자체에 고차원적인 무리가 들어있진 않지만, 초절정 고수까지 상대하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와라.”
레너드가 말했다.
“우물에서 나올 줄 모르는 개구리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고 드높은지를 가르쳐줄테니.”
“——건방떨지, 마라아아아앗!”
두 자루의 작살이 마치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