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25)
낙향문사전-225화(225/494)
제225화. 소수(素手)와 빙검(氷劍)2015.10.27.
핏.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검희의 귓가를 스친다. 제법 아슬아슬한 거리였지만 검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탓.
검희는 땅을 박찼다. 그녀의 두 팔엔 아직 정신을 잃은 화사가 안겨 있었다.
파라락.
화사의 머리카락과 옷깃이 바람에 펄럭였다. 검희 자신의 머리카락 역시 흑색 깃발인 양 허공에 나부낀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위협하듯 좌우로 스쳐 지나가고, 석양에 물든 작은 개울과 언덕이 그녀의 뒤로 빠르게 사라진다.
탓.
검희의 맨발이 또 다시 땅을 박찼다. 화사를 안은 검희는 석양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검희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원 동남쪽은 바다로 막혀 있는 데다 대도시 광주가 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달리는 것도 좋지 않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자칫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파바박.
화사와 검희의 옷자락이 소리를 내며 펄럭인다.
청원을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 금방이라도 저물 것 같은 태양은 검희의 하얀 얼굴마저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슥.
무표정한 얼굴로 내달리던 검희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엉, 콰직.
무엇인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희의 몸은 위로, 그리고 화사의 몸이 아래로 쏘아져 나갔다.
콰앙!
화사는 커다란 나무들을 부수고 숲으로 처박혔다.
그사이, 검희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빙글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탁.
검희의 맨발이 땅에 닿았다. 검희는 화사가 내리꽂힌 나무들 사이를 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석양을 바라보았다.
살짝 일그러지는 검희의 눈썹.
하늘은 아직 환했다. 그러나 어느새 태양은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부스럭.
나무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
검희는 몸을 돌렸다. 텅 비어 있던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검 한 자루를 소중히 품고 있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아름드리나무 둥치가 검희를 향해 날아왔다. 검희는 가볍게 허리를 뒤로 젖혔다.
부웅.
나무 둥치는 검희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찔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검희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콰자작.
빗나간 나무둥치가 다른 나무와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검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세웠다. 빙검은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자박.
부러진 나무들 사이에서 화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는 이미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여기저기 찢겨 나갔다. 화사는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다른 손으로는 아름드리나무를 짚고 있었다.
“너, 누구야?”
눈살을 일그러뜨린 채로 화사가 말했다.
“검희.”
검희가 답했다. 화사는 그 말을 들으며 무언가 기억해 내려는 듯 인상을 썼다.
“검희, 검희…….”
생각하던 화사는 곧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아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네 이름은 아주 생소한걸.”
“넌 날 얼음덩이라고 불렀어.”
“얼음덩이.”
화사는 피식 웃었다.
“어울리는 이름이네. 하지만 마찬가지야. 기억 안 나.”
“상관없어.”
검희가 말했다.
“난 널 막으러 온 거니까.”
“그래? 어쩐지.”
화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화사의 온 몸에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우욱.
“재수 없는 냄새가 나더라.”
콰직.
화사의 손에서 아름드리 나무둥치가 마치 종잇장처럼 뜯겨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손. 그것은 바로 소수(素手)였다.
붕.
큼지막한 나뭇조각이 검희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검희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해 냈다.
그러나 나뭇조각이 가린 시야 뒤로는 이미 화사의 소수가 검희를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스릉.
반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싶은 다음 순간.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숲을 울렸다.
하얗게 빛나는 화사의 소수는 검희의 빙검에 가로막혀 있었다. 손과 검이 충돌했는데 마치 돌이나 쇠가 부딪힌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큭큭.”
우우우웅.
화사의 햐안 손이 나지막이 울음을 흘린다. 가늘고 고운 그 손 뒤로 화사가 웃었다.
“좋은 검이네. 그리고.”
사락.
화사는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았다.
“아주 달콤한 내공이야.”
후우욱.
어느새 화사의 손에서는 하얀 빛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검희는 자신의 내력이 빙검을 통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검희는 기합을 내지르며 자신의 내력을 일시에 끌어 올렸다.
