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28)
낙향문사전-228화(228/494)
제228화. 화사의 햇살2015.11.07.
화사는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처소의 모습이다.
‘아.’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한 화사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얼음덩이가 성공했나 보네.’
이렇게 멀쩡하게 눈을 뜬 것을 보면 검희가 자신을 막아 낸 것이 분명했다.
‘후우.’
화사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위험이 끝났다 생각하니 편안한 마음이 든다.
잠시 안도하던 화사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면 이제…… 세 명째인가?’
처음에는 노군, 그리고 두 번째는 탈혼도였다. 그들은 화사를 막아 주었고, 자신의 그 끔찍한 모습을 본 이후에도 꺼리거나 죽이려 들지 않았다.
세상에서 화사가 마음을 열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그 유의미한 대상이 이제 세 명으로 늘었다.
‘가만있어 보자.’
바스락.
옆으로 돌아누우며 화사는 곰곰히 생각했다. 흘러내리는 모포를 무의식적으로 잡아 목까지 폭 덮는다.
‘익자삼우(益者三友)라 하였으니, 친구 셋이 생긴 나도 이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네.’
익자삼우란 도움이 되는 벗의 성품 세 가지를 말한 것이지 친구의 숫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사는 어려운 문자를 떠올린 스스로를 뿌듯해 하고 있었다.
“히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화사는 다시 몸을 뒤척였다.
어쩐지 침상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느긋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해서 이대로 계속 뒹굴뒹굴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유난히 상태가 괜찮은데?’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은 지독한 두통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하지 않던 그 불쾌한 탈력감도 없다.
그녀에겐 참으로 드문 일이라 이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화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사이 다시 흘러내린 모포를 어깨까지 덮었다.
사락.
‘따뜻해.’
기분 좋은 온기가 다시 어깨를 덮는다. 아무리 두터운 모포를 덮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시리던 이제까지와는 천지차이다.
‘뭐랄까, 이건 마치 내가…….’
다시 몽롱한 잠으로 빠져들려던 화사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즉시 상체를 일으켰다.
사락.
화사를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리고 속옷만 입은 자신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 화사에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놀란 눈으로 화사는 자신의 내력을 일으켜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화사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바로 검희였다.
“너, 이게 대체…….”
화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검희에게 물었다. 그러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약속대로, 널 막았어.”
검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널 고쳐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
검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문을 슥 밀었다.
그것이 신호인 듯,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문사 차림의 그 청년은 바로 손빈이었다.
“일어나셨…… 윽.”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서던 손빈은 깜짝 놀라더니 화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들어오던 적세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화사 소저! 옷을…….”
“옷?”
화사는 무심코 자신을 내려다보곤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속옷만 입은 채 상반신을 그대로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풍만하면서도 요염한 그녀의 몸매가, 잠깐이지만 적나라하게 손빈의 눈앞에 내보여진 것이다.
와락.
화사가 급히 모포로 몸을 가리고, 적세화가 얼른 손빈을 밖으로 밀어내곤 문을 닫는다.
“죄, 죄송…….”
콰당.
미처 못다 한 손빈의 사과는 문이 닫히며 끊어졌다. 화사는 검희를 향해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이년아! 아무나 들어오게 하면 어떻게 해!”
“아무나가 아니야. 손 공자야.”
검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그건 화사에겐 말장난 같은 대답이었다.
“이 멍청한 얼음덩이가…….”
부끄러움과 당혹함에 화사가 소리치려는데, 검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널 고쳤어.”
막 무어라 소리치려던 화사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되묻는 화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실이에요.”
적세화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 공자님께서 화사 소저를 치료해 주셨어요. 그리고 검희 소저가 치료의 가장 힘든 부분을 감당했고요.”
적세화는 고개를 돌려 따뜻한 시선으로 검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희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날…… 고쳤다고?”
넋이 나간 듯 화사가 중얼거렸다.
그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단어였다. 스스로 되뇌면서도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그녀의 온몸이 스스로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도, 그 지독한 차가움도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겐 없다고.
“그래.”
검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넌 미친년이 되지 않아도 돼. 더 이상 남자도 필요 없고.”
또륵.
화사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멍청아.”
화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검희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우는 것도 같았고 웃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단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래도 좋은 남자는…… 필요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화사의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달칵.
갑자기 문이 열렸다. 화사는 다시 손빈이 들어온 것인가 싶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언니!”
