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92)
낙향문사전-292화(292/494)
제292화. 퇴각2016.07.19.
화사와 당문이 나타나자 싸움은 중단되었다. 괴인의 이기어검이 멈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화사와 당문이 누구 편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도, 공손세가도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화사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기분 나빴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기껏 구해 줬는데 좀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그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제갈세가나 공손세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화사는 사파다. 그리고 그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황산에서야 이름을 얻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와 함께 나타난 이들은 정사중간이라고까지 여겨지는 당문이다.
치명적인 독과 계략으로 악명 높은 당문.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이 섣불리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구한 건 나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면사를 쓴 가녀린 여인, 당월아였다. 화사는 투덜거렸다.
“저 시커먼 사람을 멈추게 한 건 나잖아. 언니면 그런 건 좀 양보하고 그래야지.”
“싫어.”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당월아가 대답했다. 그녀가 이렇게 대화를 이어 간다는 건 사뭇 놀라운 일이지만 그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눈만 껌뻑일 뿐이다.
“에이, 내가 진짜 더러워서 빨리 이기든가 해야지…….”
투덜거리던 화사는 고개를 돌려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감상하듯 위아래로 훑어본다.
“흐음.”
단단하게 몸을 감싼 검은 옷은 이리저리 찢어져 차라리 천이라 불러야 마땅해 보였다. 초록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이지(理智)라고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도 살갗을 찌르는 듯한 그의 기세. 제갈세가 사람들이 새삼 몸을 떨 정도로 그의 존재는 섬뜩했다.
“뭐, 귀여운 수준이네. 예전의 나에 비하면.”
화사는 피식 웃었다.
“오빠가 날 치료해 줘서 말이야, 내가 이제는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기거든? 물론 밤에는 더 끝내주지만. 호호호호.”
제갈세가의 몇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사가 노골적인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몸매를 과하게 노출하는 대부분의 사파 여자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다. 바로 필옹 제갈련이었다.
‘낮에도 이긴다고?’
외사에서 화사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밤이 되면 그녀가 절대적인 무위를 발휘한다는 것을 말이다.
화사가 외사에서 가장 강한 두 명의 여인으로 손꼽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낮에도 이긴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졌잖아. 그것도 밤에.”
“익!”
당월아의 나지막한 말에 화사가 인상을 쓴다. 그 모습을 보며 필옹 제갈련은 속으로 탄식했다.
‘허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잠시 외사에서 눈을 돌린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 괴인이나 화사뿐만 아니라, 다섯 개의 철전으로 괴인의 이기어검을 막아 낸 저 면사 아가씨, 당월아까지 말이다.
“어쨌든 쟤 어떻게 할까? 잡을까, 죽일까?”
조금 흥분한 듯한 화사의 말에 당월아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섣불리 예단하지 마. 상대는 내 철전 다섯을 못 쓰게 만든 자야.”
짤랑.
어느새 당월아의 손으로 돌아간, 구겨진 철전들이 소리를 낸다.
철전 다섯을 쏟아붓고도 괴인의 이기어검을 막는 것에 그쳤다. 괴인의 검에 담긴 내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의미였다.
“그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우리 둘이 작정하면…….”
후우우욱.
순간 엄청난 기세가 화사로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갈세가나 공손세가는 물론, 필옹 제갈련마저 움찔할 정도의 기세였다.
“천하의 그 누군들 상대가 되겠어? 안 그래?”
무림인들이 천하제일을 들먹이는 것은 흔한 허세다.
그러나 지금 화사의 기세를 목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손 공자님 빼고.”
당월아의 나지막한 말에 화사가 다시 표정을 구긴다. 필옹 제갈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하군.’
방금 전까지 생사를 오고 가던 혈투가 거짓말 같을 정도로 가벼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당월아의 철전지옥은 안개 속에 숨어 사람들을 보호하고, 화사가 은연중에 쏘아내는 기세는 괴인의 움직임을 견제한다.
이미 이 자리의 주도권은 화사와 당월아에게 넘어가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 귀여운 괴물의 맛은 어떨지.”
화사가 혀끝으로 살짝 입술을 핥았다.
“한번 볼까?”
탓.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괴인을 향해 짓쳐 든 그녀의 모습을 아무도 따라잡지 못했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공중에 뜬 화사가 검은 옷의 괴인을 향해 맨손을 내리찍고, 괴인은 자세를 낮추며 그 일격을 검으로 받아 낸다.
조금 전 필옹 제갈련과 괴인의 대치가 정확히 역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격돌이 만들어 낸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을 휩쓸고, 나름 고수라 불리는 무사들도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야 했다.
피피피핑.
그사이, 기다렸다는 듯 당월아의 철전이 괴인의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괴인은 즉시 몸을 뒤로 빼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부욱.
