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18)
낙향문사전-118화(118/494)
제118화. 무봉(無鋒)과 백로(白露)2014.10.18.
달칵.
손빈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서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손빈이 대장장이에게 물었다.
“음.”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대장장이가 흘린다. 시선은 여전히 백로에 못 박힌 채다.
사락.
대장장이는 입에 물고 있던 종이를 손에 들었다. 바닥에 여기저기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얼마나 지났나?”
손빈을 쳐다보며 대장장이가 묻는다. 창이 닫히고 등불을 밝히고 있으니 그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해가 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차도 다 마셨다. 혁련위는 식사 후에 바로 떠났고 적세화와 당월아도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에 대장장이를 부르지 않은 것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가?”
희미한 목소리로 대장장이가 말했다. 겨우 한나절 사이에 그의 모습은 꽤나 초췌해진 듯 보였다. 강인한 중년의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목소리마저 힘이 하나도 없다.
“이 검은…….”
그의 시선은 어느새 백로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백로를 쳐다보는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믿기지 않군. 도저히.”
백로는 아름다운 검이다. 검과 전혀 무관한 사람의 눈길마저 단숨에 사로잡을 정도로. 무인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백로의 검신이 주는 매력은 가히 혼을 뒤흔든다. 하물며 검을 만드는 대장장이로서는 어떠하랴?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런 검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검신을 보란 듯 도도히 뽐내며.
부스럭.
대장장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커다란 다리가 휘청 흔들린다.
“괜찮으십니까?”
손빈이 얼른 부축했다. 단단한 대장장이의 근육이 팔에 가득 잡힌다.
“가 봐야겠네.”
대장장이는 대답대신 딴소리를 했다.
“당장.”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철을 두드릴 생각밖에는 없었다.
벌컥.
대장장이는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걱정이 된 손빈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어느새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잘 있으라거나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다.
따라 나간 손빈은 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대장장이를 눈으로 배웅했다. 휘청거린 것은 처음뿐, 그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괜찮을까?’
딱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일단 그는 손빈보다 몇 배는 건장한 사람이었으니까.
손빈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 안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대장장이가 전부 놓고 간 것이다.
‘나중에 갖다 드려야겠군.’
손빈은 우선 탁자 위에 있던 백로를 들었다.
웅.
투정이라도 하듯 백로가 미세하게 운다.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릉.
백로를 칼집에 갈무리하고, 손빈은 대장장이의 물건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 그러고 보니.’
손빈은 아차 싶었다. 철검을 대장간에 그대로 놓고 온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
*
*
쏴아아.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밤하늘에 높이 솟은 달은 고요히 빛을 뿌리고 북강의 밤물결은 소리 없이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저벅.
술잔을 들고 있던 노군이 고개를 돌렸다. 산악처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인물이 어둠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다.
저벅, 저벅.
나타난 사람은 전대 패검, 혁련위였다.
“뭐야?”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혁련위는 낮과는 달리 깨끗한 새 무복을 입고 있었다.
작고 고풍스러운 관을 쓰고 있던 머리도, 넓은 푸른색 띠로 묶은 것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마치 무슨 의례라도 치르는 듯한 모습이다.
“후우.”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옷까지 갈아입고 왔냐고 놀릴 만도 했지만, 지금 혁련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노군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뭐냐?”
노군이 물었다. 혁련위의 등 뒤에 커다란 검이 보였다. 그 폭이 넓고 매우 긴, 한눈에 보아도 거대한 기형적인 검이었다.
칼집조차 없는지 날을 세우지 않은 검신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길이에 걸맞게 손잡이도 크고 길었다.
“제 검입니다.”
“그게 ‘검’이라고?”
눈살을 찌푸리던 노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패검을 물려주었을 테니 아마 새로 구한 것일 터였다.
“결국 제 성격대로 하나 구했군. 어울린다. 네놈다워.”
혁련위의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흐른다.
“좋단다. 쯧쯧.”
노군이 혀를 차는데 혁련위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안 보여? 기다리고 있잖아.”
노군은 시선을 돌렸다. 전대 패검 혁련위 역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고요한 빈터, 북강의 밤물결을 뒤로하고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혁련위에 비하면 가냘프게까지 보이는 그는, 익숙한 문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혁련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달빛 아래 선 손빈은 산책을 하다 멈춰 선 듯 허허로운 모습이었다. 전대 패검과 비무를 앞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왜?”
노군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묻는다.
저벅.
아무 말도 없이 혁련위는 천천히 손빈에게 걸어갔다. 무언가 반응을 기대하던 노군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저벅, 저벅.
단정한 차림의 문사 청년이 고개를 돌린다. 혁련위를 발견한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혁련위는 자신이 약속된 상대와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는…….”
