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16)
낙향문사전-216화(216/494)
제216화. 대인(大人)2015.09.26.
철검파천 이홍계가 연회장에 돌아오면서 혈봉련 회합은 재개되었다.
이홍계의 얼굴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적어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정도로는 안정이 되었다.
그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남궁향과 흑사련의 무정검, 혈룡문의 젊은 문주와 혈봉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한편 혈룡문의 문주가 참가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철검파천 이홍계는 젊은 옥룡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혈룡문의 문주께서 참가해 주셔서 감사하오. 이 철검파천 이홍계가 예를 올리오이다.”
초로의 무인, 철검파천 이홍계가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젊은 옥룡은 대꾸조차 없다.
이홍계는 그의 무례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혈룡문이 하는 일이 본래 비밀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음을 떠올리고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제를 앞에 두고 변죽만 울리는 것은 본래 이 사람, 이홍계의 성격이 아니오. 그러니 우선 남궁세가의 뜻을 듣도록 하겠소.”
철검파천 이홍계는 번뜩이는 눈동자로 남궁향을 노려보았다.
“말씀하시게. 남궁세가의 뜻은 무엇인가?”
그가 최소한의 존대를 한 것은 손님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바스락.
남궁향은 조용히 일어나 단아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남궁세가가 이렇듯 정중하게 나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사실은 처음 등장할 때 이미 예를 표했지만, 그때는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주는 충격에 제대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는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권 님과 전대 뇌검 남궁천 님으로부터 이 일에 관한 전권을 받아 이 회합에 참석했습니다.”
낭랑한 남궁향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단아한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험상궂은 무인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은 그녀와 함께 온 다섯 명의 무인들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인하여 수많은 피가 흐르게 된 것을, 남궁세가에서도 심히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쿵.
“오해라고!”
묵직한 분노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그는 거력문의 문주, 흑철부 이벌이었다.
거력문은 혈봉련을 창설한 여섯 문파에 속한다. 흑철부 이벌 역시 강남 용봉지회에서 아들을 잃었고 남궁세가의 외청주 남궁렬이 호남을 평정할 때 문도 절반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무고한 젊은 생명들이 죽었다! 어찌하여 그것을 오해라 하는가!”
분노에 찬 흑철부 이벌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남궁향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흑철부 이벌을 똑바로 쳐다보며 남궁향이 말했다.
“만일 남궁세가가 무고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나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뭐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실 것입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아니, 우리 남궁세가 역시 그럴 것입니다. 이제 와서 진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으니까요.”
말하는 남궁향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칼을 뽑아 든 이상 결코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무림의 법이자, 혈봉련과 남궁세가 앞에 예정된 수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은 옳았다. 이제 와서 진실 여부에 집착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남은 것은 무력의 충돌뿐이다. 그것이 바로 무림의 법칙이다.
“허나 혈봉께서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대 뇌검 남궁천 님께서는 그 용기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남궁향의 시선이 혈봉을 향했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혈봉을 향한다. 덕분에 남궁향이 잠시 손빈을 쳐다본 것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첫째.”
남궁향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남궁향은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향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봉련을 대표하여 혈봉이 남궁세가를 방문할 것. 둘째, 혈봉련에서 모든 산채와 수채를 탈퇴시킬 것.”
꼿꼿이 선 남궁향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남궁세가의 뜻입니다.”
웅성.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혈봉이 남궁세가에?”
“산채와 수채를 탈퇴시키라고?”
남궁향의 말은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평소의 무자비한 남궁세가답게 무조건 항복이거나, 혹은 혈봉련을 해체하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의 조건을 들고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 이거 뭐야? 지금 우리를 짜르라는 거야?”
산채의 채주 중 하나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런 씨앙, 누굴 병신으로 아나…….”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날 듯 분위기가 삽시간에 흉흉해진다.
그러나 남궁향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헐헐.”
새된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에는 무시 못 할 공력이 담겨 있었다.
“아주 웃기는군.”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혈혼독조 왕세충이었다. 그는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비웃음을 피워 올리며 말했다.
“멀쩡한 문파들을 탈퇴시키라니, 이거야말로 무장을 해제하고 빈손으로 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응?”
“정말인가요?”
남궁향이 혈혼독조 왕세충에게 묻는다. 그 모습이 혈혼독조에겐 당돌하기까지 하니,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당연했다.
“산채와 수채가 탈퇴한다고 혈봉련이 무장해제라니,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산채와 수채 들은 그저 구경꾼일 뿐입니다. 남궁세가는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남궁향의 어조는 신랄했다. 그리고 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듣는 산채와 수채 채주들에겐 더없이 분노를 일으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군.”
