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40)
낙향문사전-240화(240/494)
제240화. 남궁세가2015.12.19.
검희가 나타난 것은 난데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손빈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상대가 바로 검희인 까닭이다.
그녀의 행동은 늘 종잡을 수가 없다. 지금 이곳이 남궁세가의 한복판이라는 것도 그녀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검희의 경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지난번 화사와 함께 세화에게 글을 배운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아직 안 돼?”
검희가 다시 묻는다.
혁련세화는 검희가 매우 총명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말하는 투는 여전히 그대로다.
“네. 아직은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답했다. 무엇이 갑자기 그녀를 나서게 했는지 몰라도 지금의 손빈에겐 불가능한 이야기다.
검희는 손빈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리겠어. 그것이 언제가 되더라도. 그리고…….”
사락.
검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지켜보겠어. 네가 과연 무엇을 버릴지.”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마치 본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는 서리만이 그녀가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곧 사라져 버리리라.
‘사랑하는 것을…… 떠나야 한다.’
손빈은 남궁소유에게 해 주었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이 단순한 말의 무엇이 자신을 사로잡았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마치 수행을 시작하는 이들의 화두(話頭)처럼 손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손빈은 그날 아침 식사 시간에 조금 늦었고, 기다리느라 입이 튀어나온 서린에게 ‘형, 너무 늦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남궁세가가 특별히 준비한 아침 식사는 손빈이 보기에도 매우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
*
*
아침을 마친 손빈 일행은 차를 마시며 한가하게 오전을 보냈다. 아마도 여행의 피로를 풀고 쉬라는 남궁세가의 배려인 듯했는데, 낮이 되자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청년이 손빈을 찾아왔다.
“진룡대협!”
훤칠한 키에 강한 눈매를 지닌 그 청년은 손빈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그날의 인사를 드리지 못함이 늘 아쉽더니,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저는 남궁훈입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그 청년은 손빈의 기억에도 있었다. 그날 등왕각에 있었던 남궁세가의 후기지수였다.
‘세가 내의 입지는 좁으나 실력은 진짜’라던 혁련세화의 말도 함께 떠오른다.
“반갑습니다. 저는 손빈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손빈이 그의 예에 답하며 말했다. 그날 남궁훈은 혈룡문의 검에 상처를 입었었다.
“괜찮습니다. 벌써 오래전 일이니까요.”
남궁훈은 호기롭게 웃으며 답했다. 환한 그 웃음에 손빈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파검신녀께서 오셨다 함을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과연 대협께서 계셨군요.”
그는 신의와 당월아 그리고 서린에게도 차례로 예를 표했다. 등왕각에서 목숨을 구해 준 사수연에겐 더욱 정중했다. 인사가 끝나자 그가 손빈을 보며 말했다.
“신의께서도 계시다 하여 제가 안내를 자처하였습니다. 괜찮으시면 세가의 이곳저곳을 보여 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마침 무료해지기 시작하던 참인 데다 신의를 제외하곤 다들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손빈은 감사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남궁훈과 함께 돌아보는 남궁세가는 매우 흥미로웠다.
건물들은 크고 화려했지만 결코 지나치지 않아서, 그 외관에서부터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건축양식 또한 전통적이기보다는 이국적인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다들 활기차고 밝으며 은은한 자부심마저 배어 있었다. 대부분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관의 복식을 한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저희는 관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의아해하는 손빈의 표정을 읽었는지 남궁훈이 말해 준다.
“강남의 유력 관리들 중에 남궁세가와 연관이 없는 자가 없고, 이곳 남창에선 남궁세가를 빼놓고 관의 일을 논할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이지요. 실제로 관의 직책을 맡은 방계 혈족 역시 적지 않으니까요.”
남궁훈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좋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저는 그만큼 남궁세가가 정도를 걷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남궁세가로 인해 강남의 치안이 상당 부분 좋아진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남궁세가가 장악한 지역에선 사파나 무뢰배들이 큰 힘을 쓰지 못한다. 상인들 또한 비교적 안심하고 거래를 할 수 있으니 상업 또한 활발해진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역 토착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남궁세가의 도움은 그야말로 명분과 실익 모두를 잡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무림 문파들에게 남궁세가의 행태는 결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심지어 무당파가 황실과 오랜 관계를 맺어 온 것조차 짐짓 외면하고 있는 판국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빈이 말했다.
“올바르게 쓰인다면 세상에 버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정도의 차이에 있겠지요. 서로가 납득하고 선한 결과를 이루는 데 사용된다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역시 진룡대협이시군요.”
