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49)
낙향문사전-149화(149/494)
제149화. 패도와 왕도2015.02.03.
“피, 필옹 님.”
어색한 남쪽 언어에 필옹 제갈련이 고개를 들었다. 제갈세가 일행이 머무는 객잔에서 일하는 하녀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왔, 아니 오셨습니다.”
하녀의 말에 필옹 제갈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시점에 찾아올 손님이라니,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특히 낯선 땅 북해에서 친족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다.
“누구라 하더냐?”
“그것이……. 앗! 이러면 아니 되시옵…….”
덜컥.
“나다.”
하녀의 제지를 무시하고 들어선 사람은 필옹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노군!”
“그래. 나다. 언제부터 네 낯짝 보기가 이리도 힘들어졌냐?”
“그럴 리가 있나.”
제갈련은 웃으며 일어났다. 근심이 짙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네라면 내 집은 언제든 열려 있다네.”
“여긴 집이 아니고 객잔이잖아.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노군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곤 제갈련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화려한 장식과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저택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객잔도 아주 좋은 데 머물고 있었구먼. 남은 죽을 둥 살 둥 고생하고 있었더니……. 에이.”
제갈련은 노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군이 그사이 무슨 고생을 했다는 말인 듯한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아직 안 돌아가고 있었냐?”
노군의 말에 제갈련이 답했다.
“균이의 상세가 중하니 돌아갈 수 없었네. 일단 소식은 전해 놓았으나 본가에서 사람이 오려면 시간이…….”
“잘됐군.”
필옹 제갈련의 말을 끊으며 노군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잘됐다니, 무엇이?”
“너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나를?”
대답 없이 노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총명한 인상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왔다.
“응? 너는…….”
제갈련은 한순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갈련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소궁주!”
그녀는 바로 북해의 소궁주 사수연이었다. 제갈련이 순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녀의 분위기는 변해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한순간 시선을 빼앗는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북해의 얼음 꽃처럼 싸늘한 그때의 느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사락.
사수연이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필옹 제갈련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곧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네가 이곳에 무슨 일이냐?”
화르륵.
무시무시한 기세가 필옹 제갈련에게서 피어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그녀는 제갈균에게 중상을 입힌 상대일 뿐 아니라, 어쩌면 장차 천하의 안녕을 위협할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 그놈 까칠하기는.”
노군이 대신 옆에서 말했다.
“손님을 이렇게 세워 놓는 게 너희 가문의 예법이냐?”
제갈련은 잠시 신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군이 동행한 것은 분명 중대한 사안이 있다는 뜻이다.
한순간 감정적으로 반응한 자신의 성급함을 반성하며 제갈련은 말했다.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사수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필옹 제갈련의 눈동자에 새삼 이채가 흐른다.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예를 표할 줄은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 들어가요?”
“조심해.”
제갈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다른 사람들이 들어섰다. 다들 이미 본 적이 있는 노군의 일행이었다.
긴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모습에 필옹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앉게. 차라도 준비하지.”
∴
노군 일행은 작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노군과 면사 아가씨는 오랜만에 맛보는 좋은 차에 흠뻑 취해 있는 듯하고 미소년은 혀를 살짝살짝 내밀어 맛만 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년의 모습에 필옹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나 누구보다 필옹의 시선을 끈 사람은 바로 소궁주 사수연이었다.
단아하게 차를 음미하는 모습에서 이전의 차갑고 싸늘한, 압도적이기까지 하던 기세는 찾아볼 수 없다.
“소식은 들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갈련이 말했다.
“북해를 네 손에 넣었으니, 이제 무엇을 할 작정이냐?”
사수연을 바라보는 제갈련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사수연은 가만히 웃음을 흘렸다. 어딘지 초연해 보이는 미소였다.
“글쎄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수연은 찻잔을 매만졌다.
“저는 이 땅을 잘 몰라요. 하지만 이곳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은 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사수연은 사르내와 나미라를 떠올렸다. 섬옥수 오르한과 북해십이비, 사방장군과 빙제, 그리고 자신에게 어린 아기를 맡긴 채 활짝 웃던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의 모습도.
“저는 이들의 미소를 지켜 주고 싶어요.”
달칵.
사수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필옹 제갈련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북해의 소궁주로서 제갈세가에 묻습니다. 북해의 교역권을 허락한다면, 제갈세가는 성실과 신의로 서로의 선(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제갈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사수연의 청명한 눈빛에 필옹 제갈련의 눈동자도 평정을 되찾는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네가 다른 숨은 의도가 없다고 어찌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사수연은 조용히 말했다.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고, 사람 간에 믿음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고 하였지요. 필옹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그녀가 한 말은 고전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제갈련의 눈에 이채가 돈다.