욕설이 쏟아지기 직전, 혈혼독조 왕세충이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 안중에도 없는 산채와 수채를 굳이 탈퇴시키라는 조건은 왜 내거셨을까? 응? 대답해 보시지. 대단하신 남궁세가의 아가씨.”
채주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혈혼독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향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분명 조소였다.
“그것은 격의 문제입니다.”
남궁향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느냐는 듯한 어조였다.
“남궁세가가 산채와 수채 따위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지요. 그러니 남궁세가는 혈봉련이 최소한의 격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묵직한 목소리로 철검파천 이홍계가 말했다.
“남궁세가에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가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이냐!”
이홍계의 음성은 결국 분노에 찬 목소리로 변했다. 그의 분노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린다.
“평화입니다.”
철검파천 이홍계를 똑바로 쳐다보며 남궁향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아마도, 진실이지요. 덧없이 사라져 간 젊은 목숨들에 대한 진실.”
단아한 모습에서 뿜어 나오는 남궁향의 기개에는 무인들마저 뒤흔드는 박력이 담겨 있었다.
‘놀랍군.’
남궁향의 모습을 보며 무정검 등원영은 내심 감탄했다.
저런 기개는 그저 무공이 높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정의 고수들과 검을 나누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 사람, 그리고 그에 걸맞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만이 저런 기개를 가질 수 있다.
‘전대 뇌검 남궁천의 영향인가?’
전대 뇌검 남궁천의 기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연회장의 인물들 정도야 어찌 눈에 차랴?
무정검 등원영은 나름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혈봉께 남궁세가로 오라 했는가?”
혈봉 계파에 속한 누군가가 눈을 번득이며 남궁향에게 말했다. 그는 조가장의 장주, 흑웅도 조혁이었다. 귀주성에 자리 잡은 조가장은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혈봉에게 가장 큰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혈봉께서 안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나?”
“우리가 혈봉께 위해를 가할 이유가 있나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흑웅도 조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예컨대 이 사태가 모두 혈봉련의 날조였다는, 그런 자백을 강제로 받아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는 흉수를 시켜 혈봉께 위해를 가할 수도 있고.”
남궁향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흑웅도 조혁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진의가 의심받는 것은 대단히 모욕적이군요. 하지만 맞아요. 아직은 서로 최소한의 신뢰도 없지요. 그러나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영원히 미래에는 닿지 못해요.”
“그런 입에 발린 말이야 누군들 못 할까?”
흑웅도 조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여전히 남궁세가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의 보장이 필요하다.”
“보장이라…….”
남궁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공정한 중재를 부탁하면 될까요?”
“중재?”
“네, 그렇습니다. 공정한 비무를 위해 참관인을 초청하듯이, 양측에서 인정할 만한 대인께 중재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비무의 참관인은 그저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다. 공정한 비무를 보장함과 동시에,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다.
중재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분쟁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양측이 모두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인(大人)이라는 의미다.
작은 분쟁에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남궁세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당연히 매우 명예롭고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흑웅도 조혁이 말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통은 이런 경우 소림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소림은 남궁세가와 함께 무림맹의 일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남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고수를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침 이곳에는 강남 무림에 그 이름이 쟁쟁한 남악노군과 혈혼독조가 있고, 남궁세가도 가벼이 보지 못하는 흑사련의 대표도 있다.
“크흠.”
혈혼독조가 짐짓 헛기침을 한다. 반면 남악노군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이고, 흑사련의 대표 무정검 등원영은 고민의 빛이 역력하다. 이런 정도의 일을 받아들여도 되는지 갈등이 되는 것이다.
사박.
그러나 무정검 등원영의 갈등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남궁향이 몸을 돌려 남악노군을 향했기 때문이다. 혈혼독조의 얼굴이 뭐 씹은 듯 일그러지는데, 남궁향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시면 중재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손 대인?”
‘뭐?’
혈혼독조는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궁향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손 대인이시라면 전대 뇌검 남궁천 님께서도 충분히 납득하실 것입니다. 저는 감히 손 대인께 이번 일의 중재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사 차림의 청년에게 쏠렸다.
삽시간에 집중된 시선에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저기, 저는 그러니까…….”
“흘흘.”
옆에서 남악노군이 웃음을 흘렸다.
“그거 좋군. 나도 동의하는 바다.”
노군의 동의는 아마도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었기 때문이리라.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악노군이 동의했다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저 문사 청년이 누구기에 남궁세가의 남궁천이 납득하며, 남악노군이 동의를 자처하는가?
반면 흑사련에서 온 무정검 등원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
문사 청년이 탈혼도나 화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해졌다.
게다가 혹시나 해서 살펴본 그의 기세는 놀랄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무심코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것이 절대 범상치 않은 일임을 안다.
그는 ‘손 공자’의 말을 반드시 화사에게 전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좋습니다.”
