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24)
낙향문사전-124화(124/494)
제124화. 차가운 해후(邂逅)2014.11.08.
사수연은 두 여인을 따라 북해빙궁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빙궁의 시녀라 했는데, 시종들이나 마차가 있는 것을 보아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마차를 타시겠어요?”
“아니요. 저는 제 말을 타겠어요.”
사수연은 젊은 여인의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여인들의 얼굴은 오히려 밝아진다. 중년 미부가 무어라 하자 마차가 돌아갔다. 아마도 사수연을 위해 급히 구한 것인 듯싶었다.
“그럼 갈까요?”
젊은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 익숙한 동작으로 말에 올랐다. 중년 미부도 가볍게 말에 오른다.
치마 같던 복식 속에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말 옆구리에는 시위 풀린 단궁과 짧은 검도 몇 자루 걸려 있었다.
“하아!”
젊은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크고 강인한 북해의 말들이 힘차게 평야를 질주했다.
두 여인의 기마술은 매우 뛰어났다. 짐을 싣고 뒤따르는 시종들의 기마술 역시 보통이 아니다.
“빙궁은 어디에 있지요?”
사수연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젊은 여인이 금방 알아듣고 미소를 짓는다.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돼요.”
사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차게 말을 몰았다. 그러나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반나절이나 지나서였다.
“보이네요.”
문득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수연은 눈을 들었다. 지평선 저쪽,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무엇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히이힝.”
말이 힘차게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사수연을 향해 불어왔다.
파라락.
물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사수연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그리고 믿지 못할 광경이 사수연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쏴아아.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과 멀리 보이는 수평선. 짠 바다 내음은 없었지만 사수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분명히 바다였다.
황량한 평야 한가운데서 맞닥뜨리는 광활한 바다.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북해예요.”
속도를 늦춘 사수연 옆으로 젊은 여인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드넓은 북해로 흘러드는 삼백서른여섯의 강, 그리고 흘러나가는 단 하나의 강. 그래서 북해는 삼백서른여섯의 아들과 단 하나의 딸을 가진 어머니라 불리지요.”
젊은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곳이 바로 북해의 수호자, 북해빙궁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북해의 바다 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크고 높은 그것은, ‘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북해빙궁.’
무림에서 북해빙궁은 비밀에 싸인 새외의 한 문파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수연이 본 대로라면 이미 하나의 부족국가나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이 북해빙궁의 칠궁주였다니, 아직도 사수연으로서는 실감이 가지 않는다.
“갈까요?”
젊은 여인이 말했다. 그들은 빙궁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어째서 빙궁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천천히 말을 몰며 사수연이 물었다.
빙궁에 가까이 오자 그들은 속도를 늦췄다. 아마도 빙궁에 대한 일종의 경의인 듯했다. 덕분에 사수연은 빙궁의 겉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아래로부터 살짝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은 거대한 빙궁의 석벽은 단순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이제껏 보았던 수수한 북해의 건축물과는 전혀 다르다.
“빙궁은 그 자체가 거대한 얼음 위에 세워진 궁이기 때문이에요.”
젊은 여인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거대한 빙궁의 기반과 중심부 역시 얼음으로 되어 있지요.”
“얼음이라면 녹지 않나요?”
녹는 것만이 아니다. 본디 얼음은 거대한 건축물의 기반이 될 정도의 단단함이 없다.
“그냥 얼음이 아니랍니다.”
젊은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득한 그 옛날, 신들의 시대에 태어난 북해 빙정이에요.”
사수연은 살짝 조소를 머금었다.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 신화의 영역이 되기 마련이다.
젊은 여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도 봄이 오고 꽃이 피어요. 하지만 이 땅 아래에는 일 년 내내 결코 녹지 않는 얼음의 땅이 있지요.”
따각, 따각.
젊은 여인이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조차 그저 지나갈 뿐, 이 세상에서 빙정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북해의 자비 아래 잠시 피어오르는 숨결일 따름이지요.”
그녀의 목소리엔 경건함마저 서려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사수연은 문득 그녀가 저잣거리에서 ‘숨결’이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수연의 질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에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곳은, 어, 대문이에요. 이곳부터 빙궁이지요.”