“천하 오대상단이 이미 북해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당장은 어떻게 막을 수 있다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해에 발을 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비무초친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사수연의 말에 제갈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대상단의 요구에 제갈세가가 휘둘린 사실을 지적한 탓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정 수준의 교역을 허락하면서 그들을 제어하는 편이 낫습니다. 북해 역시 그동안 닫아걸었던 문을 열 때가 되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저의 의도입니다.”
물론 북해의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수연은 안다. 남쪽의 힘은 북해의 자존심만으로 버텨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교류가 시작되면 북해도 변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직접 상단 관계자를 찾아가지 않은 것이냐?”
“오대상단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대세가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수연이 말했다.
“이곳에서 죄를 지어도 남쪽으로 도망가면 끝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빙궁과 제갈세가가 성실과 신의로서 협력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요.”
제갈련은 사수연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확실히.’
제갈세가가 빙궁과 손을 잡는다면 오대상단이라 해도 방법이 없다.
혹여 잠시 빙궁과 대립할 수는 있어도 제갈세가와 등을 돌리지는 못한다.
오대세가의 뜻을 거스르고 어찌 상단이 존립하랴?
“이 제안은 오대세가 전부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그들의 선택입니다. 만일 제갈세가가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빨리 교역을 시작할 수 있겠지요.”
오대세가 전부에게 열어 준 이유 또한 분명했다. 경쟁과 상호 견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경쟁 상황에서 먼저 교역을 시작함으로서 얻는 이점은 결코 작지 않다.
“물론 빙궁은 모든 교역에 세를 부과할 것입니다. 또한 상행에서 알게 된 소식 역시 빙궁에 알려야 합니다. 정확히는 민심, 혹은 민의(民意)가 되겠군요.”
제갈련의 눈동자에 새삼 이채가 돌았다.
힘을 원하는 군주는 많다. 그러나 들으려 하는 군주는 드물다.
“다른 조건은 없느냐?”
사수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사수연 개인에게 주어야 하는 또 다른 무엇이 없느냐는 이야기다.
예컨대 재화(財貨)라든가 혹은 무공 비급이라든가.
“없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사수연은 말했다.
“원하는 것은 성실과 신의뿐입니다.”
“놀랍군.”
필옹 제갈련은 감탄했다.
“힘으로 누름은 패도요, 덕으로 감싸 안음은 왕도라. 그저 막무가내로 패도를 추구할 것이라 여겼더니 그대의 안목과 지혜가 이토록 깊을 줄은 몰랐다. 내가 그대를 잘못 보고 있었군.”
그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소궁주 사수연이 북해를 손에 넣은 이후에는 반드시 남쪽으로 진출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무림맹에 보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여긴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로서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다.
상대가 이민족인 북해의 소궁주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갈련의 평은 극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다.”
필옹 제갈련이 말했다.
“구체적인 것은 본가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이 정도라면 받아들이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할 터.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성사되도록 하겠다.”
그가 정한 일은 곧 제갈세가의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필옹 제갈련이 허락한 이상 모든 것은 그가 말한 대로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천만에. 나야말로 그대의 지혜로움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혜라면, 잠시 빌린 것뿐입니다.”
따뜻한 미소가 사수연의 입가에 머문다. 제갈련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응?”
청년 문사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유난히 올곧은 눈빛으로 제갈련의 기억에 남아 있던 그 청년이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제갈련은 조금 당황했다.
“자네는 언제…….”
들어온 것을 본 기억도 없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그가 앉아 있다.
“처음부터 앉아 있었습니다만…….”
‘처음부터?’
제갈련이 의아해 하는 사이 노군이 슬쩍 끼어들어 핀잔을 준다.
“아까는 인사해도 모른 척하더니만, 벌써 노망이 들었나 보구나.”
그러고 보니 청년 앞에 따뜻한 차가 한 잔 놓여 있다.
‘면사 여아와 소년의 기세에 가리어진 것인가?’
새삼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까 일행이 들어올 때 언뜻 본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껏 전혀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목에서 숨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필옹 제갈련 앞에서.
제갈련은 안색을 굳혔다. 이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자네…… 손빈이라 하였던가?”
“네. 그렇습니다.”
