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18)
낙향문사전-218화(218/494)
제218화. 법은 추상(秋霜)과 같이2015.10.03.
혈혼독조 왕세충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 애송이 문사 청년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왕세충은 힐끗 남악노군을 바라보았다.
정작 비도를 막아 낸 남악노군은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의 입가에 완연한 웃음을 감출 순 없었다.
“흥.”
노군을 경계하던 혈혼독조 왕세충은 짐짓 코웃음을 흘리며 손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법으로 나를 다스린다고? 네가 무슨 관의 인물이라도 되느냐?”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혈혼독조 왕세충은 손빈을 은밀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만의 하나 혹시 그가 변복(變服)한 관리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클클클, 이 무식한 놈이 하는 소리 하고는.”
남악노군이 대뜸 조롱하듯 말했다. 혈혼독조 왕세충의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노군은 옆자리의 손빈을 돌아보았다.
“거 봐라, 저놈은 못 알아들을 거라고 했지. 덕치와 법치를 말하는데 관리냐고 묻는 거 봐라.”
고대국가에서는 대부 이상의 귀족은 덕으로 다스린다 하여 범죄를 저질러도 뉘우칠 기회를 주었으나, 농노와 평민 들은 예외 없이 가혹한 형법으로 다스렸다.
이것은 이후 평민들도 예를 가르쳐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德治)와, 반대로 귀족들도 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법치(法治)의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본래 덕법논쟁이 나라의 통치 규례에서 시작되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 건 됐고.”
손빈의 말을 막아 버린 노군은 혈혼독조 왕세충을 향해 말했다.
“이 무지한 인생아.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건 이 아이가 관원이라는 뜻이 아니다. ‘너는 말도 안 통하는 인간 이하의 쓰레기이니 아주 혼쭐을 내 주겠다’라는 걸 아주 품격 있게 표현한 것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꿈틀.
혈혼독조 왕세충의 이마에 핏발이 솟았다.
“헐헐헐.”
왕세충은 짐짓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번들거리는 눈빛은 그가 이미 살의를 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야.”
손빈을 노려보며 혈혼독조가 말했다. 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손빈을 둘로 갈라버릴 듯 섬뜩했다.
“노군이 있다 하여 네가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옆에서 노군이 ‘봐라, 저놈이 날 놔두고 널 먼저 걸고넘어질 거라 했지’라고 소곤거리는 것을 짐짓 못 들은 체하며, 손빈이 말했다.
“착각이라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만.”
손빈은 살기 어린 혈혼독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남보다 조금 더 힘을 가졌다 하여 예와 법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큰 착각입니다.”
혈혼독조 왕세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손빈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훈계조로 말했다.
“칼 든 자들에게 예와 법이 무슨 상관이냐?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무림의 법도니라.”
“그래서 련주가 되겠다 하셨습니까?”
“그래.”
“연약한 아가씨를 겁박하면서까지 말입니까?”
묻는 손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본디 사파인 혈혼독조 왕세충은 웃음을 흘렸다.
“철없는 어린것들은 가끔 엄히 훈계해야 제 주제를 아는 법이니까.”
그 말에 혈봉을 보호하듯 막아선 귀견수라의 눈썹이 꿈틀 경련한다.
사실 귀견수라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났지만 제지하는 혈봉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매우 아픈 경험을 한 그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아시지요.”
귀견수라의 마음을 달래 주듯, 손빈의 신랄한 지적이 혈혼독조를 향해 날아갔다.
“본디 무림의 법도란 곧 무인의 도(道)이니, 당신 같은 자가 감히 논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곳의 련주가 되겠다면, 차라리 제가 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빠득.
혈혼독조 왕세충은 더 이상의 모욕을 버티지 못했다. 이제는 노군이 아니라 노군 할아비가 오더라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이 핏덩이 같은 놈이 오냐오냐 해 줬더니 감히…….”
이를 갈던 혈혼독조의 온몸에서 살기가 넘실넘실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슥.
혈혼독조는 자신의 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타난 그의 손끝에서는, 반짝이는 금속 가조각(假爪角)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조각(假爪角)은 본래 비파 같은 악기를 연주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혈혼독조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간 흉기였다. 그 흉기는 곧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시퍼런 기운을 뿜어냈다.
우우웅.
“헉! 혀, 혈조공이다!”
“혈조공!”
혈혼독조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기운을 본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지나는 곳마다 피를 뿌린다는 혈혼독조의 성명절기, 혈조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저것이 혈조공이라고?”
절정고수의 성명절기를 직접 보기란 매우 어렵다. 그저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가끔 들을 뿐이니, 같은 무림인들에게도 절정고수들의 무공은 마치 구름 위의 신선들 이야기와 같은 것이었다.
저벅.
손끝에서 일렁이는 기운과 함께 혈혼독조 왕세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씹듯이 내뱉었다.
“단언컨대, 내 오늘 반드시 너를…….”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져 있던 노군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턱.
혈혼독조 왕세충의 걸음이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혼독조 왕세충은 눈을 부릅뜨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커헉.”
의외의 사태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노군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달칵.