그녀의 설명은 애매했지만 사수연은 이해했다. 문도, 현판도, 심지어 벽도 없이 세워진 이 두 개의 오래된 돌기둥은, 아마도 영역을 표시하는 표지석이거나 경고의 의미일 터였다.
‘손 공자님의 서원 같네.’
엉뚱하지만 사수연은 손빈의 서원을 떠올렸다. 항상 열려 있는, 문도 현판도 없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
‘후훗.’
사수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슴속에 한 줄기 온기가 솟아오른다.
일행은 말을 타고 천천히 돌기둥 사이를 지났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오래된 돌기둥이 주는 위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 순간이었다.
두근.
심장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감각에 사수연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묵묵히 서 있는 돌기둥과 멀리 선 빙궁뿐.
‘뭐였지?’
사수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숨은 인기척 같은 것도 없다. 가만히 감각을 집중해 보았지만 조금 전 그 이상한 느낌은 흔적조차 없다.
“왜요?”
젊은 여인이 묻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수연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두 여인의 뒤를 따랐다.
‘긴장했나?’
어머니의 가문이라는 것에, 그리고 북해빙궁이라는 이름에 긴장한 탓인지도 모른다.
사수연은 천천히 말을 몰아 돌기둥 사이를 지났다. 이해 못 할 문양이 새겨진 오래된 돌기둥이 사수연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따각, 따각.
돌기둥 사이를 지나자 빙궁을 둘러싸듯 세워진 고색창연한 목조 건축물들이 나타났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빙궁에 이르는 거대한 석재 계단이 보인다.
세 사람은 거대한 계단 아래까지 말을 몰았다. 빙궁 바로 앞이니 말을 타는 것을 제지할 법도 했지만, 무어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탁.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 사수연이 말 목을 쓰다듬어 주는데 시종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받았다.
“가요.”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수연은 천천히 돌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지키는 사람들이 없나요?”
입구를 막고 서서 눈을 부라리는 건장한 무사들은 어디에도 없다. 사수연의 물음에 젊은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있잖아요.”
사수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여인에게선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젊은 여인이 웃는다.
“전 활을 잘 쏴요. 남쪽 여자들은 이곳과 다르다지요?”
사수연은 그녀의 말에 시위 풀린 단궁과 검이 걸려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북해의 여인은 강인해요.”
그녀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사수연은 중년의 미부를 돌아보았다. 사수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환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리고 이분은 한 쌍의 단검을 잘 쓰시지요.”
젊은 여인이 살짝 말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빙궁 안으로 들어섰다.
“아.”
가벼운 감탄사와 함께 사수연은 눈을 크게 떴다.
빙궁 내부는 생각보다 더 크고 넓었다. 천정이 높고 기둥이 거의 없어서 탁 트인 느낌마저 준다. 창은 작았지만 곳곳에 등을 밝혀 대낮같이 환하다.
“대단하군요.”
사수연이 말했다. 화려하고 위압감 넘치는 장식들은 왜 이곳이 ‘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곳에서…….’
어린 사수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는 아름답고 가녀린 여인이다.
화려한 궁보다는 들꽃 가득한 언덕이 더 잘 어울리는 여인.
그런 그녀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어린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떻게 웃고 어떻게 뛰어다녔을까?
사박, 사박.
넓고 큰 회랑을 따라 세 사람은 조용히 걸었다. 지나치는 몇몇 시녀들이 중년의 미부인에게 예를 표한다.
“이곳에 빙제께서 계셔요.”
얼마나 걸었을까? 휘장이 드리운 커다란 문 앞에서 젊은 여인이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중년의 미부인이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사수연은 젊은 여인과 함께 기다렸다.
‘어머니의 부모님.’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슴이 뛴다. 사수연에게는 처음으로 만나는 친척인 것이다.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하지만 외할아버지에게 전해야 할 소식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사수연은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들어가세요.”
잠시 기다리자 젊은 여인이 휘장을 걷는다. 안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박.
