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27)
낙향문사전-227화(227/494)
제227화. 동병상련(同病相憐)2015.11.03.
화사가 쏟아 낸 백색 장영(掌影)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어느 한 곳의 빈틈도 없이 사방을 뒤덮는 화사의 새하얀 손그림자. 그것은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좌우에서 화사를 향해 짓쳐 들던 노군과 사수연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노군도, 사수연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콰쾅.
두 번의 폭음과 함께 노군과 사수연이 뒤로 몸을 날렸다. 이미 예상하기라도 한 듯 그들은 너무나 가볍게, 그리고 간단히 뒤로 몸을 뺐다.
후우웅.
무수한 화사의 백색 장영은 멀리 뻗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화사는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흥, 어딜 내빼려고…….”
화사가 날카롭게 외치며 사수연을 향해 일장을 뻗으려는 순간, 무엇인가 땅에 바짝 붙어서 화사를 향해 돌진해 왔다.
파밧.
마치 땅 위를 나는 듯 빠른 움직임. 그는 바로 서린이었다.
“아하, 이번엔 늑대 새끼야?”
화사는 조소를 날리며 즉시 서린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후욱, 콰앙.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서린의 모습을 감추어 주었을 뿐이다.
“얍!”
파앗.
어느새 바로 코앞에 도달한 서린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화사를 향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즈음엔 화사의 하얀 손도 이미 서린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쉬익.
창백한 여인의 손이 서린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 하얀 손에 닿은 것은 짐승의 꼬리처럼 부드러운 불진, 홍진만리였다.
휘릭.
불진은 화사의 소수에 자연스럽게 감겨들었다.
충격도 없고 폭음도 없었다. 공포의 소수공이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여인의 손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불진이 마치 굳건한 형틀인 양 화사의 한 손을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린의 불진은 결코 파괴적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내력이 보기와 달리 대단히 깊고 웅후하여 화사로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웅.
화사는 즉시 흡정공을 운용했다. 하지만 서린의 불진은 흡정공조차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이, 씨. 이거 안 놔?”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안 화사는 짜증을 내며 다른 손으로 서린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서린이 그보다 빨랐다.
“호잇!”
장난이라도 치듯 서린은 화사의 손을 휘감은 불진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화사는 일순간 휘청하고 균형을 잃었다.
“미안, 누나.”
화사의 눈앞에서 서린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형이 하라고 했거든.”
부욱.
화사의 가슴을 향해 갈퀴같이 웅크린 서린의 손이 짓쳐 든다. 그 손끝에 서린 기운은 화사라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머, 엉큼하네. 어딜 만지려고 그래?”
살짝 눈을 흘기며 화사는 몸을 비틀었다. 농담 같은 말에 장난 같은 몸짓이었지만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찌익.
화사의 옷자락이 서린의 손가락에 찢겨 나가고 맨살이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화사는 이미 서린의 측면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한 손이 묶인 채였어도 화사의 몸놀림은 마치 한 마리 꽃뱀처럼 유연하다.
“못된 애는 혼나야지?”
후우웅.
뒤이어 서린의 옆으로 짓쳐 드는 화사의 새하얀 손. 서린은 즉시 불진을 풀고 뒤로 몸을 뺐다.
탓.
“어딜 가려고? 누나랑 놀아.”
조롱 섞인 화사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서린에게 바싹 다가왔다.
훅.
섬뜩한 느낌과 함께 화사의 소수가 서린의 얼굴을 향해 아래에서 위로 짓쳐 든다.
서린은 즉시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파삭.
소수는 서린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서린의 앞머리 몇 가닥이 화사의 손끝에서 타 버린 종잇장처럼 바스러진다.
“후후. 어때? 이 버릇없는…….”
화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너무 일렀다.
“위쪽이야, 누나.”
서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
화사는 무엇인가를 감지하고는 즉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라락.
밤하늘 가득한 달 속에서 면사를 쓴 가녀린 여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달빛 속에서 여인의 그림자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마치 달에서 내려오는 월궁항아인 듯한 그 여인의 손끝에는, 소검 한 자루가 섬뜩한 초록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칫.”
그 기운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리라는 것을 화사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가볍게 혀를 찬 화사는 즉시 서린을 향해 한 손을 내쳤다.
콰앙.
맨손의 충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충격음. 서린은 기다렸다는 듯 반탄력을 이용하여 거리를 벌렸다. 애초부터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부우욱.
비단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화사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초록빛 기운. 화사는 제자리에서 빙글 몸을 회전하며 그대로 한 손을 머리 위로 내질렀다.
콰앙!
초록빛 검기와 화사의 하얀 손이 충돌했다.
“큭.”
푹.
화사의 신음과 함께 그녀의 두 발이 땅을 한 치가량 파고 들어갔다. 당월아의 소월은 그 짧은 길이와 달리 무시무시한 힘으로 화사를 짓눌렀다.
