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179)
낙향문사전-179화(179/494)
제179화. 대법(大法)2015.05.19.
바스락.
두루마리 종이가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차를 마시던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뭐야?”
“보시는 대로예요.”
예원의 원주, 화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봐도 모르겠는데?”
노군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서책도, 서찰도 아니었다.
도무지 연관성이라곤 없는 물건들의 이름을 주욱 늘어놓았는데, 구태여 말하자면 상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서류였다.
“어머, 이건 도자기 이름 아니에요?”
뒤에서 보고 있던 적세화가 목록 중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푸른 꽃잎 무늬가 아름다워서, 요즘 강남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던 바로 그거네요.”
눈을 반짝이던 적세화는 즉시 또 다른 곳을 짚었다.
“여기도 있네요. 이쪽은 다 명품 비단이고, 저쪽은 귀한 약재네요. 아, 이건 이국에서 건너온 물건 같은데요?”
내용이나 품목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대단히 비싸고 귀한 것들뿐이라는 것이다.
직접 본다면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질 물건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일 뿐이어서 서린이나 당월아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게 대체 뭐냐?”
재촉하는 듯한 노군의 물음에 화월이 조용히 답했다.
“손 공자님 앞으로 와 있던 선물들의 목록이에요.”
“선물?”
“그리고 이건.”
사락.
또 하나의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노군 어르신 앞으로 와 있던 것들이고요.”
노군은 그제야 화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아, 필옹 그놈이 예원에 맡겨 두겠다더니, 그런 거냐?”
“네.”
화월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북해에서 손빈은 제갈세가의 사람을 치료해 준 적이 있다.
필옹 제갈련은 그 사례를 예원에 맡겨 두겠다고 했는데, 아마 이것을 의미한 듯했다.
“어디 보자.”
노군이 자신의 두루마리를 끌어당겼다. 중간 즈음에 과연 필옹 제갈련의 이름으로 노군에게 보낸 적지 않은 금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빈이 것이다. 그런데 제갈세가와 공손세가가 나한테 보냈다는 이것들은 다 뭐야?”
화월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북해의 교역권에 관련한 것이에요. 세가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사실상 천하오대상단이 보낸 것들이지요.”
“그걸 왜 나한테……. 아.”
중얼거리던 노군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수연을 돌아보았다.
“이거, 네 거다.”
“저요?”
사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역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낸 것이에요. 북해의 소궁주님.”
화월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사수연에게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사수연은 고개를 숙여 화월에게 답례하면서도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교역세는 빙궁으로…….”
“세가 아니다.”
노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앞으로도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자는 천하오대상단의 의사 표현이다. 네가 이쯤에서 감사하다는 뜻을 비치면, 다음부터는 번거롭게 세가를 통하지 않고 너에게 직접 보내겠지.”
“다음요?”
사수연이 눈살을 찌푸린다. 노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다음. 아마 교역이 유지되는 한 계속 올 거다. 자칫 자기 상단만 소외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 이렇게 많이요?”
놀란 얼굴로 적세화가 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목록은 끝이 없었다.
“새 발의 피다. 다른 것도 아닌 북해의 교역권이잖아? 교역에서 얻어질 이득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극히 일부지.”
“이 정도가 계속…….”
적세화는 어이가 없었다. 이 목록의 일부만으로도 호연무관의 재산을 훌쩍 넘어설 정도다.
“제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사수연의 말에 노군이 피식 웃었다.
“원래 가진 것이 많은 놈들일수록 불안도 많은 편이거든. 혹시 자신만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 말이다.”
“이것들도 함께 전해 왔어요.”
화월은 얇은 서찰을 몇 장 꺼내 사수연에게 공손히 건넸다. 사수연은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서찰을 펼쳤다.
“이건, 북해에 대한 소식들이군요.”
서찰에는 최근 북해의 소식이 간략히 적혀 있었다.
“클클, 북해빙궁에 하는 것들을 네게도 하겠다는 뜻이로군. 정말 자상하기도 하지.”
노군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오대상단이 파악한 북해의 민심을 빙궁에 알려 줄 것을 사수연은 요구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 요약본인 것이다. 이 예물들이 교역세의 축소판인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난처한 표정으로 사수연이 노군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재물은 그녀로서도 부담스러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노군은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면 되돌려 주고, 기분 나쁘면 화를 내라. 아니면 부족하니 더 내놓으라고 하든가. 클클클.”
사수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제가 이것을 받으면, 저들이 더 비싸게 교역을 하려 하지 않을까요?”
“그럼 만일 네가 받지 않으면, 저들이 깎아 줄 것 같으냐?”
노군의 말에 사수연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빙궁의 관리라면 지금 그 태도가 옳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외사다.”
노군은 씨익 웃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하고 싶은 대로…….’