사수연이 들어선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사수연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바닥까지 흐르는 흰 수염,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 그리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한 깊은 눈동자.
넓은 의자마저 좁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가진 그는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으음…….”
노인, 빙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부릅뜬 그의 눈동자는 눈앞에 서 있는 사수연의 존재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빙제 옆에 서 있던 화려한 치장의 노부인, 빙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녀 역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지만, 사수연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사박, 사박.
사수연은 빙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사수연의 발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질 뿐이다.
사박.
사수연이 걸음을 멈췄다.
“칠궁주님의 따님입니다.”
중년의 미부인이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그분의 핏줄이, 아기씨가 드디어 북해로 돌아오셨습니다.”
“이 아이가 칠궁주의 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이냐?”
뾰족한 목소리로 빙후가 묻는다. 그녀의 머리에 매달린 크고 화려한 장식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린다.
“그건…….”
“증명은 필요 없다.”
묵직한 목소리가 중년 미부의 말을 막았다.
“이 아이는 분명히 가려의 딸이다.”
빙제가 말했다. 그가 단언한 이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빙후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스륵.
빙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노구를 움직이는 듯 힘겨웠지만 그 기세만은 섬뜩할 정도다.
“네 어미는 어디 있느냐?”
그것은 재판관의 판결처럼 냉담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께서 어디 계시는가 여쭙고 계십니다.”
뒤에서 무릎 꿇고 있던 젊은 여인이 말해 주었다.
“어머니는…….”
사수연은 대답했다. 역시 메마르고 담담한 목소리로.
“돌아가셨어요.”
젊은 여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사수연의 말을 전했다.
“아!”
외마디 신음은 중년의 미부인이 흘린 것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수연을 바라본다.
“언……제냐?”
빙제가 물었다. 그의 눈빛 역시 심하게 요동하고 있었다.
“벌써 십여 년도 넘은 일이에요.”
사수연이 답했다. 말을 전하는 젊은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중년의 미부인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을 참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선 빙후의 입가엔 조소가 걸린다.
빙제는 눈을 감았다. 움켜쥔 빙제의 손이 격동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린다. 오직 사수연만이 담담한 모습 그대로다.
“후우.”
깊은 한숨이 빙제에게서 흘러나왔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슥.
빙제는 눈을 떴다.
“네 이름이 뭐냐?”
묻는 빙제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사수연이 느낀 것은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어떤 회한 같은 것이었다.
“이름을…… 여쭙고 계십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수연이에요.”
사수연이 답했다. 빙제의 커다란 흰 눈썹이 꿈틀 경련한다.
“사, 수, 연.”
한 자 한 자 되뇌듯 빙제가 말했다.
“흥. 이름조차 북해의 것이 아니라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노부인이 말했다. 그러나 사수연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빙제의 무서운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불꽃같은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히 맞선다.
“닮았군.”
빙제가 말했다.
“그 발칙한 눈빛마저.”
사수연은 알아듣지 못했다. 빙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털썩.
그의 화려한 의복이 물결치듯 반짝거린다. 피곤이 완연한 기색으로 빙제가 말했다.
“닷새 후 대연회에서 이 아이가 돌아온 것을 알리겠다.”
“불가합니다!”
빙후가 발작적으로 말했다.
“스스로 북해를 배신하고 떠난 아이의 딸입니다! 어찌 이제 와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대연회라니요! 빙제로서 이 아이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빙제는 빙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하겠다는 것이다.”
“불가해요! 불가합니다!”
빙제는 피식 웃었다.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도 오직 빙제의 권한이다.”
스륵.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빙제는 빙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면, 자네가 빙제를 하겠나?”
빙후는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만, 빙제의 결심은 확고하다.
‘이익.’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빙후는 사수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수연은 끝까지 빙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사수연의 기억 속에 있던 어머니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완벽한 타인이다.
“물러가라.”
빙제가 말했다.
“끝난 건가요?”
사수연이 고개를 돌려 젊은 여인에게 물었다. 사수연에게 전해진 것은 대연회에서 알리겠다는 말까지다. 그러나 이후의 대화가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님은 그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 네. 물러가시라고…….”
