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43)
낙향문사전-243화(243/494)
제243화. 전조(前兆)2015.12.29.
“타핫!”
젊은이들의 패기에 찬 기합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도 없고 눈을 빼앗는 현란한 검법도 아니다.
그러나 땀과 인내 그리고 눈물로 버텨 온 수련의 시간을 말해 주듯, 젊은이들의 내력을 담은 칼날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카앙!
은빛 칼날이 서로 충돌하며 불꽃이 튄다. 그 충격이 작지 않기에 검을 맞댄 두 사람 모두 눈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문다. 그러나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타하!”
서로 대치하는 그 한순간 먼저 틈을 감지한 청년이 온 내력을 실어 검을 내리쳤다.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무모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편 청년은 그 일격을 흘려 낼 여력도, 순발력도 갖지 못했다.
부욱, 카아앙!
“큭.”
검으로 막았으나 충격은 피할 수 없다. 그는 균형을 잃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사이 틈을 놓치지 않은 상대의 검이 이미 그의 목에 놓였다.
“그만!”
경합을 주관하는 중년인이 중단을 선언했다. 승패가 결정된 것이다.
“후우, 후우.”
승리한 청년은 검을 거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얼굴엔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상대 청년은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으나 곧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세웠다. 하지만 어두운 표정은 어쩔 수가 없다.
두 청년은 세가의 어른들과 귀빈들께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다음.”
중년인의 말에 두 젊은이가 연무장 가운데로 나왔다.
긴장한 표정의 청년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의 남궁소유였다.
보고 있던 손빈이 신의에게 물었다.
“상대가 남자라면 남궁소유 소저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남궁세가는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소.”
대답은 신의 건너편에 있던 가주가 했다. 가주 남궁권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검을 든 무인에게 남녀의 구분은 무의미하오. 오히려 강호 무림에서 여자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대부분 남자가 될 터, 여자끼리만 경쟁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소.”
손빈이 가주 남궁권을 보며 말했다.
“요컨대 불공평하다 생각될지라도 그것이 현실인 이상 맞서 싸울 준비를 하라는 뜻이군요.”
“그렇소. 그것이 바로 남궁세가의 정신이오.”
가주 남궁권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손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으로 훌륭한 정신입니다.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걱정이라니?”
남궁권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손빈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불공평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덕입니다. 허나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습성이 있지요. 혹여 바꿀 수 있는 폐습마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요?”
돌려 이야기했지만 결국 남궁권의 말을 비판한 것이다.
남궁권은 손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제법 위압적이었지만 손빈은 온화한 표정으로 담담히 마주할 뿐이다.
“허허.”
가주 남궁권이 웃음을 흘렸다.
“옳은 말씀이오. 내 명심하도록 하겠소.”
“감히 주제넘었습니다. 좋게 받아들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손빈의 감사는 진심이었다. 남궁권에 비하면 손빈은 연소한 데다 주인도 아닌 손님이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매우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흐음.”
가주 남궁권은 손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손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가 빙긋 웃는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서 말이오. 사람들은 문사들이 유약하다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꼿꼿한 이들이 아니오? 상대가 누구이건 물러서지 않으며, 설령 부러질지언정 절대 휘지 않으니 말이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에둘러 책망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오. 손 대인께 무어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정말 문사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문사는 맞습니다만…….”
손빈이 대답했다. 그러나 남궁권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다 이해한다는 듯한 그 표정에 손빈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그사이 남궁소유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타하아!”
팟.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상대편 청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기로 작정한 듯 거친 기세를 내뿜으며 남궁소유를 향해 짓쳐 들었다.
반면 남궁소유는 검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승부를 포기한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했을 리는 없다. 남궁소유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우욱.
청년의 칼날이 남궁소유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한눈에도 제법 범상치 않은 내력이 담긴 강렬한 일격이었다.
그 일격이 남궁소유를 향해 짓쳐 드는 순간, 멈춰 있던 그녀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오.”
남궁권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손빈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쉬릭.
