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90)
낙향문사전-290화(290/494)
제290화. 탐욕과 인화(人和)2016.07.12.
흑검파는 강남의 사파였다. 황산에 모인 대다수의 문파들이 그러하듯, 딱히 규모도 크지 않고 뛰어난 고수도 없는 문파였다.
사대정파나 오대세가에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강북의 중견 세가들이나 강남의 신흥 문파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문파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흑검파가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황산에 눌러앉아 있었던 근거는 단 하나였다.
그건 바로 처음 비보를 발견했다는 태평문보다야 자신들이 더 낫다는 자신감이었다.
천운은 준비한 자에게 온다던가?
사대정파도 오대세가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박도문이 비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흑검파는 당장 모든 무사들을 이끌고 황산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보다 먼저 박도문의 비보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씨앙.”
흑검파 문주, 흑무쌍은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보이잖아. 박도문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비보를 발견했다던 박도문의 행적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박도문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황산으로 진입했던 다른 문파들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운무와 산그늘이 모든 것을 가려 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들어와 보았던 곳 같은데도 제대로 지형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금 더 들어가 보지요.”
옆에 서 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무사가 말했다. 흑무쌍 역시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챙,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려왔다. 흑검파의 모든 무사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찾는다.
“저쪽입니다.”
날카로운 눈매의 무사가 말했다. 흑무쌍은 자신의 거대한 도와 흑검을 양손에 쥐었다.
“가자.”
흑무쌍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검파의 무사들 십여 명은 빠르게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응?’
얼마나 갔을까? 비릿한 피 냄새가 흑무쌍의 코끝을 자극했다. 안개 탓인지 피비린내가 유난히 더 끈적하게 살갗에 들러붙는 느낌이다.
“조심해라.”
흑무쌍은 나지막이 경고했다. 흑검파의 무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눈에 살기가 어린다.
저벅.
흑검파 무사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툭.
날카로운 눈매의 무사가 팔꿈치로 흑무쌍을 친다. 흑무쌍이 돌아보자 그 무사는 칼을 든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음?’
흑무쌍은 안력을 돋우어 안개 속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사람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흑검파 무사들이 더욱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데, 희미하게 보이던 사람 그림자가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주웠다.
반짝.
‘금이다.’
바짝 머리가 선다. 흑무쌍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금, 혹은 그에 준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을 주워 든 자의 복식이 사대정파도, 오대세가도 아님을 확인했다.
꿀꺽.
흑무쌍은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은 탐욕이 끓어올랐지만 주변에 다른 자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흑검파의 무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도 흥분과 희열이 번들거린다.
사락.
조심스럽게 흑무쌍은 발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조심성은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슥.
금자를 주워 든 그자는 문득 고개를 돌려 흑검파 무사들을 보았다. 들켰다 싶은 생각에 흑무쌍이 움찔하는데, 그자가 피식 조소를 흘린다.
“네 이놈!”
일이 틀렸다 싶은 흑무쌍은 크게 소리쳤다. 먼저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너는 어느 파의…….”
흑무쌍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자가 대뜸 흑무쌍을 향해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탁, 쉬익.
날카로운 검이 흑무쌍을 노리고 짓쳐 든다.
“이 자식이!”
그자의 몸놀림은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미 검과 도를 들고 있던 흑무쌍은 강하게 도를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흑무쌍은 양손의 검과 도를 휘둘러 다음 공격을 대비했지만, 상대는 그대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고는 바로 짙은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춘다.
“쫓아라!”
상대가 도망쳤다. 그것도 금자가 분명한 것을 들고서. 흑검파 무사들은 사내가 사라진 쪽을 향해 일제히 달려갔다.
타다다닥.
가는 중간에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멈춰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금자는 이미 사라진 사내가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저기 보입니다!”
흑검파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흑무쌍도 이미 보고 있었다. 아까 도망친 사내와 비슷한 무복을 입은 자들이 검을 빼어 들고 모여 있음을.