손빈의 긍정이 그를 기쁘게 한 듯 남궁훈은 밝게 웃었다. 하지만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대협이라는 호칭은 과분하니…….”
비슷한 또래의 남궁훈에게 깍듯이 ‘대협’이라 높임을 받는 건 손빈에겐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남궁훈은 오히려 정색을 했다.
“그럴 리가요. 대협께서 대협이 아니라면 누가 대협이겠습니까? 대협이야말로 대협이라는 명호가 어울리는 대협이십니다.”
쏟아지는 ‘대협’의 폭포에 손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는다. 새벽에 만났던 남궁소유 역시 그러지 않았던가?
게다가 남궁훈 본인이 ‘진룡대협’이라는 명호를 시작한 사람임을 손빈이 알았다면 이런 부질없는 저항은 하지도 않았으리라.
옆에 있던 서린과 사수연이 웃음을 흘리는 것을 들으며, 손빈은 문득 새벽에 남궁소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중앙 연무장이라는 곳이 있습니까?”
남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 부근에 있습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제가 가도 괜찮습니까?”
“당연합니다.”
남궁훈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으로 검기 발현의 절정고수를 패퇴시킨 손빈의 검로는 아직도 남궁훈의 뇌리에 생생하다.
그가 청년들의 수련을 보고자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이리로 오시…….”
“손 공자님.”
문득 들린 여인의 목소리에 남궁훈과 손빈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남궁향이 있었다.
“남궁향 소저.”
반가운 마음에 손빈이 말했다. 미소 짓던 남궁향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단아한 걸음으로 손빈 일행에게 다가왔다.
사박, 사박.
“세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예법의 교본처럼 우아하게 걸어온 남궁향은 손빈 일행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제가 맞이했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소저의 배려 덕분에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녀에게 답례하며 손빈이 말했다. 남궁향이 전해 준 옥패가 아니었다면 남궁세가에 들어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군요.”
부드럽게 미소 짓던 남궁향이 문득 물었다.
“혹시 지금 어딘가 가시는 길이신가요?”
“제가 중앙 연무장으로 모시는 중입니다.”
옆에 섰던 남궁훈이 남궁향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답한다. 남궁향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는 손빈을 향해 묻는다.
“무례가 아니라면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물론 안 될 리가 없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감사하지요. 헌데 듣기로는 바쁜 일이 있다 하던데,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한 남궁향은 뒤따르는 시녀 중 한사람에게 무엇인가 말을 전했다.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사라진다.
“할아버지께서도 곧 돌아오실 거예요. 공자님께서 오신 것을 아시면 아주 기뻐하시겠네요.”
방긋 웃으며 남궁향이 말했다. 손빈은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신의를 떠올렸다.
“아, 그리고 신의께서도 함께 오셨습니다. 지금은 숙소에 계십니다.”
“그렇군요. 나중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게요.”
남궁향이 합류하자 일행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손빈 일행은 그녀와 함께 중앙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곳입니다.”
앞장서서 걷던 남궁훈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손빈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중앙 연무장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었다.
보통 연무장이 건물 바깥에 위치하고, 설령 지붕을 덮는다 해도 일부인 반면 남궁세가의 연무장은 전체가 넓은 지붕으로 덮여 있었다.
벽을 세우는 대신 커다란 붉은 기둥들이 육중한 지붕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답답하지도 않고 웅장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손빈의 감탄에 남궁훈이 미소를 짓는다.
“멋진 곳이지요. 그러나 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연무장은 저곳이 아닙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손빈에게 남궁훈이 말했다.
“가주께서 거하시는 청풍헌 뒤편에 마검연(磨劍淵)이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역대 가주들께서 그곳에서 검을 수련하셨지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연이라 함은 ‘무뎌진 칼날을 가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무(武)를 중시하는 세가의 정신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과연 검왕가라 불리는 남궁세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지금은…….”
말을 잇던 남궁훈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어서 가시지요. 마침 잠룡지회가 열리게 되어 사제들이 많이 와 있을 것입니다. 아, 잠룡지회는…….”
“들었습니다. 세가의 젊은 후기지수를 뽑는 자리라지요?”
남궁훈은 살짝 놀란 표정을 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가시지요, 대협.”
손빈은 그를 따라 연무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일행과 합류한 남궁향은 사수연, 서린, 당월아와 함께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당월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지만.
문득 손빈은 방금 전 남궁훈이 자신을 대협이라 호칭한 것을 떠올렸다.
“남궁 소저.”
“네.”
남궁향이 손빈을 바라본다. 덕분에 이야기를 나누던 사수연, 서린 당월아도 손빈을 향한다.
“실은…….”