남궁소유는 맞서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히는 듯하던 그녀의 검은 청년의 강맹한 일격을 부드럽게 흘려 내더니, 어느새 그의 옆구리로 파고든다.
‘헉.’
청년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여기서 뒤로 물러났다간 허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게 된다. 그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타하아!”
타앙.
발밑에서 전해지는 육중한 반탄력. 그 기세를 이용하여 청년은 그대로 몸을 틀며 남궁소유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욱.
자세는 조금 무너졌으나 한층 기세를 더한 칼날이 남궁소유의 유연한 허리를 가를 듯 짓쳐 든다.
허점을 노리던 남궁소유에게 오히려 역습을 가하는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남궁소유는 걸려들지 않았다.
탓.
남궁소유가 발을 구른 순간 그녀의 모습이 청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휘릭.
허공에서 남궁소유의 분홍빛 무복이 춤을 춘다. 그리고 청년은 보았다. 자신의 눈앞을 남궁소유의 검 끝이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큭.’
실전이었다면 자신은 그대로 실명했으리라. 그러나 아직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청년은 스스로의 기세를 감당 못 하고 몇 걸음 더 나아간 후에야 멈추었다. 그리고 즉시 몸을 돌렸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남궁소유를 공격하기 위해서다.
슥.
그러나 고개를 돌린 순간, 청년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남궁소유의 칼끝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언제…….”
청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뛰어오르는 것은 보기엔 화려하지만 위치와 방향을 바꾸기 힘들다. 자신의 판단대로라면 분명 남궁소유가 착지하기 전이다.
그러나 남궁소유는 이미 자신의 눈앞에 서 있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서.
“조금 전에요.”
남궁소유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만!”
중년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부가 결정된 것이다.
휘릭.
남궁소유는 가볍게 검을 거두었다. 검이 모습을 감추고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남궁소유가 예를 표했다.
“움직임이 좋군요.”
비무를 지켜보던 손빈이 말했다. 남궁소유가 청년의 뒤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움직임에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차이가 상대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승부는 그 이전에 결정되었지만.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습니다. 조금 전 그것은 분명 남궁검법이었지요?”
“그렇소. 남궁검법이오.”
가주 남궁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미소를 지으며 남궁소유를 쳐다보고 있었다.
“본래 저 아이의 남궁검법이 탁월하였으되 경직된 감이 없지 않더니, 오늘은 초식의 활용과 연계가 매우 유연하고 자유분방하오. 특히 허공에서 펼쳐 낸 초식은 제법 인상적이었소.”
조금 전 남궁소유가 보여 준 모습은 전부 남궁검법에 있는 동작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계는 남궁권조차 처음 보는 것이다.
“평소의 저 아이와 비교하면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을 정도로군.”
슥.
남궁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무를 마치고 물러나려던 남궁소유는 가주 남궁권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좋은 비무였다. 대인께서도 자네의 검을 칭찬하시더군.”
“감사합니다, 가주님.”
가주의 칭찬에 남궁소유의 얼굴이 약간 상기된다. 그녀는 손빈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좋은 검이었습니다. 아주 인상적이군요.”
손빈의 말에 남궁소유가 살짝 웃는다.
“고마우신 분께 검평을 받은 덕분입니다.”
그 고마운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손빈이다. 손빈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남궁권이 물었다.
“검평이라? 어떠한 것이더냐?”
그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은 것은 당연히 남궁소유의 부친이 해 주었을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뭐랄까요, 그저…….”
남궁소유의 귀여운 얼굴에 살짝 장난기가 돌았다.
“포기하면 편해진다더군요.”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손빈은 억울했지만 여기서 그걸 따질 수는 없었다.
“포기라고?”
가주 남궁권이 의아한 표정을 한다. 남궁소유는 반짝이는 눈으로 가주에게 말했다.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 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포기라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무엇인가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녀의 말은 손빈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권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소유가 보여 준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변한 건 그녀의 검술만이 아니다.
지금 남궁소유는 가주 앞에서도 사뭇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너무 긴장이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젊은이다운 활기가 느껴져 그리 나쁘지 않다.
