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35)
낙향문사전-235화(235/494)
제235화. 배례식의 주인2015.12.01.
혁련세가의 배례식은 조촐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단 혁련세가의 어르신 대다수가 참석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몇 사람만 참석하는 조촐한 배례식은 물 건너가 버리고, 세가의 어른 대부분이 함께하는 제법 큰 자리가 되어 버렸다.
물론 외부 손님은 본래대로 엄격히 제한해서, 배례식은 세가 사람들이 대다수인 가문 내부의 잔치 같은 분위기였다.
“우와, 세화 누나 예쁘네요.”
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손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례식의 주인공인 적세화, 이제 곧 혁련세화가 될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밝은 옷을 입고 배례식장 전면에 앉아 있었다.
복식이나 장식이 아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아서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녀 좌우에는 혁련공과 호연무관의 관주 적철관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혁련세가의 현 가주, 패검 혁련호와 전대 패검 혁련위도 자리했다.
“이렇게 올 수 있을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도 같이 갈 걸 그랬어요.”
서린이 입술을 비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빈과 단둘이 참석한 서린은 평소 도복 같은 외투를 벗고 말쑥한 귀공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서린의 미모가 더욱 빛나서, 배례식에 참석한 여인들 중에 서린을 힐끔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지난번에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거라 서로 인사를 나눠야 했으니까.”
손빈이 해명해 주었다. 지난번 연회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입장이라 적극적으로 인사를 하고 소개를 해야 했다.
반면 손님으로 참석한 지금은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슬쩍 사라지면 그만이다. 물론 지금도 서린에게 말을 건네 보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별문제 없이 잘 끝나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적세화를 보며 손빈은 안도했다.
공손세가의 대표로 온 중년인은 정식으로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고 한다. 물론 공손지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배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참석시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슥.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가 일시에 조용해지고 패검 혁련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오. 지금부터 배례식을 시작하겠소.”
가주의 말과 함께 배례식이 시작되었다.
배례식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본질적으로 무가인 혁련세가가 예법이나 형식을 그리 중요시 하지 않는 데다, 이런 배례식이라는 것이 딱히 정해진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혁련세가의 조상께 이번 일을 아뢰고 그 후에는 호연무관의 적철관 부부에게 키워 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절을, 그리고 새로이 부모로 섬기게 된 혁련공 부부에게 절을 한다.
그것으로 핵심적인 절차는 끝이었다. 그러나 배례식은 생각보다 길게 끌었다.
이제 정식으로 가족이 된 혁련세화의 인사를 받고자 하는 세가의 어른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절을 하는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아니면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는지 서린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비록 좌우에 도와주는 시녀들이 있다고 해도 많은 어른들께 일일이 절을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아무리 무관의 여식이라 하나 여인의 몸으로 어찌 힘들지 않으랴. 그러나 혁련세화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린에게 말해 주었다.
“인사를 받겠다는 것은 가문의 어른으로서 돌보아 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말하자면 관계의 인정이라는 것이지. 그러니 이건 세화 소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돕겠다는 뜻인 거야.”
본래 예상보다 더욱 많은 세가의 어른들이 혁련세화의 절을 받는다. 그것은 그만큼 혁련세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세가 내에서 혁련세화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럼 진짜 혁련세가의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건가요?”
“아마 그럴지도?”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린이 대번에 우울한 표정이 된다.
“우웅, 그럼 세화 누나 자주 못 보겠네요.”
그건 서린도 대번에 알아차릴 만큼 당연한 사실이었다.
세가의 일을 맡게 되면 서원에는 아무래도 소홀해지리라. 어쩌면 앞으로 얼굴 보는 것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도시 청원의 작은 서원과 혁련세가는 감히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차이나는 곳이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겠니? 세화 소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손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적세화, 아니 혁련세화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면 손빈은 기꺼이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 속에 있는 그녀가 너무나 빛나 보이지 않는가?
“그럼 이제 함께 자리해 주신 귀한 손님들께 예를 올리겠소.”
혁련세가 어른들께 올리는 절이 끝나자, 이번엔 손님들의 차례가 되었다.