그들은 막 흑검파를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이었다.
‘많아야 일곱.’
짓쳐 들던 흑무쌍은 순식간에 적이 몇 명인지 세었다. 그들이 손에 금자를 들고 있는 것도, 그리고 주위에 이미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자들이 있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쳐라!”
크게 소리 지르며 흑무쌍이 도를 내리쳤다. 상대방이 대비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금자를 숨기거나 갖고 도망칠 시간도 말이다.
카앙.
“이게 무슨 짓이오!”
적들 중 한 사내가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흑무쌍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무슨 짓은.”
흑무쌍은 상대를 비웃었다.
“비보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신 거지!”
상대는 금자를 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이미 검을 빼 들고 있으며 피 흘린 시신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흑무쌍의 조소는 당연했다. 그리고 상대 역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카앙. 캉!
“이야아!”
“전부 죽여라!”
날카로운 쇳소리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아까 도망쳤던 사내가 이들 중에 없는 것도, 무복이 조금 다른 것도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칼부림 소리와 함께 안개 사이로 흐르는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
*
*
공손세가의 가주, 쾌검 공손충과 공손세가의 무사들은 천천히 황산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고 결코 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한 사람은 지도를 들고 수시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다른 문파들을 제쳐야 한다는 다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단심화 공손지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염려에 공손세가의 가주, 쾌검 공손충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너야말로 힘들지 않느냐?”
“저야 괜찮아요. 아직 젊잖아요. 아, 물론 백부께서 나이가 드셨다는 뜻은 아니에요. 워낙 대단하신 분이시니까요.”
공손지가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비록 일부에선 독심화라 부르며 그녀를 조롱하고 있지만, 그녀는 황산오화로 꼽힐 정도의 미녀다.
그런 귀여운 조카가 염려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걱정해 주니 그 어떤 백부가 싫어하랴?
쾌검 공손충은 나이 어린 공손지를 아꼈다. 그녀의 무공으로는 조금 위험한 이 황산행에 데려온 것도 가문 내에서 그녀의 입지를 높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표독한 공손지도 가주인 쾌검 공손충 앞에서는 아예 딴사람인 양 살갑게 굴었다. 그녀에게 또래의 동성 친구들이 없는 또 다른 이유였다.
휘릭.
앞에서 들린 기척에 공손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공손지 같은 한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가문에서 쟁쟁한 고수들이라 반응도 빨랐다.
착.
사람 그림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는 공손세가의 무인이었다.
“찾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가주 공손충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더냐?”
“제갈세가입니다.”
“제갈세가…….”
중얼거리던 가주 공손충이 묻는다.
“내 뜻을 전했느냐?”
“네. 가주님을 만나는 것에 동의했으며, 앞쪽 계곡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주 공손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황산에 온 제갈세가의 무사들 중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자는 없더냐?”
“전부 있었습니다.”
쾌검 공손충은 공손세가의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공손세가는 곧 제갈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계곡 앞에 도착했다. 역시 운무가 가득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잠깐만요.”
공손지가 문득 가주 공손충에게 말했다.
“제갈세가가 딴마음을 먹을 수도 있으니, 먼저 안전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공손충은 공손지의 말을 옳게 여겼다. 지금 이곳 황산은 무법천지다. 막말로 제갈세가가 이곳에 매복해서 공손세가를 친들 누가 알까?
공손충은 무사 몇에게 손짓을 했다. 앞을 살펴보라는 의미다. 지시를 받은 무사 두 사람이 계곡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예를 나누는 듯 말소리와 함께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짧게 들려온다.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들어가자.”
가주 공손충의 말에 따라 공손세가의 무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공손지는 가주 공손충이 작은 피리 같은 것을 꺼내어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분명 입에 닿은 듯 보이던 작은 피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공손충의 품 사이로 사라졌다.
‘응?’
공손지는 의아한 눈으로 가주 공손충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공손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걸음을 옮긴다.
