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29)
낙향문사전-229화(229/494)
제229화. 계책(計策)2015.11.10.
서원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부드러운 바람이 서원을 두른 나무들을 흔들고, 금빛 글자가 수놓인 붉은 깃발을 펄럭였다.
서원에 기를 올리는 것은 생소한 일이었지만, 금빛으로 반짝이는 ‘백년가약’이라는 글자는 그 이유를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서원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작은 서원이 비좁아 보일 정도의 사람들 속에서도 붉은 혼례복을 입은 노부인 당운영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정말 예뻐요.”
“우와.”
사수연과 적세화의 예의 바른 인사와 화사의 진심이 묻어나는 감탄이 당운영에게 쏟아졌다. 당월아는 말없이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노부인 당운영은 밝게 웃으며 그녀들에게 답했다.
“다들 고맙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말하는 당운영의 뺨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의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예쁘군.”
“영매야 언제든 예쁘지.”
노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붉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노군의 모습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거북한 표정이 그런 느낌을 한층 부채질한다.
“안 그러냐?”
노군이 옆을 돌아보며 묻는다. 옆에는 커다란 체구의 전대 패검, 혁련위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전대 패검 혁련위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 내자보다는 안…….”
“됐다.”
노군이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오라고 하지도 않은 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불쑥 나타나서는……. 넌 그냥 구경이나 해라.”
투덜거리던 노군의 시야에 문득 손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새 옷으로 의관을 차려입은 손빈은 웃으며 서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으로 사수연과 적세화, 그리고 당월아의 모습도 보인다.
화사와 검희 역시 노부인 당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화사는 아예 당운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노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군은 고개를 돌려 마루 위에 놓인 커다란 도, 파월을 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도라고 짐작도 못할 정도의 파월은 나무 지지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본래 손빈의 처소에 놓아둔 것이나, 바람이라도 쐰다며 손빈이 꺼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진짜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좋구나, 참으로 좋아.”
노군의 눈가에 습기가 어린다. 그러나 오늘만은 신의도 노군을 놀리지 않았다.
“정말 괜찮나?”
신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한 여인에게 평생을 얽매이는 일이네. 자네의 마음은 알겠지만, 정말 이걸로 괜찮겠는가?”
사뭇 진지한 신의의 표정에 노군이 피식 웃었다.
“글쎄,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모르겠네. 잘하는 짓인지…….”
담담한 목소리로 노군이 답했다.
“하지만 어쩌면.”
노군은 시선을 들어 당운영을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웃는 당운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난, 이날을 보기 위해 이제껏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네.”
그 대답에 신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와아아.”
갑자기 서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아이들이 돌아온 것이다.
“음? 저 녀석들…….”
신의가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혼례복을 입은 당운영에게 우르르 몰려오더니 품에 가득 들고 온 것들을 뿌렸다.
파라락.
허공에 흩어지며 바람에 날리는 색색의 꽃들. 순식간에 꽃잎이 눈처럼 서원 마당에 흩날린다.
“축하해요, 할머니 선생님!”
“축하드려요!”
꽃을 뿌린 아이들은 소리를 치기도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기도 했다. 서원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당월아와 함께 온 다섯 아이들도 함께였다.
“너희들…….”
노부인 당운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운영을 위해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꽃을 찾아 헤맨 것이다. 이슬에 젖고 풀잎에 물든 아이들의 옷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정말로 고맙구나.”
사락.
노부인 당운영은 무릎을 굽혀 아이들을 하나하나 꼭 안아 주었다. 혼례복이 흐트러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흠, 흠.”
노군의 헛기침 소리에 당운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노군이 짐짓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괘, 괜찮겠소? 나와 이렇게 혼례를 올려도?”
노군이 묻는다. 당운영은 일어섰다.
사락.
“네.”
노부인 당운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평생 이날을 기다리며 살아온걸요.”
듣는 사람마저 부끄러워질 대답에 노군의 얼굴도 붉게 물든다. 그러나 말하는 당운영의 표정은 화사하기만 했다.
“고마워요, 순랑.”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당운영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소녀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만 노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할 말을 잊고 만다.
“그럼 혼례식을 시작할까요?”
의관을 정제한 손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혼례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본래라면 주육례(周六禮)니, 주자사례(朱子四禮)니 하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쳤을 것이지만 두 사람은 바로 혼례식을 올렸다.
혼례식 자체도 서로 절을 하고 한 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는 것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예쁘다.”
화사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붉은 혼례복의 노부인 당운영의 모습을 밝고 아름다웠다.
반면 노군은 내내 어색한 표정을 풀지 못해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혼례식 후에는 다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적세화와 당운영이 함께 준비한 음식들은 정갈하면서도 맛있어서 아이들도 모두 좋아했다.
“나, 갈게.”
식사를 마치고 난데없이 화사가 말했다.
손빈은 그녀가 떠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모르고 있던 아이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왜요?”
“가지 마요, 언니.”
소소와 앵앵이가 바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화사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 마. 또 올 테니까.”