물론 혁련세화가 손님들에게 절을 하지는 않는다. 손님들의 축하를 받는 사람도, 감사의 예를 표하는 사람도 혁련세화가 아니라 혁련공이다.
어디까지나 이번 배례식은 혁련공이 딸을 맞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대세가 중 혁련세가를 제외한 세가들이 차례로 예물을 전하고 먼저 혁련공에게, 그리고 혁련세화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조금 색다른 일이 일어난 것은 당문의 차례였다.
“축하드립니다.”
당문에서 온, 중후한 느낌의 중년인이 혁련공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혁련세화에게도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혁련세화가 단정한 모습으로 정중히 예를 표한다.
“아, 그리고 자네에게 전하라 하는 말씀이 있으셨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당문에서 혁련세화에게 말을 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운영 어르신과 총괄군사께서 자네의 친절에 대해 특별히 감사의 말을 전하라 하셨네. 비록 우연한 인연이었으나 이처럼 귀한 우연은 언제라도 기쁜 것이라 하시더군.”
적세화가 친절을 보여 준 것은 사실이다.
당장 노부인 당운영이 그러하고, 총괄군사 당화련이 서원을 방문했을 때도 음식을 한 사람이 적세화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적세화를 만난 건 당월아로 인한 것이니 우연이라는 말도 맞다. 그러나 그 모든 사정을 이해하는 건 손빈과 서린, 그리고 적세화뿐이다.
“당문 총괄군사? 그 설검 당화련 말인가?”
“당운영 어르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웅성거렸다.
“강호행이라도 하다 만난 것인가?”
“그러고 보니 호연무관에서 강남 용봉지회에 계속 나갔었지? 거기서 만났을까?”
중소 무관의 여식과 당문이 만난 ‘우연한 인연’에 대해 궁금해하며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세화가 언제?”
부친 적철관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혁련세화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당문의 중년인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당문에서 온 중년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화군께서도 축하의 인사를 전하라 하셨네. 언제라도 당문을 찾아 준다면 가주의 이름으로 환영할 것이라 하시더군.”
사람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화군은 곧 당문의 문주 화군 당옥담을 일컬음이다. 당문의 문주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것이다.
혁련세화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재차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놀라움으로 물드는데, 이번에는 남궁세가에서 온 중년인이 혁련공에게 예를 표했다.
“훌륭한 따님을 맞이하게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고맙소이다.”
혁련공이 웃으며 감사의 예를 표한다. 남궁세가에서 온 중년인은 혁련세화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당문과 인연이 있었다니 놀랍군. 실은 전대 뇌검께서도 자네에게 따로 축하를 전하라 하셨네.”
“오오.”
사람들은 탄성을 흘렸다.
당문의 가주가 축하를 전한 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전대 뇌검 남궁천과는 그 무게감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말하는 남궁세가의 중년인도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다. 남궁세가의 공자 남궁혁의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다. 그에게는 하늘 같은 전대 뇌검이 혁련세화에게 따로 축하를 전하는 것이다.
“지난번 광주를 방문하셨을 때 자네의 친절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하시더군. 언제라도 남궁세가를 찾아 주기 바라네. 전대 뇌검의 손님이시니 기쁘게 맞이하도록 하겠네.”
칭찬의 말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혁련세가 사람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자부심과 함께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남궁세가의 중년인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전대 뇌검께서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 하시던데…… 무슨 뜻인가?”
말을 전하면서도 그는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체 전대 뇌검이 혁련세가의 양녀에게 잘 부탁할 것이 무어란 말인가?
혁련세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분에 넘치는 말씀이군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그건 언뜻 들으면 의례적으로 나누는 인사 같았다. 남궁세가에서 온 중년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를 마지막으로 세가들의 인사가 끝나고, 오대상단에서 온 인사들이 혁련공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이런 훌륭한 따님을 얻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뵈었지만 아직도 예전과 똑같으시군요.”
화남상단에서 온 인상 좋은 중년의 사내가 혁련공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혁련공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는 혁련세화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소저. 앞으로도 우리 화남상단을 잘 부탁드립니다.”
화남상단에서 온 중년인은 연배도 어린 혁련세화에게 대단히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문의 총괄군사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 그리고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혁련세화에게 인사를 전했다.