“타하!”
파앙!
폭발처럼 터져 나오는 검희의 기세. 그 엄청난 압력에 화사의 흡정공은 순간적으로 검희의 빙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타닷.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희가 뒤로 물러섰다.
“크큭.”
화사가 웃었다. 뒤로 몇 발 물러선 그녀는 놀랍다는 듯 자신의 하얀 손을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한 감각이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검희를 보았다.
“흡정공이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 빠져나간 건 아주 좋은 판단이야. 하지만 그런 임기응변이 얼마나 갈까?”
화사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손끝을 핥았다.
핏.
소수로 변한 화사의 손끝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다. 그녀 자신의 신체도 예외는 아니어서, 화사의 혀끝이 베이고 피가 흐른다.
“이미 해가 지고 있거든.”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면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달이 뜰 거야. 그러면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해.”
희게 빛나는 화사의 소수. 그리고 붉은 입술에 흐르는 그녀 자신의 피.
화사는 웃었다. 어둠 가운데 번져 가는 그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섬뜩했다.
그러나 검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반검, 빙검을 손에 들고 화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임기응변.”
“뭐?”
무슨 소리냐는 듯 화사가 반문했다. 그러나 검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네가 말한 임기응변. 어떻게 쓰는지 알아?”
화사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게 무슨…….”
“역시.”
검희의 입가에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스쳐 지났다.
그 미소가 너무나 신경을 거슬려서, 화사의 눈매가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진다.
“바보는 변하지 않네.”
“뭐?”
자박.
검희는 한 발을 가만히 내디뎠다.
쩌저적.
그녀의 발이 닿은 곳이 하얗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지표면뿐만 아니라 풀과 꽃잎들마저 얼어 가더니, 어느새 그녀 주변으로 하얗게 서리가 번져 간다.
“나를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박.
검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해 봐. 바보 꽃뱀.”
후우우웅.
빙검이 울었다. 반으로 잘린 그녀의 검에서 일렁이는 한기가 더없이 도발적이다.
“그것 참 이상하네.”
화사가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모욕적인 검희의 말에도 불구하고 화사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너와는 꼭 한 번 이렇게 해야 할 것 같거든?”
사박.
화사 역시 한발 앞으로 나섰다.
“이 멍청한 얼음덩어리야.”
빠득.
섬뜩한 소리가 화사의 입에서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날카로운 기세가 화사의 온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악.
산발한 그녀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듯 허공에 떠오르고, 하얗게 물들어 있던 화사의 두 손이 그 창백한 빛을 더한다.
콰과각.
두 여인의 기세가 서로 충돌하며 고요하던 숲은 순식간에 폭풍을 만난 것처럼 되었다.
나뭇잎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흙먼지와 풀잎이 비산한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먼저 움직인 사람은 검희였다.
“상효일절(霜曉一節).”
후웅.
거대한 검이 그녀의 반검 위에 환상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하늘로 솟은 하얀 검신. 무엇이든 짓이겨 버릴 것 같은 그 압도적인 모습 앞에서도 화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나, 신기한 재주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검희의 거대한 백색 검신을 화사는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걸로 내 몸을 뜨겁게 해 줄 수 있겠어?”
사뭇 도발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화사가 말했다.
몽롱한 눈빛과 윤기 흐르는 입술이 사뭇 기루의 기녀인 양 색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보이는 대로가 아님을 검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곧 알려 줄게.”
검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부우욱.
거대한 백색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자신을 향해 주저 없이 짓쳐 내리는 그 칼날을 보며 화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부디.”
화사의 손이 하얗게 백열하기 시작했다. 이미 코앞까지 다다른 백색 칼날을 보며, 화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짜릿하게 해 주길 바라.”
콰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빛이 숲을 집어삼켰다.
***
따가닥, 따가닥.
손빈 일행이 탄 마차는 어두운 관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고삐를 잡은 노군에게 손빈이 묻는다.
