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97)
낙향문사전-297화(297/494)
제297화. 연륜의 차이2016.08.06.
신의를 품에 안은 오르한은 안개 자욱한 황산을 질주하고 있었다.
시야를 제한하는 짙은 운무는 외사의 고수인 오르한에게도 제법 벅찬 것이어서, 곧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거칠게 도약하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을 해야 했다.
절벽을 날아내리거나 커다란 바위를 차고 날아오르는 것도 예사였다.
오르한은 힐끔 품에 안은 신의를 바라보았다. 분명 무공 같은 건 익히지 않았을 텐데 신의는 오르한의 거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나?”
오르한은 앞을 바라보며 물었다. 신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말을 걸기엔 너무나 얼굴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 장애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 하기도 했고.
“음, 별로 괜찮지 않네.”
신의의 대답에 오르한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군. 나 때문에…….”
“자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네.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니.”
무뚝뚝한 신의의 대답에 오르한은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 오르한이 헛기침을 하고 묵묵히 앞을 바라보는데 문득 신의가 말했다.
“이 땅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나?”
“얼마 되지 않았네. 소궁주님의 서찰을 받고 즉시 북해를 떠나 곧장 이곳으로 향했으니까.”
오르한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커다란 소나무와 기이한 모양의 바위를 조심하며 땅을 박찼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신의의 말에 오르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생은 무슨. 소궁주님의 일이라면 어찌 만 리 길인들 주저하겠나?”
만 리 길이라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오르한의 유일한 친우였던 선대 빙후의 손녀, 사수연의 부탁이라면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건 나와 같군.”
오르한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를 돌아보았다. 신의의 눈빛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오르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평범한 의원이 어찌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가 싶었는데 그 대답을 지금 들은 셈이다.
오르한은 신의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가 다쳐선 안 되기에 가능한 부드럽게 땅을 박찬다.
“이곳의 음식은 어떠하던가? 북해와는 많이 다를 텐데 힘들지 않았나?”
신의의 물음에 오르한이 조심스럽게 앞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딱히 힘들지는 않더군. 향료를 많이 써서 가끔 입에 안 맞는 것이 있긴 했으나 본래 음식을 크게 가리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가? 잘됐군.”
오르한은 신의의 목소리에서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흘깃 오르한이 돌아보자 신의가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한다.
“향료를 많이 섭취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으니 말일세.”
남자다운 인상의 신의가 바로 눈앞에서 진지하게 말한다. 오르한은 쑥스러움을 감추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군. 엇!”
갑작스레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오르한은 급히 몸을 틀었다. 덕분에 신의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탁.
오르한은 나뭇가지를 발로 차며 금방 본래의 자세를 회복했다. 그녀는 신의에게 물었다.
“괜찮나?”
“괜찮네.”
신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르한을 안은 신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아 놀란 것은 분명하다.
그도 남자라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일까?
어쩐지 오르한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웃는 건 신의에게 실례다.
오르한이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신의가 말했다.
“나는 당분간 연아 옆에 있을 참인데 자네는 어떤가? 이 일이 끝나면 바로 북해로 돌아가야 하나?”
오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당분간은 소궁주님 곁에 있으려 하네. 소궁주님께서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그것은 오르한뿐만 아니라 빙제가 직접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머나먼 이 남쪽 땅에서 소궁주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사실 한둘이 아니다.
“제자들에게도 좋은 수련의 기회가 될 테니까 말일세.”
오르한은 그녀의 좌우에서 따라오고 있는 북해십이비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북해십이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옆 사람들과 무엇인가 재잘거린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오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수련을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음에도 그저 좋아라 할 뿐이다.
하긴 늘 말로만 듣던 남쪽 땅에 왔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연아는 가끔 내 일을 도와주곤 하네.”
신의의 목소리에 오르한은 귀를 기울였다.
“자네는 환자를 잘 돌보는 편인가?”
“아니, 그런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네.”
오르한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한 자루 검에 일생을 걸고 살아온 오르한에게 환자를 돌보는 것은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약재를 분류하거나 의술에 관계된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글이나 문장이라면 그저 간신히 무지를 벗어난 정도일세. 난 문사가 아니야.”
“그렇군.”
어쩐지 힘이 빠진 것 같은 신의의 목소리에 오르한은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의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할 뿐이다.