“수고하였다. 더욱 정진하도록 해라.”
가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격려해 주었고, 남궁소유는 감사의 예를 표하고 자리로 물러갔다.
그 이후로도 몇 사람의 비무가 계속 이어졌다. 손빈의 시선을 끈 비무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하여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남궁소유는 그 이후로도 유연하고 신선한 검로를 선보이며 상대를 이겨 나갔다. 정석에 가까운 남궁세가의 강한 검법들 중에서 그녀의 비무는 단연 돋보였다.
그 결과 잠룡지회의 마지막 결전은 남궁소유와 남궁규라는 청년이 겨루게 되었다.
“저 청년의 무복은 독특하군요.”
남궁규를 보며 손빈이 물었다. 그의 무복은 남궁세가의 것과 조금 달랐다. 덕분에 호리호리하고 신경질적인 남궁규의 인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세가의 방계에 속한 청년이오.”
가주 남궁권이 말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궁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계가 결선까지 남는 경우가 드문데, 제법 자질이 뛰어난 청년인 것 같소.”
직계는 대부분 방계보다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환경의 탓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계인 남궁규가 지금까지 이겨 왔다는 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는 뜻이리라.
“그만큼 열심히 수련을 했다는 뜻도 있겠지요.”
손빈의 말에 남궁권이 빙긋 웃었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남궁세가에 없소.”
남궁권은 청년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 젊은이들은 실력만으로 볼 때 모두 세가의 미래를 짊어질 만한 인재들이오. 한 번 경합에서 이기거나 졌다 하여 어찌 저들 간의 우위를 정할 수 있겠소?”
“옳은 말씀입니다.”
손빈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가주의 말은 손빈의 생각과 사뭇 달랐다.
“허나 아무에게나 세가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법. 결국 저들의 성정과 인품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가문의 기둥으로 서게 될 자들이 결정될 것이오.”
손빈은 남궁권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실력이 다들 비슷하다면 당연히 인품을 보아야 하리라.
사실 실력 이전에 보아야 하는 것이 인품이겠지만, 무가(武家)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주 남궁권이 말하는 성정과 인품은, 경합 한두 번으로는 알 수 없다는 실력보다 더 애매한 것이다.
결국 혈연과 가문 내의 인맥으로 정해진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혈연 조직의 폐단이라는 것이로구나.’
손빈은 남궁향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실력을 겨루는 과거제도도, 존경받는 어른의 안목을 신뢰하는 천거 제도도 모두 예부터 인정받아 온 관리 등용 방식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남궁권의 말을 무조건 비판할 수도 없다.
“시작하오.”
가주의 말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연분홍 무복을 입은 여성스러운 몸매의 남궁소유와 호리호리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궁규가 검을 빼어 들었다.
이번만큼은 남궁소유의 눈동자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하다. 특히나 마르고 키가 큰 남궁규의 눈빛은 사뭇 섬뜩할 정도다.
‘응?’
문득 손빈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 저랬던가?’
남궁규의 비무는 조금 전에도 몇 번 있었다. 당연히 손빈도 보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늘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자세히 볼수록 마치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화감이 든다.
손빈은 혹시나 싶어 가주 남궁권을 보았다. 그러나 남궁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옆에 있는 신의는 애초부터 별 관심이 없다.
슥.
고개를 돌려 손빈은 일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저 이상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불편한 표정이다.
사수연 역시 미심쩍은 표정이고 당월아 또한 면사 뒤로 사뭇 날카로운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남궁규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손빈과 일행들뿐인 듯싶었다.
손빈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남궁향과 혈봉을 바라보았다. 남궁향 역시 가주와 마찬가지로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혈봉 금사련은 달랐다.
‘혈봉 소저.’
손빈은 눈을 크게 떴다.
혈봉 금사련은 딱딱한 표정으로 남궁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한 남궁세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녀의 작은 얼굴만이, 마치 다가올 불행의 전조(前兆)인 양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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