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32)
낙향문사전-232화(232/494)
제232화. 손님들2015.11.21.
적세화의 배례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손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원을 나섰다.
새 옷 특유의 냄새와 약간은 어색한 촉감이 느껴졌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쓰고 있는 작은 관도 새것이었다. 적세화가 손빈에게 감사의 표시로 보내 준 것이다.
“새 의관이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손빈은 당연히 사양했다. 그러나 노부인 당운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세화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새 옷과 관을 쓰도록 하게. 그것도 아주 좋은 것으로.”
당운영의 말뜻을 이해 못할 손빈이 아니다. 한마디로 오대 세가나 상단에 밀리지 않도록 차려입으라는 의미다.
손빈은 사람의 마음보다 의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세화를 위해서라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따로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것으로 세화 소저에게 부담을 줄 수는…….”
“괜찮아요.”
적세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혁련세가에서 해 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마세요. 이번 기회에 제일 좋은 것으로 해 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손빈도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했다. 혁련세가에서 받는 것도 가히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세화 말대로 하게. 나도 자네가 새 옷을 입은 모습을 한번 보고 싶군.”
노부인 당운영의 말에 손빈은 적세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적세화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손빈에게 새 옷이 도착했다. 손빈이 이제껏 본 옷 중에 가장 비싸고 귀한 옷감으로 만든 옷이었다.
한번 옷깃을 만져 본 손빈은 호연무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서원에서 호연무관까지는 금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 공자님.”
적세화는 이미 호연무관 앞에 나와서 손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빈은 적세화에게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보다, 보기 좋네요.”
손빈은 웃었다. 적세화가 보내 준 옷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서 손빈의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소저도 예쁘시군요.”
적세화는 살짝 웃고는 말했다.
“가요,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 광주 혁련세가로 향했다.
따각, 따각.
“혁련공 어르신을 만난 적은 없지요?”
마차 안에서 적세화가 묻는다.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네, 없습니다. 세화 소저는 이미 만나셨습니까?”
“무관에 정식으로 제안이 오기 전에 먼저 뵈었어요.”
이제 곧 혁련세화가 될 적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이시더군요. 서로 의지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어요. 저도 저렇게 늙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세화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좋은 사람들이리라.
“괜찮습니까?”
문득 손빈이 묻는다. 창밖을 내다보던 적세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네? 아, 혁련세가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 말인가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세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쉽지는 않았어요.”
따각, 따각.
마차 소리 사이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가문을 버리는 건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고, 부귀에 눈이 먼 속물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났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손빈은 갑자기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적세화가 그런 여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소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은 말도 안 됩니다.”
적세화는 가만히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적세화는 손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욕을 먹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손빈은 그녀의 말에서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적세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깨를 으쓱하며 적세화가 말했다.
“여자는 본래 집을 떠나는 것이 운명인걸요. 때로는 그 일을 기다리기도 하고요. 그러니 손 공자님 생각만큼 힘든 건 아니에요. 저도 한편으론 시원섭섭한걸요? 집안에 효도 한번 제대로 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건 평소 적세화다운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손빈은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축하드려야 하나요?”
“그럼요, 당연하지요.”
손빈은 나름 납득이 되었다. 가문을 이어야 하는 남자와 집을 떠나야 하는 여자의 입장은 확실히 차이가 있으리라.
하지만 손빈의 염려를 덜어 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남녀의 입장 차이가 어떻든 간에 가족을 떠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 벌써 광주군요.”
창밖을 보며 적세화가 말했다.
따각, 따각.
마차는 벌써 광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적한 청원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도시의 모습을 보며 적세화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가깝네요.”
“네.”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지만 손빈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혁련세가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마차를 내렸다.
세가의 위세를 말해 주듯 크고 화려한 정문을 지나 이리저리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이 딸린 작고 수수한 저택이 나왔다.
작다 해도 지나온 다른 건물이나 전각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손빈의 서원보다 더 큰 곳이다.
“오, 세화 왔니?”
부드러운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키가 작고 단아한 흰머리의 노부인이 웃으며 서 있었다.
“네, 어머니.”
적세화가 웃으며 답했다. 아직 배례식 전이었지만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던 손 공자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손빈입니다.”
손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자네로군. 만나서 반갑네.”
이미 손빈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노부인은 고개를 숙여 손빈의 예에 답했다.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손빈을 향한 노부인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세화가 왔는가?”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노부인과 달리 훤칠한 키를 가진, 온화한 느낌의 그 노인은 바로 혁련공이었다.
“아버님.”
“오, 세화야.”
혁련공은 웃으며 적세화에게 말했다. 가슴까지 닿는 흰 수염과 흰머리가 그가 헤쳐 나온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여보, 손 공자님도 왔어요.”
