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05)
낙향문사전-205화(205/494)
제205화. 당문의 마지막 밤2015.08.18.
깊은 밤, 손빈은 처소에서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조금 전 현천수련검식도 마친 터라 기분도 좋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손빈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덜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손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화련 소저.”
화려한 복식을 한 당화련이 거침없이 들어서고 있었다. 당문의 젊은 총괄 군사이자 당월아의 언니이며, 사자혁과 당백호의 생사결에 동행했던 설검 당화련.
“그래, 나야.”
평소보다 유난히 도도한 표정으로 당화련이 말했다. 그녀는 손빈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처소를 휙 둘러본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늦은 밤에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왜, 오면 안 돼?”
은근히 무례를 지적하는 말에도 당화련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잖아.”
탁.
당화련은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인 양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손빈이 있는 서탁 부근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당문 총괄 군사이자 현 당문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라곤 여겨지지 않는 행동이다.
‘응?’
손빈은 그녀의 얼굴색이 살짝 발그레한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술을…….”
“그래, 했어.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서.”
얼굴색을 보아하니 만취할 정도로 마신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말이나 행동은 유난히 거침이 없다.
‘음.’
손빈은 잠시 주저했다. 예의로라도 이유를 물어봐야 하겠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미 당화련이 손빈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묻지 않을 수도 없다.
“저, 왜 기분이…….”
“사랑하는 내 동생 월아가 또 떠나니까.”
손빈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당화련은, 손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내뱉었다.
“게다가 너하고 같이 가는데, 기분이 좋겠어?”
거의 노려보듯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에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월아 소저는 괜찮을 겁니다. 이미 아무도 무시 못 할 고수이기도 한 데다 노군께서도 계시고…….”
“후우우.”
긴 한숨 소리가 손빈의 말을 끊었다.
“역시 넌 아무것도 모르네. 아니…….”
당화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나인가?”
시선을 내리는 당화련의 표정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니, 손빈으로선 무어라 할 수가 없다.
부스럭.
당화련이 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탁.
서탁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옥빛 자기병이다. 자기의 빛깔부터가 대단히 영롱하니, 혹시 무슨 영약 종류인가 싶어 손빈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건…….”
“술이야.”
“네?”
손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화련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향이 맘에 들길래 슬쩍 가져왔어. 여기도 잔은 있지? 가서 가져와.”
또 술을 마시겠다는 뜻이어서 손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살짝 얼굴 붉어진 정도로도 이런데, 여기서 더 취한다면 손빈으로선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서.”
하지만 당화련은 막무가내였다. 손빈은 어쩔 수 없이 침상 옆에 놓인 물 잔을 가지러 갔다.
“두 개.”
손빈이 작은 잔 하나를 집어 들자 당화련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손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잔 두개를 들었다. 가능하면 가장 작은 것으로.
탁, 쪼로록.
잔이 놓이고 작은 옥빛 자기병에서 투명한 호박색 술이 흘러나왔다. 깊고 짙은 향이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운다.
그 향이 그윽하고도 부드러워 술에 대해 잘 모르는 손빈이라도 매우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손빈은 서탁 앞에 있던 의자를 들어 당화련 앞에 놓고 앉았다.
“이것밖에 안 되네.”
작은 잔이었지만 술은 채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자기병을 흔들어 보던 당화련은 휙 하고 병을 등 뒤로 던져 버렸다.
퉁.
자기병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작은 함에 정확히 들어갔다. 손빈이 그것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자 당화련이 피식 웃는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손빈은 새삼 그녀가 무공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미 설검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고, 강호 무림에서는 젊은 신진 고수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응? 그럼…….’
그런 그녀가 발그레할 정도라면, 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마신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들어.”
당화련의 목소리가 손빈의 생각을 끊는다. 손빈은 엉겁결에 잔을 들었다. 향이 좋기도 하고, 아주 조금이니 별 상관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축하해.”
손빈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며 당화련이 말했다. 그러고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손빈은 내심 ‘뭘 축하하나’ 싶었지만, 어쨌거나 일이 잘 풀린 것이라 생각하며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컥.”
얼마 안 되는 양이다 싶어 단숨에 들이켠 것이 잘못이었다.
술은 생각보다 매우 독했고, 손빈은 대번에 기침을 뱉었다.
“콜록, 콜록.”
