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34)
낙향문사전-134화(134/494)
제134화. 폐월수화(閉月羞花)2014.12.13.
손빈 일행은 객잔에 짐을 풀었다. 객잔은 확실히 이국적이었지만, 손님들은 온통 남쪽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상단 관계자거나 검과 도를 찬 무림인들이었다.
“이상한데?”
객잔 식당을 내려다보며 노군이 말했다. 방에 짐을 풀고, 사실 노군은 짐이랄 것도 거의 없었지만,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오는 계단 위에서였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조용하다니요?”
손빈이 물었다.
“아니, 원래 칼 든 놈들이 모여 있으면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거든.”
“잠잠하지 않은데요?”
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지금 시끄러워요.”
서린의 말대로였다. 객잔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이야기 소리와 소음에 서린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손빈이 말했다. 서린이 고개를 돌려 손빈을 올려다본다. 손빈은 한 손을 턱에 대고 말했다.
“이곳은 외지입니다. 자연히 마음이 들뜨는 데다가 부와 권세를 한손에 쥘 수도 있다 생각하면 그 흥분은 더하겠지요. 게다가 무공이라면 나름대로 자신 있는 자들뿐일 테고요. 헌데 소란이나 말썽은 어디에도 없군요.”
확실히 그랬다. 괜한 시비를 거는 자도 없고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왁자지껄 시끄럽긴 했지만.
“무림인들이 이렇게 예의 바른 놈들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노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객잔을 둘러보았다.
“일단 내려가지요.”
손빈의 말에 일행은 나무 계단을 내려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소이가 얼른 다가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서 오쎄요.”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점소이를 보았다.
“뭐야? 말투가 왜 그래?”
“무엇 초으십니까?”
점소이는 노군의 말엔 대답도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무엇인가를 품에서 내놓았다. 손빈이 그것을 받아 살펴보았다.
“이건 양가죽이군요.”
얄팍하게 다듬은, 제법 널찍한 양가죽 표면에는 여러 가지 음식 이름이 무언가로 지진 것처럼 적혀 있었다. 서체가 삐뚤빼뚤하고 획이 빠진 것도 있어서 저절로 실소가 나온다.
“아마 이중에서 주문하라는 듯합니다.”
“우리말을 잘 모르는 게로군.”
노군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말했다.
“압니다. 알아요. 많이는 모르지만 초큼 압니다.”
“초큼?”
피식 노군이 웃었다. 노군은 품에서 철전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탁.
점소이의 표정이 반색이 된다. 이곳에서 쓰는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어볼 것이 있다.”
노군이 말했다.
“아들은 무지 많은데 딸은 하나뿐인 가문이 어디냐?”
“네?”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삼백서른여섯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가진 가문이에요.”
옆에서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놈이 지금 못 알아듣고 있는 것 같은데?”
“오우, 압니다. 알아요. 초큼 천천히…….”
“삼백, 삼백 알지? 그리고 서른여섯의 아들과……. 에이, 됐다.”
점소이의 표정이 벌써 애매해지는 것을 깨닫고 노군은 질문을 포기했다.
“가서 음식이나 가져와라.”
노군은 철전을 점소이 쪽으로 밀어주었다. 철전을 집어 든 점소이는 환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주문을 받아 사라졌다.
철전 덕분인지 시키지 않은 음식도 나와서 서린과 당월아를 기쁘게 했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긴 하군.”
식사를 마친 노군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객잔이 온통 익숙한 남쪽 복색투성이다. 물론 겉옷 같은 것들은 이곳 북해의 것이긴 했다. 손빈 일행도 그랬고.
“비무초친의 승자는 한 명뿐일 텐데, 왜 이렇게 많이 온 것일까요?”
당월아가 물었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단 역시 마찬가지예요. 거대 상단들이야 그렇다 치고, 중소 상단들은 왜 이렇게 많이 온 거죠?”
“혼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지.”
노군이 답했다. 그는 후룩 차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거대 상단 하나가 새로운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 그 상단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거나 일감을 받고자 하는 상단들이 몰리게 된다. 제아무리 거대 상단이라도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상단이라도 한 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재력과 인력은 한정되어 있다. 일이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협력할 중소 상단들이 필요하다.
“비무초친의 승자도 마찬가지. 온통 북해인뿐인 빙궁에 홀로 들어가고 싶겠느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다들 떠나지 않고 있는 거야. 오대세가 주위에 중소 문파들이 몰리는 것처럼.”
노군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만은 못 알아들은 채였지만.
“늑대 한 마리가 사냥감을 잡으면, 다른 놈들이 뒤에서 서성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투덜거리듯 노군이 말했다. 그제야 서린은 ‘오오!’ 하고 탄성을 흘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누구에게 물어봐야…….”
그렇게 노군이 말했을 때였다.
사락.
