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53)
낙향문사전-253화(253/494)
제253화. 협의의 결과2016.03.05.
남창의 날씨는 유달리 화창했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남궁세가의 넓은 후원에서 손빈 일행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높네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수연이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손빈이 그녀의 말을 받는다.
“이제 계절이 바뀌려나 보지요.”
“벌써 그렇게 됐나요?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들 것 같은 푸른 하늘이 그야말로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손빈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수연의 고운 자태다.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허허로운 사수연의 모습에 손빈은 문득 걱정이 들었다.
“수연 소저,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네?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사수연이 손빈을 보며 반문한다. 손빈은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를 들어 소저만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다 괜찮을 거라든가…….”
남궁향의 예측대로라면 사수연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필연적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다. 그녀가 손빈에게 피해를 줄 것을 염려하여 떠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후훗.”
사수연이 웃었다. 그녀는 손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손빈을 똑바로 향한다.
“손 공자님.”
“네.”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사수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그렇지만, 저는 성격이 좀 못됐답니다. 누군가 저를 누르려 들면 오히려 반대로 더 튀어 올라요. 아버지도 제 성격은 고치지 못하셨지요.”
사수연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손빈은 문득 사자혁이 사수연에 대해 ‘세상에서 내가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저 딸이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는 떠나지 않아요. 외사를 적으로 돌릴 만한 세력이 제게 협박을 한다고요? 그렇다면.”
말하던 사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차라리 제가 먼저 그들을 박살 내 버리겠어요.”
한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아, 네.”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사수연이 그런 손빈을 향해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저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
“혹시…….”
문득 사수연은 목소리를 낮추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손 공자님께서…… 함께 가시겠다면 모르지만.”
“나도 갈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린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곤 손빈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다시 묻는다.
“형, 나도 데려갈 거지?”
“저도 가요.”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의나 반론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뭐야, 다 가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노군이 투덜거리듯 말한다. 그 옆을 지키던 당 부인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도 가요, 순랑.”
“어?”
노군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다. 당 부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상관없잖아요? 청원이든 남악이든, 아니면 천축이나 서역이라 해도 말이에요.”
“하지만 영매는…….”
당운영에게는 지켜야 할 가문이 있다. 아직도 당문은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당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나이면 물러날 때도 됐잖아요? 남은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지요. 저는 순랑만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크, 크흠. 그, 그래?”
노군은 짐짓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헤벌쭉한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천축이나 서역이라면 한번 가 볼 만도 하군.”
정원의 희귀한 화초를 살피던 신의가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의의 말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신의가 머쓱함을 느끼기도 전에 때마침 누군가 정원으로 들어섰다.
달칵, 달칵.
낯선 소리와 함께 정원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걷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작은 수레 같은 것에 타고 있었다.
작고 가녀린 체구,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수레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그녀는 바로 혈봉 금사련이었다.
“금 소저.”
손빈이 반색하며 다가섰다. 다른 일행도 손빈을 따라 혈봉 금사련에게 다가선다.
“괜찮으십니까?”
손빈이 묻자 혈봉 금사련은 미소를 지었다.
“네, 덕분에요.”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이전까지의 어두운 기색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절 살려 주신 분이 손 공자님이시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수레에 앉은 채로 혈봉 금사련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고 진심이 어린 예였지만 손빈은 사뭇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밖엔 하지 못해서…….”
혈봉 금사련은 목숨을 건졌으나 이제 자신의 발로 일어설 수는 없다. 그녀가 앉은 채로 예를 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니에요. 이렇게나 해 주신 거죠.”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혈봉 금사련이 고개를 젓는다.
만일 손빈이 그 흐름을 받아들였다면 혈봉 금사련을 완전히 낫게 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 들어간 손빈이 그녀를 치료할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나 해 주었다’는 혈봉의 말은 옳다.
“네가 가지고 있던 능력은 어찌 되었느냐?”
다짜고짜 노군이 묻는다. 신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혈봉 금사련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뭐랄까, 희미하게 느낌이 오는 정도랄까요?”
“흐음, 그 정도 눈치야 강호에서 굴러먹던 놈들이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만……. 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노군의 퉁명스러운 말 아래에 자신을 향한 염려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혈봉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멋쩍은 듯 노군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이거 뭐냐? 수레치곤 특이한데?”