카가가강.
허공을 가른 괴인의 붉은 궤적에 철전이 튕겨 나온다. 그러나 괴인이 충격을 받았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철전을 받아치는 괴인의 몸이 크게 휘청였기 때문이다.
탓.
공중에서 한 바퀴 몸을 뒤튼 괴인은 땅에 내려섰다. 괴인의 발이 땅에 닿았다 싶은 즉시 괴인은 몸을 위로 뽑아 올렸다.
피핑.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같은 차이로 괴인이 있던 자리를 두 개의 철전이 스쳐 지났다.
허공에 뜬 괴인은 기괴한 자세로 몸을 뒤틀더니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또 다른 철전과 괴인의 검이 충돌하고, 그 반탄력과 함께 괴인은 즉시 몸을 뺐다.
“앗! 놓쳤잖아!”
화사의 말과 동시에 괴인은 쏜 화살처럼 허공을 날아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따라가지 마. 놔준 거야.”
당월아의 목소리에 막 땅을 박차려던 화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덕분에 그녀의 자세가 조금 어정쩡하다.
“어, 그래? 진짜?”
미심쩍은 듯 화사가 당월아를 보며 묻는다.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세 개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어.”
당월아의 말을 이해한 것은 화사뿐이다. 철전 열 개 중에 세 개는 다른 사람들을 호위하듯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채 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 아직 제대로 놀아 보지도 못했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 것 같더니 의외로 쉽게 도망가네?”
화사는 아쉽다는 듯 괴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곤 휙 몸을 돌려 당월아를 향해 걸어왔다.
“아, 그런데 아까 그거 무슨 단어야? 예단? 예단이라고 했지?”
아무렇지 않게 화사가 당월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화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당월아와 함께였다지만, 그녀는 이기어검을 구사하던 괴인을 단번에 쫓아내 버린 것이다.
“고맙네.”
묵직한 목소리는 필옹 제갈련의 것이었다. 감사에 익숙하지 않은 화사가 못 들은 척 얼버무리는데, 당월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필옹의 예에 답한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뒤이은 여인의 목소리는 제갈경의 것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나선 그녀는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화사와 당월아를 바라보는 제갈경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난다. 병약한 그녀에게 여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뭐 구명지은까지야…….”
화사가 슬쩍 뺨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데, 당월아는 대답 대신 나지막이 묻는다.
“아파요?”
“네?”
반문하던 제갈경은 곧 당월아가 한 물음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갈경이 익숙히 듣던 질문이었다.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그런 것뿐이랍니다. 이번 일로 다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경이 답한다.
“……다행이네요.”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딘지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한 어조라고 생각했지만, 제갈경은 밝은 미소로 답했다.
사박.
그사이, 뒤로 물러나 있던 당화련이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있다간 상황이 전혀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두 분 가주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행히 두 분은 아무 일 없으신 것 같으나…….”
당화련은 힐끗 땅에 쓰러진 무사들을 보았다. 예닐곱 명의 무사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다. 본래 각 세가별로 대략 십여 명이 동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괴인의 일검에 삼분의 일이 무력화 된 것이다.
“피해가 작지 않군요.”
제갈세가 가주 제갈관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딱딱하게 굳는데,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충이 짐짓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크흠. 당문 총괄군사께서도 보신 바와 같이 우리 공손세가 역시 피해가 크오.”
“네 이놈!”
제갈관의 분노는 당연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바로 네놈이거늘 그 무슨 망언이냐!”
“허허, 내가 모든 것을 꾸몄다라…….”
어이없는 듯 실소하던 공손충이 눈살을 찌푸린다.
“제갈 가주께서는 지금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소? 우리 공손세가가 이 일을 꾸몄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으신가 말이오?”
“하늘이 보고 땅이 보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들은 바이거늘 무슨 말이더냐!”
“허허, 이것 참.”
곤란하다는 듯 공손충이 고개를 젓는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이야 제갈 가주의 편을 들 것이고, 공손세가의 사람들은 내 말이 옳다 할 것이니 그것이 어찌 근거가 되겠소? 게다가 이렇게 다친 공손세가의 제자들이, 내 말이 옳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소?”
공손충은 당화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이까? 총괄군사.”
당화련은 굳이 자신을 향해 묻는 공손충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충이 지금 당문에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의 그라면 당문의 총괄군사에게 이처럼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당화련의 말에 공손충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당문이라면 반드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허허허, 과연 당문의 총괄군사시오.”
공손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당화련을 향해 예까지 표하며 말했다.
“당문의 총괄군사께서 총명함이 남다른 것은 익히 들었소. 당문의 공정한 처사를 이 공손충 절대 잊지 않겠소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당문이 공손세가의 편을 듦으로써 얻어 낼 이득은 막대하다. 그야말로 공손세가가 목숨을 건지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네, 네 이놈, 감히 어디서 더러운 술수를…….”