오르한은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성실한 의원을 지켜 주는 것이라면 잘할 수 있지.”
보진 않았지만 신의의 시선이 오르한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군.”
방금 전과 똑같은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생기가 느껴지는 것은 오르한의 착각일까?
오르한은 땅을 박차고 운무 가득한 황산 계곡 사이를 질주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바람 소리만 귓가를 스쳐 지난다.
“사람은 혼자 살면 위험하네.”
잠시 말이 없던 신의가 문득 난데없는 소리를 한다. 오르한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신의를 보았다.
신의는 오르한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특유의 그 낮고 담담한 음성으로.
“예컨대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기도가 막히는 경우가 그러하지. 누군가 옆에서 간단한 처치만 해 줘도 아무 일 없는 것을, 혼자 있다가는 죽을 수도 있네. 그뿐인가? 단순히 실족해서 넘어져도 죽을 수 있고, 무심코 무거운 것을 들어도 죽을 수 있지. 심지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자세에 따라서는 혈류의 흐름이 막혀 죽을 수 있다네.”
신의의 말은 거침이 없었지만 듣는 오르한으로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하다못해 등이 가려워도 누군가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제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밤에 누군가 옆에서 함께 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안심하는 법이니까.”
“뭐?”
앞을 보는 것조차 잠시 잊고 오르한은 신의를 돌아보았다. 신의는 그 강렬한 눈동자로 오르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같이 살지 않겠나?”
순간 오르한은 균형을 잃고 휘청 흔들렸다. 덕분에 갑자기 눈앞에 닥쳐든 기암괴석을 피하느라 오르한은 급히 내력을 끌어 올리며 크게 몸을 뒤틀어야 했다.
탁.
오르한과 함께 신의 역시 크게 흔들린다. 오르한에게 안긴 이후 처음으로 신의도 눈을 질끈 감는다.
다행히 오르한은 금방 균형을 되찾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오르한은 벌컥 화를 냈다.
“이런 위험한 와중에 그런 짓이라니! 게다가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그따위 농지거리를……!”
같이 살자는 말은 분명 함부로 내뱉을 것이 아니다.
게다가 만난 지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된 이성에게 할 말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오르한은 수치와 당혹감 그리고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신의는 대답하지 못했다. 격하게 흔들렸던 탓인지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린다.
그 모습에 오르한도 잠시 신의에 대한 분노를 멈추었다.
잠시 후 신의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그건 오르한이 기대했던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
“자네는 내가 싫은가?”
“아직도 그런……!”
오르한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신의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자네가 팔을 풀면 나는 죽네.”
신의의 말은 사실이었다. 험한 바위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는 중이니, 그저 신의를 놓아 버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
설령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외사의 고수인 오르한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신의를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자네에게 천박한 농이나 건넬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신의는 화류계의 풍류공자도 아니고 의원이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사람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어찌 경솔히 행하랴?
“그런데 어째서!”
“이제껏 나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같이 살자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네.”
사실 신의에게 호감을 표한 여인은 많았다. 세도가의 여인으로부터 심지어는 황실과 혈연이 있는 가문의 여인까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나 재물을 지키기 위해 신의의 명성과 의술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오직 자네만이 내가 그 말을 한 유일한 상대일세.”
말하는 신의의 눈빛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오르한은 말이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오르한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신의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우와, 그러니까 지금 목숨을 걸고 꼬시는 거네요?”
뒤에서 북해십이비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목소리가 바로 그 말을 받는다.
“저건 꼬시는 게 아니라 아예 청혼이잖아. 여자에게 안겨 가면서 저렇게 꼴사납, 아니 당당하게 청혼을 하다니…….”
“우웅, 어쨌거나 부러워라.”
안개 사이로 들려오는 어린 제자들의 목소리를 오르한은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신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휙, 휘릭.
귓가로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난다. 오르한은 앞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붉어진 뺨은 어찌할 수 없었다.
유난히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신의에게 들릴 것 같아서 오르한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문득 신의가 말했다.
“저쪽이군.”
오르한은 화들짝 놀랐다.
“으, 응?”
“연아와 빈이가 있는 곳 말일세. 바로 저곳일세.”
신의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오르한은 그제야 신의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아, 그, 그렇군.”