객잔의 두터운 휘장을 옆으로 젖히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빈 일행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이런.”
막 객잔에 들어선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자네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온화한 학자풍의 노인이 말했다. 단정한 흰머리와 잘 다듬은 수염, 그리고 한 손에 든 섭선이 마치 고고한 선비와도 같은 노인이었다.
손빈이나 당월아, 서린은 그 노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객잔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그 노인의 기운이 부지불식간에 이곳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젠장.”
노군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왜 여기에…….”
그사이 노인의 뒤를 따라 십여 명의 청년 무사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본 듯한 복식이라고 손빈이 생각하는 순간, 객잔의 누군가가 그들을 알아보았다.
“제갈세가!”
‘아.’
그제야 손빈은 깨달았다. 용봉지회의 연회장이었던 등왕각에서 비슷한 무복을 입은 사람을 본 기억이 있었다.
“자네들은 먼저 올라가게.”
학자풍의 노인이 말했다.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손빈 일행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제갈세가는 벌써 통과했다지?”
“역시 제갈세가…….”
무사들이 위층으로 사라지자 조용하던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락.
제갈가의 노인이 노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이로군. 잘 지냈나?”
온화한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노군의 찌푸린 눈살은 펴지지 않았다.
“넌 왜 맘대로 앉고 그래? 누가 앉으라고 했냐?”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노인은 오히려 활짝 웃었다.
“그 성격은 하나도 안 변했군. 그러면 서 있을까?”
슥.
노인이 일어섰다. 마른 체격의 그 노인은 보기보다 키가 커서 앞에 기둥이라도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 정신 사납다. 그냥 앉아.”
“고맙네.”
노인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빈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사가 늦었군. 나는 제갈가의 졸필, 제갈련이라 하네.”
손빈이 놀란 얼굴을 했다.
“혹시 필옹 제갈련 선생이십니까?”
노인, 제갈련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어찌 나를 아나?”
덜컥.
손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옹의 글씨는 비록 힘없이 흐르는 듯하나 그 필세는 태산과 같다.”
제갈련을 바라보며 손빈이 말했다.
“필옹 선생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필옹 서한집은 저희 서원에서는 최고의 인기였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손빈은 정중히 예를 표했다.
달칵.
필옹 제갈련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빈의 예에 답했다.
“졸필을 그리 높이 평해 주니 부끄러울 따름이네. 만나서 반갑네.”
손빈과 필옹 제갈련은 서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노군이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무언가 투덜거렸다. 제갈련이 노군을 내려다보더니 씩 웃으며 손빈에게 말했다.
“이런 친구지만 잘 부탁하네. 말은 험해도 속마음은 제법 여리거든. 알고 보면 글씨도 제법 쓰고.”
“뭐가 어째?”
노군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닙니다. 도리어 제가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손빈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말이 진심임을 아는지라 노군도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릴 뿐이다.
“그나저나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제갈련이 노군에게 물었다.
“남악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예원에서도 자네가 있는 곳을 모르던데 이곳 북해에서 볼 줄은 몰랐군.”
제갈련은 씨익 웃었다.
“설마 이제라도 장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가?”
“뭐?”
노군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피차 다 늙은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 그러는 너는 고상한 척하는 주제에 새장가라도 들고 싶었나 보구먼? 이 먼 북해까지 오고.”
“허허, 내 나이가 어때서 그러나?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지.”
“재미없다.”
노군이 정색하며 제갈련을 째려본다. 제갈련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실은 세가에서 북해 비무초친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더군.”
필옹 제갈련이 말을 이었다.
“허나 북해가 어떤 곳인가? 이득이 크다고 덥석 덤벼들 만한 곳은 아니지. 어떤 위험부담이 있을지 모르니 내가 같이 온 것일세. 이를테면 일이 일그러졌을 경우의 대비랄까,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마지막 방책인 것이지.”
“흐음. 그 비무초친 말이냐?”
“그래.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겠더군.”
“쉽지는 않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별일이로군.”
노군이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제갈련의 표정은 진지했다.
“비무초친을 한다는 소궁주 옆에 오르한이 서 있었네. 북해의 유일한 외사급 고수, 섬옥수 오르한 말일세.”
“섬옥수 오르한이라.”
노군의 눈빛도 변했다.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만…….”
“아무리 자네라도 결코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지.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바로 빙궁의 소궁주였네.”
“소궁주?”
“그 아이는…….”
필옹 제갈련의 눈빛이 변했다.
“다르더군.”
“달라? 어디가? 말을 제대로 해야 알 거 아니냐?”
노군이 따지듯 물었다. 제갈련은 웃었다.
“알았네. 찬찬히 얘기해 주지.”
*
*
*
협력 관계인 마운 상단의 발 빠른 대처로 제갈세가 일행은 비교적 일찍 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천하오대상단 중 수위를 다투는 거대 상단답게, 마운 상단은 이미 빙궁의 중추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위태롭다고?”