내력을 따진다면 당월아보다 검희가 더 위다. 그러나 검희나 사수연의 내력은 화사와 같은 음한(陰寒)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큰 충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반면 서린이나 당월아, 노군은 다르다. 특히 당월아의 독공은 화사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때문에 화사는 검희나 사수연을 상대할 때보다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 짜증 나는 암고양이가!”
이를 갈던 화사는 당월아를 향해 다른 손으로 일장을 쳐 올렸다.
쩌저적.
화사의 하얀 손은 당월아의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일장을 쏘아 냈다. 당월아는 즉시 위로 솟구쳤다.
퍼엉.
화사의 거대한 손그림자가 밤하늘로 헛되이 솟고, 당월아는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팔락.
흩날리는 옷자락과 함께 당월아는 깃털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하지만 화사는 그 모습을 볼 틈이 없었다. 두 자루의 검, 소령과 미명이 또 다시 그녀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과곽.
“아, 진짜!”
파박.
화사는 두 손을 한번 교차시켰다가, 그대로 두 사람을 향해 좌우로 내질렀다.
카앙.
새하얀 화사의 두 손이 두 자루의 검을 막아 냈다. 그러나 소령도, 미명도 이번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키이이잉.
우우웅.
두 자루의 검이 기세를 더하는 것과 함게 화사의 두 손이 하얗게 백열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럴 거야?”
화사가 사수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반대편에 노군이 있지만 화사는 그쪽으론 시선도 돌리지 않는다.
“아하, 저 오빠 때문에 그래?”
놀라는 듯, 혹은 놀리는 듯 화사가 은근한 눈빛을 한다.
“걱정 마. 뺏어 가진 않으니까. 그냥 잠깐만 가지고 놀다가 돌려줄게. 뭐, 조금 망가질지도 모르지만.”
노군과 사수연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화사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그 모습에 사수연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군과 사수연을 상대하면서 화사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다.
밤은 그녀의 세상이라던 노군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사에서 제일 강한 두 여인 중 한 명이라더니.’
경박해 보이는 언행과 달리 화사는 검희의 상효일절을 막아 내고 노군과 사수연, 그리고 서린과 당월아까지 상대했다.
비록 검희나 노군에게 살의가 없었다 해도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 정도라면.’
어쩌면 화사가 검희보다 더 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붉게 물든 화사의 눈동자를 보고 사수연은 곧 그 생각을 버렸다.
화사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피로 물든 눈동자와, 그녀의 온몸을 내달리는 검붉은 핏줄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날 막을 거야?”
재잘거리듯 화사가 묻는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수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화사의 한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한계가 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시 바보는 변하지 않아.”
문득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사는 고개를 들었다.
“널 막는 건, 나라고 말했잖아.”
파라락.
검은 밤하늘, 그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검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소리를 낸다. 그리고 화사는 검희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상효일절.”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검희의 반검이 순식간에 거대한 검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쩌저적.
대지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백색 검. 푸르게 빛나는 그 검극이 화사를 향해 똑바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하하!”
헛웃음처럼 화사가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사의 두 손에서 엄청난 한기가 터져 나왔다.
퍼엉.
“쯧.”
“웃.”
사수연과 노군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수연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으며 뒤이은 공격을 대비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나도 말했지?”
화사가 고개를 들어 검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노군과 사수연은 안중에도 없는 화사의 두 손에서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콰과과각.
스스로 일으킨 기세로 화사의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머리카락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펄럭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화사의 눈은 이제 눈동자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화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너, 재수 없다고.”
붉은 입술로 화사가 말했다.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검극을 향해 두 손을 똑바로 쳐올렸다.
콰아앙!
화사의 기운과 검희의 상효일절이 그대로 충돌했다. 뒤이어 엄청난 소리와 빛, 그리고 폭풍 같은 기세가 숲을 휩쓸었다.
‘웃.’
사수연은 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노군 역시 인상을 쓰며 손으로 눈을 가린다.
잠시 후, 충돌의 결과가 그들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쿠쿠쿠쿠.
화사의 두 손은 검희의 상효일절과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검희의 거대한 검신이 뿜어내는 기세도 대단했지만, 화사의 두 손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세도 결코 사람에게 허락될 만한 것이 아니다.
“크크큭.”
화사가 웃었다.
“아주…… 작정했네?”
그녀는 이전처럼 가볍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검희는 차가운 시선으로 화사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갈 데까지…… 가 보잔…… 거야? 이…… 멍청한…….”
자박.
작은 발소리에 화사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지만, 화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그녀의 시선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화사는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손빈을 발견했다.
“어머, 오빠?”
화사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마음이…… 큭, 바뀐 거야?”
저벅, 저벅.
손빈은 천천히 화사에게로 걸어갔다. 검희와 화사가 만들어 내는 엄청난 기세가 손빈의 접근을 거부하듯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한데? 가까이 오면…… 다칠 수도 있어.”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려는 듯 화사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나 그 모습은 손빈에겐 마치 울먹이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저벅.