혈봉이 앉아 있는 것은 커다란 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 같은 것이었는데,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의자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짐승이 앞에서 메는 대신 뒤에서 사람이 밀도록 되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바퀴도 둘밖에 없다.
“남궁향 소저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혈봉 금사련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남궁향을 바라본다.
“옛 문헌에 이런 수레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고 만들어 본 거예요. 알아보니 그다지 희귀한 것도 아니더군요. 제가 한 건 그저 수레 크기를 작게 한 것뿐이지요. 바퀴도 큰 편이 더 안정적이더군요.”
“바퀴는 두 개뿐이냐?”
노군이 관심을 드러낸다. 그는 평소 마차에도 제법 애착을 보이곤 했다.
“아니요. 앞에도 있고, 뒤에도 하나 있어요. 뒤쪽 바퀴는 빠르게 움직일 경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남궁향은 노군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노군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설명을 들었다.
아예 몸까지 굽히고 수레를 세밀히 들여다보던 노군이 문득 눈살을 찌푸린다.
“제법 잘 만들었다만, 수레가 굴러 내려갈 경우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이는구나.”
“아. 그렇군요.”
남궁향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저는…….”
말을 하던 남궁향은 고개를 돌려 귀견수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검은 무복을 입은 채로 혈봉 금사련의 수레를 잡고 있었다.
“이분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흑립을 눌러쓴 귀견수라가 수레를 놓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그가 멈춰선 곳은 손빈 앞이었다. 귀견수라의 키가 손빈보다 큰지라 마치 내려다보는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못했다.
털썩.
귀견수라는 그대로 손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만이 아니라 두 무릎을 땅에 댄 것이다. 상체는 그대로 세운 채였지만 푹 숙인 고개가 그의 각오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손빈이 놀라 그를 일으키려는데 옆에서 남궁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혈봉 소저!”
혈봉 금사련이 두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남궁향이 급히 만류했지만 그녀는 결국 수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게 되었다.
“하아.”
금사련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은 이제 절맥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체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너는 아직 환자다!”
신의가 화를 내고 남궁향은 급히 금사련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금사련은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몸을 일으키더니 결국 손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잠시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들어 손빈을 올려다보았다.
“저 금사련, 뻔뻔하지만 감히 공자님께 청을 드리려고 해요.”
말하는 혈봉 금사련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를 빛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아랑은 제게는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에요. 아랑이 공자님께 지은 죄는 그의 목숨을 바쳐도 모자라겠지만, 부디 이 사람을 제게 돌려주세요.”
말을 끝낸 혈봉 금사련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지고 하얀 목덜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후우.”
손빈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손빈은 금사련을 향해 몸을 굽히며 말했다.
“저는…….”
“뻔뻔하긴 하구나.”
문득 튀어나온 노군의 음성이 손빈의 말을 끊었다.
“너의 충동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르겠느냐? 네 뜻은 비록 가상하다 해도 앞뒤 생각 없이 움직인 탓에 수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질 뻔했다. 그런 행동은 너나 이놈, 그리고 혈봉련을 위해서도 결코 도움 될 것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야.”
냉정한 목소리로 노군이 말했다. 혈봉 금사련은 입술을 깨물고 그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손빈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손빈은 노군을 향해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어르신…….”
“그렇게 말하는 것들은 전부 개소리다.”
씨익 웃으며 노군이 말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남의 협행에 잘난 척, 지혜로운 척 충고하는 것들치고 속에 꿍꿍이 없는 놈 없더라. 그러니 너는 그런 말에 조금도 신경 쓸 것 없다. 알겠느냐?”
“어르신…….”
혈봉 금사련이 눈물 어린 눈동자로 노군을 올려다보았다. 노군은 마치 손녀에게 대하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금사련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런 건 빈이 녀석에겐 오히려 역효과야. 대죄(待罪) 같은 거 하면 이놈은 더 어쩔 줄 몰라 하거든.”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견수라만 해도 부담이 말 못 할 정도인데, 혈봉 금사련까지 무릎을 꿇으니 안절부절못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그냥 차라리 대놓고 뻔뻔하게 하는 게 좋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좋고. 예를 들면, 음……. 그렇지. ‘내 가슴을 만졌으니 이 사람 그냥 살려 주세요’라고…….”
“안 만졌습니다!”
손빈이 격하게 항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네? 뭐라고요?”