목 안이 마치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손빈은 얼른 물을 찾으려 하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당화련의 비웃는 듯한 시선과 마주쳤다.
“크흐음!”
손빈은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에 이어 가슴, 그리고 배까지 자극이 오기 시작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았다.
술이 강하진 않아도, 여자 앞에서 술 한 잔에 쩔쩔매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 게다가 당화련이라면 더더욱.
“좋은, 쿨럭, 술이군요. 크흐음.”
손빈은 손으로 슬쩍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그런 손빈의 귀에 당화련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손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 네가 하는 일은 다 잘될 거야.”
당화련이 말했다. 손빈이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는데 빛나는 당화련의 눈동자가 손빈을 똑바로 마주한다.
“네 경쟁자는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눕게 될 거고, 널 반대하는 사람은 갑자기 몸이 불편하게 될 거야. 만일 누군가 너와 원수를 진다면, 그 집안엔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겠지.”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용으로는 복을 빌어 주는 것 같은데, 그 표현이 아주 살벌하다.
“글쎄요.”
어깨를 으쓱하며 손빈은 말했다.
“아직 우리와 경쟁하는 서원은 없는데요.”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당문의 힘으로 비호를 해 주겠다는 의미인 줄은 안다. 하지만 솔직히 손빈에겐 그다지 필요가 없다.
“그럴까?”
당화련의 붉은 입술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운다.
“세상에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많은 법이거든. 우리 당문의 특기이자, 매우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지.”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당화련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월아에게 보내 온 송암상단의 북해 교역세는, 일단 예원이라는 곳으로 보내도록 할게. 어차피 월아 몫으로 정해진 것도 따로 있으니까.”
북해 교역세란 아마도 천하오대상단 중 하나인 송암 상단에서 보낸 예물일 터였다. 당월아에게 이미 자초지종을 들은 당화련은 그것을 예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사실 당문을 손에 쥐었으니 재물의 많고 적음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당월아나 당화련이 원한다면 모두가 그녀들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옥룡과 손을 잡으라는 말도 취소하겠어.”
당화련의 말에 손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이 감히 우리 당문에 독을 보냈거든.”
말하는 당화련의 눈빛은 서슬 퍼렇게 번득이고 있었다. 손빈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이전 연무장에서의 그 일이…….”
“증거는 없어. 증인도 없고. 하지만 상처를 보면 명백하지. 어떤 짐승이 감히 우리 당문에 이빨을 들이밀었는지는 말이야.”
당문에 적의를 가진 상대는 많다. 그러나 이런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다.
뛰어난 상대일수록 특유의 방식이 있는 법. 총괄 군사 당화련은 이번 일이 다른 세가도, 문파도 아닌 혈룡문의 작품임을 확신했다.
“우리 당문과 혈룡문은 암묵적인 협력을 약속했지. 하지만 이번 일로 그 협약은 깨졌어. 그러니 이번 혈봉련 회합에서 나나 당문을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 우리 당문은 반드시 너를 지지할 테니까.”
혈봉련을 둘러싼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장강 북부를 마주하고 있는 당문은 그중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자, 여기.”
바스락.
당화련은 품에서 얄팍한 서찰 같은 것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내키면 읽어 봐. 이번 일에 대한 것들이니까.”
“감사합니다.”
“어떻게 할지는 정했어?”
“글쎄요.”
손빈은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있을까요?”
그건 아주 부드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당화련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당문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도 하는 얘기가 기껏 저런 말이라니.
“하, 대체 너는…….”
당화련은 말을 하다 말고 새삼 손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손빈은 당화련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속셈도, 숨은 의도도 없는 투명한 눈동자. 그 청아한 눈빛이 당화련을 똑바로 바라본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당화련은 순간 맥이 빠졌다.
‘하긴, 본래 이런 남자였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손빈은 이랬다.
달빛 아래 펼쳐졌던 아름다운 검로도, 북해 소궁주와 함께 펼친 그림 같은 연수합격도, 그리고 당월아를 구하고 어린 독인들을 살려 낸 그 놀라운 능력도 다만 그가 걸친 옷과 같은 것일 뿐이다.
문득 당화련은 처음 손빈을 보았을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 압도적인 사자혁 뒤로 겁도 없이 쫄래쫄래 따라오던 촌스러운 한 문사의 모습을.
피식.
당화련은 헛웃음을 흘렸다.
덜컹.
“갈래.”
