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68)
낙향문사전-168화(168/494)
제168화. 지음(知音)2015.04.11.
팽팽한 긴장이 단번에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전혀 예기치 않게 노군이 끼어들자, 외사급 고수들은 한편으로는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사태를 관망했다.
비검 공손극은 낭패한 표정으로 탈혼도를 힐끔 바라보았다.
탈혼도 역시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그저 그뿐이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간다’는 노군의 일갈은 그가 누구 편인지 이미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하시오, 노군 할배.”
탈혼도가 먼저 발을 뺐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능청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소란을 피우고 싶은 의도는 없었소. 그러니 그만 노를 가라앉히시구려. 노군의 소령검이 춤추는 건, 웬만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아예 털썩 자리에 앉아 버렸다.
이렇게 되니 남은 것은 공손극뿐이다.
“넌 어쩔 테냐?”
노군이 으르렁거리듯 비검 공손극을 향해 말했다. 공손극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흥, 언제부터 노군이 예원의 수호자를 자처했는지 모르겠군.”
노군의 흰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이놈이 무슨 헛소리야?”
공손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노군과 일행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핍박받는 화월을 위해 노군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주들 역시 노군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에 감사와 선망이 담뿍 담겨 있다.
“그렇게나 화월을 편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본래 공손극은 이곳에서 탈혼도와 생사결을 벌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두 늑대가 피를 흘리면, 또 다른 짐승의 이빨에 둘 다 죽을 뿐이니까.
게다가 노군이 나서고 탈혼도가 물러섰으니 더 이상 버텨 보았자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심사가 뒤틀린 공손극은 털썩 자리에 앉으며 화월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하긴, 연주도 못하는 예인이 원주로 있으려면 노군이라도 붙잡아야겠지.”
“뭐라?”
“노군 어르신.”
노군을 만류한 목소리는 화월의 것이었다. 그녀는 노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지극히 공손한 그녀의 예에 당황한 건 노군이다.
딱히 화월을 보호한다는 생각보다는, 둘의 충돌이 손빈에게 끼칠 영향을 염려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말하는 화월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어리고 있었다. 화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미천한 재주이오나, 비검께서 원하시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잠시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원의 원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 그녀가 연주를 하지 않으면 비검 공손극의 뜻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것이 된다.
“흥.”
공손극은 조소했다. 그러나 원주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 준 셈이라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사락.
화월이 시비들을 향해 손짓하자, 시비들이 곧 연주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한다.
“안타깝네요.”
적세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필 공손세가라니……. 저 여인만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어요.”
“그럼 그냥 놔둬? 그러다 빈이 놈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노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화월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결과가 된 건 결국 노군 탓이니까.
“후우.”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화월을 불렀다.
“화월아.”
“네.”
화월이 조용히 답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노군이 말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노군이 화월을 위해 나서겠다는 보장과도 같았다.
그러나 화월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조용히 미소를 피워 올리며 화월이 말했다.
“저 또한 예인으로서 자신의 감정만 앞세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유념치 마세요.”
“크흠.”
노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잔잔히 미소 지으며 노군을 바라보던 화월이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한다.
“하지만…… 정 그러시다면 저분을 잠시 빌려도 될까요?”
“저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노군이 고개를 돌렸다. 화월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손빈이었다.
“그건…….”
눈살을 찌푸린 노군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손빈이 말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손빈 자신을 위해 나선 노군이다. 그가 난처해하는 모습이 그렇지 않아도 안쓰럽기도 했고, 사자혁과 인연이 있다는 화월 역시 손빈으로선 가능한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그럴 만한 역량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녀는 다름 아닌 천하 예인의 정점, 예원의 원주이니까.
“허나 제가 칠현금을 만진 날이 그리 길지 못하니, 자칫 원주님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요.”
“괜찮아요.”
화월은 웃었다.
“제 아이들은 좋아하던걸요. 공자님의 음률을.”
그녀가 말하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손빈은 알아차렸다. 예원 정원에서 만난 세 명의 예인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면 칠현금이 하나 더 필요하겠네요.”
