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88)
낙향문사전-288화(288/494)
제288화. 각성2016.07.05.
법허 신니와 천수검 능천화의 격돌이 끝났다. 밀려났던 안개도 천천히 주위를 둘러싸고, 황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침묵 속에 빠져든다.
“허어.”
나지막한 탄식이 법허 신니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녀의 온몸은 천수검 능천화의 천여일검이 할퀴고 간 상처로 가득했다.
온 세상을 밝힐 듯 백열하던 그녀의 선장도 지금은 그 빛을 잃고 본래의 투박한 색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언제 그런 절기를 익혔지, 사매?”
천수검 능천화가 빛나는 눈동자로 법허 신니에게 묻는다. 뺨이 약간 상기된 것을 제외하면 대결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다. 엄청난 내력을 쏟아부은 후에 뒤따르는 가벼운 탈력감조차 그녀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으로 온통 균열이 번져 나간 대지는 법허 신니의 선장이 남긴 거대한 충격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지를 뒤엎고 갈라지게 만든 충격조차도 천수검 능천화를 어쩌지는 못했다.
“내가 알기로 그런 무공은 아미에 없었을 텐데? 설마 아미에 내가 모르는 비전 절기가 있었나?”
법허 신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우고는 답했다.
“……얼마 전, 작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선장이 그녀의 늙은 몸을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검로에 가슴이 뜨거워지길래 즉흥적으로 만들어 본 것일 뿐입니다. 이 나이에 주책도 없이 말이지요.”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다고? 사매가?”
천수검 능천화는 흥미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법허 신니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그저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고 재해석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야. 그것이 오히려 대단해.”
천수검 능천화는 진심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사매의 말대로라면 심결도, 비의도 알지 못한 채 초식의 형(形)만 보고 만들었다는 뜻이잖아? 그것이야말로 어찌 대단하다고 하지 않겠어?”
그녀는 마치 들뜬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습에 법허 신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왼다. 천수검 능천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매는 어떤 식으로…….”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법허 신니의 목소리가 천수검 능천화의 말을 끊는다.
“사자는 저를 꺾었습니다. 이제 뜻하신 대로 아미에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지요.”
천수검 능천화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법허 신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아마도 아미뿐만 아니라 외사, 그리고 강호 무림을 전부 뒤엎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게…….”
법허 신니는 눈을 들어 천수검 능천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제가 남긴 모든 것을 부정한 다음에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그에게 그토록 집착하고 번뇌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어찌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집착하지도, 연연하지도 않아.”
싸늘한 목소리로 천수검 능천화가 말했다.
“번뇌라고? 내 어디에 그를 향한 번뇌 같은 것이 있다는 거지? 내 어디에 그를 향한 집착이 있다는 거야?”
아득.
천수검 능천화가 이를 갈았다. 그녀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법허 신니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이미 그보다 강한데.”
후우욱.
압도적인 기세가 법허 신니를 향해 덮쳐 왔다. 이미 탈진한 상태에 가까운 법허 신니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법허 신니는 오히려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가요? 그럼 어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한때 그 누구보다 친애했던 사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법허 신니는 말했다.
“어째서 그 모습으로 있는 건가요? 무제와 가장 가까웠던 젊은 날의 그 모습을, 어째서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는 거지요?”
천수검 능천화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의 여유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
그녀의 눈동자는 살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천여일검을 펼쳐 낼 때조차 장난 같던 그녀의 눈빛이 지금은 상대를 향한 증오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모습은 그저 유희일 뿐이야. 더 이상 나를 모욕하는 건 사매라도 용서치 않아.”
법허 신니는 눈을 감고 속으로 불호를 외웠다. 더 이상은 말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네 차례인가?”
천수검 능천화는 고개를 돌려 청혜 사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격돌이 보여 준 여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청혜 사태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선택해.”
한 줌의 온기조차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천수검 능천화가 말했다. 법허 신니를 대할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청혜 사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천수검 능천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수검 능천화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린다.
“아미의 멸문인지, 아니면 내게 복종할 것인지.”
손을 내밀지도, 회유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선택을 강요할 뿐이다. 천수검 능천화에게 청혜 사태는 아무 의미 없는 타인에 불과했으니까.
‘멸문.’
그 짧은 단어가 주는 무게에 청혜 사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미가, 자신이 평생 몸담아 왔으며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청혜 사태는 시선을 돌려 장문인 혜월 사태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청혜 사태를 바라본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깨문 입술,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혜월 사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알려 주고 있었다.
“잘 선택하는 것이 좋을 거야.”
조소 섞인 천수검 능천화의 목소리가 청혜 사태의 귀를 울린다.