“관계는 이미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련에게 말했다. 그들은 비무초친의 시작을 기다리며 커다란 비무대 곁에 앉아 있었다.
“삼궁주 아자이는 권력 구도에서 탈락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빙후에겐 쓸쓸한 노년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혹은 비참한.”
빙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던 중년 사내의 말은 냉정했다.
“구하기 힘든 것들까지 가져다주며 투자를 퍼부었는데, 사실상 원금마저 날리게 된 형편이었지요. 그래도 제갈세가의 귀인들께서 와 주신 덕분에 일부는 회수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갈세가의 절정고수를 확보하기 위해 빙후는 많은 것을 내놓았다. 물론 대부분은 제갈세가로 흘러가겠지만, 상단으로서 얻게 된 이득도 작지 않다.
“이대로 소궁주를 꺾어 주신다면, 그야말로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흥, 네가 감히 제갈세가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중년의 무인, 맹호검 제갈균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제갈세가의 방계에 속했지만 무공 실력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사실 그리 틀리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는 모든 무인들의 꿈이라 할 수 있으니까.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의 어리석음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중년의 사내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다만 소궁주의 위명이 하도 경천동지할 지경인지라…….”
필옹 제갈련은 흥미를 느꼈다.
‘소궁주라…….’
강호에 숨은 기인이사가 많다 하나 그것은 일종의 돌발 변수이자 예외적인 경우다.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와 혁련세가의 발이 묶이고 당문마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은 경쟁자는 공손세가뿐이다. 제갈련은 그렇게 예측했다.
그런데 북해에 도착해 보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가장 큰 벽은 바로 소궁주 자신이었다.
이미 북해에서 적수가 없다는 건 애교에 불과하고, 심지어 다음 빙제의 권좌에 앉을 것이 확실하다 했다.
비무 대회의 전리품 정도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알고 보니 가장 위협적인 일기당천의 맹장으로 나타난 경우랄까.
“괜찮으니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말해 주게. 지금 북해의 사정에 가장 정통한 사람은 자네이니 말일세.”
제갈련이 온화한 얼굴로 말하자 중년 사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제갈련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맹호검 제갈균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무어라 말하지는 못했다. 전대 가주의 친형이자 제갈세가 최강의 고수인 필옹 제갈련의 말에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으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군.’
필옹 제갈련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소궁주의 무공이 높아 봤자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을 그 역시 은연중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아아!”
“오오오!”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필옹 제갈련은 고개를 들었다. 빙궁의 거대한 계단으로 문제의 소궁주가 내려오고 있었다.
사박, 사박.
부드럽게 흘러내린 고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일렁이고, 가녀린 허리에 걸린 한 자루 검이 반짝인다.
화려한 장식도 요란한 문양도 없는 수수한 옷은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은근히 드러내며, 오히려 소궁주의 여성미를 더욱 뽐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을 단숨에 앗아 간 것은 바로 소궁주의 미모였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하던 빙궁도, 광활한 북해조차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가운 소궁주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사람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어.’
노년의 제갈련 역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꽃이 부끄러워하고 달이 숨는다더니…….’
그저 수사라고 생각했던 문장이 이 순간 그의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수많은 수식어조차 부족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소궁주는 매력적이었다.
“이건…… 제법 아름답군요.”
옆에서 제갈균이 말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소궁주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쯧.’
제갈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청정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리도 누누이 말했건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아직 젊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나이니까.
“저 정도라면, 반드시 이겨야겠습니다.”
제갈균이 말했다. 그러나 그런 각오를 다진 것은 그만이 아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사박.
소궁주가 멈춰 섰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휘이잉.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였다. 그리고 소궁주는 그 차갑고 오만한 눈빛으로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옹 제갈련조차 이 순간 자신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궁주님.”
“소궁주님.”
환호하던 북해인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두 손을 가슴에 모은 그 모습이 사뭇 경건하기까지 해서, 남쪽에서 온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락.
소궁주의 하얀 손이 가볍게 위로 올려졌다. 그녀는 말했다.
“일어나세요.”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볍게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듯한 위엄과, 제갈련조차 오싹할 정도의 한기였다.
‘음?’
문득 제갈련은 소궁주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 탓에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제갈련이 기억하는 누군가와 똑같았다.
‘저 아이는…….’
제갈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와 함께 있던 그 여아가 아닌가?’
*
*
*
“뭐라고?”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누구라고 했나?”
“음.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네.”
필옹 제갈련이 말했다.
“북해의 소궁주는 신의와 함께 제갈가에 찾아왔던 바로 그 아이였네. 명호가…… 아마 파검신녀 사수연이라 했던가?”
노군의 얼굴이 굳었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당월아의 움직임도 그대로 멈췄다.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서린은 고개를 들어 손빈을 올려다보았다.
손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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