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30)
낙향문사전-230화(230/494)
제230화. 적세화의 결정2015.11.14.
전대 패검 혁련위의 난데없는 제안은 혼례식으로 들떠 있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가 보겠네.”
거구의 혁련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적세화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묻는다.
“혹시 저희 부모님께 이 말씀을 전하셨나요?”
“아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혁련위가 말했다.
“자네의 뜻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타인을 양녀로 들이는 일은 가문의 중대사다. 강남의 양대 패자를 자처하는 혁련세가, 그것도 전대 가주가 정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일에 개인의 의사는 대부분 무시되기 마련이다. 혁련위가 적세화의 의사를 우선한 것은 이 제안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적세화는 단정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혁련 대협.”
혁련위는 한번 눈을 깜빡하더니 그대로 서원을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적세화는 몸을 돌려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저도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적세화는 붉은 혼례복을 입은 남악노군과 노부인 당운영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죄송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어, 음, 그래.”
노군이 조금 더듬거리며 답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노부인 당운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운영이 말했다.
“자네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깟 이름 같은 것에 얽매일 속 좁은 남자는 아니니까.”
적세화는 살짝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로 당운영에게 답했다.
다른 일행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나서 적세화는 자신의 동생 중오와 그 친구 계구를 데리고 서원을 떠났다. 아무래도 소문이 나는 걸 막기 위함이리라.
두 아이와 함께 서원의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애처로워 보여서 사람들은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게 뭔 일이야?”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노군이 중얼거린다. 그의 붉은 혼례복은 여전히 어딘가 어색하다.
“손녀로 삼고 싶다잖나.”
신의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답한다. 노군은 인상을 썼다.
“그걸 누가 몰라? 갑자기 저놈이 왜 그러냐 이거지.”
“세화 소저가 양녀가 된다면, 적씨 가문을 떠나는 것인가요?”
문득 사수연이 묻는다. 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겠지. 일단 양녀가 되면 성도 바뀌고…….”
“반드시 그런 건 아니랍니다.”
노부인 당운영의 목소리가 노군의 말을 끊었다. 당운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연무관과 혁련세가예요. 아가씨 한 명을 못 키울 집안도 아니고 게다가 세화도 이제 성년이지요. 혁련세가의 양녀가 된다 해도 본래 세화가 호연무관의 딸이라는 사실이 사라지겠어요?”
“그야 그렇지.”
노군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어릴 때라면 모를까 지금 와서 그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
“게다가 혁련세가의 딸이 되는 거예요. 시집이라도 보냈다면 출가외인이라 하겠지만, 혈연을 어떻게 부정하겠어요? 혁련세가나 호연무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세화를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호연무관을 혁련세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음,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가족과는 좀 멀어지지 않을까?”
신의가 묻는다. 당운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설마요. 그랬다간 당장 ‘혁련세가의 양녀가 되더니 본가를 소홀히 하더라’는 말을 듣게 될걸요? 그리고 적당한 거리는 가족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기도 한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애틋해질 거예요.”
“하지만 그러면 서원에는 오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사수연이 물었다. 당운영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반응했다.
“누나 선생님 못 와요?”
“안 돼요, 우아앙.”
앵앵이가 대번에 눈물을 글썽이는데, 자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중오는 좋아할지도.”
그 말에 손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친누나가 선생님이라 중오가 나름 고생한 듯했다.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노부인 당운영이 말했다.
“아니야. 세화 선생님은 다시 오실 거란다.”
“정말요?”
“진짜예요?”
아이들이 저마다 묻는데 노군도 궁금하다는 듯 말한다.
“어째서?”
노부인 당운영은 웃었다. 아이들과 똑같이 묻는 노군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세화를 양녀로 삼으려는 노부부는 일찍 자식을 잃고 외로이 살아왔다고 했지요? 젊을 때는 모르지만 늙어 자식이 없으면 아무래도 가문의 중책에선 멀어지기 마련이랍니다. 존경은 받으나 실권은 없는 것이지요.”
당운영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실 남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젊은 여인을 들여 후손을 보았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 노부부가 어떤 성품인지는 알 만하지요.”
노군이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거대 세가입네 하는 곳에도 제대로 된 사람이 있긴 있었군그래.”
소위 오대세가라 하는 이들의 오만방자하고 탐욕적인 행태를 익히 알고 있는 노군으로선 당운영의 말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평생 당신을 기다린 저도 있잖아요.”
당운영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하자 노군이 툭 던지듯 답한다.
“당신이야 본래 특별하지.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당연하다는 듯한 노군의 말에 노부인 당운영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번져 간다.