사수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문득 원주 화월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원은 상단을 대하는 것에 익숙해요. 큰 재물을 관리하는 것에도 부족하지 않지요. 만일 원하신다면, 오대상단과 연관된 일은 저희가 대신 처리해드리겠어요.”
“그게 좋겠군요.”
사수연의 결정은 빨랐다. 어차피 돌려보내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지금 노군 어르신과 손 공자님께 와 있는 것들은 그대로 두 분께 드리세요. 그리고 다음부터 오는 것들은 원주께서 관리해 주시면 좋겠어요.”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받아?”
노군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사수연은 미소를 지었다.
“말씀대로라면 어차피 두 분에 대한 사례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나요?”
사수연의 말에 노군은 피식 웃었다.
“금방 배우는구나?”
그녀의 말대로 이 예물은 중간에서 역할을 한 노군이나 손빈에 대한 사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월이 무릎을 굽히며 사수연에게 예를 표했다.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수연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요.”
갑작스러운 것도 갑작스러운 것이지만, 당장 이 많은 물건을 보관할 곳도 없다. 그저 이렇게 목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니까.
“아.”
두루마리에 적힌 물건들을 살펴보던 사수연이 눈을 빛냈다.
“이건 손 공자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네. 그러실 줄 알고 미리 가져다 놓았어요.”
화월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멈춘 곳에, 칠현금이라는 글자가 단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
*
*
신의와 장강어옹이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벌써?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지났지?”
노군의 말에 적세화가 답했다.
“중간에 예원십이소주의 회합이 있었으니까요.”
예원 십이소주들의 회합이 끝난 지도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그 전에 지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이미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음, 그렇군. 그럼 서원에 서찰을…….”
“제가 아까 써 놓았어요.”
적세화가 말했다. 어차피 지금 서원은 그녀의 오라버니 적세호 공자가 돌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쓰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내일쯤 원주께 부탁드려서 서원으로 보낼게요.”
“그래, 고맙다.”
노군이 말했다. 그는 사실 서찰을 보내는 일 같은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서 챙겨 주는 적세화가 더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적세화는 서찰을 보내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신의와 장강어옹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별채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몰골은 초췌했다. 다만 눈빛만은 번뜩이고 있어서, 안내하던 시비가 그 모습만으로도 질겁할 정도였다.
“어, 왔냐?”
두 사람을 향한 노군의 인사는 그게 다였다. 노군은 찻주전자를 들고 휘적휘적 걸어 정원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신의님! 어옹 어르신!”
적세화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음, 잘 있었냐?”
신의가 적세화에게 묻는다.
“네. 아니, 저 몇 가지 일은 좀 있었습니다만……. 두 분은 괜찮으세요?”
“괜찮다. 우리도 차 좀 다오.”
신의와 어옹은 노군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적세화는 즉시 차를 준비했다.
집 안에 있던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도 밖으로 나왔다. 사수연은 신의의 초췌한 모습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의님!”
“앗! 누워 있던 할아버지다.”
서린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당월아도 두 사람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 아이는 누구냐?”
장강어옹이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중에서도 역시 사수연이었다.
“사수연이다. 무제의 딸이지.”
“무제의!”
장강어옹의 가느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수연은 어옹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사수연이라 합니다.”
“난 장강어옹이라는 늙은이다.”
어옹은 사수연을 관찰하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는 빈이와 무슨 관계냐?”
“네가 알아서 뭐하게?”
퉁명스러운 신의의 대답에 어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부적절한 관계는 아니겠지? 자고로 정파는 품행이 단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다른 사람의 사적인 관계까지 따지고 드는 건 정파인으로서 옳은 행동이고?”
“그, 그런 건 아니다만.”
어옹이 헛기침을 했다.
“신경 꺼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타인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없느니라.”
신의의 말에 듣고 있던 노군이 피식 조소를 흘린다.
“여자 손목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놈이 말은 참 잘한단 말이야?”
노군의 말에 신의의 눈살이 일그러진다.
“내가 왜 없어?”
“환자 빼고.”
신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원주 화월이 소식을 듣고 별채로 나왔다.
“신의님, 어옹 어르신.”
화월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예를 표했다. 신의와 어옹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예에 답했다.
일행이 전부 모이니 제법 북적북적했다. 신의와 어옹도 따뜻한 차로 오랜 여독을 씻어 내고 훨씬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빈이는?”
신의의 한마디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잔다.”
노군이 대답했다. 신의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이 늦은 오후까지 잠들 놈이 아니니, 분명 일이 생긴 것이겠구나.”
서원에서도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나던 사람이 손빈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노군에게 신의가 말했다.
“분명히 내가 말하기를,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 했을 텐데?”
“깨, 깨우면 일어나거든?”
노군의 대답은 힘도, 설득력도 없었다.
덜컥.
신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를 봐야겠다.”
“그 꼴로 누굴 만지려고 그래?”