화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손빈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켜보던 노군도 사수연도, 당월아나 서린은 물론 신의조차 손빈을 말리지 않았다.
손빈의 안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화사뿐인 듯했다.
“위험하다고 내가…….”
화사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후우웅.
손빈이 화사와 검희의 기세 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했고, 폭풍 같은 기세가 손빈을 오히려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저벅, 저벅.
손빈은 화사에게로 똑바로 걸어왔다. 화사는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검, 백로에 시선을 던졌다.
한눈에도 보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백로의 칼날이 달빛 아래에서 도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하, 나하고 놀러 온 게 아니구나?”
짐짓 유쾌하게 웃으며 화사는 손빈에게 말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어. 나를 빼고 모두 다 한마음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화사는 단숨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노군과 사수연을 시작으로 서린과 당월아로 이어지던 파상 공세, 그리고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검희의 상효일절.
이것은 모두 화사의 시선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손빈의 선검 백로가 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칼날로 화사의 목숨을 가져감으로써.
“오빠도 날…… 죽이러 온 거야?”
화사의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붉은 피였다.
“아닙니다.”
손빈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빈이 말했다. 화사는 붉은 눈으로 손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사이, 손빈의 손끝이 화사의 드러난 어깨에 닿았다.
파바박.
손빈이 화사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팽팽하게 대치 중인 두 사람의 엄청난 기세에 그대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과 같았다.
터져 나갈 곳을 찾고 있던 두 사람의 기세가 삽시간에 모여들고, 손빈의 옷자락이 여지없이 찢어져 나갔다.
촤악.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에 있던 실핏줄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손빈의 팔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오히려 화사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내력을 정면으로 받고도 이 정도라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락.
화사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는 사이, 손빈은 어느새 화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화사가 손빈의 품에 살짝 안긴 듯한 모습.
“지금입니다.”
화사의 귓가에서 손빈이 속삭이듯 말했다.
파앙.
검희가 내력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튕겨나듯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 순간, 화사는 폭주하던 자신의 내력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내력을 흩트리는 산공(散功)도, 강제로 가져가는 흡정(吸精)도 아니었다.
그것은 갈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가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찾은 것 같은 그런 평안함이었다.
‘아아.’
화사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 속에서 폭주하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던 잔혹한 폭력에서 놓여난 것이다.
털썩.
힘을 잃은 화사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손빈의 품에 기댄 것같이 되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지만 다시 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뜰 수 없다 해도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우우웅.
나지막이 검명이 들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손빈의 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화사는 상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아무런 실감이 들지 않았다.
후우우웅.
생소한 소리와 함께 화사는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
우우우웅.
창백한 빛이 어두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조심해라!”
노군이 경고하듯 외쳤다.
사수연이나 당월아, 서린은 벌써 몸을 낮추고 내력을 흩트린 상태였다. 이것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섯 아이들은 당월아 뒤에서 아예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서린이 옆에서 겁에 질린 아이들을 안심시킨다.
반면 검희는 그저 담담히 서서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반검에 빛이 반사되어 일렁인다.
후웅.
그 신비한 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빈의 백로에서 솟아올랐던 빛은 무수한 반딧불처럼 바스러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 공자!”
휘릭.
사수연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사수연은 휘청하는 손빈과 화사를 감싸 안았다.
“감사합니다.”
손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사수연을 올려다본다. 사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사를 감싸 안았던 손빈의 왼팔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수연은 정신을 잃은 화사를 조심스럽게 땅에 눕혔다.
“신의님.”
사수연이 부르기 전에 이미 신의는 다가오고 있었다. 사수연이 신의에게 말했다.
“손 공자님을 봐주세요.”
“저는 나중입니다.”
손빈이 사수연을 보며 말했다.
“지금 화사 소저를 치료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더 힘들어질 겁니다.”
사수연 역시 알고 있다. 화사가 모든 음기를 쏟아 낸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치료하기 위한 최적의 시기다.
손빈의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화사를 치료하기 전엔 손빈은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알았어요.”
사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의 기운은 극음에 해당하고, 당연히 사수연이 나서는 것이 가장 충격이 적다.
“그럼 준비를…….”
“내가 하겠어.”
사박.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사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검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반검은 이미 품 안의 칼집에 그 모습을 감춘 뒤다.
“당신이?”
사수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검희는 화사 옆에 다가와 가만히 무릎을 굽혔다.
“바보 꽃뱀에게는 빚진 것이 있으니까.”
사수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화사와 검희가 관계가 있었던가 생각하는데 검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상효일절은 그녀에게서 가져온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사수연이 물었다. 검희는 화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
“화사가 첫 번째, 그리고 내가 두 번째.”
“무엇이 말이냐?”
어느새 다가온 노군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험.”
검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옥룡이, 그렇게 말했어.”
그녀가 말하는 ‘옥룡’은 선대 옥룡이 분명했다. 사수연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데 노군의 입에서 섬뜩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으득.
이를 악문 노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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