누군가 일어섰다. 옥색 부채로 얼굴을 가린, 마치 그림 같은 자태의 그 귀공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박, 자박.
“반드시 너를. 그리고 뭐?”
그는 바로 혈룡문의 젊은 문주였다. 천천히 걸어 나온 그는 혈혼독조 왕세충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꺽, 꺼억.”
혈혼독조 왕세충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 부근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입은 보기 흉하게 벌어지고,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던 기세는 이미 그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촥.
젊은 옥룡은 부채를 접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그 얼굴에 서리처럼 싸늘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 따위가.”
슥.
접힌 옥빛 부채가 위로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은 혈혼독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퍼억.
“컥!”
젊은 옥룡의 손에 들린 옥빛 부채는 혈혼독조의 입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혈혼독조의 얼굴이 돌아가고 단번에 그의 입가가 피로 물든다.
“감히.”
퍽.
“누구를.”
퍼억.
“어찌한다고?”
팍.
피가 튀고 치아가 부서졌다. 가조각에 내력을 실을 정도의 절정고수, 혈혼독조가 젊은 옥룡의 부채 아래서 무기력하게 유린당한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너무나 원초적인 폭력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 가학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사파의 무인들조차 사색이 될 정도로, 폭력은 그 잔혹한 맨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빡, 빠악.
혈혼독조의 눈동자엔 이미 초점조차 사라져 있었지만 옥빛 부채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이 일방적인 구타는 결국 피범벅이 된 혈혼독조의 몸이 기울고서야 끝이 났다.
쿵, 털썩.
이미 한참 전에 정신을 잃은 혈혼독조의 몸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가 연회장 바닥으로 천천히 번져 간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서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 이래서 아이들에게 안 좋다고 했구나.”
그 말에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서린은 물론이고 노군이나 사수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노기마저 느껴지는 것은, 젊은 옥룡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나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쯧.”
젊은 옥룡은 자신의 부채에 튄 혈혼독조의 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월.”
“네!”
혈룡문의 절정고수, 한월이 즉시 젊은 옥룡 앞에 부복한다. 젊은 옥룡은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촥.
“치워라.”
한월은 쓰러진 혈혼독조의 뒷덜미 옷자락을 잡아 들어 올렸다. 피로 엉망이 된 혈혼독조가 마치 인형처럼 덜렁거린다.
휙.
즉시 한월이 사라지고, 피로 물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젊은 옥룡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사파 연합이 앉은 자리였다.
“헉.”
쌍검귀 장쌍은 물론, 사파의 무인들이 헛바람을 삼키며 몸을 움찔했다.
혈혼독조의 피가 얼룩진 붉은 부채 너머로 싸늘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기생오라비 같던 젊은 옥룡의 첫인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감히 내 손님께 무례를 범해?”
젊은 옥룡의 눈동자가 빛났다. 사파 문주들과 채주들은 가슴이 조여 오는 듯한 기세를 느꼈다.
“누구냐? 그 쓰레기를 련주로 삼으려던 놈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상대는 저 혈혼독조를 피 떡으로 만들어 버린 사내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저, 저저, 저, 저희는…….”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컥.”
그의 부릅뜬 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고통으로 입이 벌어졌다. 새파랗게 질린 그의 안색이 검게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쿵.
그는 혈혼독조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젊은 옥룡이 손을 댈 필요조차 없었다. 사파 문주들과 채주들의 얼굴에 죽음의 절망이 서린다.
“꺼져라.”
나지막한 젊은 옥룡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귀양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 바로 너희가 죽는 날이다.”
그것은 심판의 선고인 동시에 자비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사파 무인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연회장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밖으로 도망쳤다.
“가, 가자!”
쌓였던 둑이 무너지듯 사람들이 삽시간에 몰려 나갔다. 의자가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발이 걸려 자빠지는 자도 있었다.
우당탕.
“어이쿠.”
흉악한 인상의 그들이 나뒹구는 모습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가면극 같았지만,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썰물처럼 사파 무인들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혈룡문의 사람들과 하얗게 질린 혈봉 계파의 무인들뿐이다.
찌푸린 눈으로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던 젊은 옥룡은 가볍게 뒤로 돌았다.
사박.
젊은 옥룡이 다가오자 혈봉 계파의 무인들이 움찔한다. 그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고, 젊은 옥룡은 걸음을 옮겨 손빈 앞에 다가섰다.
탁.
피로 더럽혀진 옥빛 부채가 접혔다. 젊은 옥룡은 부채를 두 손으로 맞잡고 손빈에게 예를 표했다.
“귀한 손님께 못 볼 꼴을 보여 드렸습니다.”
손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친 것 같군요.”
“그럴 리가요.”
젊은 옥룡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방금 전의 피 튀기던 광경조차 잊을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그는 문득 손빈을 향해 물었다.
“혹시 제가 과했다 생각하시는지요?”
“아닙니다.”
손빈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었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지요.”
혈혼독조는 피로 물들긴 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는 제대로 밥을 씹을 수 없게 되겠지만 말이다.
너무 무자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이제까지 저질러 온 악행을 생각하면 오히려 대단히 자비로운 처사다.