“이 정도야 문제도 아니지.”
노군은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이 좋지 않아 손빈은 사뭇 걱정이 되었다.
사실은 이전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하지만 노군은 늦더라도 차라리 오늘 안에 서원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광주까지 이어지는 관도도 있고 해서, 일행은 노군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덕분에 이렇게 어두운 밤까지 마차를 달리게 된 것이다.
따가닥, 따가닥.
손빈은 힐끔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다섯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의외로 당월아가 아닌 사수연이 별을 보며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당월아나 서린까지 눈을 빛내며 열심히 사수연의 말을 경청한다.
그 모습에 손빈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오른다.
“신의 놈은 자냐?”
노군이 흘깃 손빈을 보며 묻는다.
“안 잔다.”
대답은 신의가 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던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군에게 말했다.
“넌 한눈팔지 말고 마차나 몰아라. 네 덕에 이리 고생들을 하는 것이니.”
노군은 신의의 말에 반론을 펴지 못했다.
사실 노군이 빨리 가자고 한 이유는 서원에서 기다릴 노부인 당운영에 대한 걱정도 있기 때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앞뒤 분간도 못하니……. 쯧.”
신의는 혀를 찼다. 노군이 발끈해서 말한다.
“보고 싶어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너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보면 이 애틋한 마음을 알 게다.”
“애틋 같은 소리 하네.”
신의는 피식 웃었다. 노군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핏대가 솟았다.
“네 이놈, 나중에 여자 만나서 변하기만 해 봐라. 오늘의 이 굴욕을 단단히……. 응?”
감정을 실어 말하던 노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거 무슨 소리냐?”
“소리?”
신의가 눈살을 찌푸린다. 난데없이 무슨 이야긴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노군은 바로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웠다.
“워, 워!”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천천히 멈춰 섰다.
신의는 물론 아이들과 당월아, 사수연도 노군을 쳐다본다. 그러나 노군은 아랑곳 않고 마부석에서 일어나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둥.
아주 작은 울림이 어둠 속에서 들렸다. 마치 멀리서 누군가 북을 두드리는 듯 희미한 소리였다.
“들었지?”
노군이 말했다. 신의와 손빈을 빼고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가 있군요.”
손빈이 말했다.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빈에게 묻는다.
“너도 들었느냐?”
“정확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손빈이 답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입니다.”
손빈의 시선은 어둠 저편을 향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언젠가 겪어 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가자.”
노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즉시 고삐를 당겨 마차를 옆길로 돌렸다.
덜컹, 덜컹.
관도를 벗어나자 바로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꽉 잡아!”
노군의 외침은 아마도 신의와 손빈을 향한 것이리라.
갑자기 흔들리는 마차에 손빈도 정신이 없는데, 문득 누군가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싼다.
‘어?’
손빈이 고개를 돌리자 사수연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손빈을 잡아 준 것이다.
“아, 저는 괜…….”
덜컹.
마차가 다시 한번 흔들린다. 덕분에 손빈은 ‘괜찮다’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것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살짝 붉어진 사수연의 모습 탓인지도 모른다.
“크흠.”
짐짓 헛기침을 하며 손빈은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신의는 서린이 붙잡고 있었고, 다섯 아이들은 어느새 당월아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에 불안 같은 것은 없었다.
“헤헤.”
붉은 머리의 홍아가 웃는다. 그 모습에 손빈도 웃었다. 갑작스러운 밤중의 질주가 아이들에겐 그저 재미있는 놀이인 것만 같았다.
덜컹, 덜컹.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달리던 마차는 금방 숲 어귀에 도착했다. 그때쯤엔 숲에서 들리는 폭음과도 같은 소리를 일행 모두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콰앙.
“너희는 여기 있어라.”
노군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노군의 말을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수연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손빈에게 말했다.
“손 공자님은 여기서…….”
그대로 몸을 날리려는 사수연에게 손빈이 말했다.
“저도 가야 합니다.”
사수연이 멈칫했다. 그녀는 손빈을 돌아보았다.