작은 소녀의 목소리.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앵앵이와 소소였다.
“언니이!”
놀란 얼굴을 하던 앵앵이는 곧 울상이 되어선 화사에게 달려왔다.
와락.
앵앵이는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화사에게 안겼다. 그러곤 대번에 눈물을 쏟는다.
“히잉, 언니이.”
화사는 품에 안은 작은 앵앵이를 토닥여 주었다. 그사이 소소가 종종 걸음으로 침상에 다가와 화사를 올려다본다.
“언니 많이 아파? 울었어?”
“아니.”
화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
눈물을 흘리며 화사가 소소에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
그 모습에 적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콧등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만큼은 검희도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손빈은 화사의 거처가 있던 당월아의 저택에서 서원까지 쫓겨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쯤은 도망쳐 온 것이다. 밖에 서 있던 사수연과 당월아의 시선이 못내 거북했기 때문이다.
“그건 네가 잘못한 거다.”
찻잔을 들고 있던 노군이 짐짓 진중한 어조로 말한다.
“아무리 실수라곤 해도 과년한 아가씨의 나신을 보다니, 참으로 부럽…… 아니 파렴치한 일이지.”
당운영의 눈초리에 노군은 얼른 말을 바꿨다. 하지만 손빈으로서도 할 말은 많다.
“그건…… 아니,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실수였고 그리 많이 본 것도 아니며 속옷도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걸 말했다간 오히려 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게다가 확실히 본 것도 사실이라, 손빈은 그대로 말을 삼켜야 했다.
“와하하하.”
“꺄학.”
마당에선 다섯 아이들과 서원의 꼬마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염려가 무색하게, 서원 꼬마들은 다섯 아이들과 금방 친구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졸다 깨어난 장아가 다섯 아이들의 머리색을 보고 ‘예쁘다’고 중얼거린 때문인지도 몰랐다.
덕분에 다섯 아이들은 평범한 옷을 입고 꼬마들과 함께 서원 곳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물론 그 중심에는 항상 서린이 있다.
“팔은 괜찮은가?”
흐뭇한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손빈에게 노부인 당운영이 묻는다.
노부인 당운영은 손빈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주었다. 손빈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며 차를 받아 들었다.
“네, 괜찮습니다. 신의께서 보살펴 주셨으니까요.”
손빈의 왼팔은 깨끗한 천으로 싸여 있었다.
“다행이네. 헌데 듣기론 북해에서 그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던데, 이번엔 왜 그렇게 다친 겐가? 역시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걱정이 가득한 당운영의 말에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어중간해서 그래.”
대답은 노군이 했다. 당운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노군을 본다. 하지만 노군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서원이 정말 좋아졌군요.”
손빈이 찻잔을 들고 서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건물이나 배치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나무를 많이 심어 놓으니 분위기가 확실히 더 아늑하고 편하다.
뒤편에 있다는 별채는 나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휑하던 마당도 이젠 제법 그럴듯한 정원으로 보인다.
“괜찮나? 주인 허락도 없이 이것저것 손을 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습니다.”
당운영의 조심스러운 말에 손빈이 고개를 저었다.
“노군께서는 제겐 가족과도 같은 분이시니 따로 허락을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손빈의 음성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옆에 있던 노군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숨긴다.
노부인 당운영은 웃었다.
“그럼 나도 이제 자네의 가족이 된 셈이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하얀 머리의 우아한 노부인이 고개를 숙인다. 손빈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박, 자박.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손빈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적세화가 서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수연과 당월아, 검희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화사는 소소와 앵앵이의 손을 잡고 웃으며 서원으로 들어선다.
소소와 앵앵이는 곧바로 꼬마들에게 뛰어가고, 손빈은 그녀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손빈이 화사에게도 자리를 권하며 묻는다. 화사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괜찮아. 그 정도 노출이야 뭐 평소에도…….”
말하던 화사는 아차 싶었다. 괜찮으냐는 건 몸 상태를 의미한 것일 텐데 자신이 잘못 대답한 것이다.
슬쩍 손빈을 보니 그도 곤란한 듯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못 마주치고 있다.
“워, 원하는 게 뭐야?”
갑자기 화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손빈이 권한 자리엔 앉지도 않고 고개를 들고 손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말해 봐. 그게 뭐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이 누나가 해 줄게.”
