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30)
낙향문사전-130화(130/494)
제130화. 심마(心魔)2014.11.29.
후우웅.
짙푸른 기운을 두른 검이 어둠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사수연을 단번에 둘로 가를 듯한 그 검은, 그러나 창백한 기운을 뿜어내는 하얀 검에 가로막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엄청난 기세에 등불이 세차게 흔들리고 칠궁주전의 휘장이 폭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그러나 검을 맞댄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우우웅.
차가운 사수연의 시선과 불꽃같은 섬옥수 오르한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한다.
“흥.”
카앙.
오르한은 검을 강하게 휘두르며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어딜!”
사수연이 오르한을 향해 짓쳐 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소궁주님.”
사르내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야심한 밤이라 사르내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묻는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은 숨길 수가 없다.
“소궁주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없자 사르내가 결심한 듯 그렇게 말했다.
오르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사수연을 쳐다보았지만 사수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구를 가린 휘장이 가만히 움직이며 사르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락.
사르내는 얇은 침의에 긴 겉옷 하나만을 걸친 채였다. 제대로 옷을 입지도 못한 채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앗!”
섬옥수 오르한의 모습을 발견한 사르내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사르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벽에 걸려 있는 병장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탓.
“필요 없어.”
사수연이 말했다. 사르내가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췄다. 사르내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아서 이미 그녀의 손끝이 날카로운 소검에 가 닿아 있었다.
“소궁주님?”
오르한을 경계하며 사르내가 묻는다. 언제라도 소검을 움켜쥘 준비를 하고서.
“신경 쓰지 마, 사르내.”
사수연은 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르한을 향한 채였다.
“나가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누가 묻거든 내가 수련을 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수연은 말했다.
“이건 수련이니까.”
오르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르내는 소검에서 손을 거두고 사수연의 명을 받들었다.
사박.
차분한 걸음으로 사르내는 밖으로 나갔다. 오르한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좋은 종이군.”
사르내가 밖으로 사라지자 오르한이 말했다.
“신뢰, 애정, 혹은 충성……. 무엇이라 일컫든 간에 상대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너는 운이 좋구나.”
“그것 역시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사수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랬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오르한이 말했다. 그녀의 흰머리가 가볍게 일렁인다.
“하지만 지금은, 네게 약간의 예의를 가르쳐 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후우욱.
섬옥수 오르한의 기세가 단번에 바뀌었다. 그리고 그녀의 온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침묵하던 오르한의 검이 다시 짙푸른 기세를 흘린다. 툴케르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마치 바늘 끝을 마주한 것 같은 기세였다.
“간다.”
훅.
순간 오르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사수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서리 내린 듯 새하얀 사수연의 검이 즉시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찢었다.
콰앙!
휘장이 펄럭이고 등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푸르고 흰 두 자루의 검은 결코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콰앙.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크고 넓은 칠궁주전이 두 사람의 격돌을 이기지 못하고 나지막이 떨었다. 그 엄청난 격돌을 이어 나가는 섬옥수 오르한은, 그러나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사수연이 펼쳐 내는 검법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특히 그녀의 현천한빙결이 내뿜는 한기는 섬옥수 오르한으로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것은…….’
오르한은 자신을 똑바로 향하는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 같은 여인조차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너무나 싸늘한 사수연의 눈동자.
‘바로 이 아이.’
처음 사수연은 섬옥수 오르한에게 밀리는 듯했다. 오르한이 가진 무인으로서의 연륜과 경험은 사수연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우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수연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게 오르한이 보여 주는 것들을 흡수해 나갔다. 이제는 사수연의 검로에서 원숙한 노련미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타하!”
섬옥수 오르한은 벼락처럼 검을 내리쳤다. 비무의 흐름을 갑작스럽게 깨어 버리는 회심의 일 검. 사수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우웅.
사수연의 검이 우는 것과 동시에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광!
두 사람의 신형은 뒤로 주욱 밀려났다. 오르한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이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걸 받아 내다니, 대단하구나.”
오르한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네 검 역시 훌륭해.”
사수연이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아.”
격돌의 순간 사수연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손빈의 검로였다.
달빛 아래에서 그가 보여준 옥룡역린참의 검로.
세상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 같던 그 일 검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손빈의 그 검이 준 충격에 비하면 오르한의 검은 그다지 인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훌륭하지만.
움찔.
섬옥수 오르한의 눈썹이 경련했다. 사수연으로서는 진심이었겠지만 오르한에게는 모욕에 가깝다.