뻔히 보이는 공손충의 술수에 분노한 제갈관이 부르르 떤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당문이다. 그로서는 그저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허허, 더러운 술수라니. 제갈 가주께선 아직도 모르시겠소? 결국 강호 무림은 속고 속이는 전쟁터라는 것을 말이오.”
공손충은 조소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조소는 당화련의 짧은 말에 곧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일순간에 공손충의 표정이 굳는다.
당문의 마음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더 얻어 내려는 것일까?
공손충은 경계와 의심의 시선으로 당화련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당화련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까 하신 말씀 말이에요.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제갈세가의 편을 들 것이고, 공손세가의 사람들은 공손세가의 편을 들 것이니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 말입니다.”
공손충의 한쪽 눈살이 일그러진다. 그 말에 무슨 잘못이 있던가?
“그래서?”
“제갈세가도, 공손세가도 아닌 사람의 증언이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의 객관적인 증언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공손충은 당화련이 무슨 술수를 부리려는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녹아야.”
당화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당문의 무사들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초록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뛰어왔다.
“네, 이모.”
‘이모’라는 호칭에 당화련이 눈살을 일그러뜨린다. 아직 혼인도 안 한 젊은 처녀가 벌써 이모라 불리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좋은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녹아의 모습에 당화련의 불쾌감은 온데간데없이 녹아 버린다. 당화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녹아에게 물었다.
“아까 저 아저씨가 뭐라고 하든?”
“우웅. 나 때문에 싸우는 건 싫은데…….”
주저하는 녹아에게 당화련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괜찮아. 안 싸울 테니 말해 봐.”
“당문은 사천의 오랑캐고, 남궁세가와 혁련세가는 강남 변방의 무지렁이들이라고 했어요.”
녹아는 작은 입으로 재잘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아까 그 괴인을 공손세가가 불러들인 거냐고 저 언니가 물으니까 그렇다고 했어요. 공손세가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다가, 저 언니한테 혼났어요.”
제갈경을 가리키며 녹아가 말했다. 당화련은 녹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녹아가 웃으며 좋아한다. 당화련도 싱긋 웃었다.
본래 당화련은 아이들을 싫어한다. 시끄럽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만은 예외다. 동생 당월아를 따르는 아이들이란 것만으로도 귀엽게 보이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슥.
당화련은 몸을 세웠다. 그리고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충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미소는 흔적조차 없다.
“그렇다는군요.”
“허허.”
공손충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 어린아이의 말을 믿으신단 말이오?”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렇네요.”
당화련이 말한다. 언뜻 들으면 공손충의 지적을 수긍하는 듯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은 이미 분명했다.
“그러면 제삼자인 우리 당문은 이대로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당사자이신 공손세가와 제갈세가에서, 알아서 해결하시도록 말이에요.”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필옹 제갈련이 있으니 당화련의 말대로 된다면 공손세가는 죽은 목숨이다.
공손충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하는데 뒤에 서 있던 공손지가 나섰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쨍쨍한 공손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화련은 눈살을 찌푸리고 공손지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말과 공손세가 가주님의 증언, 어느 것이 더 중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요. 하물며 오대세가의 일원이라 자처하는 당문이 한낱 어린 여자아이의 말로 강호 무림의 중대사를 결정하다니요?”
공손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화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세상이 당문을 어찌 볼지, 총괄군사께서는 생각 못 하시는 건가요?”
당화련의 눈썹이 꿈틀했다.
“넌 누구지?”
“나는 공손지예요.”
공손지는 또렷하게 답했다. 그리고 당화련도 공손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아, 그렇군. 네가 바로 그…….”
희미한 웃음이 공손지의 입술에 걸린다. 생략된 것은 아마도 ‘황산오화’라는 단어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당화련 역시 공손지 자신과 같은 황산오화 중 한명이니까.
자박, 자박.
당화련은 공손지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공손세가의 가주나 다른 무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였다.
“뭐, 뭐예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공손지는 애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박.
어느새 당화련은 공손지 앞에 서 있었다. 당화련은 공손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당화련의 하얀 손이 바람을 갈랐다.
짝!
“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공손지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당화련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짜악!
이번에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입안이 터졌는지 공손지의 입가에 피가 번지는데, 당화련은 공손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따위가 당문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지극히 차가운 시선으로 공손지를 내려다보며 당화련이 말했다.
“그리고 명심해. 이 세상에서 네가 함부로 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공손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이 일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던 데다가, 공손지 자신이 뺨을 때린 상대가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뺨을 맞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두 번이나.
공손지는 이를 악물고 표독스러운 눈으로 당화련을 노려다보았다. 하지만 감히 반항할 수는 없었다.