제 딴에는 당당하게 나가겠다는 듯 가슴을 내밀었는데, 덕분에 손빈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흘깃 화사의 가슴을 향한다.
“이, 이상한 건 안 돼!”
손빈의 시선을 놓칠 리 없는 화사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짐짓 당당하던 표정은 간데없고, 예전의 그녀와는 다른 딴사람을 보는 듯하다.
“바보 꽃뱀.”
자리에 앉은 검희가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빈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건…….”
“착각이에요.”
싸늘한 사수연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손빈이 고개를 돌리자 꽃 같은 사수연의 웃는 얼굴이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사 소저의 착각. 그렇지요?”
하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손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얼굴이 빨개져 있던 화사는 그제야 주위를 한번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노부인 당운영이 건네준 차를 받아 들고 화사는 몇 모금 맛을 보았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따뜻함이 가슴 속에서 번져 간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화사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곤 힐끗 손빈의 팔을, 천으로 빼곡히 감싼 왼팔을 보았다.
“그거, 내가 한 거라며?”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따지자면 제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요.”
“하지만 결국 내가 한 거잖아.”
화사는 검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검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화사는 다시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말해 봐. 내가 무엇을 해 주면 좋겠어?”
묻는 화사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다친 팔은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손빈은 오히려 화사에게 물었다.
“소저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인가요?”
“앞으로?”
화사가 되묻는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를 잡으러 갈 거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화사가 대답했다. 그야말로 엉뚱한 말이었지만 화사의 눈동자엔 결연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젠 망설일 이유도 없어. 그가 어떻게 나오건, 이번엔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야.”
화사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손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두 분이 함께 놀러 와 주십시오.”
무슨 소리인가 싶은 듯 화사가 손빈을 쳐다본다. 손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화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정말 와도 돼? 난 널 다치게도 했고, 그리고 여긴 아이들도 있는 데다가, 난 되게 위험한 년이고…….”
더듬거리는 화사에게 손빈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화사 소저를 보고 싶어 할 테니까요.”
화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무엇인가를 애써 삼키며 화사가 말했다.
“조, 좋아. 그 정도라면.”
잠시 우물쭈물하던 화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고, 고마워.”
진심이 담긴 화사의 말에 손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화사는 자신도 모르게 덧붙였다.
“오빠…….”
“네? 오빠요?”
난데없는 호칭에 손빈이 되물었다. 하지만 말한 화사가 더 놀라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이건 정말 시, 실수라고, 실수!”
화사는 그야말로 새빨개진 얼굴로 있는 힘껏 손을 내저었다.
“아, 네.”
의외로 손빈은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화사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흘깃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놀라거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부인 당운영만이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일 뿐이다.
‘후우.’
화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 씨. 왜 갑자기 오빠라는 말이 나온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래선 대놓고 꼬리를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쨌든 오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화사는 고개를 돌려 꼬마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꺄하하.”
“히히히.”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지켜보는 화사의 입가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신의가 방에서 나왔다. 그는 화사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왔구나. 몸은 괜찮으냐?”
화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보살펴 주셨다 들었어요. 이 은혜가 백골난망이어요. 호호호.”
말하는 화사의 얼굴은 자랑이라도 하듯 뿌듯한 표정이었다. 표정만 보아서는 감사하다는 건지 잘난 체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싶은 신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데, 앉아 있던 검희가 묻는다.
“백골난망의 난(難)이라는 글자, 어떻게 쓰는지 알아?”
자랑스럽던 화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화사는 입술을 비죽이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나쁜 년, 쉬운 거 놔두고 하필이면 제일 어려운 걸…….”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빈과 사수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화사는 항변하듯 말했다.
“배, 백(白)하고 망(忘)은 안다고!”
하지만 이젠 적세화까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정작 검희는 여전히 무덤덤하지만 화사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대놓고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이, 이익!”
화사의 성질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다들 어색한 웃음으로 시선을 피할 뿐이다.
마당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화사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아이들을 숨기거나 피신시키는 사람도 없다.
“너, 나중에 두고 봐.”
검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화사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화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은 그저 평범할 뿐이고, 누구나 당연하게 화사를 받아들여 준다.
“에이, 씨.”
짐짓 투덜거리며 화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야 눈물이 핑 도는 자신의 붉은 눈시울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의 따뜻한 햇살이 화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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