묻는 사수연의 눈빛이 어딘지 섬뜩하다. 덩달아 서린과 당월아도 손빈을 돌아본다.
“형…….”
“손 공자님.”
“아닙니다! 손은 가져다 댔지만 닿지는 않았어요. 소저도 봤잖습니까?”
손빈의 말에 사수연의 눈빛이 흔들린다. 확실히 그녀가 볼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다음, 손빈이 일어설 때까지는 보지 못했다. 혈마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의 시선이 신의와 남궁향을 향한다.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혈마를 제외하면 이 두 사람이다.
“그, 글쎄요. 저는 멀어서 잘…….”
먼저 남궁향이 발을 뺀다. 그리고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측면에서 정확히 본 것이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보기엔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신의님!”
치료의 일환이니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던 손빈의 기대는 허망하게도 응답받지 못했다.
“마, 만지셨나요?”
아래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손빈은 시선을 내렸다. 혈봉 금사련이 새빨개진 얼굴로 물어보는데, 그녀의 글썽글썽한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아닙니다.”
손빈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노군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청백을 더럽혔다 하여 심각한 일로 번질 수도 있다.
“그렇군요. 공자님의 말씀을 믿겠어요.”
혈봉 금사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가 납득하니 주위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진다. 손빈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혈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아랑을 용서해 주실 건가요?”
손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혈봉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러나 손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앞으로 평생 금사련 소저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그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귀견수라가 고개를 들고 손빈을 쳐다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고마워요.”
촉촉한 혈봉 금사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귀견수라, 아랑을 돌아보았다.
“들었지요?”
눈물 젖은 눈동자로 금사련은 아랑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말아요, 아랑.”
“그건.”
격동을 참으려 이를 악문 아랑은 간신히 말을 뱉었다.
“내가 할 말이오.”
어느새 아랑의 눈동자도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
소란이 진정되고 나서 일행은 정원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혈봉련과 남궁세가의 협의 결과를 손빈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혈봉련과 남궁세가의 협의는 간단히 끝났다. 현 가주 남궁권의 뜻이 확고한 데다가, 전대 가주인 남궁천 역시 그 결정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우려하던 것은 남궁세가가 아무런 결론도 없이 시간을 끌 경우였어요.”
혈봉 금사련이 손을 모은 채로 수레 위에서 말했다. 그녀의 수레는 귀견수라 아랑이 밀고 있었고, 손빈은 그녀 옆에서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속도를 맞추어 걷고 있었다.
“혈혼독조라는 사람이 한 예측 말이군요.”
혈혼독조는 혈봉련의 련주가 되려던 자다. 물론 노군, 특히 젊은 옥룡이 용납하지 않았지만.
“네. 하지만 가주께서 뜻을 분명히 하셨더군요. 저는 오히려 이번 일을 통해 명문 정파의 저력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사실 혈봉련 내에서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금사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되었습니다만,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손빈이 물었다. 혈봉련은 여러 문파의 연합체다. 남궁세가처럼 가주의 결정이 곧 법이 되는 곳이 아니니 다른 말이 없을 수가 없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대답은 옆에서 함께 걷던 남궁향이 했다.
“남궁세가가 약속한 것은 ‘혈봉의 깃발을 먼저 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에요. 즉 혈봉 소저께서 어느 문파든 파문하거나, 혹은 혈봉의 깃발을 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강남 무림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지요.”
“아아.”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의 적이 된다는 의미는 크다. 혈봉의 결정에 그 여부가 달렸으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생사여탈권을 쥐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가도 무조건 양보하는 건 아니에요. 먼저 적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딱 그 정도까지만이거든요.”
남궁세가의 양보도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 그저 감정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명확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게다가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혈봉련이 혼란스러운 것보다는 예측 가능한, 그리고 우호적인 혈봉이 힘을 얻는 것이 더 낫다.
손빈은 현 가주 남궁권의 심계에 내심 감탄했다.
“저희는 내일 떠나려 해요.”
혈봉이 말했다. 손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내일 떠나려 합니다.”
“언젠가 다시 이렇게 정원을 거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때는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말고요.”
손빈은 빙긋 웃으며 혈봉 금사련에게 말했다.
“반드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금사련 역시 미소로 손빈에게 답했다. 그녀의 미소는 또래의 여느 아가씨처럼 밝고 화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