물론 손빈은 관원도 아니고, 그를 벌할 생각도 없었지만.
저벅, 저벅.
어느새 돌아온 한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쓰러진 사파 한 명을 들고 나간다. 의식을 잃은 그 무인 역시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렇습니까?”
눈을 반짝이며 젊은 옥룡이 묻는다. 조금 전 그의 행동은 사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사파의 무인들조차 그 피 튀기는 광경에 안색이 변했다. 손빈이 평범한 문사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러나 손빈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법으로 다스릴 것을 정했다면 결코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법령이 추상같이 서지 않으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젊은 옥룡은 소리를 높여 웃었다.
촥.
피로 물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젊은 옥룡은 손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련주를 하겠다 하셨지요?”
“아, 그건…….”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차라리 내가 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사적인 표현이다.
“비유컨대 그렇다는 뜻일 뿐,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젊은 옥룡은 가만히 부채를 저었다.
“아쉽습니다. 저는 손 공자님을 지지할 의사가 충분히 있었는데요.”
그 말에 연회장에 남아있던 혈봉 계파 무인들의 안색이 변한다. 혈룡문이 지지를 한다면 혈봉련의 련주 자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손빈이 의례적으로 말했다. 젊은 옥룡은 손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후후.”
젊은 옥룡이 웃음을 흘렸다.
“제게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은…… 귀찮다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하하하.”
젊은 옥룡이 크게 웃는다.
“역시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부채 너머로 젊은 옥룡의 눈동자가 빛났다. 손빈을 잠시 쳐다보던 젊은 옥룡은 고개를 돌려 철검파천 이홍계를 보았다.
“회합을 계속 진행하시오.”
“아.”
철검파천 이홍계는 그제야 정신을 수습했다. 혈혼독조의 비도를 시작으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탓이다.
“고맙소이다, 손 공자.”
이홍계는 손빈에게 정중한 예를 표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손빈이라 여긴 탓이다.
“그건 제가 아니…….”
손빈이 손을 내저으려는데 노군이 얼른 말을 끊는다.
“자, 늦었으니 빨리빨리 하자. 이젠 뭐가 남았냐?”
철검파천 이홍계는 남아 있는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혈봉 계파의 사람들은 다들 방금 전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이다.
“음, 그러니까…….”
사박.
작고 여린 아가씨, 혈봉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남궁향 소저와 제가 손 대인께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혈봉 금사련이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귀견수라의 얼굴엔 불쾌감이 가득했다. 앞에 선 혈봉의 표정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불편하신가요?”
혈봉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손빈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남궁향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남궁향이 손빈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괜찮겠습니까?”
“먼저 중재를 부탁드린 건 저예요.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요.”
손빈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제게는 과분합니다만, 그리하지요.”
그 한마디에 남궁향과 혈봉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다.
“감사합니다, 손 공자님.”
“감사합니다, 손 대인.”
사락.
꽃같이 아름다운 남궁향과 혈봉 금사련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손빈에게 예를 올렸다.
손빈은 갑작스러운 예에 당황하고 그 모습을 쳐다보는 사수연은 미소를 짓는데, 서린은 손빈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낸다.
“우리 또 어디 가는 거예요?”
“그래.”
손빈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먼 곳이야.”
피로 물든 옥빛 부채로 표정을 가린 젊은 옥룡의 시선은, 그런 손빈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
*
*
“들었지?”
당월아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세찬 바람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묻으려 했지만, 그 음성을 듣지 못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함부로 힘을 써서는 안 돼. 하지만 벌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로 주저하지 마.”
다섯 아이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인륜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홍아가 손을 들고 묻는다. 손빈이 ‘인륜을 아는 자는 덕으로 교화한다’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당월아는 가만히 홍아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홍아의 눈동자는 한 점 그늘 없이 당월아를 향하고 있었다.
“너희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
“우웅?”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당월아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자, 이제 숙제할 시간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지?”
“네!”
합창하듯 아이들이 말했다. 당월아는 다섯 아이들을 쳐다보며 가만히 말했다.
“그럼 시작해.”
파박.
당월아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곳이 까마득히 높은 누각 지붕이라는 것도 아이들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휙, 휘릭.
다섯 아이들은 서로 경쟁하듯 앞다투어 귀양의 밤거리 사이로 흩어졌다. 그들이 뒤쫓고 있는 대상은 바로 도망치듯 연회장을 떠난 사파 연합의 여러 무인들이었다.
“너희는 강해져야 해. 무지한 이 세상은 절대 너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다섯 아이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당월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너희는 행복해질 거야.”
당월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환한 미소였다.
“반드시.”
그날 귀양의 밤하늘엔 온 세상을 덮을 것 같은 커다란 달이 떠올라 있었다.
∴
다음 날, 그렇지 않아도 붐비던 귀양의 의원들은 갑자기 급한 환자를 새로 받아야 했다.
뼈가 부러진 자, 탈이 난 자, 내상을 입은 자 등 부상의 종류도 다양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제 혈봉련 회합에 참가했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혈봉련에 속하지 않은 사파 문파와 산채, 수채의 무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회합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 목숨을 잃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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