화월은 시비들에게 칠현금을 하나 더 준비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칠현금이라면 제 것을 쓰세요.”
문득 소주 중 한 명이 말했다. 고운 자태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바로 서안의 난향이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오나, 공자님의 음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것입니다.”
깍듯하고 정중한 태도로 그녀가 말했다. 마치 처음 본다는 듯 거리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감사합니다.”
손빈이 예를 표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손빈의 예를 받는다.
“그럼 갈까요?”
화월의 말에 손빈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시비들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준비해 놓았다. 손빈의 자리는 내빈들을 향하여 보았을 때 화월의 좌측이었다.
그 또한 음양오행에 따른 배치여서 손빈은 내심 감탄했다. 아니면 이런 경우의 전례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박.
자리에 앉은 화월이 잠시 현을 고른다. 손빈도 자리에 앉았다.
손빈 앞에 놓인 것은 눈에 익은 칠현금이었다. 사자혁과 함께 들었던, 그날 난향이 연주했던 검은색 칠현금이다.
손빈은 칠현금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반갑기도 하고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추억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팅, 팅.
손빈은 몇 번 현을 퉁겨 보았다. 탄주하는 손빈의 자세나 손의 움직임이 서툴러 보였는지, 몇몇 소주들이 살짝 눈살을 일그러뜨린다.
“제가 금을 가까이하지 않은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군요.”
화월이 가만히 말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연회장에 울려 퍼진다.
“손이 둔하여 실수를 할지라도 너그러이 용서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실 분은 손 공자님입니다.”
돕는다는 말은 겸양의 표현이리라. 손빈은 예를 표했다.
몇 사람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특히 남궁향이나 모용린, 남궁천과 혁련위는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저런 청년이 있었나?’
반면 탈혼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노군에게 인사할 때 뒤에 누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연회장에서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다. 그러니 눈에 담아 둘 이유조차 없었으리라.
‘킁.’
여전히 인상조차 희미한 청년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탈혼도는 화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는 화월이 과연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을지가 더 관심사였다.
대부분의 외사급 고수들 역시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아미파의 청혜 사태는 청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문사가 아니라 악사였나?’
분명 문사의 행색인데 칠현금을 연주한다고 한다. 게다가 예원의 원주가 합주를 권할 정도면 생각보다 제법 한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서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있나 보군.’
부드러운 음률을 연주하는 젊은 청년이라면 충분히 아가씨들의 방심을 뒤흔들 수 있으리라. 특히 거친 무사들만 보아 온 무가의 아가씨들에겐 더더욱.
이해는 가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여전하다. 청혜 사태는 칠현금 앞에 앉은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건 ‘네가 얼마나 하나 보자’라는 심정과 비슷했다.
“혜강의 광릉산이라는 곡을 아시나요?”
“네. 일전에 합주한 적이 있습니다.”
화월의 물음에 손빈이 답했다. 세 명의 예인들과 정원에서 두 번째 연주했던 곡이 바로 그것이었다.
“광릉산은 오래전 실전되었다 알려졌으나 기적적으로 찾아낸 고금곡(古琴曲)입니다.”
그것은 손빈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연회장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소개 같았다.
사실 많은 고금곡이 실전되었다가 다시 복원되곤 했다.
하지만 수많은 변주가 존재하는 데다 애초에 정확한 재현이 목적이 아니기에, 예전의 원곡과 똑같다는 확증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분은 이 곡을 금(琴)과 소(簫)에 어울리도록 편곡하고 이름하기를 소오강호(笑傲江湖)라 하였다 하니, 지금 이 자리에 어울리는 곡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소(簫)는 못합니다만…….”
옆에서 들린 손빈의 말에 화월이 시선을 돌렸다.
“소오강호가 아니라 본래의 광릉산을 할 것입니다. 예전에 하셨다 하니 그때처럼 하시면 돼요.”
손빈을 향해 웃어 준 화월은 두 손을 칠현금 위로 뻗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위로 긴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손빈은 느낄 수 있었다.
화월의 손이 현을 채 퉁기기도 전에, 그녀를 둘러싼 흐름이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한순간, 그녀의 손이 가볍게 위로 튀어 올랐다.
