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70)
낙향문사전-270화(270/494)
제270화. 항주 무림맹2016.05.03.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이처럼 아름다운 항주 한복판에 무림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림맹은 정파를 표방하는 거의 모든 문파들을 아우르는, 가히 강호 무림 최대의 세력이다. 그러나 무림맹은 생각만큼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무림맹이 사대정파와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하는 느슨한 연합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사대정파와 오대세가가 서로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시 항주의 무림맹에서는 오늘도 오대세가와 사대정파 대표자들의 격렬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요!”
공손세가의 대표자, 공손창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감찰이라니? 대체 무슨 권한으로 아미파가 감찰을 행한단 말이오? 게다가 사전 협의조차 없었소!”
공손창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조차 짐짓 꾸민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오대세가의 정치적 술수가 난무하는 복마전, 무림맹이니까.
“그리고 언제부터 아미가 무림맹을 대표했소? 이것은 참으로 무림맹의 모든 문파들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소!”
공손창은 아미의 대표자 무정 사태를 따지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정 사태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무슨 권한이냐고? 권한이야 당연히 있지. 사대정파는 강호 무림에서 일어나는 문파들의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할 권한이 있음을 이미 인정하지 않았나?”
문파 간 분쟁이란 흔한 이야기다. 그럴 때 중재를 맡는 것은 대부분 사대정파 중 한 곳이다.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오대세가가 공정한 중재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누가 뭐라 해도 무림맹의 중심축은 사대정파다. 소림, 무당, 화산, 아미 외에도 오래된 명문 정파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 세가 쇠하여 사대정파에 비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들 사대정파는 그 오랜 전통과 함께 속세를 벗어난 고고함으로 인하여 무림맹의 상징적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 그건 해당 문파에서 요청했을 경우였소!”
공손창은 항변했다. 그러나 그 항의는 먹혀들지 않았다.
“내 기억에 그런 조건 같은 건 없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그때의 기록을 살펴보든가.”
무정 사태의 말에 공손창은 이를 악물었다. 확실히 그런 조건 같은 건 달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사대정파가 세속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자체를 꺼려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대정파는 특정 문파가 의협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 그 문파를 사파로 규정하기 전에 사실 여부를 심사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은가?”
“그, 그건…….”
공손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대정파는 오대세가의 장식 역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대정파가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권한이다.
오대세가가 재력과 수적 우위라는 세속적 영향력을 가지고 무림맹을 좌우한다면, 사대정파는 전통에 바탕을 둔 사람들의 신뢰와 대의명분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사대정파는 무림맹 문파들의 신뢰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만일 사대정파가 무림맹에 없었다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오대세가는 당장 치열하게 싸우던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특정 해당 문파를 조사할 자를 일컬어 ‘감찰사’라 하고, 사대정파나 오대세가가 아닌 ‘무림맹’의 이름으로 보내기로 이미 협의하지 않았나?”
무정 사태의 말에 공손창은 쓴 뿌리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런 그를 제갈세가의 외청 청주, 제갈상이 구해 주었다.
“사태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문파 간의 분쟁에 강제로 개입할 권한까지는 없습니다. 게다가 무력으로 억압한 것이 아닙니까?”
제갈세가의 대표자가 끼어든 것은 이유가 있었다.
소위 ‘무림맹 감찰사’ 위가진의 활약은 주로 강소성 일대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그 ‘분쟁’을 일으킨 문파의 배후가 제갈세가와 공손세가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것은 엄연히 아미파의 월권입니다.”
제갈상의 지적에 무정 사태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의 죄목은 ‘방조’겠군.”
무당의 도사, 태현 진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태현 진인은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대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를 일으킨 문파들 뒤에 세가들이 있음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단 말인가? 무림맹의 이름으로 감찰사를 보내지 않았다면, 설령 아미나 무당이라 한들 그들이 듣는 척이나 했을 것 같나?”
무림맹의 실권은 오대세가가 쥐고 있었다. 사대정파가 강한 종교적 특색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오대세가가 무림맹의 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갈, 공손, 남궁, 혁련 그리고 당문의 오대세가는 무림맹을 통하여 협력관계를 구축함으로서 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당이 나서자 무정 사태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나 태현 진인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아미의 이번 처사가 참으로 옳으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네.”