“어쨌든 이로 보건대 세화가 혁련세가의 양녀가 된다 해도 특별한 의무나 제약이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처음엔 조금 바쁘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 노부부를 모시고 서원으로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거대 세가의 사정에 환한 당운영의 말이니 확실하리라. 하지만 노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세가 내에서 세화를 질시하거나 탐탁잖게 여기는 놈들도 있을 법한데? 아무리 패검, 저놈이 감싼다 해도 한계가 있거든.”
노군이 말한 ‘패검’은 전대 패검 혁련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지적에 노부인 당운영도 동감을 표했다.
“맞아요. 더구나 전대 패검께서 각별히 여기는 노부부라면 아무래도 방계가 아닌 직계일 가능성이 높지요. 세가 내의 배분만으로 따지면 세화가 가지게 될 위치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자리일 거예요.”
“그럼 더 걱정이지. 세가 놈들이 얼마나 옹졸한데!”
노군의 말에 당운영의 대답이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세화라면 걱정 없어요.”
당운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기완 달리 저 아이는 아주 강하답니다. 똑똑하고 결단력도 강한 데다 책임감도 남다르지요. 저 아이를 당문으로 들여 키워 보면 어떨까 하고 저도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신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동안 적세화의 도움을 받아 온 신의로서는 전적으로 공감할 만한 말이다.
사수연이나 손빈 역시 그랬다. 아이들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아마도 적세화의 깐깐한 수업을 들어 왔기 때문이리라.
나름 뭘 안다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에 손빈이 절로 미소를 짓는데 노군의 음성이 들렸다.
“그럼 세화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군.”
“네. 호연무관이나 세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혁련세가가 큰 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아요.”
혁련세가는 남궁세가와 함께 강남의 양대 패자를 자처하는 거대 세가다. 호연무관이나 적세화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라 할 만한 일이다.
“헌데, 세화 소저의 표정은 그리 썩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수연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인다.
노부인 당운영은 손빈을 보며 말했다.
“그야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마음에 걸려요?”
사수연이 묻는다. 당운영이 사수연을 보며 답했다.
“그래. 작은 소도시 무관의 딸로는 얼마든지 친근하게 만날 수 있지만, 거대 세가의 딸이 되면 오히려 가까이 하기가 조심스러운 사람 말이야.”
“아.”
무엇을 깨달았는지 사수연이 동그란 눈을 한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조용하던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운영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래서 말해 준 거란다. 그런 이름 같은 것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정말 그러네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데.”
사수연도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신의나 서린마저 무엇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무슨 얘기야?”
노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손빈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당운영이 손빈에게 묻는다.
“무슨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문 때문에 세화 소저를 꺼려 하는 사람이라면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손빈은 단언했다.
“중요한 것은 세화 소저의 사람됨이지 그녀가 가진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세화 소저의 지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
손빈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당운영은 씨익 웃었다. 사수연은 조금 복잡한 미소를 짓고 당월아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기다리면 된다네.”
느긋한 표정으로 당운영이 말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건, 우리는 그 아이의 편이니까.”
그 말에 아이들까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
*
*
“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
소은표국의 젊은 국주, 은초빈이 말했다. 정식으로 국주의 일을 맡은 지도 이젠 제법 되어 은초빈에게선 원숙함마저 풍겨 나왔다.
“나야 뭐 늘 똑같아.”
적세화가 찻잔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 아, 얼마 전엔 내 또래 아가씨들도 조금 도와줬고. 넌 어때?”
“바빠.”
달칵.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은초빈이 말했다.
“하지만 재미있어.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표행을 다니는 건 괜찮아?”
적세화의 물음에 은초빈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거야 옛날부터 익숙한걸. 그리고 이젠 그렇게 자주 다니지도 않아.”
아직 젊지만 은초빈은 표국 운영에 익숙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표행도 제법 다녔고, 표국의 일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젊고 생각이 유연해서 그녀가 국주로 있는 소은표국은 날로 그 위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래, 너라면 잘할 줄 알았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적세화의 말에 은초빈은 웃었다. 적세화가 손빈을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면 소은표국은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좀 팍팍 도와주지 그래?”
은초빈은 은근한 눈빛으로 친구 적세화를 바라보았다.
“계집애, 듣자하니 앞으로 귀한 아가씨가 되신다며?”
“그걸 어떻게…….”
적세화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피식 실소를 흘린다.
“소소한테 들었구나?”
“잘난 척 좀 해 보려 했더니 너한테는 안 되겠네. 맞아, 소소가 와서 재잘거리더라.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라고 해 뒀어.”
적세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은초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적세화가 고개를 들자 은초빈의 따뜻한 시선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렇지?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서, 그래서 마음대로 못하는 거지? 괜찮아, 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난 네 친구잖아.”