따랑.
현이 울었다. 그녀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일곱 개의 현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땅, 따라랑, 땅.
부드러운 바람처럼 화월의 음률이 연회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손빈은 가만히 그 선율을 음미했다. 그 어떤 예인보다 크고 도도한 흐름이 손빈을 감싸고 흐른다.
그녀, 화월의 손끝이 만들어 내는 슬픔과 기쁨이 이 순간 손빈의 마음속으로 넘치도록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사락.
손빈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가 울려야 할 음률, 그가 함께해야 할 흐름은 이미 그 자리에서 손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을 감싸 흐르는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과 함께.
따당.
작고 희미한,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새로운 음이 화월의 선율에 얹혔다.
그 순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
청혜 사태는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그 음은 한순간 예기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마음과도 같았다.
단번에 마음이 마음에 공명하고, 선율에 선율이 공명한다. 마치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의 마음은 이내 선율과 함께 움직이고 흘러갔다. 칠현금과 그녀가 같이 기뻐하고 서로 그리워하며 더불어 울었다.
“훌쩍.”
누군가 벌써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외사급 고수는 아닐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젊은 소주들 중 하나일까?
그러나 청혜 사태는 누구인지 쳐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속에도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아.”
여기저기서 한탄과 같은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몇몇 여인들은 행여 방해가 될까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마음을 흔드는 선율에 충격을 받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연주를 하고 있던 화월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이런 음을 화월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숨겨 놓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진심을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때로는 그녀를 놀라게 하고 혹은 감싸 안으며, 그녀를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하는 이런 음(音)을.
어느새 그녀의 손은 멈춰 있었다. 더 이상 연주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주 선율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손빈의 칠현금은 여전히 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화월을 기다리고 있는 듯 부드럽고 따뜻하게.
화월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 앞에 그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녀의 음을 알아주던 지음(知音).
항상 홀로 기다리고, 언제나 눈물로 그리워하고 있던 바로 그가 이곳에 있었다.
‘당신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는 건가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그는 이곳에 있었다. 그녀의 칠현금 안에, 그리고 그녀의 마음 안에. 그토록 보고 싶던 그는 이미 자신과 함께였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화월은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여인임과 동시에, 그녀는 예인이었으니까.
화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강하게 칠현금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따랑, 따당, 땅.
거친 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 누구보다 격렬하게 그녀는 화를 냈다. 거칠게 그에게 쏘아붙이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그에게 쏟아 냈다. 웃음으로 강호를 조롱했던 선율이 그녀의 손 아래서 절규하고 있었다.
투웅, 퉁―.
화월에 답하는 손빈의 선율은 낮고 묵직했다. 그는 묵묵히 화월의 분노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자칫 소음으로 끝날 수도 있는 화월의 선율을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명할 수 있었다. 화월의 분노 아래 숨은 그녀의 슬픔에, 그리고 그녀의 뜨거운 정(情)에.
차창, 차앙―. 퉁.
화월과 손빈의 격렬한 음이 동시에 연회장을 울리고, 화월의 하얀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손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곡이 끝난 것이다.
“하아, 하아.”
화월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며 붉은 입술이 가쁜 숨을 내쉰다. 본래 대곡이긴 하나 단 한 번의 이 연주로 모든 힘을 다 쏟아 낸 것 같았다.
‘내가 이렇듯 감정적인 연주를 하다니…….’
가쁜 자신의 호흡을 느끼며 화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악이네. 예인으로서.’
연주에 임하는 예인은 반드시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자신의 연주에 우는 예인은 삼류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스스로의 연주에 어찌할 바 모르고 격렬하게 반응해 버렸다.
‘그리고…… 여자로서.’
또륵.
화월의 눈가에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눈물도, 자책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칠현금 속에서 마침내 그리운 지음(知音)을 만난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미타불.”
불광 선사가 탄식처럼 불호를 흘렸다. 다만 그뿐, 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불호는 연주에 취해 있던 사람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과연 예원의 원주로다.”