노부인의 말에 온화한 노인, 혁련공이 대번에 흥미를 보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빈이라 합니다.”
손빈은 혁련공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혁련공 역시 손을 모으고 손빈의 예에 정중히 답한다.
“반갑네. 혁련공이라 하네.”
혁련공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의 무공이 아니라, 그가 가진 지혜와 통찰 탓이리라.
“세화에게 말은 들었네. 청원에서 서원을 한다지? 젊은 사람이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손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보는 혁련공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엄격했다.
“같이 이야기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자네들이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니 시간이 없군. 나중에라도 세화와 함께 들러 주게.”
“네, 그러겠습니다.”
손빈의 대답에 문득 노부인이 말한다.
“우리가 서원으로 가도 되지 않겠어요?”
“오, 그것도 좋겠군.”
혁련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빈에게 물었다.
“혹시 서원으로 찾아가도 방해가 되지 않겠나?”
“천만에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혁련공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고맙군. 혁련위 그 친구가 하도 좋아하는 눈치기에 나도 내심 궁금했거든.”
손빈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노부인이 살짝 눈을 흘기며 혁련공에게 말한다.
“여보, 그 친구라니요? 그래도 항렬상 어른이신데.”
혁련공은 어색한 듯 너털웃음을 흘린다.
“괜찮소. 우리끼린데 뭐 어때?”
“여보,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 이제는 뭐라 할 어른도 없는걸. 알고 보면 세가에서 우리가 제일 늙다리들이라고.”
혁련공이 투덜거리는 모습은 손빈을 절로 미소 짓게 했다. 노부인이 손빈과 적세화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어서 가 보게. 손님들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
“네, 다녀오겠습니다.”
적세화가 혁련공 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혁련공의 미소는 따뜻하기만 했다.
*
*
*
오늘 열릴 연회는 젊은 손님들을 위한 연회였다. 귀한 손님들을 환영하는 자리이자, 세가나 상단의 젊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
당연히 세가의 어른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주인의 역할은 적세화가 맡았다. 손빈은 그녀의 지인으로서 함께 손님을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회는, 놀랍게도 강위에 떠 있는 유람선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가…… 연회 장소입니까?”
손빈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붉은 기둥을 세우고 황금빛 지붕을 얹은 제법 커다란 배가 선착장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런가 보네요.”
적세화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주강(珠江)은 광주를 가로지르는 크고 넓은 강이다. 풍경 역시 아름다워서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늘 떠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 선착장에 있는 배 역시 그런 유람선 중의 하나였다.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서 먼 곳으로 가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물 위에서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연회를 열기엔 좋은 배다.
“휘장을 쳐서 햇빛을 가린 유람선은 자주 봤지만 이런 배는…….”
손빈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 배는 특이했다. 배 위에 붉은 기둥을 세우고 황금빛 지붕까지 얹어서 마치 연회장이 물 위에 떠다니는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배를 바꾸시겠습니까?”
중년의 선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 역시 혁련세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에요. 그대로 하겠어요.”
적세화가 대답했다. 이제 와서 배를 바꿀 시간은 없다.
두 사람은 배 위에 올랐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시종과 하녀 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른다.
“어머나.”
적세화는 눈을 반짝이며 배 안을 돌아보았다. 손빈도 그녀를 따라 배 안을 구경했다.
유람선 안은 제법 널찍한 연회장이었다. 벽 대신 창을 달아서 사방을 막을 수도, 활짝 열 수도 있었다.
준비를 위한 작은 별실은 물론, 예인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무대도 있어서 상당히 본격적인 연회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장식을 조금 변경해도 될까요?”
배의 겉모습만큼이나 화려한 장식들을 보며 적세화가 말했다. 선장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적세화는 하녀들에게 능숙하게 몇 가지를 지시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것들을 빼내고 배치를 조금 바꾸자, 오히려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훨씬 좋군요.”
손빈도 그녀의 안목에 감탄했다. 선장 역시 살짝 놀라는 눈치다.
“자, 그럼 손님을 맞이해 볼까요?”
적세화가 웃으며 말했다. 손빈은 문득 누가 참석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오늘 오시는 분들이 누구라 하셨지요?”
“대부분 상단에서 오신 분들이에요. 혁련세가와 관계가 깊은 화남상단과 그 외에도 마운상단, 재부상단, 송암상단, 회양상단의 분들이지요.”
그들의 이름은 손빈도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천하오대상단이라는 분들이로군요.”
“네. 재력으로는 물론이고 세가나 관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예를 들면 남궁세가는 회양상단과 가깝고, 당문은 송암상단과 오랜 친분 관계가 있어요.”