젊은 여인의 말과 함께 사수연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곳을 걸어 나갔다.
사박, 사박
빙제도, 빙후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중년 미부인의 오열이 새어 나오는 가운데 사수연은 휘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잠시나마 기대했던 핏줄의 따뜻함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사수연의 가슴속에 찬바람이 불었다.
*
*
*
빙궁의 한 처소, 화려한 등불 아래 사수연이 앉아 있었다. 옆에서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주고 있는 사람은 중년의 미부인이었다.
시중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돕게 해 달라는 중년 여인의 간곡한 요청을 사수연은 거부하지 못했다.
“이름이 뭐죠?”
사수연이 물었다. 사수연의 머리를 정돈하던 중년의 미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시녀장이라 불러 주시면 된답니다.”
젊은 여인이 대신 답했다. 그녀는 의사소통을 위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사수연이 중년의 미부인을 보며 말했다.
“이름을 알려 주세요.”
중년 미부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리곤 곧 눈물을 글썽인다.
“아기씨는 정말 어머님을 꼭 빼닮으셨군요.”
글썽이던 중년의 미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사르내라고 불러 주세요.”
“당신은요?”
사수연이 젊은 여인을 돌아보며 말한다. 그녀 역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저는 나미라예요.”
“사르내, 나미라.”
사수연은 가만히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중년의 미부, 사르내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인다.
“소궁주께서도 그러셨지요. 늘 이름을 묻고 나선 그렇게 되뇌시곤 했어요. 진짜 이름도 아니었는데 그토록 소중히…….”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요?”
“사르내도, 나미라도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에 불과해요.”
사르내는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북해의 아들딸들이 성인이 되는 날, 그들은 대초원에서 홀로 칠 주야를 지내게 돼요. 그들이 돌아올 때는 각 사람마다 가슴속에 특별한 하나의 이름을 품고 돌아오지요.”
그녀의 설명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 이 성인식의 내용 자체가 외부인에게는 비밀로 지켜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름을 품고 북해의 바다에 잠겨 하룻밤을 지내면, 그의 모든 과거는 흘러가고 북해의 어머니가 허락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지요. 그것이 바로 진실 된 이름이 가지는 의미예요.”
“그러면 제 어머님의 진실 된 이름은…….”
“그 이름을 밝히는 상대는 오직 생사를 결(決)할 일생의 대적이나, 평생을 같이 할 반려뿐이에요. 그러니 아마도…….”
중년의 미부, 사르내는 말을 흐렸다. 사자혁만이 알 것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는 듯했다. 빙제 역시 사자혁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이름조차 몰랐었구나.’
가려라는 이름도 아마 비슷한 소리를 빌려 온 것이리라. 사실 사수연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 엄마는 어디까지나 엄마였으니까.
“제 할머니께서는 어디 계시지요?”
“선대 빙후께서는 소궁주께서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르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답고, 강인한 분이셨습니다.”
“그런가요.”
사수연의 가슴에 바람이 분다. 빙제를 만나는 자리에 완전한 타인이 있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사실이 되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지요?”
묻는 사수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소궁주께서는…….”
사르내의 목소리도 떨고 있었다.
“선대 빙후님을 닮아 아름답고 따뜻한, 그러나 너무나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북해의 그 누구보다 강한 분이시기도 했지요.”
커다란 사르내의 눈동자가 사수연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모두가 그분을 사랑했고, 모두가 그분의 사랑을 받았어요. 힘의 율법이 지배하는 북해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보여 주신 분.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이렇게 불렀지요.”
사르내는 나미라가 자신의 말을 전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은 북해의 언어로, 그리고 한 사람은 남쪽의 언어로.
“새벽하늘 아래 피어오르는 하얀 숨결처럼. 밤이 춥고 외로울지라도 그분의 빛이 그대와 함께하리라.”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 같았다.
사락.
사르내와 나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손을 가슴에 포개어 모으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들은 말했다.
“북해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기씨.”
그들의 목소리엔 온기가 가득했다. 핏줄이라 하던 빙제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온기가.
그러나 사수연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