가주가 가장 앞장서 있던 터라 공손지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벅, 저벅.
쾌검 공손충은 짐짓 여유로운 자세로 느긋하게 걸어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계곡 안쪽에선 제갈세가 사람들과 먼저 들여보낸 무사들이 예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히 별일 없으셨군요, 제갈 대협.”
쾌검 공손충은 먼저 제갈세가의 가주, 철필 제갈관에게 예를 표했다. 철필 제갈관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정중한 예로 답한다.
“공손 대협께서도 무탈하셔서 다행이오.”
공손세가와 제갈세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강북을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경쟁해 온 데다가, 얼마 전 남경에서는 공손세가가 뒤를 봐주는 남경 이가장과 제갈세가가 후원하는 방림파가 부딪힌 적도 있다.
“어쩐 일로 만나자 하셨소?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그리 좋지 않은 곳으로 보이오만.”
철필 제갈관은 바로 용건을 물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쾌검 공손충은 필옹 제갈련이 뒤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필옹이라는 명호답게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가 외사의 고수임을 부친 비검 공손극이 이미 경고해 준 바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소이다.”
쾌검 공손충의 말에 철필 제갈관이 묻는다.
“제안이라면?”
“제갈세가와 공손세가가 손을 잡는 것이 어떻소?”
철필 제갈관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이미 예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검 공손충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일컬어 오대세가라 하나 이는 무지한 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하오. 당문은 사천의 오랑캐요, 남궁세가와 혁련세가는 강남 변방의 무지렁이들에 불과하니 어찌 감히 강호 무림의 오대세가에 들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지극히 편협적이고 왜곡으로 가득 찬 말이었다. 강남은 이미 그 문화와 경제 수준을 인정받았고, 사천이 대륙의 역사에 편입된 지도 수백 년이 넘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땅을 대륙의 중심, 중원(中原)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으음, 허나…….”
“나는 감히 그런 것들이 오대세가라 들먹이며 정통 명문 세가인 우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소이다.”
말하는 쾌검 공손충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철필 제갈관은 속으로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러나 쾌검 공손충은 제갈관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희망을 읽었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필 제갈관과 쾌검 공손충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한다. 그녀는 바로 단심화 공손지였다.
“신분에 상하가 있고 출신에 귀천이 있음은 하늘의 이치지요. 오늘날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모두 질서가 허물어진 탓입니다.”
철필 제갈관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주들의 이야기에 젊은 여인이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감히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단심화 공손지는 다소곳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녀의 긴 머리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허나 저는 작금의 모습을 보며 애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비보(秘寶)라 하면 마땅히 강호 무림의 존경받는 어른께 그 처분을 맡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찌 오늘처럼 사파건 정파건 가릴 것 없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진흙탕의 개싸움 같은 추태를 저지른단 말입니까?”
이전투구(泥田鬪狗). 단심화 공손지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걸맞았다. 게다가 예의와 범절을 역설하는 그녀의 말은 철필 제갈관이나 제갈세가의 사람들에게 꽤나 설득력 있게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허나 저는 지금 제갈세가의 분들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명망 높은 제갈세가의 분들이시라면, 이러한 뜻을 충분히 헤아려 주실 것이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심화 공손지가 말했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 좁은 소견과 무례를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단심화 공손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철필 제갈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내심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 아이의 말을 어찌 생각하시오?”
공손세가의 가주 쾌검 공손충이 넌지시 묻는다.
철필 제갈관은 낮은 신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대정파와 오대세가가 회동을 갖고도 아무런 결말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도 마찬가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쾌검 공손충이 단심화 공손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공손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소곳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눈길이 힐끗 제갈경을 스친다.
제갈경은 공손지 자신과 함께 황산오화라 불리는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다. 소문처럼 병약한 외모였지만 총명한 눈동자는 공손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질녀의 무례를 사과하오.”