“네 결심에 따라 수많은 아미 제자들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청혜 사태의 어깨가 흠칫 경련한다. 때로는 서로 갈등하고 가끔은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아미는 그녀가 지금껏 함께 자라 온 곳이다. 그들이 자신의 선택 하나에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북경에 자혜문이라는 것도 세웠다지? 대단해, 내가 있을 때는 산문 밖을 나가는 것조차 허락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천수검 능천화가 조용히 웃었다.
“전부 죽게 될 거야. 너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널 따라온 그 자혜문의 문도들도 말이야.”
차가운 살의가 안개를 넘어 청혜 사태에게 전해 온다. 그녀의 살의는 진심이며, 그럴 의지와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지금 이 모든 일이 황실의 뜻이라면 당연히 귀결되는, 아까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사매.’
경희 군주, 청련이라는 법호를 받은 그녀의 사매 역시 이 일과 무관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바로 그녀일 터이다.
‘어째서…….’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안다. 황실의 뜻이니까, 그리고 군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천자의 명이니까.
그러나 경희 군주는 자신을 배신했다. 그녀의 반짝이던 눈빛도, 안타까운 한숨도, 그리고 자신을 향한 따뜻한 말과 시선까지 전부 거짓이었다. 진심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도.
“청혜야.”
부드러운, 따뜻한 목소리가 청혜 사태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청혜 사태는 스승 법허 신니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온화한 스승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네 책임도 아니야.”
힘없이 이어지는 법허 신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마주하게 된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그 목소리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그러니 죄책감 같은 것은 가질 필요 없다. 나는, 네가 살아서 행복한 것을 보고 싶구나.”
‘스승님.’
청혜 사태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왈칵 올라온다.
돌이켜 보면 자신을 향한 스승의 눈빛은 언제나 그랬다. 때로는 엄하고 단호하기도 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향한 진심이 가득했다. 이제껏 항상,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 실망이네.”
천수검 능천화의 조소가 청혜 사태를 향했다.
“이 정도도 결정하지 못하는 거야? 번뇌를 끊지 않으면 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나? 이렇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면 네가 도를 깨닫는 일은, 아마 영영 없겠어.”
그 노골적인 모욕에도 청혜 사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생명이 걸린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주는 중압감, 경희 군주의 배신과 스승의 애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폭풍처럼 뒤섞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법허 신니와 천수검 능천화의 격돌은 청혜 사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광경은 손빈과 검희의 비무를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했고,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비무를 통해 청혜 사태는 무엇인가 희미한 단초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
조금만 더 시간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전혀 새로운 무엇이 열릴 것 같은데, 지금 그녀에겐 자신과 수많은 타인들의 목숨이 걸린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항상 결정을 미루기만 하지.”
천수검 능천화의 눈빛에 경멸이 흐른다.
“그 결과 내가 아닌 타인이, 혹은 다른 무엇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노골적인 멸시를 숨기지 않으며 천수검 능천화는 검을 들어 올렸다.
“물론 그 결정에 따르는 책임은, 전부 네가 지게 되고.”
‘아아…….’
그러나 청혜 사태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의 총명한 이성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 대답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스승 앞에서 어찌 그녀를 배반할 수 있으랴? 어찌 그녀의 뜻을 부정할 수 있으랴?
청혜 사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스승과 함께 죽는 것뿐이다. 절망과 분노와 낙심과 좌절 속에서, 청혜 사태는 곧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릴 천수검 능천화의 칼날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외사는.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혜 사태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엄청난 비무를 보여 주었던 당사자이자, 무력한 문사의 모습으로 청혜 사태의 경멸을 받았던 그의 목소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곳이 아니던가요?
‘하고 싶은 대로.’
청혜 사태는 그 말을 되뇌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길을 따른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가에 몸담은 청혜 사태에게 그 말은 또 다른 문장을 의미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곧 길이다. 순간, 혼란과 번뇌에 방황하던 청혜 사태의 마음이 길을 찾았다.
후우웅.
‘헛!’
검을 들던 천수검 능천화의 안색이 변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혜 사태의 기세가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뿐이랴? 주위를 둘러싼 기운이 눈앞의 청혜 사태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은 감각.
장문인 혜월 사태는 물론이요, 법허 신니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천수검 능천화만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청혜 사태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는 순간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 이전에 그러했듯이.
‘위험해.’
판단은 빨랐고 결심은 단호했다. 천수검 능천화는 즉시 검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핑.
날카로운 기세가 천수검 능천화의 눈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녀조차 감히 경시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
천수검 능천화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기운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칫.”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안개를 뚫고 울려 왔다.
“헐헐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안개 저편에 서서히 드러났다.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오는 그는 시종일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왜 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놈들은 늘 웃으면서 등장하나 했더니만…….”
저벅, 저벅.