법허 신니가 말했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화월의 금이 이러하니, 그 누가 원주의 자격이 없다 하겠는가? 십 년이 지나도 과연 오늘의 화월을 넘을 예인이 있을까 싶구나.”
어찌 들으면 비검 공손극을 노골적으로 힐난하는 셈이었으나, 공손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얼굴을 굳히고 감정을 숨기느라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락.
화월이 일어섰다. 그사이 자신의 감정을 수습한 그녀는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부족한 재주를 높이 평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오랜 미망(迷妄)에서 깨어난 듯 그녀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슥.
화월은 몸을 돌려 손빈을 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에 비해 손빈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화월의 시선을 느낀 손빈이 고개를 든다. 그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하다.
“찬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화월은 느꼈다.
이제는 화월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남악노군이 그를 비호하려 하였는지, 장강어옹이 만났다 하는 ‘무제의 길을 걷는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난향이 말한 ‘무제의 길벗’이 누구인지도.
복잡한 시선으로 손빈을 바라보며 화월이 말했다.
“손 공자님께 돌아가야 함이 마땅합니다.”
화월은 손을 뻗어 손빈을 향했다.
“오오, 그렇지. 젊은 데도 대단하군.”
“어느 예원 소속이지?”
“혹 화월이 직접 키운 제자인가?”
감탄과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빈을 예원 소속으로 착각한 듯한 말도 많았다.
문사 차림의 청년에 대한 기억 자체가 별로 없는데다가 화월과 합주한 것만이 강렬하게 각인된 탓이다.
“잘하는군요.”
부원주 비연이 짐짓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격동을 숨기려는 듯 작게 떨리고 있었다.
“고금의 예법에 어긋난 점은 다소 있지만, 그것만 다듬는다면 제법 들어 줄 만한 연주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한다면, 크흠, 어쩌면 황궁 공연에도…….”
“그러지 말고 풍월루로 오지 않겠어?”
비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무례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 버린 사람은 바로 부원주 효설이었다.
목선과 어깨를 드러낸 효설은 비연의 눈총은 아랑곳없이 손빈을 향해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동자에 손빈을 향한 관심과 호감이 여과 없이 빛나고 있었다.
“너라면 단번에 풍월루의 특급 예인이 될 거야.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것은 물론이고, 천하절색의 기녀들까지 원 없이 품을 수 있어. 어때? 남자로서 제법 끌리지 않아?”
효설은 당장에라도 손빈을 채 갈 듯한 기세였다.
다른 소주들 역시 손빈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일부 경계의 눈초리나 몽롱한 선망의 눈빛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의와 관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흐음. 대, 대단하네요.”
“정말 좋았어요.”
“훌쩍. 어디 소속이에요?”
여러 소주들이 때를 만난 듯 한마디씩 하던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그래, 남자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여인의 교태로운 목소리가 연회장에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탈혼도의 옆자리에 있던 화사(花蛇)였다.
손빈을 중심으로 말을 나누던 소주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연회장의 시선이 단숨에 그녀에게 집중된다.
“이토록 색기 넘치는 사내는 처음이야. 오랜만에…….”
사뭇 도발적인 자세로 가슴을 드러내며 화사가 말을 이었다.
“아흥, 정말 뜨거워졌어.”
청혜 사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은 청혜 사태에겐 음담패설에 가깝다. 여자로서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달칵.
화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손빈을 향해 눈웃음을 피워 올렸다.
“누나와 같이 갈래? 아주 즐겁게 해 줄게.”
탁.
화사가 가볍게 발을 구른다 싶은 순간, 그녀의 몸이 흐릿해졌다.
‘엇.’
청혜 사태는 순간 그녀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녀를 경시하면 안 된다는 법허 신니의 말을 잊고, 어느새 겉모습으로 평가하고 있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화사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청혜 사태는 즉시 시선을 돌렸다. 문사 차림의 청년 악사, 손빈을 향해서.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앙!
“어머, 이게 무슨 일일까?”
노래하듯 화사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서늘했다. 목표했던 문사 청년에게 채 닿기도 전에, 두 개의 칼날이 이미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교차하며 화사를 막아선 두 자루의 검. 그것은 바로 미명(未明)과 소월(素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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