손빈의 눈빛은 단호했다. 사수연이 잠시 주저하는데, 뒤에서 당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누면 오히려 좋지 않아요.”
당월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어차피 갈 거라면, 같이 가요.”
청아와 홍아는 벌써 마차에서 뛰어내렸고, 신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은 없는 듯하다.
살짝 한숨을 섞어서 사수연이 말했다.
“좋아요.”
당월아의 말대로 어차피 간다면 같이 가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 손빈이 가겠다고 한 이상, 사수연은 그 뜻을 꺾지 못하니까.
달칵.
일행이 전부 마차에서 내렸다. 손빈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데 묵직한 충격음이 숲 가운데서 울려 나왔다.
쿠웅.
제법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도 그 진동이 이곳까지 전해진다. 손빈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가죠.”
사수연이 앞장서고 일행은 노군이 사라진 숲 속으로 들어섰다.
폭음과 진동이 점점 심해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 부서진 아름드리나무들이 일행 앞을 막아섰다.
그곳에 노군이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어르신.”
손빈이 나지막이 부른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쿵!
폭음과 함께 나무둥치가 터져 나갔다. 사수연이 즉시 손빈 앞을 막아선다.
“오호호호. 아주 재미있네. 안 그래?”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부서진 나무둥치 사이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과 찢어진 옷자락. 도발적인 몸매를 가진 그 여인의 눈빛은 사수연에겐 제법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얗게 빛나는 두 손만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소수!’
사수연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자박.
여인은 부서진 잔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비웃는 듯한 미소와 도발적으로 내민 가슴. 그녀는 분명히 화사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너, 왜 끝을 내지 않으려는 거지? 설마 날 죽이고 싶지 않은 거야?”
사락.
하얀 옷자락이 팔락이듯 내려앉았다. 화사의 맞은편에 소리도 없이 내려선 사람은 바로 검희였다.
“말했잖아.”
자박.
작은 맨발이 한 걸음 움직이자 주변에 하얗게 서리가 번져 간다. 반으로 잘린 검을 땅을 향해 뻗은 검희는 화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널 막겠다고.”
“그래? 하긴, 그 상효일절인가 하는 거라면 충분히 날 막을 수도 있겠지.”
화사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방금 검희의 일 검에 날아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화사가 말을 이었다.
“네 그 재주, 어쩐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화사의 말에 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희의 눈빛에 무엇인가 스쳐가는 것을 사수연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후후후. 부정하지 않네?”
검희를 쳐다보며 화사가 웃었다.
“자, 그럼.”
후우우욱.
화사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전에 항주에서 사수연과 당월아를 상대로 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기세였다.
지켜보던 노군의 안색이 변하고, 사수연 역시 몸을 낮추며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한 손은 손빈을 제지하듯 뒤로 뻗었다.
“간다?”
언뜻 들으며 아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의 결과는 교태 서린 음성과는 전혀 달랐다.
슥.
화사는 가볍게 한 손을 뻗었다.
아무런 예비 동작조차 없는 간단한 움직임. 그러나 그녀의 하얀 손이 어둠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손 그림자가 검희의 시야를 온통 뒤덮었다.
쩌저적.
검희의 안색이 변했다. 검희는 지체 없이 몸을 솟구쳤다.
탓.
가녀린 검희의 몸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손 그림자가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쿠우웅, 콰지직.
아름드리나무들이 수수처럼 부서져 나가고 묵직한 진동이 대지를 울린다.
사수연은 물론이고 노군의 안색마저 변했다. 모습은 분명 달랐지만 화사의 거대한 일장(一掌)은 검희의 상효일절과 무척이나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탓.
검희가 다시 땅에 내려섰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굳은 검희의 표정과 찢어진 옷자락은 조금 전 화사의 한 수가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때?”
낭랑한 목소리로 화사가 말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빛 아래 번뜩였다.
“이래도 아직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검희를 내려다보며 화사가 도도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멍청한 얼음덩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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