쾌검 공손충이 고개를 숙였다. 철필 제갈관은 깜짝 놀랐다. 제갈세가의 무사들도, 공손세가의 무사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아는 한 가주가 외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공손 가주께서는 어서 고개를 드시오.”
말리는 철필 제갈관도, 제갈세가의 사람들도 과히 나쁜 표정은 아니다. 저 오만하기로 소문난 쾌검 공손충이 제갈세가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제갈세가는 예법과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소. 공손 가주의 제안이 합당하다면 결코 까닭 없이 물리치지는 않을 것이오.”
그건 사실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적당한 이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거절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검 공손충은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오.”
잠시 사이를 둔 후, 쾌검 공손충이 말했다.
“나는 제갈세가와 공손세가가 비보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천의 오랑캐나 강남의 무지렁이들이 다시는 어른인 체 행세하는 것을 보지 않기를 원하오.”
공손충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철필 제갈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 황산에 있다는 비보가 사실이라면 확실히 공손충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공손세가를 믿을 수 있을까?
“이 제안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넌지시 이어지는 쾌검 공손충의 목소리가 철필 제갈관의 판단에 쐐기를 박았다.
“나는 기꺼이 남경을 제갈세가에 넘겨줄 용의가 있소. 우리가 황산의 비보를 차지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말이오.”
철필 제갈관의 눈동자에 탐욕이 스쳤다.
남경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도시다. 공손세가가 남경을 넘겨준다면 제갈세가의 영향력은 크게 확장된다. 그만큼의 물질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공손 가주께 너무 큰 희생이 아니오?”
진담이라기엔 너무나 솔깃한 이야기라 오히려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런 철필 제갈관의 내심을 짐작한 듯, 쾌검 공손충이 미소를 짓는다.
“허허, 피를 나눌 혈맹을 얻는 일이니 어찌 남경 따위가 아깝겠소?”
혈맹(血盟)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바는 컸다. 현재 오대세가의 적은 오대세가뿐이다.
그러니 제갈세가와 공손세가가 진심으로 협력할 수 있다면, 다섯 개의 발 달린 솥 같은 지금의 형세가 대격변을 맞이하는 것이다.
즉, 지금 공손세가의 가주는 그저 비보를 차지하는 것뿐 아니라 대국적인 새로운 그림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음.”
가주 철필 제갈관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힐끗 필옹 제갈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차피 가문의 일은 가주인 철필 제갈관에게 일임한 터이기도 하다.
철필 제갈관은 마음을 정했다.
“허나 이런 중차대한 일은 성급히 결정할 만한 것이 못 되오.”
쾌검 공손충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가주의 말씀은 충분히 공감하오. 이런 중대사를 어찌 하루아침에 정할 수 있겠소?”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쾌검 공손충은 말했다.
“다만 오늘부터 시작하여 강북을 대표하는 두 세가가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 갈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는 바요.”
철필 제갈관은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알겠소.”
제갈세가의 가주, 철필 제갈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 가주의 말씀처럼 두 세가가 힘을 합쳐 이 어려움을 돌파해 봅시다. 하늘의 때나 땅의 이점조차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하였으니, 비록 황산이 위험하다 하나 인화(人和)를 이룬다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나를 믿어 주시니 감사하오.”
쾌검 공손충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길지 않았다.
사락.
뒤에 서 있던 필옹 제갈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해라.”
필옹 제갈련의 경고는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사람들 모두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무언가 온다.”
후우우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필옹 제갈련의 옷이 바람을 맞은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무위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사람은 가주 철필 제갈관이다. 필옹 제갈련의 무위는 이렇듯 공공연히 드러내어선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옹 제갈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그 ‘무엇’은 절대 자신의 무위를 숨기면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슥.
필옹 제갈련은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무사들을 지키듯 그들을 등지고 섰다. 그 탓에 쾌검 공손충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공손지 역시 한순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도.
후우우우욱.
필옹 제갈련의 옷이 거칠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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