말하던 화사는 슬며시 손빈을 본다.
“와도 되지?”
“그럼요.”
손빈이 웃으며 답하자 그제야 화사의 표정이 환해진다.
“아, 그리고…….”
화사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손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여기서 혼인해도 돼?”
손빈은 웃었다. 아마 오늘의 혼례식이 그녀에게 커다란 감명을 준 듯했다.
“물론입니다. 소저시라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초조하던 화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는 손빈을 향해 쾌활하게 말했다.
“고마워, 오빠.”
허락을 받은 게 기쁜지 화사는 자신이 한 말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화사는 무릎을 굽혀 소소와 앵앵이를 꼭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언니 금방 올게, 알았지?”
아이들을 안아 준 화사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한가운데 앉아 있는 노군과 당운영을 향해 말했다.
“축하해요. 아저씨, 아줌마. 백년가약(百年佳約)이라 했으니, 백 년 동안 행복하게 사세요. 호호호.”
노군은 쓴웃음을 짓고 당운영은 미소로 답했다.
화사는 적세화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사수연과 당월아에게도 힐끗 시선을 준 후, 고개를 돌려 말없이 앉아있는 검희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봐, 얼음덩이.”
검희는 흘깃 화사를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정한 년 같으니.”
화사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그럼, 누나는 이만 갈게.”
화사는 사뭇 교태로운 자세로 손빈에게 한마디 한 후, 바로 몸을 날렸다.
탁.
화사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노군이 혀를 찼다.
“마차 타면 될 걸 뭐하러 경공을 쓰는지 모르겠군. 쯧쯧.”
“말이라도 내어 줄 걸 그랬나요?”
당운영이 노군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줘도 못 타. 말을 탈 줄 모르니까. 여하튼 성질은 급해서…….”
투덜거리는 노군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눈치챘는지 적세화가 물었다.
“두 분은 혹시 따로 계획이 있으신가요?”
당운영은 조금 놀란 눈을 했지만 곧 웃음을 피워 올렸다.
“잠깐 여행을 갈까 하네.”
“여행요?”
적세화가 되묻자 당운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노군은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운다.
“둘이서 남악에 잠시 다녀올까 해. 순랑이 살던 곳도 보고 싶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듣고 싶어서.”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알려 주고 싶은 지난날들이 얼마나 많으랴.
“크흠. 그런데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이냐?”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노군이 전대 패검 혁련위를 향해 말을 던진다.
전대 패검 혁련위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적세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용무가 있다는 뜻이다.
“저요?”
적세화가 놀란 눈으로 혁련위를 쳐다본다. 혁련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에서 얇은 서찰 하나를 꺼냈다.
바스락.
자리에서 일어난 적세화는 혁련위에게 다가가 예의 바른 태도로 서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서찰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조금 부끄러운 듯하던 적세화의 표정은 잠시 후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사람들은 적세화를 쳐다보았다. 서찰을 다 읽고 나서도 적세화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뭐냐? 무슨 서찰이기에…….”
“저를 혁련세가에 들이려 하신다는군요.”
적세화가 노군의 말에 답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놀라움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당운영이 무어라 하려는데 노군이 대뜸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뭐야? 이놈이 미쳤나. 왜 갑자기…….”
“양녀로요.”
나지막한 적세화의 말에 벌떡 일어나던 노군이 멈췄다.
“양녀?”
“네, 정확하게는 혁련위 대협의 손녀가 되는 셈이네요.”
적세화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내게 조카뻘이 되는 노부부가 있네.”
전대 패검 혁련위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부인데 조카라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항렬로 따지다 보면 그런 차이가 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일찍 자녀를 잃고 평생을 둘이 지냈지. 자네라면 그들을 잘 돌봐 주리라 생각하네.”
평소 그답지 않게 매우 긴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
*
*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은밀한 정원.
초록빛 그늘 아래 세워진 작은 정자에 한 여인이 조용히 앉아 서찰을 읽고 있었다.
또로롱, 짹짹.
작은 시냇물과 새 소리가 희롱하듯 귀를 간질이고,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그러나 여인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사락.
여인의 희고 긴 손이 서찰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 움직이더니 이윽고 낮은 탄식이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황궁의 첩보가 한낱 주루의 소문보다 느리다니.”
여인, 경희 군주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하,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경희 군주의 시선을 받은 관복 차림의 작은 청년, 소하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답했다.
“황궁의 관심은 첩보의 중요성에 따라 엄격히 선별되며, 드러나지 않은 깊숙한 내부의 일을 알아내는 것에 집중하니까요. 예컨대 고관대작의 부패나 군부의 수상한 움직임이라면 그 누구보다 정확하지만, 세상의 온갖 소문을 수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요.”
소하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경희 군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맞아. 하지만 이 일은 황상께서 내게 직접 하명하신 일이야. 결코 가벼이 취급될 수 없는 일이지.”
바스락.