중소 정파들 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분쟁이 일어나는 동안, 녹림이나 수채 같은 사파들은 활개를 치고 다녔다.
적어도 사대정파는 이번 사태에 무림맹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건 무당의 뜻입니까?”
공손창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현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단호한 대답에 오대세가 대표자들의 안색이 굳었다. 그것은 소림이나 화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미파에 이어 무당까지 이토록 단호히 나올 줄은 그들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우리 공손세가의 뜻 역시 분명하오.”
공손창은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은 공손세가의 뜻이며 공손창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아미의 명백한 월권이며, 아미는 이 일에 대해 사과하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하오.”
“제갈세가 역시 동의합니다.”
제갈상은 굳은 표정으로 공손창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허어.”
소림의 승려 혜불이 탄식을 흘리고는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혜불은 지팡이인 석장(錫杖)을 들고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 사안이 우리들의 권한을 벗어난 것은 명백하오. 이제는 무림맹 최고 회의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이다.”
‘최고 회의’란 말에 모두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제갈상이 신음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으음, 허나 최고 회의를 열면 그 여파가…….”
‘무림맹 최고 회의’란 사대정파와 오대세가의 장문인과 가주 들만이 참석하는 명실공히 최고 권한을 가진 회의다.
문제는 이 ‘최고 회의’를 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다.
많은 시간과 막대한 경비가 드는 것은 물론이고, ‘최고 회의’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강호 무림에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럴 정도로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허면 어쩌겠소? 여기에 있는 분들 중에 이 일을 처리할 정도의 권한을 위임받아 오신 분이 있소?”
혜불의 말에 아무도 답을 못 했다. 그만큼 이번 ‘무림맹 감찰사’ 사건은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들 자파에 ‘최고 회의’에 대한 것을 알리도록 하시오. 만일 모두가 말없이 덮고 가겠다면, ‘최고 회의’ 같은 건 열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나 혜불의 말처럼 되지 않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미와 무당이, 혹은 공손세가와 제갈세가가 굽히지 않는 이상 이 일은 결국 최고 수장들이 결론을 내야 할 사안이 된 것이다.
“이번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겠소.”
의사 진행을 맡은 혜불의 말과 함께 회의는 끝났다. 이런 직책 역시 사대정파가 돌아가며 맡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덜컹.
공손세가와 제갈세가의 대표자가 제일 먼저 일어섰다. 그리고 무당과 아미의 대표자도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쯧.’
느긋하게 앉아 있던 남궁세가의 외청 부청주 남궁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림맹 대표자의 직책은 본래 그의 형 외청 청주 남궁렬의 일이었으나, 부상으로 그가 대신하는 중이다.
‘대표자가 모이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는데 난데없이 ‘최고 회의’라니. 얼마나 걸릴지 감도 안 잡히는군.’
이번 회의에서 남궁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본래 정치적 협상에 익숙하지 않은 성격인 탓도 있었지만, 가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일에 관한 한, 우리 남궁세가는 절대적으로 관망할 뿐이다. 알겠나?
가주 남궁권은 매우 강력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건 상당히 이례적인 명령이었는데, 남궁세가 역시 공손세가와 이런저런 분쟁을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가주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나저나 제법 귀찮은 일이 되었는데?’
남궁세가의 외청 부청주 남궁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혁련세가의 대표자나 당문의 대표자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세가의 가주들로부터 똑같은 엄명을 받았다는 사실도.
*
*
*
그 시각, 항주의 한 다루에서는 손빈과 노군, 신의와 장강어옹이 황혼을 바라보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커어, 좋구나.”
노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항상 딴지를 걸던 신의와 장강어옹 역시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붉게 물든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빛에 따라 하늘과 땅이 온통 변해 가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멋지군요.”
손빈도 탄식하듯 말했다.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던 낮이 끝나고 이제 밤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온다. 바야흐로 낮과 밤의 경계에 그들이 있는 것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대단하단 말이야.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홀라당 뒤집힐 수가 있는 것이지?”
“밤과 낮이야 수천 년 전부터 늘 있던 것 아니냐?”
신의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노군은 혀를 찼다.
“그야 수천 년 전부터 있긴 했지. 하지만 매일 일어나는 일이라 해서 그 장엄함이 퇴색할 이유가 있더냐? 네놈은 마음이 너무 메말랐어. 하긴 평생 환자만 들여다보고 살았으니 어찌 내 감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너도 나처럼…….”