물음과 동시에 필옹 제갈련은 은밀히 자신의 기운을 문사 청년에게 흘려 보냈다.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갈련이 흘려 보낸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무심코 디딘 발밑이 훅 꺼지기라도 하듯이.
“헛.”
덜컹.
제갈련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밀려나며 소리를 낸다.
‘사술?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사술이라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눈앞의 문사 청년에게선 어떠한 사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필옹이 한 번 더 기운을 흘려 보내려 했을 때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노군의 분노한 음성이 제갈련의 귀에 파고들었다.
제갈련이 고개를 돌리자 노군이 눈에 불꽃을 번뜩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은 봐줄 수도 있어. 몰랐으니까. 그런데 또 해? 몸도 성치 않은 애한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뭐하는 짓이야!”
부들부들 떠는 노군의 음성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문의 면사 아가씨와 미소년의 눈매 역시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소궁주 사수연마저 자신을 노려본다.
“아니, 나는…….”
“보고도 모르겠으면 아예 맥을 짚어 보자 하든가. 그렇지 않아도 약한 놈에게 왜 기운을 흘려 보내고 그래, 엉?”
“그럼 맥을…….”
“네가 의원이야? 왜 남의 맥을 짚어? 제정신이냐?”
제갈련은 억울했다. 애초에 어떤 무림인이 상대에게 넙죽 맥을 짚어 보게 해 준단 말인가? 스승이나 부모도 아닌 바에야.
예상한 대로의 대답을 뱉어 낸 노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면 확 안 고쳐 주는 수가 있어.”
“안 고쳐? 뭘…….”
“균인가 귤인가 하는 그놈 말이다.”
제갈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놀라움은 이제까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균이를 고칠 수 있단 말인가?”
필옹 제갈련이 와락 노군의 손을 붙잡았다. 노군은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나는 아니야.”
노군은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놈이 살고 죽는 건 바로 이놈 손에 달렸다.”
필옹은 놀란 눈으로 청년 문사를 쳐다보았다.
유난히 허허로운 미소로, 청년 문사가 제갈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여기요?”
서린이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손빈을 쳐다본다.
“그래.”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린은 손가락 하나를 똑바로 세웠다.
서린의 손가락 끝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리는 순간, 손빈이 말했다.
“지금.”
손빈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린은 누워 있는 제갈균의 혈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팍.
누워 있던 제갈균의 몸이 꿈틀 경련했다. 의식이 없다지만 엄청난 고통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어때요?”
서린이 다시 손빈을 쳐다본다.
“잘했어.”
손빈의 칭찬에 서린이 방긋 웃으며 좋아한다. 손빈은 당월아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월아 소저.”
가느다란 은빛 실로 제갈균의 맥을 살피던 당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혈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안정되고 있어요.”
당월아는 은사(銀絲)를 풀고 얇은 종이를 제갈균의 코에 가져다 대어 호흡을 확인했다.
“호흡도 안정을 되찾았어요. 이제는 회복되기를 기다리면 돼요.”
“어, 눈꺼풀은 이제 안 열어 봐도 돼요?”
감긴 제갈균의 눈꺼풀을 뒤집으려던 서린이 묻는다.
“필요 없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월아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월아 소저.”
손빈의 말에 당월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냥 제가 했어도 됐을 텐데…….”
“그러고 나서 쓰러지려고?”
노군이 어림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로워도 이게 나아. 벌떡 일어나게 할 필요도 없어. 막힌 것만 풀어 주면 된다.”
막힌 것만 푼다 했지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온통 뒤엉킨 제갈균의 기맥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도 모르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필옹 제갈련을 보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가 손빈을 본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마도 잠시 후면 의식을…….”
“으음.”
손빈이 말하는 사이 제갈균이 신음을 흘렸다. 제갈련은 한달음에 제갈균에게 다가갔다.
“균아! 정신이 드느냐?”
중년에 가까운 제갈균이었지만 필옹 제갈련에게는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듯했다. 제갈균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괜찮다. 다 괜찮아.”
제갈련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균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제갈균은 안심이 되었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필옹 제갈련은 잠든 제갈균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손빈을 바라보았다.
“고맙네.”
그는 덥석 손빈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어허.”
탁.
노군이 그의 손을 막았다.
“어딜 함부로 건드려. 또 사술이니 뭐니 이상한 말이나 하려고.”
“그건 미안하다 하지 않았나?”
제갈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손빈을 바라보았다.