경희 군주는 서찰을 들어 시녀, 항아에게 건넸다.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항아는 정중히 서찰을 받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책임자인 홍 태감을 파직하도록 해.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라면 더 이상 나라의 녹을 먹을 자격이 없지.”
소하가 빙긋 웃었다. 그것은 반대 의견을 말할 때 하는 그의 버릇이다.
“비록 비공식적인 자리라 하나, 첩보 조직의 수장을 맡은 태감을 파직하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거야.”
경희 군주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협력할 마음이 없는 자를 중요한 자리에 놔둘 수는 없어. 그의 안목이 여기까지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어차피 황상께서도 한 번쯤 물갈이를 해야 할 때라고 여기고 계시니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소하의 불안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파직해. 대신할 태감은 얼마든지 있어.”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태감을 비롯한 모든 관직의 임명 권한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것이다. 그 황제가 경희 군주의 편에 선다면 못 할 것은 없다.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군부에 관련한 것뿐,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녀가 원한다면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강남 무림은 못 써먹겠군요.”
소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세가가 혈봉련과 화친을 하려 들다니, 전혀 예상외의 일입니다.”
경희 군주를 분노하게 한 소식은 바로 이것이었다.
강남 무림을 뒤덮을 불길이 되길 바랐던 일이 이렇듯 어이없이 사그라들게 되리라곤 아무도 알지 못했으리라.
“누군가 있다는 뜻이지. 남궁세가와 혈봉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누군가가.”
경희 군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강남 무림의 분쟁은 분명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관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도적으로 이 분쟁을 방치했다. 이 불길이 마침내는 강남 무림을 집어삼키도록.
그 상황이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피로 씻지 않고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분쟁이 이렇게 간단히 종식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역시 외사인가요?”
소하가 말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겠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경희 군주가 말했다.
“사자혁. 아니, 현천의 무제.”
경희 군주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나고, 이제껏 말없이 서 있던 청랑검 위가진의 눈동자도 한순간 반짝였다.
그날 밤 보았던 그의 압도적인 기세가 지금도 그들의 눈앞에 생생하다.
“허나 그는 외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했습니다.”
소하가 빙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우리가 그를 만났던 것이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천운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 만일 그가 가진 의미를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물러나지는 않았을 거야.”
청랑검 위가진은 여전히 말이 없고, 경희 군주의 눈동자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야. 그는 나를 거절했지만,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으니까.”
경희 군주의 붉은 입술이 나지막이 달싹였다.
“무제의 길을 걷는 자.”
그들이 알아낼 수 있었던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이름.
그것이 바로 ‘무제의 길을 걷는 자’였다.
“그를 찾아. 이번엔 절대로 나를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진정 존재하는 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소하가 한숨을 쉬듯 말을 이었다.
“무당의 장문인 청수 진인조차 외사에 대해서는 파편적으로만 알 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외사의 인물을 직접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심각한 것은…….”
소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걸린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 짙어진다.
“혹여 이것이 외사를 멸하라는 황상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황상께서는 그리 말씀하신 적이 없어.”
경희 군주 역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다가오는 날을 위하여 황실의 위험을 제하라 하셨을 뿐이지.”
황제는 나이가 많다.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리지는 못하고 있으나 황위의 주인이 바뀔 때가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했다.
황위의 계승은 피를 부르는 문제다. 이것을 위해 문무백관을 무수히 참수한 황제도 있었다. 장래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을 아예 철저히 죽여 없앤 것이다.
그러나 현 황제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순리에 따른 선양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사실 천하 만민을 위하는 선량한 군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외사가 황상께 충성을 바치게 된다면 황실의 안위는 한층 공고해질 터.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황실과 천하의 안녕을 위한 가장 좋은 결과가 되겠지.”
물론 외사와 황실 사이에는 경희 군주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로써 그녀의 정치적 위상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될 터였다.
하지만 소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제가 짧은 식견으로 대단히 어리석은 말을 하였습니다.”
소하는 고개를 깊이 숙여 그의 주군, 경희 군주에게 사죄했다.
“주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제 무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경희 군주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고개 숙인 소하를 잠시 바라보던 경희 군주가 시선을 거둔다.
“번천지계의 준비는?”
문득 경희 군주가 물었다. 그녀가 말한 ‘준비’가 무엇인지 소하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언제든 원하시는 대로 시작될 것입니다.”
“좋아.”
달칵.
경희 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내려앉는다.
“늑대는 하늘에 오를 생각을 말라고? 그런 하늘이라면.”
아득.
경희 군주의 입술 사이로 거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뒤집어 주겠어.”
조용히 중얼거리는 경희 군주의 눈동자엔 은은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어떻게 할까요?”
소하가 묻는다. 막 자리를 뜨려던 경희 군주는 발을 멈췄다.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가 뇌검 남궁권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어느 곳이든 똑같아. 변화를 원한다면, 그 수장을 바꿔야 하는 법이지.”
돌아보는 경희 군주의 표정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소하는 깊이 고개를 숙여 주군의 명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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