게다가 오늘로서 혁련공의 딸이 되어 정식으로 혁련세가의 사람이 된다.
오대세가 중 세 곳과 인연을 맺은 셈이니,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으랴? 뒤를 이은 다른 상단의 사람들 역시 정해진 수순처럼 혁련세화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공식적인 배례식이 마치고 가벼운 연회가 시작되었다.
“하하하.”
“호호호.”
혁련세화 주위에는 인사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이전 연회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단과 세가의 사람들도 그녀와 인사를 나누려 했다.
혁련세화는 시종일관 웃으며 여유롭게 손님들을 맞이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하에 이름 높은 오대세가와 오대상단이 모인 이 배례식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그녀, 혁련세화였다.
‘잘됐네.’
손빈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런 자리야말로 적세화, 아니 혁련세화에게 어울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손빈은 혁련세화와 눈길이 마주쳤다.
혁련세화가 손빈을 향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손빈이나 서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손님들 탓에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손빈은 괜찮다는 뜻을 담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만 갈까?”
노부인 당운영의 말도 있고 해서, 손빈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떠나기로 했다.
“인사 안 하고요? 그리고 이것도 먹어야 하는데…….”
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에 놓인 요리를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려고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인사는 벌써 했어. 가면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서린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손빈이 그렇다 하니 조금도 의심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네, 형.”
손빈은 서린과 함께 조용히 물러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막 연회장을 나가려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손빈을 가로막는다.
“가는가?”
위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체격의 전대 패검, 혁련위가 앞에 서 있었다.
“네. 세화 소저를 잘 부탁합니다.”
손빈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제 혁련세화를 서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기꺼이 축하해야 할 일이다.
전대 패검 혁련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음……. 또 보지.”
다시 한 번 손빈은 혁련위에게 예를 표했다. 서린도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혁련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히 계세요.”
혁련위는 고개를 끄덕여 서린에게 답례했다. 서린은 바로 손빈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손빈은 혁련세화의 앞날이 밝기를 마음 깊이 염원하며 세가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난 후에도 혁련세가의 연회는 오랫동안 끝날 줄을 몰랐다.
*
*
*
다음 날 새벽, 손빈은 늘 하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인기척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어느새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다. 손빈은 등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방 한쪽 나무 지지대 위에 놓여 있는 흑색 대도, 파월을 한 번 바라보고 손빈은 밖으로 나섰다.
달칵.
“누구…….”
누구냐고 물으려던 손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적세화, 아니 혁련세화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소저.”
놀란 표정으로 손빈이 묻는다. 혁련세화는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손 공자님.”
“아, 네. 좋은 아침…….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반사적으로 인사를 받던 손빈이 다시 물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가 답했다.
“오늘부터는 저희가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거든요.”
“저희요?”
“네. 저와 수연 소저, 월아 소저, 그리고 당운영 님요. 수연 소저와 월아 소저도 곧 올 거예요.”
혁련세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 별채에서 노부인 당운영과 노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 벌써 왔는가?”
“왔냐?”
당운영과 노군에게 혁련세화는 공손히 아침 인사를 올렸다.
“저,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손빈이 물었다. 노부인 당운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 자네에게 계속 신세를 진 것이 미안해서 말이네. 세화도 시간이 된다 하니 이제부터 식사는 우리에게 맡기게나.”
이제까지 식사 준비는 손빈이 해 왔다. 사수연도 그런 쪽에는 경험이 없고 당월아에겐 애초부터 기대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오랜 서원 생활로 경험이 있는 손빈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정리와 설거지 같은 것을 사수연과 당월아가 해 왔다.
“왜? 못 믿겠나?”
노부인 당운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미덥지 못하기는 하다. 그래도 혁련세화가 있으니 낫긴 할 터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화 소저,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이제 저 독립했잖아요.”
혁련세화가 웃었다.
양녀가 된 것을 왜 독립했다고 표현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괜찮다는 뜻인 듯했다.
“쌀쌀하군. 차라도 마시자.”
여전히 어리둥절한 손빈에게 노군이 말한다. 아침마다 있는 일이라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준비하겠습니다.”