본래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진룡대협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말해주려 했다. 갑자기 타인에게서 알게 되는 것보다는 본인이 직접 말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진룡대협입니다’라고 말하자니 갑자기 잘난 척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수연과 서린, 당월아까지 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아, 저기, 그게…….”
손빈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왜 그러세요?”
남궁향이 놀란 눈으로 묻는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손빈을 향한 걱정이 가득하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괜찮아요, 손 공자님?”
“형. 왜?”
사수연과 서린도 덩달아 걱정하기 시작하고 당월아마저 눈을 깜빡이며 쳐다본다. 남궁훈도 발걸음을 멈추고 손빈을 바라보니 모든 사람이 손빈을 쳐다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닙니다. 별일 아니니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손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어쩐지 오늘은 새벽부터 당황스러운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일행은 다시 연무장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손빈은 걱정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가주님께도 말씀드려야 하나?’
남궁소유의 말처럼 손빈을 진룡대협이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다. 당연히 가주도 모르고 있으리라.
나중에 남궁훈이나 남궁소유를 통해 듣게 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일부러 숨긴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것이다. 방금 전의 경험으로 볼 때 ‘내가 진룡대협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난제다.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거지?’
자신이 바라지도 않은 과분한 호칭 덕분에 쓸데없는 고민만 생겼다.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더더욱 억울하다.
‘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그런 명호를…….’
‘진룡대협’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다시 화끈거린다. 그 ‘할 일 없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채 손빈은 남궁훈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타하아!”
문득 들려오는 기합소리에 손빈은 눈을 들었다. 일행은 어느새 중앙 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하압!”
부웅.
“타앗!”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터져 나오는 기합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빈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이는 청년과 아가씨 들이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채 수련하는 중이었다. 그 수련의 나날이 적지 않음을 말해 주듯 눈빛들이 사뭇 강렬하다.
“사형!”
누군가 남궁훈을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시끄럽던 연무장이 갑자기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오오.”
연무장의 누군가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린다. 남궁훈과 남궁향 역시 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지만, 지금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수연이었다.
사수연의 미모는 독보적이다. 파검신녀라 불릴 때부터 그러했지만, 북해에서는 사술이나 마력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이후 북해빙정의 힘은 사라졌으나 그녀는 차가운 얼음꽃처럼 그 아름다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주 보는 일행들조차 그러하니 처음 보는 젊은이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그들은 사수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하.’
사수연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보며 손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손빈 역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러했으니까.
게다가 요즘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노군께서 투덜대실 만하네.’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노군이나 신의의 마음을 알 듯했다.
사수연은 짐짓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손빈은 이곳을 보지 않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손빈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궁소유 소저?’
그녀는 바로 새벽에 만났던 남궁소유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연무장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새벽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이후 계속 이 연무장에 있었던 듯했는데,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손빈 일행이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무릎 위에 놓인 검을 쓰다듬거나 입술을 깨무는데 그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세가를 찾아 주신 귀빈을 소개하겠다.”
남궁훈의 힘찬 목소리가 연무장 끝까지 퍼져 나갔다. 젊은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자 남궁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젊은이들이 눈빛에 기대가 떠올랐다. 드디어 저 아름다운 아가씨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남궁훈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분께서 진룡대협, 손빈 님이시다.”
한순간, 젊은이들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손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비록 노골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지만, 많은 사람들의 실망스러운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손빈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그로써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정중한 반응이었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더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저 사람이…… 진룡?”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흘린 그 말이 모두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빈도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이 무슨 무례더냐!”
기백이 담긴 커다란 목소리가 남궁훈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한번 발을 구른 그는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대협께서 예를 표하시는데 감히 답례조차 없다니, 이러고도 너희가 남궁세가의 무인이라 자처하는가!”
남궁훈의 분노는 젊은이들을 퍼뜩 깨어나게 했다. 그들은 일제히 손을 모으며 손빈에게 예를 표했다.
“대협을 뵙습니다.”
“대협을 뵈어요.”
모두가 손빈에게 고개를 숙였다. 멍하니 있던 남궁소유도 놀란 얼굴로 일어나 다른 이들을 따라 예를 표한다.
“대협.”
남궁훈이 굳은 표정으로 손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손을 모으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그건 짧고 묵직한, 그리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말에 손빈은 당혹스럽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지 그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음성을 통해 남궁훈의 진솔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손빈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손빈은 손을 모아 남궁훈의 예에 답했다.
“부족한 저에게 이토록 예를 다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손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남궁훈도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당당하고 따뜻한 그 미소를 마주하며, 손빈은 그제야 남궁세가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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