“혼인을 해야 한다고?”
신의가 선수를 쳤다. 그러나 노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작 빈이를 만났어야 한다고.”
노군의 말은 의외였다. 신의는 물론이고 손빈도 당황하는데 노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남악에 있을 때는 일몰이 없었겠느냐? 그러나 지금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 그게 다 빈이 덕분이지.”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문득 장강어옹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군.”
“뭐?”
신의의 반문에 답하듯 어옹이 말을 이었다.
“나도 빈이 덕에 마음이 편해졌지. 예전엔 장강에 낚싯줄을 드리우고도 온통 강호 무림에 대한 걱정뿐이었는데, 지금은 ‘빈이가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더군. 자연히 붕어의 마음도 더 잘 알 수 있고.”
“붕어의 마음 같은 소리 하네. 그놈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그게 좋은 일이냐? 그리고 친한 척 ‘빈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노군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장강어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흠, 그런 뜻이었나? 하긴 그 말도 맞군.”
신의도 그제야 이해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연아에 대한 걱정은 덜었으니까. 그리고 몇몇 다른 환자들도.”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서원은 별일 없겠지요?”
화제를 전환하려 손빈이 말했다. 사실 신의가 사수연 이야기를 하니 문득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잘들 있겠지.”
노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화사가 무슨 엉뚱한 짓을 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일단 탈혼도 그놈도 있고 만일의 경우엔 월아도 있으니까.”
“월아 소저요?”
의외의 이름에 손빈이 묻자 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월아는 내력 특성상 화사와 상극이거든. 게다가 머리가 좋아서 화사를 갖고 놀 가능성이 크지. 일단 화사와 월아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자체가 달라.”
당월아는 천하의 온갖 귀한 비급을 섭렵했다. 물론 그 무공을 다 체득하진 않았다 해도 핵심은 모조리 꿰뚫고 있다.
이것을 응용하면 얼마든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수를 펼쳐 낼 수 있으리라.
“게다가 보통 독공을 주력으로 하는 자들은 거리를 두려고 하는 데 비해, 월아는 근접 박투도 아주 서슴없단 말이지. 힘과 힘의 대결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그러니 아마 화사는 제대로 손도 못 쓰고 성질만 내다가 패퇴당할걸?”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아 소저가 강할 것이라는 건 대강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정도던가요?”
“몰랐냐? 하긴 월아는 절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외사 고수들도 월아의 실력을 알아차리기 힘들 거다.”
손빈은 노군의 말에 공감했다. 당월아는 일단 외모부터가 면사로 꽁꽁 숨기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감탄할 그 미모를 가지고도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월아 소저가 가장 강한…….”
“그건 아니지.”
노군이 손빈의 말을 끊었다.
“연아가 있잖아.”
“사수연 소저요? 수연 소저는 화사 소저와 내력 특성이 비슷하지 않나요?”
“비슷하지. 하지만 연아는 천재잖아.”
노군은 주저 없이 말했다.
“월아도 대단하지만 연아에겐 안 되지. 둘 다 천재지만 분야가 다르다고 할까? 무슨 묘수를 쓴다 해도 연아는 아마 단박에 그 허점을 치고 들 거다. 같은 수를 두 번 쓰는 건 상상도 못 할 거고. 게다가 연아는 현천결이 있지 않느냐? 결국 둘이 승부를 내려면 진심으로 임해야 할 텐데…….”
말하던 노군이 고개를 젓는다.
“월아는 못 한다. 표현은 안 하지만 자신이 인정한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하거든. 결국 월아가 물러나겠지.”
“일부러 진다는 뜻인가요?”
손빈의 말에 노군이 혀를 찼다.
“이런 답답한 문사 같으니. 무인이라면 마음의 강함 역시 실력이다. 게다가 경지가 높을수록 심리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야. 어옹 저놈이 절기를 펼칠 때 중얼거렸던 거 기억 안 나냐?”
“아.”
손빈은 어옹이 절기를 펼치며 ‘푸른 물결 위에 청류를 드리우니 온 세상이 낚이도다.’라고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건 무슨 주문 같은 게 아니다. 그걸 말함으로서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일종의 초월 상태로 이끄는 것이지. 소위 절기라고 말할 정도면 절대 보통 정신으로 펼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아하.’
