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67)
낙향문사전-167화(167/494)
제167화. 화중쟁투(花中爭鬪)2015.04.07.
자리에서 일어난 화월은 시비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즉시 시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연회장 중앙에 커다란 나무 돗자리 같은 것을 펼쳤다.
촤라락.
정교한 나무 조각들이 세심하게 연결된 두터운 대(臺)가 연회장 중앙에 자리 잡았다.
비록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에 불과했으나, 제법 넓어서 연회장 중앙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시비들은 검은색의 긴 나무 의자와 각양각색의 악기들을 그 주위에 보기 좋게 가져다 놓았다. 순식간에 연회장 한가운데에 야트막한 무대가 준비된 것이다.
“옛 예인은 자신의 연주를 이해하던 유일한 벗을 잃은 후에 스스로 현을 끊어 절현(絶弦) 하였다 합니다.”
화월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넓은 연회장 가운데 그녀의 음성이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자신의 예(藝)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것은 저희에게는 평생에 다시없는 기쁨. 그러니 오늘 저희와 함께해 주신 귀인들께 예원의 원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던 화월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공손하지만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자태였다.
“지금부터 열두 명의 소주들이 예를 선보일 것입니다.”
좌우로 열두 명의 소주들을 돌아보며 화월이 말했다. 소주들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들은 모두 촉망받는 예인들이며,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 재주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아이들입니다.”
화월의 목소리는 자부심이 가득하고, 소주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화월이 말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바삐 오가던 시비들도 뒤로 물러나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사락.
앞으로 나선 사람은 부원주 비연이었다. 마치 궁중 여인처럼 고색창연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세 명의 소주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사락, 사락.
네 사람의 옷은 각각 색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는 비슷했다. 그녀들의 움직임을 따라 화려한 머리 장식이 흔들리고, 금사와 은사로 수놓은 비단옷이 일렁인다.
“참으로 오랜만에 귀인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부원주 비연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사이 뒤에서는 세 명의 소주들이 자리를 잡고 시비들이 조심스럽게 악기를 가져온다.
이미 익숙한 칠현금과, 칠현금과 비슷하지만 기러기발 같은 것으로 현을 지탱하는 쟁(箏), 그리고 유난히 크고 현이 많은 슬(瑟)이 그녀들의 손 아래 놓였다.
“오늘은 저와 세 소주들이 함께 연주할까 합니다. 부족하다 내치지 마시고 어여삐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비연은 예를 표하고 소주들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든 것은 푸른색의 작은 소(簫)였다. 비연의 붉은 입술이 소 위에 가볍게 놓인다.
차라랑, 차랑.
세 현악기가 일제히 뿜어내는 음은 압도적이었다. 낮고 높은 음들이 앞서거나 물러나며 한꺼번에 물결치니 그 느낌이 마치 장강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쁘진 않군.”
노군이 말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화월이 자부심을 가지고 말한 바대로, 그들의 연주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연주는 평생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것이다.
현의 물결이 몰려온다 싶더니, 이어서 가만히 소의 음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하듯 가늘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사수연이나 당월아는 물론이고 적세화나 남궁향은 아예 눈을 감고 연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의 음률이 세 현악기를 덮을 정도로 커졌지만, 유난히 귀가 좋은 서린 역시 전혀 시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락.
음률이 손빈을 감싸고 흘러가고 있었다. 각 사람의 마음을 담은 선율이 각기 흐름을 따라 때로는 하나가 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며 흐른다.
그 흐름은 너무나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땀이 흘러야 이런 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재능이 있어야 이런 선율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손빈은 그들의 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예인이로구나.’
처음엔 조금 차가운 인상의 비연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맞닿은 소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누구보다 더 역동적이고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 명의 소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빈 음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화려한 꽃들의 쟁투와도 같았다.
촤라랑.
네 사람의 연주가 끝났다. 그러나 여운에 휩싸여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넓은 연회장 안에 연주의 잔향만이 은은히 떠돌 뿐이다.
“좋구나.”
입을 연 사람은 아미의 법허 신니였다. 그녀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좋아. 과연 비연이다. 네 소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 나아진 듯하구나.”
“어여삐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연주의 여운으로 발갛게 상기된 비연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아주 좋은 연주였소, 비연 시주.”
흰 수염의 승려가 털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에 찍힌 계인과 손에 든 굵은 염주가 인상적인 그는 바로 소림의 불광 선사였다.
그는 뒤에 선 세명의 소주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세 소주들의 음률 역시 대단하더군. 앞날이 기대되는 바요.”
“감사합니다.”
세 명의 소주들도 상기된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비연과 세 명의 소주들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왔다. 시비들이 즉시 그녀들의 악기를 조심스럽게 무대 옆으로 가져다 놓는다.