잠시 주저하던 적세화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계집애,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난 벌써 접었다니까.”
웃는 은초빈의 눈가엔 살짝 눈물이 어려 있었다. 은초빈은 눈을 깜빡이고는 말했다.
“그런데 가능성은 있어? 같이 있는 아가씨들도 보통은 아니던데.”
이번엔 적세화가 웃었다.
“가능성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적세화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누가 그러더라. 사랑이란 밤에 자기 전에 자꾸만 생각나고,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되고, 힘들 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의지가 되는 존재라고.”
“그래?”
은초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럼 우리 첫사랑은 어릴 때 잡은 딱정벌레겠네?”
“풋.”
적세화는 하마터면 차를 내뿜을 뻔했다.
그녀들이 어렸을 때 잡은, 혼날까 봐 부모님 몰래 숨겨 두고 눈을 반짝이며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그 커다란 딱정벌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하하, 정말 그렇네.”
조금 허탈한 음성으로 적세화가 웃는다.
“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사실이야.”
“이거 심각한데?”
은초빈이 짐짓 과장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중증이야. 그것도 아주 심각한. 이러다 잘못하면 내 소중한 친구가 평생 노처녀로 늙는 것 아니야?”
“그것도 괜찮아.”
미소를 지으며 적세화가 말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정말 좋은 일이거든.”
“계집애.”
살짝 글썽이는 눈동자로 은초빈이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
친구의 말에 적세화가 다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 미소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고, 은초빈은 생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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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 세화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소?”
호연무관의 관주 적철관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화려한 서신에는 혁련세가의 가주가 보내 온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제안이 담겨 있었다.
“혁련세가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말이오.”
“그렇게 좋아하실 일만은 아니에요.”
적세화의 어머니, 적철관의 아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혁련세가는 우리 무관에 비하면 너무 거대한 가문이지요. 혹여 그쪽 사람들에게 어려움이나 당하지 않을지…….”
“괜찮소. 세화라면 잘 해낼 거요.”
“그럴까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화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계속 서원에 있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요?”
“서원도 나쁘지는 않소. 허나 세화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혁련세가의 제안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적철관이 사뭇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원의 일을 돕는 것이라면 딸의 평판이나 장래에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특히 좋은 인상을 받은 서원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적세화는 무가의 딸이다. 천생 무인인 적철관의 입장에서는 무가와 인연이 닿기를 원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비록 혼인은 아니지만 혁련세가의 수양딸이 된다면 좋은 무가로 시집가는 것은 이미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는 세화가 서원 선생님과 혼인을 한다고 해도 좋았을 것 같아요.”
조금은 과한 듯한 아내의 말에 적철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세화가 원한다면야 나도 좋지만, 이제 세화는 혁련세가의 딸이 되지 않았소?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적철관의 말에 아내는 나지막이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적철관은 딸의 마음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사실은 적세화가 호연무관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세화는 사려 깊은 아이랍니다. 정말로, 착한 아이지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적철관은 아내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어쨌든 세화도 좋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마시오.”
대충 아내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적철관은 다시 서찰을 펴 들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적힌 서찰에는 적철관의 딸, 적세화에 대한 전대 가주의 평이 적혀 있었다.
딸을 칭찬하는 말이 싫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다시 읽어도 흐뭇하기만 한 적철관이었다.
‘녀석,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더니 언제 혁련세가와 이런 인연을.’
생각할수록 흐뭇하다. 다름 아닌 혁련세가에 인정받았다 생각하니 더더욱 그렇다.
‘헌데 어째 칭찬하는 내용이 좀…….’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적철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찰에는 전대 가주가 적세화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었다.
‘올곧은 기개와 강직한 성품, 그리고 그 단호한 결단력을 아버님께서 극찬하시며 중요한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평하셨다…….’
서찰의 ‘아버님’이란 전대 패검 혁련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올곧은 무인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아무리 봐도 정숙한 아가씨라기보다는 무슨 대장부에 대한 평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뭐, 상관없겠지.’
어쨌든 혁련세가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배례식이 언제라 했지요?”
문득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적철관은 급히 서찰에서 날짜를 찾았다.
“다음 달이오.”
배례식은 새로운 부모님들께 예를 올리고 정식으로 혁련세가의 딸이 되는 예식이다.
혁련세가에 정식으로 선을 보이는 날이자 세가의 어른들께 첫인사를 드리는 때이기도 하다.
“잘돼야 할 텐데요.”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되는 듯했다. 적철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세화는 잘 해낼 테니까.”
남편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어머니의 본능적인 감각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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