손빈은 노군의 말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무제는 안 그랬다고?”
노군은 손빈의 속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군이 쓴웃음을 짓는다.
“천외사성을 평범한 외사에 비교하면 안 되지.”
‘외사’에 ‘평범’이라니, 정말로 이상한 수식어라고 손빈은 생각했다.
“그래서 월아는 연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거다. 연아는, 그때도 말했다만 무제를 닮아서 은근히 무서운 면이 있거든.”
그 말에 손빈은 동의할 수 없었다. 손빈의 눈에는 사수연이 화를 낼 때도 예쁘기만 하니까.
“그럼 수연 소저가 가장 강한 건가요?”
손빈이 의문문으로 말한 것은 조금 전의 경험 덕택이었다. 그리고 손빈의 예상은 옳았다.
“글쎄? 진심으로 임한다면 화사도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서…….”
“화사 소저요?”
노군은 찻잔을 매만졌다.
“그래. 연아와 화사는 서로 내력 특성도 비슷하고 잔재주를 싫어하는 성격도 닮았지. 결국 힘과 힘의 정면 대결이 되는 셈인데, 외사에서도 화사를 당해 낼 사람은 별로 없거든. 아, 물론 밤이라면 말이다.”
화사가 밤에 어떤 역량을 발휘하는지는 손빈도 익히 알고 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연아는 네가 고쳐 준 덕에 숨만 쉬어도 내력이 늘어나거든?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화사를 넘어설 수 있었지. 그런데 네가 화사도 고쳐 줬잖냐.”
손빈은 사수연의 목숨을 위협하던 한기를 그녀의 진원지기 그 자체와 동화시켰다.
즉 숨만 쉬고 있어도 그녀 몸속의 한기가 자연히 움직이며 내력과 진기를 더해 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월아나 화사 역시 마찬가지다. 신의를 만난 이후엔 한기나 독기를 배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화사나 혈봉 금사련의 경우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마 낮에는 연아가 우세할지도 모르지만, 밤에 화사를 당할 수는 없을 거다. 음? 그러고 보니 앞으로 탈혼도는…….”
노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탈혼도가 화사를 끔찍이 위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앞으로는 무공으로도 꼼짝 못 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손빈도, 노군도 그리고 신의도 탈혼도를 위해 잠시 묵념했다. 영문 모르는 장강어옹만 눈살을 찌푸릴 뿐이다.
“어쨌든 그런 거다. 뭐, 북해에서 싸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북해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에 손빈이 물었다.
“그래. 북해라면 연아가 압도적으로 이긴다.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어. 아니, 북해에서 연아를 이길 사람은 외사에 아무도 없다. 검희가 와도 안 되지.”
“어째서요?”
노군은 오히려 왜 그걸 묻느냐는 듯 멀뚱멀뚱 손빈을 바라보며 말한다.
“만년빙정이 있잖아. 네가 본래대로 돌이켜 주긴 했다만, 한번 동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길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년빙정의 힘을 쓸 수 있을 거다. 완전히 집어삼켜졌던 그때와 같지는 않겠다만.”
“그렇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득 노군이 말했다.
“너도 그렇지?”
“아, 저는…….”
“만년빙정뿐만이 아니다. 흐름이 네게 친숙하다느니, 너를 돕는다느니 하는 게 다 그런 거잖냐? 한번 눈이 뜨이면 다시 감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손빈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노군만큼 손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그만큼 노군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손빈을 향한 그의 따뜻한 정이기도 하다.
“웃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노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네가 그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건 그런 거냐? ‘칼질 한 번이면 다 이기는데 누가 더 강한지 어떻게 아나요?’ 뭐, 그런 거야?”
너스레를 떨며 노군이 말했다. 손빈은 손을 내저었다.
“설마요. 아참, 서린은 어떤가요?”
“그놈은 보물을 썩히는 중이라서.”
노군이 혀를 찼다.
“황학 진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놈이 서린 아니냐?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린이야말로 진인께서 원하시던 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막대한 내력 같은 건 전혀 쓸데없는, 그런 삶 말이다.”
노군의 목소리엔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눈을 들어 창밖 풍경을 향하는 그를 따라 손빈도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도 저물어 항주 거리에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들, 보고 싶네.’
항주의 화려한 야경을 보며 손빈은 고즈넉한 서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따뜻한 정이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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