“다음은 저희인가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일어난 사람은 부원주 효설이었다. 어깨와 목을 보란 듯 드러낸 그녀가 걸어 나오자, 비슷한 복식을 한 소주 넷이 그 뒤를 따른다.
사박, 사박.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는 여인의 아름다운 춤보다 좋은 것이 없지요.”
효설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네 명의 소주는 그녀 뒤에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 있는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과 같았다.
“옛 현인도 이르기를 마음에 가득한 기쁨을 말로 다하지 못하여 노래로 하고, 노래로 다하지 못하여 춤으로 한다 하였던가요?”
‘호오.’
손빈에게 그녀의 말은 제법 의외였다. 그것은 사서삼경 중 한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낀 것은 손빈만은 아닌 듯 했다.
“예기(禮記)의 악기편(樂記篇)이군요.”
남궁향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적세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예기(禮記)요? 예기는 저도 읽었는데, 저런 구절이 있었나요?”
갑자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지 남궁향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아, 원문은 조금 달라요. 제법 길기도 하고……. 그래서 아마 잘 모르시는 걸 거예요.”
남궁향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예인이니, 아마 예악(禮樂)에 관한 글을 따로 배운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전을 배움에도 게으르지 않다’고 말한 화월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저희의 음(音) 또한 부족하지는 않으나, 오늘은 춤으로 여러분께 즐거움을 드릴까 합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연주는 시비들이 맡았다.
다른 시비들과는 조금 다른, 제법 화려한 복색을 한 시녀들이었는데 아마도 부원주 효설이 직접 데려온 사람들인 듯했다. 악기들도 다양하고 독특한 것들이 많았다.
창, 창, 따라랑, 따랑.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음률부터가 밝고 화려한데,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눈앞에서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눈이 핑핑 돌 정도다.
게다가 부드러운 옷자락이 일렁이며 그녀들의 아름다운 곡선을 은은히 드러내니, 시선이 딴 데를 향할 엄두를 못 낸다.
사락, 사라락.
‘대단하군.’
손빈 역시 눈을 떼지 못했다. 서로 교차하고 자리를 바꾸는 현란한 움직임 가운데서도 그녀들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대가의 작품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데, 그 동작이 사뭇 우아하고 화려하면서도 단호한 절제가 느껴졌다. 제법 노출이 심한 복식조차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보인다.
‘아!’
효설과 소주들의 춤을 쳐다보던 손빈은 아차 싶었다. 처음 보는 화려한 풍경에 그만 넋을 잃고 노골적으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손빈은 힐끗 일행을 살폈다. 이렇게 정신을 놓을 정도로 쳐다보는 것은 선비의 마음가짐에도 어긋나거니와, 당장 쏟아질 여성들의 핀잔과 날카로운 눈초리가 신경 쓰인다.
‘응?’
하지만 손빈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손빈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가씨들의 몰입은 대단해서, 사수연이나 당월아, 적세화와 남궁향까지 그야말로 홀린 듯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노군만은 어쩐지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서린은 춤 그 자체에 관심이 많은 듯 춤을 따라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고 있었다.
손빈은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강호의 연륜 탓일까? 나이 많은 사람들은 느긋한 표정인 반면, 젊은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오히려 같은 여성들이 더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모용린이나 건너편에 앉은 승복 차림의 여승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춤을 보고 있었다.
손빈은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좀 전 비연과 함께한 소주들의 연주도 대단했지만 이 춤에 비하면 아무래도 색이 바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느끼는 바는 다들 비슷한가 보구나.’
부담에서 벗어난 손빈은 느긋한 마음으로 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웃으며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눈이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 예인들도 마찬가지구나.’
한마음이 되어 춤을 추는 듯했지만 손빈은 그 가운데 보이는 팽팽한 열기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다섯 사람은 각자가 이 자리의 주역이었다.
따라랑, 차랑.
연주와 함께 춤도 끝났다. 정확하게 처음 섰던 자리로 돌아온 효설과 네 명의 소주들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조용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하, 아주 좋구나!”
그제야 깨어난 듯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말한 사람은 바로 전대 뇌검 남궁천이었다.
“예원의 회합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좋아, 아주 좋아. 바로 이거야! 하하하.”
정말로 만족한 듯, 남궁천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반면 전대 패검 혁련위는 무슨 생각인지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다.
“효설의 자태는 이전보다 지금이 더욱 곱구나.”
법허 신니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쪘답니다.”
상기된 얼굴의 효설이 방긋 웃으며 답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래? 내 눈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정말 쪘어요. 신니께도 보여 드릴 수 없는 곳이 말이에요.”
효설은 드러난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난처한 듯 말했다. 그 모습이 방금 전 춤추던 모습과 대비되며 더없이 귀여운 매력을 뽐낸다.
“과연 효설이군.”
문득 키가 큰 노인이 말했다.