갑자기 당화련은 벌떡 일어났다. 손빈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늦은 밤이라 만류할 이유도 없었다.
저벅, 저벅.
손빈은 나가는 당화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당화련은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쏴아아.
차가운 바람이 방 안에 스며들었다. 당화련은 문을 연 채로 가만히 있었다. 화려한 그녀의 옷자락이 밤바람에 부드럽게 일렁인다.
“월아 곁에 있어.”
당화련이 말했다. 손빈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그럼 나도 네 편에 서 있을 테니까. 그 어떠한 때라도 반드시.”
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화련은 문을 닫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손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화련 소저.”
이미 문밖으로 나간 그녀에게, 손빈은 예를 표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흥.”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당화련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지막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입술에는, 숨길 수 없는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자박, 자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당화련이 멀어져 갔다. 손빈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더 이상 책을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탁.
손빈은 책을 덮었다. 당문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아직 다 안 끝났냐?”
덜컥.
문이 열리며 노군이 들어섰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던 손빈은 노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다 됐습니다.”
손빈은 챙겨 놓은 작은 짐을 들었다. 그때 노군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무슨 냄새지? 너 술 마셨냐?”
“아, 네. 어젯밤에 조금…….”
손빈이 대답했지만 노군은 성에 차지 않는지 코까지 킁킁거리며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분명…….”
“아침부터 무슨 짓이야?”
뒤따라 들어온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점잖게 노군을 나무란다. 하지만 노군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찾았다.”
노군이 들어 올린 것은 어젯밤 당화련이 던져 버린 작은 옥색 자기병이었다.
노군은 코를 자기병에 가까이 대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냐?”
손빈은 긴장했다.
“혹시 무슨 귀한 영약 같은 것입니까?”
어쩐지 좀 미심쩍다 싶었다. 그 당화련이 아무것이나 들고 올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귀한 영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솟아오른다.
“영약은 아니고, 술이다.”
노군은 병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는 신의에게 휙 던져 주었다. 신의는 병을 받더니 향과 잔류물을 꼼꼼히 살폈다.
“술 맞군.”
신의의 말에 손빈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귀한 것이라면 어쩔까 싶었는데 그냥 술이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노군은 신의에게 빈 병을 다시 건네받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백년주 같은데? 당문도 생각보다 통이 크군. 이걸 내주다니.”
“네?”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거…… 한 병 담그는 데 최소한 백 년 걸린다는 그 술이다.”
“배, 백 년요?”
범상치 않은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손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오랜 기간 천천히 숙성시키는 종류인데, 오직 당문에서만 비밀리에 만든다 하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놈이지. 제대로 숙성시키기가 힘들어 당문의 문주도 평생 한 번 맛볼까 말까 한다니, 어떤 면에서는 어지간한 영약보다 더 귀한 술이다.”
“그, 그런가요?”
“이걸 마시다니 운이 좋구나. 황학 진인께서도 생전에 딱 한 번인가 맛보셨다고 하던데.”
노군은 아쉬운 듯 혀를 쩝쩝거렸다. 술을 즐기지 않는 노군조차 미련을 가질 정도이니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만했다.
“비싼…… 겁니까?”
“비싸고 자시고 일단 구할 수가 없다니까? 이거 한 잔을 위해서라면 천금을 던질 애주가도 천하에 널렸을 거다.”
손빈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걸 맛도 보지 않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니, 천금을 마셔 버린 셈이 아닌가?
“저, 어서 나가시지요. 다들 기다릴 텐데.”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좋은 일이 없을 것을 깨달은 손빈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 나가자.”
어차피 빈 병을 들고 있어 봤자 없는 술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노군은 들고 있던 작은 옥색 자기병을 휙 던지고 밖으로 발을 옮겼다. 옥색 자기병은 소리도 없이 본래 있던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빈이 형!”
손빈이 나오자 서린이 냉큼 달려와 반색을 한다. 당문에 와서 숙소를 따로 받아서 그런지 아침마다 유독 반가워하는 서린이다.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빈은 노부인 당운영과 사수연, 당화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당월아가 보이지 않는다.
“월아 소저는요?”
사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곧 올 거예요. 아, 저기 오네요.”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면사를 쓴 가녀린 당월아 뒤로 다섯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를 덮어쓴 다섯 아이들은, 헐렁한 옷을 입은 채 처음 걸음을 배우는 것처럼 뒤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당월아 뒤를 줄줄이 따라오는 그 모습이, 마치 어미 뒤를 따르는 아기 새들 같은 모습이라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뭐야, 왜 다들 뭘 덮어썼어?”