노군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신의는 그제야 자신이 매우 지저분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은 맞군.”
“씻으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어요.”
원주 화월이 얼른 일어났다. 그녀는 시비들에게 씻을 물과 새로 갈아입을 옷을 준비시켰다.
잠시 후, 신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체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한 신의는 고관대작 같은 멋진 모습이었다.
장강어옹은 본래 부실한 체격인 데다가, 예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였다.
사치와 허영을 삼가기 위함이라 했는데 노군 말로는 그저 옷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했다.
달칵.
일행은 손빈의 처소로 들어섰다. 여덟 명이나 되는 일행이었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저벅, 저벅.
신의는 서슴없이 손빈에게 다가섰다. 잠자는 모습을 조용히 살피던 신의는 노군을 돌아보았다.
“깨워 봐라.”
“부르면 일어난다.”
무슨 말인가 싶은 신의가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 역시 노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신의는 잠든 손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빈아.”
반짝.
거짓말처럼 손빈이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신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신의님.”
서린이 얼른 다가와 손빈을 부축했다. 손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셨군요. 그리고 어옹께서도.”
손빈은 어옹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은 방금 전까지 잠자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맥을 좀 짚어 보자.”
“우선 좀 앉으시지요.”
신의는 그제야 모두들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행은 여기저기서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고, 신의 역시 침상 옆에 앉아 손빈의 맥을 살폈다.
“으음.”
“나쁘진 않습니다.”
손빈이 미리 말했다.
“그래. 하지만 좋지도 않다.”
신의는 의외로 인상을 쓰지 않았다.
“생명이 그야말로 경각에 달렸구나.”
일행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경각에 달렸다는 말은 곧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 즉 대단히 위독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화월이 더듬거리며 묻는다. 그러나 신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의는 손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질병이나 기혈의 막힘이 있어 환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거든, 침과 약으로 치료하되 그 약성이 너무 강하여 도리어 환자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먼저 몸을 보(補)하는 것이 우선되기도 한다.”
강론을 하는 것처럼 신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만일 사람이 의식을 잃고 그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면 그 즉시 지체하지 말고 대법을 시행하여야 한다. 그 무엇보다 목숨을 되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신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손빈의 상태는 지체 없이 큰 의술을 시행하여야 할 정도로 위급하다는 뜻이다.
“대법이라니?”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은 머리나 심장 같은 요혈에 커다란 침을 찌르겠지만.”
듣던 적세화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수연의 안색도 변하고, 화월의 표정이 파랗게 변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처방이었다.
“하지만 이놈 같은 경우에는, 오장육부가 아니라 직접 진기에 충격을 주어야겠지.”
“그, 그렇게 해야 할 정도인가요?”
적세화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묻는다. 지금 손빈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저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 내가…….”
신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맥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지금 신의를 쳐다보는 손빈의 눈동자가 너무나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진기에 충격을 준다면, 뭘 말하는 거냐?”
묵직한 목소리로 노군이 말했다.
“말 그대로다. 마치 커다란 침으로 심장을 찌르듯, 강한 내력으로 빈이의 진기에 직접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잘못되면?”
“죽는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손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자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농담인 듯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신의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법을 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손빈의 목숨을 건 대법이.
“이중에서 누가 내력이 가장 강하지?”
신의가 노군에게 물었다. 아마도 노군일 것을 짐작한 것이지만,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내기의 운용이라면 내가 뛰어나지만, 내력 자체만을 두고 따진다면 현재 이 둘이다.”
노군이 지목한 사람은 사수연과 당월아였다.
“린이도 제법이긴 하지만, 아직 완전히 자기 것이 되지 못했어.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나아졌다.”
서린은 미안하다는 듯 목을 쏙 집어넣었다.
“자기 것이라니?”
장강어옹이 물었다.
“진인의 마지막을 지킨 제자가 바로 저놈이라더라.”
노군의 말에 장강어옹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대로라면 서린은 천외사성의 일인, 황학진인의 모든 것을 이은 것이다.
어옹은 그제야 노군이 자신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부 다 같이 하면 안 돼요?”
서린이 신의에게 묻는다. 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 기운이 섞이면 좋지 않아. 한 가지 기운만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답은 나왔군.”
주저 없이 노군이 말했다.
“한기다.”
사수연은 물론 당월아도 의아한 표정으로 노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군은 그녀들 대신 창문을 돌아보았다.
“거기 있지?”
노군이 밖을 향해 외쳤다.
“너도 필요하다. 어서 들어와.”
일행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창밖엔 그저 오후의 햇살이 내리쬘 뿐, 아무것도 없었다.
“저, 누구를…….”
기다리던 적세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사락.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 앞에 누군가 내려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얀 서리가 문틀에 번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지막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얀 옷에 긴 검은 머리, 가슴에 소중히 품은 한 자루의 검.
“옆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고개를 돌려 일행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는 바로 검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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