손빈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고, 노부인 당운영은 혁련세화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혁련공 어르신은 잘 있나?”
“네, 새벽에 기침하셔서 이미 아침 문안을 드리고 왔어요.”
혁련세화가 대답했다. 당운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물었다.
“혁련위 대협께서는 무어라 하시던가? 다른 말씀은 없었나?”
“혁련공 어르신을 잘 부탁드린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말이 있을 리가 없지. 혁련위 그놈은 자기 딴에는 그냥 양손녀 들인 것뿐이니까.”
옆에 앉아있던 노군이 툭 던지듯 말한다.
“우직한 소 같은 놈이다. 숨은 계책 같은 것도, 딴마음 같은 것도 없어. 그런 주제에 발을 옮길 때마다 쥐를 잡는단 말이지.”
적세화가 웃고 노부인 당운영도 웃으며 말한다.
“그런 사람이지요. 남들은 온갖 계산 후에 내놓는 계책을, 혁련위 대협은 아무 생각도 없이 대뜸 실행해 버리거든요.”
“그러니 뇌검 그놈이 미치려고 하지. 빈이 놈 마음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패검 이놈은 그냥 한 방에 끝내잖아.”
적세화가 혁련세화가 되었다. 손빈의 심성으로 볼 때 혁련세가에 어떤 마음을 갖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노군의 말에 적세화가 살짝 보탠다.
“손 공자님의 마음을 얻겠다는 그런 의식조차 없으세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더 무서운 놈이라고.”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노군은 툴툴거렸다.
“덕분에 난데없이 저만 덕을 본 것 같아서 죄송하기까지 해요.”
혁련세화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요 근래 부모님 눈치가 제법 심각했거든요. 이대로라면 제가 서원을 그만두든가, 아니면 손 공자님과 혼인하겠다고 선언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어요.”
노부인 당운영은 웃었다. 그런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다행이로군. 이번 일로 독립도 하고,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도 한 셈이 아닌가?”
“네. 그러니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혁련공 어르신, 아니 아버님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럼 혁련공 어르신이 복귀할 생각은 정말 없는 건가?”
“네. 결심이 이미 확고하시더군요.”
혁련세화의 말에 당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문득 문이 열리고 신의가 방에서 나왔다.
“음, 세화 왔구나.”
“네, 신의님.”
혁련세화가 인사를 올리는데 신의 뒤에서 서린의 반가운 음성이 튀어나온다.
“세화 누나!”
“잘 잤니? 서린아.”
혁련세화는 웃으며 서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청아, 홍아를 비롯한 다섯 아이들이 두다다다 달려온다. 아이들은 당월아의 집에 살고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다 하여 방을 따로 받았지만 항상 같이 몰려다니는 건 여전하다.
아이들은 노군, 당운영, 신의, 혁련세화, 서린에게 줄줄이 인사를 했다. 뒤이어 사수연과 당월아가 뒤따라 서원으로 들어와 아침 인사를 올린다.
“아, 세화 소저. 배례식은 잘 끝났나요?”
“네. 고마워요, 수연 소저.”
혁련세화는 사수연과 인사를 나누었다.
당월아는 늘 그렇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다. 혁련세화는 웃으며 그녀에게 답례했다.
한산하던 서원은 갑자기 떠들썩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던 노부인 당운영이 말했다.
“자, 그럼 아침 준비를 시작할까? 오늘은 좀 늦었구나.”
당운영을 따라 사수연, 당월아, 혁련세화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차를 가지고 나오던 손빈과 스쳐 지나던 혁련세화는 손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세화 소저.”
“네?”
지나던 손빈이 문득 생각난 듯 부른다. 혁련세화가 발을 멈추자 손빈이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저, 그때 하고 싶다던 일은…….”
분명 그녀는 ‘욕을 먹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 와 있어도 될까 싶은 것이다. 사실 차를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이해를 못 한 손빈이 마지막으로 부딪힌 문제이기도 하다.
“아, 그거요?”
혁련세화는 웃었다.
“지금 하고 있답니다.”
“네?”
손빈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혁련세화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그대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건 너무나 밝고 아름다운, 그야말로 꽃보다 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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