설검 당화련은 이미 젊은 신진 고수의 대명사와 같은 이름이다. 방금 전만 해도 설검 당화련이 정말로 작정했다면 그녀는 죽을 수도 있었다.
“너, 너…….”
채 말을 잇지 못하며 공손지는 분노와 모욕감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당화련이 고개를 돌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관을 바라본다.
“제갈 가주님,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무, 무엇이오?”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제갈관이 반문한다. 당화련은 가볍게 웃었다.
“가주께서 원하신다면, 이번 일에 한하여 당문은 기꺼이 제갈세가의 편에 서겠어요.”
제갈세가로서는 그야말로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가주 제갈관은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미 공손세가의 혈맹 운운하는 것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데다가, 상대가 다름 아닌 당문이기 때문이다.
“당문이 어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물어도 되겠소?”
가주 제갈관의 말은 신중했다. 이 상황에서 당문을 불쾌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 있거든요. 그에게 대적하는 사람에겐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해 주겠다고 말이에요.”
제갈관은 당화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세상에 당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생각하며 제갈관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필옹 제갈련을 바라보았다.
당화련 역시 필옹 제갈련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필옹 제갈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비검, 그자가 결국…….’
제갈세가를 공격한 공손세가는 이 혼란의 배후이거나, 적어도 깊은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하면 비검 공손극 역시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아니, 오히려 공손세가의 행동은 이 자리에 없는 비검 공손극의 뜻이리라.
반면 제갈세가를 도운 당월아는 무제의 길을 걷는 자, 손빈의 사람이다. 그녀가 손빈과 보통 친분이 아님은 이미 북해에서 필옹 제갈련 자신이 목격한 바다.
그렇다면 유추되는 인과관계는 하나뿐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비검 공손극은 손빈을 적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당문은 이것이 오히려 공손세가를 칠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고 말이다.
즉, 당화련이 말한 ‘어떤 사람’이란 아마도 손빈이 틀림없다.
‘저 아이의 뜻인가?’
필옹 제갈련은 당월아를 바라보았다.
비검 공손극이 공손세가를 움직이듯, 당문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녀다.
그러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 당문의 이 행동은 작고 가녀린 여인으로만 보이는 그녀, 당월아의 의지일 수밖에 없다.
“고맙네.”
필옹 제갈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것으로서 공손세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제안을 받아들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더 제 뜻대로 해도 될까요?”
당화련의 말에 필옹 제갈련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이 자리의 주도권을 쥔 자가 당문이거늘 무엇을 주저할까?
감사의 예를 표한 당화련은 돌아서서 공손세가의 가주를 보며 말했다.
“가세요.”
공손충의 눈동자가 빛난다. 당문까지 돌아섰으니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만 벗어나면 살길이 열린다. 아니, 공손세가의 외사 고수인 비검 공손극이 있으니 오히려 복수를 꾀할 수도 있다.
“내 본의는 결코 아니지만, 그런 것엔 또 꽉 막힌 누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나지막이 한숨까지 쉬며 당화련이 말했다. 그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적었지만 그녀가 지금 공손세가를 살려 주고 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알았다.”
가주 공손충이 낮게 말했다. 함정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공손세가 무사들은 다친 자를 부축했다. 공손지 역시 뒤로 물러서더니 당화련을 노려보았다. 그 표독스러운 눈동자는 사뭇 눈빛만으로도 당화련을 죽일 듯했다.
“두고 봐.”
“마음대로.”
당화련은 조소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공손세가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공손지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혹 당화련의 마음이 변할까 차마 더 이상 말하지는 못했다.
“가자.”
가주 공손충의 말과 함께 공손세가의 무사들은 자리를 떴다.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분노로 몸을 떨었지만 당화련이 이미 명령한 것을 거스르진 못했다.
“기대되네요.”
당화련이 나지막이 말한다. 사뭇 즐거운 듯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낭랑하다.
“앞으로 공손세가가 어떤 일을 당할지 말이에요.”
유쾌함 뒤에 숨은 싸늘함이 듣는 이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 목소리에 가주 제갈관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대로 놔주는 게 더 잔인한 게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당화련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문득 당화련이 말한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관이 당화련을 본다.
“제갈세가는 계속 황산에 남아 있을 건가요?”
“아니, 아니오.”
대답하는 데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가주 제갈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제갈세가는 이대로 물러나겠소. 당문의 행운을 비오.”
이곳이 사지임을 확인한 이상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게다가 자신들에게는 공손세가에 갚아야 할 복수가 남아 있다.
이제는 황산의 비보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필옹 제갈련 역시 가주의 판단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화련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아주 현명한 선택이군요.”
그건 황산의 꽃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화사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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