“제갈세가에는 영약이라 할 만한 것이 제법 있다네. 신의께서도 종종 진귀한 약초를 구하러 오시기도 하지. 뭔가 도와줄 것이 없겠나?”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는 손빈의 말을 끊으며 노군이 끼어들었다.
“준다면야 당연히 받아야지. 그리고 정말 고마우면 금자나 은자도 좀 보내고 그래.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영약보다야 그게 훨씬 낫지.”
“알겠네.”
필옹 제갈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덕분에 노군이 도리어 멍한 표정이 되었다.
“진짜 보내려고?”
“예원(藝苑)으로 보낼 테니 내킬 때 찾아가게나. 그러고 보니 자네가 아직 안 찾아간 것도 있다던데?”
“예원이 그런 일도 했었나?”
제갈련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 됐네. 그곳이야 말만 하면 무엇이든 해 주는 곳이니까.”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사이, 필옹 제갈련이 손빈에게 말했다.
“제갈세가는 은혜를 잊지 않네.”
제갈련은 품에서 작은 옥패 하나를 꺼냈다. 초록빛이 도는 자그마한 원형 옥패였다.
“언제든 찾아오게. 제갈세가는 결코 자네를 박대하지 않을 것일세.”
“아니, 저는…….”
손빈은 고사하려 했다. 그러나 필옹 제갈련의 늙은 눈동자에 담긴 마음이 진심임을 알아서,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작고 동그란 초록빛 옥패를 손빈이 받아 들었다.
“가자.”
분위기를 깨듯 노군이 말했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았으니 가야지. 돌아다닐 곳이 많아.”
노군이 앞장서자 다들 그 뒤를 따랐다.
손빈은 필옹 제갈련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번에는 제갈련도 미소로 받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네?”
의아한 표정으로 손빈이 반문했지만 제갈련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빈이 노군 뒤를 따르고,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이 그를 감싸듯 따라 나간다.
‘손빈이라.’
그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제갈련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필옹 제갈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남악노군과 북해의 소궁주, 게다가 당문의 외사 급 고수마저 아우르는 일행의 중심은 다름 아닌 저 문사 청년이라는 것을.
*
*
*
“필옹은 한다고 했고, 공손세가도 당연히 할 거고. 남궁세가와 혁련세가는 빈이가 편지 쓰면 되고.”
말을 타고 흔들거리던 노군이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서신을 보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바로 옆에서 말을 몰던 손빈이 묻는다. 노군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냐? 네가 보냈다는 걸 알면 아마 입이 귀에 걸릴 거다. 알고 보면 그놈들도 은근히 외로움 타거든. 게다가 그리 나쁜 내용도 아니고.”
나쁜 내용이 아니라 맨발로 튀어나올 정도로 좋은 소식이다. 그 서신의 내용을 환영하지 않는 세가는 없으리라.
“당문은 네가 쓸 거지?”
노군이 당월아를 보며 말한다. 당월아는 고개를 저었다.
“당문의 사람이 북해에 왔더군요. 그편에 소식을 전하겠어요.”
“그래? 역시 오긴 왔었군.”
중얼거리던 노군은 손빈을 보았다.
“몸은 괜찮으냐?”
“네, 괜찮습니다. 요즘에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강물 위에 둥둥 떠서 저절로 같이 흘러가는 느낌이에요.”
조금 전 제갈균의 상세를 치료할 때도 그랬다. 흐름을 보는 것만 아니라 그 변화 또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린을 통해 그런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손빈은 손을 들어 가만히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크고 부드러운 흐름이 지금 이 순간도 손빈을 감싸 안고 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은데요?”
“좋아지긴 했겠지. 느낌으로는.”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잊지 마라. 지금 널 붙들고 있는 것은 모래알 하나 같은 현천결, 아니 현천대강결의 기운뿐이다. 그러니 신의 놈이 네 상태를 확인할 때까지 절대 섣불리 나서면 안 된다. 알겠냐?”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노군이 말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금의 너에겐 목숨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노군의 말이 너무 과장이 심하다 생각한 탓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노군의 말인 데다, 사수연이나 당월아 서린까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혹여 검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말고.”
“백로가 서운해 하겠군요.”
손빈은 허리에 찬 백로를 내려다보았다. 선검 백로는 여전한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좀 참으라 그래.”
노군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말을 좀 많이 해라.”
“말을요?”
고개를 끄덕이며 노군이 말했다.
“그래야 남이 안 놀라지.”
손빈은 무슨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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