“무제에게는 빚이 있다.”
오르한이 말했다. 모욕당한 무인의 분노가 그 목소리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일 검으로, 그 빚을 갚겠다.”
“그래?”
사수연이 답했다. 담담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만일 갚지 못한다면 어쩔 셈이지?”
오르한을 향한 사수연의 눈빛은 싸늘했다. 오르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나도 네 뜻을 따르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이미 비무가 아니었다. 한 자루 검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자들의 원초적인 투쟁. 그 앞에서 목숨 같은 건 이미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오르한의 입술이 달싹였다.
“가장 강한 자에게, 모든 것을.”
북해의 율법 이전에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절대의 원칙이었다. 태양이 동에서 뜨고 서로 지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듯이.
우우웅.
섬옥수 오르한의 검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에 어리던 푸른 기운이 순간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대한 검신이 되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저건!’
어찌 사수연이 잊을 수 있을까? 자신의 가슴에 차가운 칼날을 박아 넣은 검희를, 그리고 그녀의 절기였던 그 거대한 은빛의 검신을.
오르한의 절기가 검희의 것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오르한은 검희가 아니다. 하지만 사수연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훅.
사수연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스쳐 지나갔다.
후우우우웅.
“그것을 꺼내라.”
오르한이 말했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 뿜어내는 기세에 의해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이 폭풍을 만난 듯 펄럭이고 있었다.
“툴케르의 도를 잘라 버린 그것을.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그녀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사수연은 알 수 있었다. 사수연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역시,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섬옥수 오르한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기회는 주었다.”
오르한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그리고 그녀의 거대한 검신이 사수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섬옥수 오르한을 있게 한 그녀의 절기. 한 줄기 벼락처럼 모든 금제를 깨뜨리는 검, 일섬파옥(一閃破獄)이었다.
쿠르르릉!
그것은 까마득히 높은 절벽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 그러나 사수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우우웅.
그녀의 검이 새하얀 빛을 뿜었다. 정해진 운명에 항거하듯 사수연은 자신의 검을 위로 쳐올렸다. 그리고 거대한 푸른 검신과 사수연의 검이 충돌했다.
쩡!
거대한 충격이 사수연을 뒤흔들었다. 사수연의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심장이 그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수연은 자신이 밀릴 것임을 알았다.
콰과과곽.
사수연의 검은 여전히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한의 거대한 푸른 검신을 물러나게 하지는 못했다.
‘큭.’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사수연의 검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패배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후욱.
어둠이 사수연을 덮었다. 절망이 발밑에 그 입을 벌리고 공포가 사수연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검희의 검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은 그때처럼, 사수연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안 돼!’
사수연은 외쳤다. 자신은 절대 질 수 없다.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모든 것은 끝이니까.
그러나 그 단 한 번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끝없는 심연 아래로 추락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사수연은 절규했다.
‘이겨야 해!’
-이겨야 해!
쿵.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사수연은 들었다. 무엇인가 자신의 의지에 동조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절대적인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절규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제껏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던 그것. 태고로부터 존재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 사수연에게 응답하고 있는 그것은, 끝조차 보이지 않는 광대한 힘의 바다였다.
화악.
사수연의 검이 빛을 뿜었다.
쩌저적.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신이 커져 갔다. 오르한의 푸른 검신과 맞닿은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빛을 뿜어내는 사수연의 검신은 끝없이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마, 맙소사.”
섬옥수 오르한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오르한을 비웃듯, 은빛의 검신은 오르한의 검을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구구궁.
그것은 마치 거인의 손가락에 짓눌리는 벌레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 어떠한 절기도, 놀라운 재주도 이 힘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르한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다만 으깨지는 일뿐. 그 압도적인 절망감이 오르한이 느낀 마지막 감정이었다.
쨍.
다음 순간,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
*
*
촤아아.
멀리 들리는 북해의 파도 소리에 오르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펄럭, 펄럭.
칠궁주전은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등은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고, 무참히 찢어진 휘장들이 어둠 속에 음산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돌로 된 바닥 역시 이리저리 깨져 나갔고, 얼마 되지 않던 가구들은 남김없이 박살 난 채였다.
스륵.
오르한은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나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내력이 단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힘없는 여인에 불과하다. 설마 이대로 영영 내력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오르한을 엄습했다.
“괜찮아.”