“내가 시켰다.”
투덜거리는 노군에게 신의가 답했다.
“새살이 나오는 중이라 햇볕을 직접 쐬는 건 좋지 않아. 마차도 가능하면 사방이 막힌 것을 타라 했는데, 월아가 싫다더군. 그래서 마차에도 큰 천으로 차양을 달아 그늘을 드리우기로 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이들이 왜 저런 머리 덮개를 썼는지, 그리고 유독 통이 넓고 큰 옷을 입고 있는지 이해했다. 햇볕을 가리고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사이 당월아와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월아 소저.”
손빈의 인사에 당월아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그러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도 인사해.”
당월아 옷자락을 잡고 있던 아이 하나가 머뭇거리며 손빈 앞에 나섰다. 그러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여.”
어눌한 목소리로 아이가 말한다. 예전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천지차이라 손빈이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손빈은 아이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이가 흠칫 어깨를 떤다.
손빈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킁, 킁.”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빈의 손끝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손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늘 속에 빛나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손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슥.
아이는 손빈의 손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손빈은 그제야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비록 머리 덮개 위였지만.
“이 아이는 홍아예요.”
“홍아예여.”
홍아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말이 어눌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은 또렷하게 발음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이 종종거리며 손빈 앞에 나선다.
“이 아이는 청아, 그리고 황아, 회아, 녹아예요.”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들이민다. 손빈은 아이들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색이냐? 이름 참 간단하게도 지었다.”
이름의 유래를 알아차린 노군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손빈이 대신 답했다.
“아명이겠지요. 그렇지요?”
아명(兒名)은 일부러 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짓는 법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큰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월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사이 아이들은 손빈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구경을 시작했다.
사수연에겐 조금 겁을 내는 듯했지만 사수연이 웃어 주자 금방 옷자락에 얼굴을 부비고, 노부인 당운영이나 노군, 신의에게도 곧잘 고개를 숙였다.
다만 당화련 근처에는 아무도 가지 않았다. 당화련이 눈살을 찌푸리고 싫은 태를 노골적으로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경계심 내지는 적의를 표현한 것은 서린에게였다.
청아라 불리는 아이가 서린을 보더니 자세를 낮추며 이를 드러냈다.
“우으으으.”
서린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피식 웃었다. 그리고 청아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휙.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서린의 손은 매우 빨랐다. 하지만 청아 역시 움직임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청아의 헐렁한 소매가 서린의 손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갔다.
쉬릭, 딱콩.
어이없게도 청아의 소맷자락은 허공을 갈랐다. 서린의 손이 기묘하게 휘더니 청아의 머리 덮개 위에 꿀밤을 먹인 것이다.
“아!”
청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더니 금방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입을 비죽비죽한다.
“괜찮아.”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한마디에 청아가 억지로 눈물을 참는다.
청아는 고개를 들고 서린을 노려보았지만, 서린은 콧방귀만 뀌었다.
“서린아.”
손빈이 달래듯 말해 보았지만 서린은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마 서열을 확실히 정하려는 것 같아서, 손빈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 가자.”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게 싫은지 노군이 말했다. 노부인 당운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세요, 순랑.”
“크흠. 서, 서원에서 봅시다. 영매.”
이제와 새삼 부끄러운지 노군이 헛기침을 한다. 노부인 당운영은 이곳의 일을 정리한 후 서원으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다섯 아이들도 당운영과 함께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들은 당월아를 떠나려 하지 않고, 당월아는 손빈과 동행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몸조심해, 월아야.”
“응, 언니.”
당화련과 당월아도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당화련은 손빈을 한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못될 경우 각오하라는 듯이.
짐짓 헛기침을 한 후에 손빈은 당화련과 노부인 당운영을 향해 예를 표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아닐세. 우리야말로 정말 고맙네.”
당운영이 손빈의 손을 맞잡았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손빈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당화련은 짐짓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심정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음을 손빈을 알 수 있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곧, 또 뵙겠습니다.”
손빈은 말했다. 그렇게 손빈 일행은 다섯 아이와 함께 당문을 떠났다.
혈봉련의 회합이 열린다는 귀주성의 성도 귀양은, 장강을 넘으면 바로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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