혁련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물었지만 대답은 혁련위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었던, 그리고 오랫동안 갈구해 왔던 기대와 흥분이 혁련위의 전신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동시에 엄청난 기세가 그의 주위로 휘몰아친다.
후우웅.
“저는 손빈이라 합니다. 작은 서원의 선생님이자…….”
폭풍 같은 기세 속에서 손빈이 답했다.
“감히 무제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입니다.”
파라락.
혁련위의 기세가 손빈의 머릿결을 흩트렸다. 그러나 손빈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충돌하는 그 모습은 멀찍이 앉은 노군과 신의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쯧, 재미없는 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노군이 눈살을 찌푸린다.
“뇌검 같으면 놀려 주는 맛이라도 날 텐데, 무뚝뚝하니 영 흥이 안 나네.”
“전대 뇌검과는 아주 다르군.”
지켜보던 신의가 말한다. 노군은 피식 웃었다.
“뇌검이 쾌검이라면 저놈은 중검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중검. 한번 받아 보면 아주 뼈마디가 쑤실 정도로 묵직하지.”
노군이 말했다.
“그때 저놈의 검을 받아 내느라 아직도 뇌검의 삭신이 쑤신다잖아. 뭐, 어차피 무공에 미쳤다는 점에서는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남 얘기하듯 노군이 말한다. 신의가 물었다.
“빈이는 괜찮겠나?”
“괜찮지 않을걸?”
노군의 대답에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본다. 그러나 노군의 표정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뇌검 대하듯 했다간 아마 그대로 짓눌리고 말 거다.”
말하는 그의 시선은 똑바로 손빈을 향하고 있었다.
신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보기에 무림인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외사에 속한다 하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노군은 물론이고 저곳에 서 있는 혁련위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노군과 마찬가지로 손빈과 혁련위에게 못 박혀 있었다.
후우욱.
손빈을 둘러싼 혁련위의 기세는 여전히 거세다. 마치 언제까지고 그럴 것처럼.
“이 검은……”
후웅.
혁련위가 말했다. 그와 함께 폭풍같이 몰아치던 기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주변의 공기는 오히려 더 팽팽해지고 있음을 손빈은 느낄 수 있었다.
스륵.
커다란 검이 혁련위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폭으로 따지면 손빈의 얼굴 정도는 너끈히 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검 끝부분이 뚝 끊어진 듯 뭉툭하게 잘려 있는 점도 특이했다.
훅.
거대한 검이 가볍게 허공을 가른다. 전대 패검 혁련위는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무봉(無鋒)이다.”
무봉이라 함은 곧 칼날이 없다는 뜻이다. 기형적인 거검이었지만 손빈은 오히려 그 검의 모습에서 친숙함을 느꼈다. 사자혁이 쓰던 흑색 대도, 파월이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검이군요.”
혁련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친다.
스릉.
손빈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무봉에 비하면 가늘게까지 보이는, 곧게 뻗은 검신이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검은 백로입니다.”
혁련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손빈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웅.
백로가 울었다.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손빈의 진심이었다.
마주 선 혁련위에게선 어떠한 날 선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경계도 의심도 조롱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부딪혀 오는 무인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검을 마주한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지극히 순수한, 그렇기에 진심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무인. 그가 바로 전대 패검 혁련위였다.
“나야말로.”
혁련위가 말했다. 짧은 그 말 속에서 손빈은 그의 진심을 느꼈다. 이제는 그 마음에 답할 차례였다.
스륵.
손빈 역시 자세를 취했다. 푸른 달빛 아래 백로가 조용히 반짝인다. 마치 북강에 흐르는 밤물결처럼.
웅.
혁련위의 거검, 무봉이 낮게 울더니 곧 짙푸른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섬뜩한 기세도 날카로운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손빈은 알 수 있었다. 혁련위의 거검에 서린 기운이야말로 끝없이 내면으로 침잠하여 그 극의에 다다른 결과임을.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달빛이 가득한 공터엔 검을 겨눈 두 사람과 낮은 검명만이 울린다. 한 폭의 그림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영원히 그러할 것처럼.
그러나 다음 순간.
후욱.
혁련위의 거검 무봉이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느리게 보였지만 무봉이 뿜어내는 폭풍 같은 기세는 결코 범상치 않았다.
섣불리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가는 아마도 무봉에 의해 삽시간에 두 동강이 나 버리고 말 것이다.
우웅.
백로가 울었다. 무봉을 감싸고 휘몰아치는 기세를 손빈은 누구보다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봉에 그 어떤 빈틈도 없음을 또한 알 수 있었다.
이제껏 혁련위와 맞선 모든 사람들처럼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무봉의 일격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후욱.
떨어지는 무봉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산악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것은 무봉이 거검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웅.