“그렇군요.”
평소 상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은 터라 손빈의 반응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하지만 상단 관계자라면 이들의 이름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질 터였다.
“아, 그리고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공손세가, 당문에서도 오신다더군요.”
이번엔 손빈도 놀랐다.
“그럼, 오대세가와 오대 상단이 전부 오는 것인가요?”
적세화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 당문이라면…….’
손빈은 생각했다. 당문이라면 서원에도 두 사람이나 있다. 따로 보낼 필요까지 있나 싶은데 어쨌거나 세가 간의 일이라니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리라.
“배례식 전부터 수고가 많으시군요.”
손빈의 말에 적세화가 배시시 웃는다.
“쉽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때였다. 하녀가 배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전한다.
“벌써 왔나 봐요.”
적세화가 말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손빈도 밖으로 나갔다.
선착장으로 나오자 제법 화려한 마차 몇 대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젊은 청년과 아가씨들이 내려선다.
“세가에서 먼저 도착했군요.”
적세화의 말이 아니더라도 손빈은 그들이 무인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
“응?”
손빈과 적세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흘렸다. 세가에서 온 젊은이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문에서 오신 분이, 저 아가씨였군요.”
마차에서 내린 아가씨 중 한 명은 손빈과 적세화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미 만나 본 적이 있는 당문의 은검대 부대주였던 것이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라고 적세화는 반색을 했다. 하지만 손빈은 또 다른 아가씨를 발견하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저 소저는…….’
손빈은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이미 세 번째 만나는 그녀는, 무한의 황학루와 장강의 객잔에서 마주쳤던 공손세가의 아가씨 단심화 공손지였다.
“여기예요?”
마차를 내린 공손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웃는 모습이었다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더욱 빛을 발했겠지만, 아쉽게도 공손지는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 먼 광주까지 와서 대체 무얼 보여 주려나 싶었는데, 기껏 강이라고요? 게다가 유람선? 이제까지 마차에서 흔들린 것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질렸단 말이에요.”
그녀의 불만은 오랜 여정에 따른 피로 때문인 듯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속내를 거침없이 내뱉는 건 분명 무례한 일이다.
함께 마차를 타고 왔던 혁련세가의 젊은 청년이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짓는데도, 공손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 공손 소저께서 실망이 크신가 보오.”
훤칠한 키의 청년이 말했다. 귀공자같이 차려입은 그는 공손지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선상 연회라니, 제법 운치가 있지 않소? 소저의 별호가 단심화이니 오늘은 강물 위의 꽃을 보게 되겠구려.”
“흥, 그런 입에 발린 말은 하지도 마세요. 남궁 오라버니는 항상 말로만…….”
단심화 공손지는 살짝 눈을 흘겼다. 하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은 말이라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린다.
“하하, 남궁 공자의 말이 어찌 입에 발린 것이라 하겠소? 소저의 아름다움이 꽃과 같으니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심이라오.”
때를 놓칠세라 또 다른 청년이 말한다.
“아이, 참. 제갈 오라버니까지……. 이제 그만하세요.”
단심화 공손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슬쩍 다른 아가씨를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 언니는 어때요? 괜찮아요?”
그녀가 당 언니라 부른 여인은 날렵한 몸매를 가진 키가 큰 아가씨였다. 바로 은검대 부대주다.
“나는 괜찮아요. 그리고 언니라 부를 필요 없어요, 공손 소저.”
“어머나, 그래도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잖아요. 안 그래요?”
은검대 부대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단심화 공손지의 맹랑한 속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공손지는 자신이 어리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유치하군.’
그러나 은검대 부대주에게 그런 공손지의 행동은 가소로울 뿐이다.
부대주는 이미 당문에서 인정을 받아 정식 직책을 맡은 사람이다. 아직 세가 내에서 자리조차 잡지 못한 이 젊은이들과는 무공에서나 영향력에서나 비교가 안 될 정도인 것이다.
‘아무리 임무라지만 내가 이런 것들이나 상대해야 한다니.’
은검대 부대주에게 명을 전한 사람은 바로 당문 총괄군사 설검 당화련이다. 어찌 그 명을 소홀히 할 수 있으랴?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쉰 부대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공손지는 사뭇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다.
“어서 오세요.”
그사이, 마차로 다가간 적세화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공손지를 비롯한 두 명의 아가씨와 세 명의 청년들이 적세화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적세화는 공손지의 시선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짝 조소를 띄운 공손지는 뒤에 서 있는 손빈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를 생략한 채 다짜고짜 물어보는 것도, 그리고 그 내용조차도 이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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