혈봉이 작은 목소리로 남궁향에게 답했다.
“손 대인께서 중재를 맡으신다면 저는 기꺼이 남궁세가를 방문하겠습니다.”
남궁향의 제안에 혈봉이 승낙했으니 이제 결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혈봉의 말은 혼란에 종지부를 찍기는커녕 더 부채질하는 셈이 되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커져 가는데,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웃는 사람은 바로 혈혼독조 왕세충이었다.
“이거야 원, 아주 개판에 막장이로군. 아주 끝내주는 조합이야.”
혈혼독조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남궁세가를 이곳에 초청하다니 말이 되나? 이거야말로 적에게 속을 다 내보이는 꼴이 아니냔 말이야.”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그가 말했다.
“게다가 저런 애송이에게 중재를 맡기려 들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하긴 어린 계집들의 생각이니 유치할 수밖에 없겠지. 자기들끼리 대인이니 뭐니 하는 꼴이 아주 우습군.”
그는 쌍검귀 장쌍을 보며 말했다.
“이게 다 중심을 잡아 줄 어른이 없어서 그런 걸세, 어른이. 내가 혈봉련에 애정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니까 진작에 련주를 세웠어야지. 쯧쯧쯧.”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혈혼독조 왕세충은 짐짓 훈계조로 말했다. 쌍검귀 장쌍은 감히 대답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철검파천 이홍계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혈혼독조 왕세충이라 해도 이 정도의 막말은 모욕에 가깝다.
“지금 혈혼독조께서는…….”
그때 혈혼독조가 쌍검귀 장쌍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장쌍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감히 혈혼독조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이 정도면 올 때까지 온 상황이다.
“긴급한 제안이 있소!”
쌍검귀 장쌍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철검파천 이홍계가 노려보는 것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러 동도들께서 보다시피, 지금 혈봉련 회합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소. 혈혼독조 님의 지적처럼 이것은 모두 련에 어른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쌍검귀 장쌍은 소리쳤다.
“혈혼독조 님을 혈봉련 련주로 모실 것을 제안하는 바이오!”
갑작스러운 그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련주를 모시자니 혼란이 더욱 극에 달한 듯한 느낌이다.
“옳소이다!”
누군가 외쳤다. 사파 문파 중 하나였는데, 쌍검귀 장쌍이 눈치를 주자 벌떡 일어났다.
“혈혼독조 님을 련주님으로 모셔야 하오!”
“혈혼독조 님을 련주님으로!”
“혈혼독조! 혈혼독조!”
분위기를 파악한 산채와 수채의 채주들도 저마다 일어서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산채들의 맏형을 자처하는 오호채 채주 진괄도, 수채들의 대표를 자임하는 역발산 유력도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혈혼독조 왕세충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쌍검귀 장쌍이 그에게 약조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클클클.’
혈혼독조 왕세충은 웃었다. 남악노군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이, 혈혼독조 왕세충에게는 그 무엇보다 더 즐거웠다.
*
*
*
“아래, 시끄러워졌어여.”
연회장 옆, 파천문의 과거 위세를 보여 주듯 높이 솟은 누각 꼭대기에서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세찬 바람에 당장이라도 휩쓸릴 듯 위태했지만, 아이는 용케 날아가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작고 가녀린 여인, 당월아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가린 면사는 강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청아, 넌 천근추의 운용에 좀 더 집중해야 해.”
“네에.”
청아라고 불린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청아 곁에는 다른 네 명의 아이들도 있었는데, 다들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콰과곽.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아이가 쓰고 있던 머리 덮개가 벗겨졌다. 단발머리 정도로 자란 파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팔락인다.
“헤헤. 청아 머리 덮개 벗겨졌다.”
옆에 있던 녹아가 웃었다. 청아는 부끄러운 듯 얼른 머리 덮개를 썼다. 하지만 그 바람에 한쪽 발이 휘청하며 균형을 잃는다.
“아.”
청아가 아차 싶은 듯 소리를 내는데, 당월아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청아의 옷자락을 잡아 들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나 강아지의 뒷목을 잡아 올린 것 같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나지막한 음성으로 당월아가 말했다.
아무런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감격한 듯 그녀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쳐다본다. 그들을 걱정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해여.”
당월아는 청아를 내려놓았다. 혼났다고 생각하는지 청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처음이니까. 하지만 다음엔 실수하지 마.”
청아는 입술을 꽉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사뭇 대견해서 당월아는 청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의 눈동자에 부러움의 빛이 스친다.
파라라락.
거친 바람에 당월아의 옷자락이 펄럭인다. 그러나 당월아는 거센 바람도 아랑곳없이 누각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저 아래, 연회장의 한곳에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 아이들 역시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혈봉련의 회합이 열리는 파천문의 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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