투덜거리듯 백로가 울었다. 그러나 백로의 칼날은 이미 무봉을 향해 깨끗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검이 맞닿은
순간.
째앵!
깨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노군이나 당월아가 움찔할 정도였다. 신의는 손으로 귀를 막았고, 서린은 즉시 몸을 낮추며 두 눈동자에 완연한 적의를 드러낸다.
“크르…….”
“기다려.”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중에 손 공자께 혼나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서린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참는 듯 서린의 손가락이 움찔움찔한다.
“하, 하지만…….”
어눌한 목소리로 항의하며 서린은 고개를 들어 당월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랗게 변한 입술이 금방이라도 피를 터트릴 듯했다.
후우욱.
무봉이 바람을 가르며 손빈에게 쇄도했다. 첫 일격에 사냥감을 움켜쥐지 못한 사자처럼 거검이 분노하며 허공을 찢는다.
콰과곽!
그 기세를 비웃듯 손빈의 백로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거대한 검신과 아름다운 칼날이 허공중에서 만났다.
째앵!
공간 그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자루의 검은 또다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쿵, 쿵.
두 걸음, 전대 패검 혁련위의 발이 물러섰다. 그 기세에 휘말린 풀들과 흙먼지가 그제야 놀란 듯 세차게 일어난다.
파바박.
“음.”
혁련위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말했다.
“대단하군.”
저벅.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손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파라락.
주위를 휩쓰는 기세에 그의 옷깃과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허나 부족하다.”
쿵!
거검을 쥔 혁련위가 한 발을 내디뎠다. 단지 그뿐인데도 엄청난 기세가 손빈을 압박한다.
“보여라. 아니면, 죽는다.”
완연한 살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는다는 그의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손빈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손빈에게 주는 기회라는 것도.
“후우우.”
손빈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백로를 들었다.
사락.
“알겠습니다.”
손빈을 마주한 혁련위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슥.
거검 무봉이 다시 손빈을 향한다. 끈적끈적한 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대신 알 수 없는 희열이 혁련위의 눈빛에 넘쳐난다.
“간다.”
혁련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쿠웅.
그가 발을 차자 대지가 진동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체구가 거검 무봉과 하나가 되어 손빈에게 떨어져 내렸다.
콰과곽!
그건 앞을 막아선 그 무엇이라도 짓눌러 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쳐다보던 노군이 침을 삼킬 정도로.
그러나 정작 그 앞에 선 손빈에게 거검 무봉의 폭풍 같은 기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오직 여리고 가는 한 줄기의 흐름뿐이었다.
사락.
검과 흐름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혁련위는 자신이 염원하던 바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단 한 자루의 검이 천지를 둘로 가르는 그 모습을.
*
*
*
“후우.”
노군이 한참만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인데도 아직 손의 경련이 멈추지 않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놈도 참…… 진짜 자비가 없어.”
신의가 피식 웃었다.
“죽을 목숨을 살려 주는데도?”
신의의 말은 정확했다. 손빈이 검을 멈추지 않았다면 혁련위의 가슴이 꿰뚫렸을 것이니까.
“목숨을 살려 주면 뭐하나? 그건…….”
노군은 새삼 고개를 저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다. 세상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그 광경을 과연 무엇이라 표현해야 하랴?
“어쨌든 이제 전대 패검의 문제는 끝났군.”
“그래.”
신의의 말에 노군이 성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눈앞에 거검 무봉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혁련위의 모습이 보였다.
“쯧.”
노군은 혀를 찼다. 술잔을 든 자신의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린다.
전음으로라도 전대 패검을 놀려 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도 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으려면, 늘 그렇듯 아직도 조금 기다려야 할 듯했다.
털썩.
서린이 주저앉았다. 당월아는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린의 부릅뜬 눈과 멍한 표정이 그의 심정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어때? 기다리라고 했었지?”
멍한 서린의 눈동자가 당월아를 향했다. 당월아는 피식 웃어 주려 했지만 아직 경련하는 입가의 근육이 어색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당월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 서 있는 손빈과 혁련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가끔씩 흔들리는 옷자락만이 환상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스륵.
혁련위는 땅에 박혀 있는 자신의 거검, 무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커다란 그의 몸이 잠시 휘청했지만 혁련위는 멈추지 않았다.
검신을 아래로 향한 무봉의 커다란 손잡이가 눈 높이에 이르자 그는 두 손으로 검을 맞잡았다. 그리고 손빈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쏴아아.
바람이 스쳤다. 혁련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손빈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임을.
스릉.
손빈 역시 백로의 검신을 아래로 향하고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리고 전대 패검 혁련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무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경의였다.
쏴아아아.
검을 쥐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두 사람을 북강의 밤바람이 부드럽게 감싸고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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