흰머리에 흰 눈썹을 지닌 그가 긴 수염을 느긋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야 알겠군. 남이 열심히 해 놓은 일에 재 뿌리는 거, 생각보다 아주 즐거운데? 크헐헐헐.”
마치 악당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바로 남악노군이었다.
웃던 노군은 천수검 능천화를 슥 쳐다보고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뭘 봐?”
천수검 능천화의 눈썹이 꿈틀 경련한다.
“언제부터 남악노군이 아미를 신경 쓰게 되었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천수검 능천화가 말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청혜 사태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언제?”
어깨를 으쓱하며 노군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신경 쓴 적 없는데? 아미야 어찌 되건 내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그림의 떡인데. 영매보다 예쁜 여자도 없고.”
노군의 말을 천수검 능천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 왜 나서는 거지?”
“말했잖아.”
씩 웃으며 노군이 답했다.
“재 뿌리는 거라고. 방금 한 말을 까먹다니,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벌써 치매가 왔나 봐? 하긴 뭐 자네도 나이가 나이이니.”
으득.
천수검 능천화는 이를 갈았다.
‘여기서 끝을 내야 하나?’
당장 청혜 사태를 베어 버리고 남악노군과 결판을 낸다면 가능성은 있다. 어차피 남악노군은 목숨까지 걸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간은 천수검 능천화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후우웅.
청혜 사태에게 몰려들던 기운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를 막을 기회는 지나간 것이다.
천수검 능천화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청혜 사태가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번쩍.
청혜 사태의 눈동자는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안광이 그녀의 눈동자에 은은히 서린다.
“거참 신기하군. 나 때도 저랬나?”
노군이 청혜 사태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 와중에도 법허 신니는 자신의 제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의 시선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슥.
청혜 사태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천수검 능천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나지막이 달싹였다.
“선택하라고 하셨던가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청혜 사태는 말했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잔잔한 종소리처럼 퍼져 나간다.
“그래.”
천수검 능천화가 씹듯이 내뱉었다.
“나는…….”
청혜 사태가 답했다. 그녀의 선택은 멸문도, 굴복도 아니었다. 그녀가 찾은 마음의 길.
“거절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항이었다.
천수검 능천화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러나 청혜 사태의 눈동자엔 더 이상의 주저함도, 번뇌도 없다. 그녀는 천수검 능천화를 향해 말했다.
“물러나십시오. 스승님 앞에서 당신을 베고 싶지는 않습니다.”
“흥.”
천수검 능천화는 코웃음을 흘렸다.
“네가 날 벤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모르는 일이지요.”
청혜 사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요.”
후우욱.
그 순간 날카로운 기세가 청혜 사태의 온몸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검을 들지도 않았는데, 수천의 예리한 검극이 이 순간 천수검 능천화를 겨누는 것만 같다.
“오호라.”
남악노군이 감탄했다.
“마음이 일면 검이 이는 경지라? 청출어람이라더니 제자 한번 제대로 키웠네?”
법허 신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자의 성취는 그녀로서도 기쁜 일이지만 노군처럼 너스레를 떨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다.
“뭐, 그래 봤자 빈이에겐 안 되지만.”
슬쩍 덧붙이는 노군의 말에 법허 신니의 눈썹이 씰룩 경련한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은 아니다. 노군 역시 법허 신니의 표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쩔래? 어린애에게 쫓겨나는 게 정 억울하면 한번 해보든가.”
이죽이는 목소리로 노군이 말한다. 천수검 능천화는 이를 악물고는 노군 대신 청혜 사태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알고 있겠지?”
조롱과 원독을 가득 담아 천수검 능천화가 말했다.
“다 죽게 될 거야. 아미의 제자들도, 자혜문의 문도들도 전부 다. 그리고 이건 전부 네가…….”
“그렇게 두진 않습니다.”
청혜 사태가 말했다.
“그것이 나의 선택입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단호한 결의가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천수검 능천화는 더 이상 청혜 사태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칫.’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법허 신니를 상대하는 것은 천수검 능천화에게도 적잖은 소모를 요구했다. 그녀가 천여일검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수검 능천화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여기서 청혜 사태와, 무엇보다 남악노군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못 된다.
“두고 봐.”
천수검 능천화가 청혜 사태를 노려보며 씹듯이 내뱉었다.
“네가 절망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 테니까.”
탓.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수검 능천화가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모습은 짙은 안개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클클클.”
노군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청혜 사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고 본다는데?”
그 말에 청혜 사태는 가만히 웃었다.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지요.”
파락.
청혜 사태는 몸을 세우고 두 손을 모아 노군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합장했다.
“도우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내게 감사할 것 없다. 나도 부탁받은 것뿐이니까.”
씨익 웃으며, 노군이 답했다. 그건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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