화려한 비단 옷에 고급스럽게 장식한 관, 그리고 보옥을 박아 넣은 검.
보란 듯 위세를 떨치는 그는 바로 공손세가의 전대 가주, 비검 공손극이었다.
“풍월루를 한 손에 쥔 여인다운 재주였다. 소주들 역시 조금도 부족함이 없더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효설은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조금 전 법허 신니를 대할 때와는 짐짓 다른 태도였다. 네 명의 소주와 함께 효설은 자리로 돌아갔다.
연주하던 시비들이 악기를 돌려놓고 물러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화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희군요.”
화월은 미소를 지으며 다섯 소주를 돌아보았다.
“서안의 난향, 북경의 가연, 개봉의 월영, 장사의 홍련, 중경의 연화. 열두 명의 소주가 다들 그러하지만, 다음 세대 예원을 이끌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녀의 말에 부원주 비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또 다른 부원주인 효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녀 역시 밝은 얼굴은 아니다.
“그러면 먼저 장사의…….”
“잠깐.”
화월의 말을 끊으며 누군가 말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공손세가의 전대 가주, 비검 공손극이었다.
“비연과 효설의 재주를 보았으니, 오랜만에 화월의 금을 듣는 것이 어떤가?”
공손극의 입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조소였다. 화월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언제 그랬냐 싶게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다.
“저는 감히 재주가 부족하여…….”
“허어, 예원의 원주가 재주가 부족하다?”
조소를 머금은 공손극이 화월의 말을 잘랐다.
“그럴 리가 있나. 예원의 원주가 그저 누구와 가깝다 하여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닐 터인데.”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공손극은 말을 이었다. 그의 손가락에 가득한 보옥이 반짝거렸다.
“아니면, 혹 지음(知音)을 잃어 절현(絶弦)이라도 하였단 말인가?”
화월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와 무제의 합주는 외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화월이 얼마나 깊이 그를 사모하는지도.
그러니 화월이 지음을 잃었다는 말은, 곧 현천의 무제가 죽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절현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소가 사라진 표정으로 화월이 말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으니까요.”
“훗, 그래?”
공손극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사양할 이유가 없겠군. 절현도 하지 않았으면서 어찌 자신의 예를 펼치기를 저어한단 말이냐? 가진바 재주조차 펼치지 못하는 이가 예원의 원주로 있음이 과연 합당한가?”
마치 연주를 권유하듯 공손극은 손을 들어 화월을 향했다.
훅.
그것은 마치 무심결에 불어온 바람 같았다.
그러나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공손극의 동작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내력이 담겨 있었다. 화월 정도의 가녀린 여인이라면 저항조차 못하고 나동그라질 터였다.
“흥.”
누군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손빈은 보았다. 한 줄기 날카로운 지풍이 공손극의 장력을 단번에 흐트러뜨리는 것을.
파앙!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기운이 흐트러져 사라졌다.
“킁.”
그 모습을 보며 노군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손빈은 지풍을 날린 사람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은…….’
손빈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다만 하나, 그가 노군을 ‘노군 할배’라고 불렀다는 것과, 그 옆자리에 혈봉과 귀견수라가 함께 앉아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니까 내가 저놈을 싫어하는 거라니까?”
강렬한 눈매로 이죽이듯 말하는 그는 바로 흑사련의 외사급 고수, 탈혼도였다.
짙고 두터운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공손극을 향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해. 연약하고 가녀린 여인에게 애매히 덮어씌우려 들지 말고.”
“훗. 그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이야기군.”
비검 공손극은 탈혼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입가엔 여전히 조소가 머물러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불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너뿐이겠지.”
탈혼도 역시 공손극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도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릇이 안 되면 감히 올려다보지 마라. 천외사성 중 둘이 비었다 해도, 네가 올라갈 자리는 없다.”
“둘이 비었다고? 천만에. 천외사성은 이미 끝났다. 너야말로 언제까지 그들의 그림자를 좇을 셈이냐?”
탈혼도와 공손극의 시선이 허공중에 강렬하게 얽혔다. 공손세가와 흑사련의 앙금은 오래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군.”
“흘흘, 나도 동감이다. 언제부터 외사가 천한 것들의 재주나 보는 곳이었더냐?”
후우우욱.
두 사람의 기세가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폭풍은 미처 연회장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기세가 서호 위로 터져 나갔다.
“큭.”
“윽.”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충격에 탈혼도와 공손극의 안색이 변한다. 그사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여기서 싸우려고? 뭐, 그것도 좋아. 싸우고 싶다는데 연회장이면 어떻고 회합이면 어때?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노군이 말했다. 그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스윽.
천천히 노군이 일어섰다. 그의 눈빛에서 시퍼런 기세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용납 못 한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까 걱정인데, 어디서 기세를 피어올리고 지랄들이야?”
노군의 입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가 진짜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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