나지막한 목소리에 오르한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에 담긴 한기는 뼈를 찌르는 듯했다.
“내력은 돌아올 거야.”
펄럭.
찬바람이 들이치는 커다란 창 앞, 반쯤 부서져 나간 큰 의자에 한 여인이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냘파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오르한은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자신의 절기 일섬파옥을 짓눌러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가 바로 그 악몽 같던 무제의 딸, 사수연이라는 것을.
“윽.”
오르한은 일어섰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그녀가 휘청 균형을 잃었지만 다시 쓰러지는 것만은 모면했다.
사수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슥.
일어선 오르한은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쿡.
“섬옥수 오르한. 칠궁주의 명을 기다립니다.”
고개 숙인 오르한의 목소리는 담담함을 넘어 초연하기까지 했다. 설령 사수연이 당장 목숨을 끊으라고 해도 그녀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수연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오르한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오르한의 흰머리가 자신에게 고개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북해에 너를 이길 자가 있나?”
“소궁주님뿐입니다.”
오르한이 답했다. 사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너를 따르는 자들은?”
“소수의 제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모두 여인들입니다.”
“열둘.”
사수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거침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르한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생각은 끝났으니까.
“북해의 힘이 될 열둘을 세워라. 그들을…… 앞으로 북해십이비(北海十二婢)라 부르겠다.”
명하는 사수연의 목소리는 여제와 같이 위엄이 넘쳤다. 오르한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오르한이 고개를 숙여 사수연의 명을 받들었다. 사수연은 밖을 향해 말했다.
“사르내.”
사락.
“네, 소궁주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사르내는 즉시 안으로 들어왔다. 엉망이 된 칠궁주전의 모습에도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 사람을 빙궁 밖으로 안내해 줘. 정중하게 예를 갖춰서.”
여전히 침의에 외투 차림인 사르내는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오르한과 함께 칠궁주전을 나갔다.
쏴아아아.
텅 빈 칠궁주전에 북해의 파도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짓쳐 들었다. 찢어진 휘장이 음산하게 펄럭인다.
“하.”
사수연은 허탈한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오르한의 말대로라면 이제 북해에서 사수연을 이길 사람은 없다.
“하하.”
사수연은 웃었다.
“끝났네.”
비무는 끝났다. 아니,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손빈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 기쁘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웃음소리는 이렇게 메마르기만 한 것일까…….
사락.
사수연은 부서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그러나 마음은 강철과 같고 생각은 얼음과 같다.
혼란스러울 것도 어지러울 것도 없다. 마치 눈을 감고 있다가 이제야 뜬 것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사수연은 자신의 기억을 되살렸다. 북해에 들어와서 본 모든 사람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지어 비무 중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들까지 전부.
“그랬구나.”
사수연은 중얼거렸다.
“그랬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은 물론 소궁주들과 비빈들, 유력 족장들과 장군들까지. 그들의 생각과 의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이런 느낌인가?’
내려다본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땅에서 분주히 기어 다니는 벌레들을 보듯, 자신은 그 하찮은 생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도하고 오만한 시선으로.
문득 사수연의 시선 끝에 부서진 자신의 검이 보였다. 깨어진 찻잔처럼 산산이 조각난 검의 잔해들이 어둠 가운데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아.”
사수연이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차갑고 싸늘했다.
“손에 넣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빙제의 말이 옳았다. 손에 넣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불안해할 이유도,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손에…… 넣으면.”
혹시 그가 나를 잊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자신에게 그 어떤 결함이 생긴다 하더라도.
“하.”
이제는 비웃음도 메말랐다. 이토록 선명한 절대의 진리를, 왜 지금까지의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사락.
사수연은 눈을 감았다. 생각은 끝났다. 고뇌도 번민도 이제는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그 색을 잃으며 희미해져 가고, 사수연의 마음은 느릿하게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쉬고 싶어, 잠시만이라도.’
이 순간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만 휴식뿐이었다.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휴식.
사수연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고 휘장이 펄럭였다. 은은한 달빛이 창으로 들어와 잠든 사수연의 고운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빈.”
그것은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다. 사수연의 붉은 입술이 달빛 아래 본능처럼 달싹이고 있었다.
“제발…….”
속삭이듯 사수연이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목소리는 달빛 가운데 흩어져 버렸다.
후욱.
한기가 사수연을 감싸듯 피어올랐다. 그리고 사수연 주위로 차가운 서리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수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그 무엇도 그녀에겐 더 이상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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