짙은 안개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어느새 소궁주와 푸른 늑대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온 것이다.
오르한은 내심 안도하며 신의가 말한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오르한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
*
*
작은 등불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손빈은 서찰을 읽고 있었다.
물론 등불이 필요할 정도로 어두운 것은 아니다. 등은 아이들을 위해 걸어 놓은 것이다.
가는 붓을 들어 간단한 문장을 적은 손빈은 한 번 훅 불어서 먹을 말린 후 고이 접어 초록 머리의 소녀, 녹아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녹아야. 힘들지는 않니?”
손빈의 말에 녹아가 서찰을 받아 들고는 활짝 웃는다.
“아니요. 아주 재미있어요. 나중에 또 할 수 있어요?”
마주 웃으며 손빈이 대답했다.
“그래, 그때는 다른 아이들도 같이하자.”
“네!”
힘차게 대답하는 녹아의 머리를 손빈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해. 너희는 정말 소중한 아이들이니까.”
“히히히.”
녹아가 좋아라 하며 웃는다. 그러곤 몸을 똑바로 세우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탁.
손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녹아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서서 주변을 살피던 사수연이 빙긋 웃는다.
“아이들이 정말 대견하네요.”
“네. 고마운 일입니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하고요.”
녹아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손빈이 말했다. 그러나 사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이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다섯 아이들의 눈동자에 빛나는 것은 자부심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분명히 귀중한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수연의 말에 손빈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수연 소저. 그렇게 말해 주셔서.”
“천만에요, 손 공자님.”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사수연이 웃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순간 손빈은 말을 잊었다.
그러나 사수연은 곧 몸을 돌려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손빈의 안전을 지킨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는 한시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문득 손빈은 예전 옥룡설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수연 소저가 이렇게 날 지켜 주었지.’
손빈은 새삼 사수연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이지 아름답다. 손빈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게다가 수연 소저는…….’
사수연은 성품이 올곧고 분명하다. 누구를 닮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반면 서원에서 보여 주는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부드러운 면도 있다. 사람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당월아조차 사수연에게는 마음을 여니까.
‘어머니라는 분의 영향일까?’
자그마치 그 사자혁이 반한 상대다. 게다가 북해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수연의 어머니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좋은 의미로.
‘후우,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새삼 손빈은 사수연을 향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일단 모든 걸 떠나서 그녀는 사자혁의 딸이자 북해의 소궁주가 아닌가?
신분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이 시대에 사수연의 신분은 그야말로 황실에 비견할 만하다. 물론 황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락.
바람이 가볍게 사수연의 머릿결을 흔들고 지나간다. 사자혁의 딸이라는 인연이 아니었으면 저렇게 아름답고 멋진 아가씨와 평생 말이라도 한번 나눌 수 있었을까 싶다.
그렇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손빈은 갑작스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러고 보니!’
지금 손빈은 사수연과 단둘뿐이다. 손빈은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기회는 서원에서도 얻기 힘들다.
‘가만있자.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손빈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서원에서 여인들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주로 적세화와 노부인 당운영이 말하고 다른 아가씨들은 열심히 듣는 분위기였는데, 그때 적세화가 이렇게 말했다.
―자연스러워야 해요. 무언가 속셈을 갖고 접근하는 게 보이면 기분이 확 나빠지거든요. 상대에 대한 인상도 당연히 최악이 되지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손빈은 그 말을 되뇌며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적세화는 이런 말도 했었다.
―요즘 인기 있는 사람요? 글쎄요, 다들 재미있는 남자가 좋다던데요?
‘재미있게.’
손빈은 ‘자연스럽게, 재미있게’라는 두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게…….’
문득 예전에 서원에서 배웠던 ‘원시 유가 도가 강론’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상 체계를 아우르며 핵심을 통찰해 내는 그 책에 감탄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고, 심지어 ‘책의 저자는 틀림없이 득도해서 구름을 타고 다녔을 것’이라는 낭설까지 떠돌았을 정도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고 손빈 역시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과연 사수연에게도 그것이 재미있을까?
‘이건 안 돼. 으아, 뭐 다른 거 없나?’
다른 게 생각날 리가 없다. 수년간 낮이고 밤이고 읽었던 것이 오직 그런 책들 뿐인 데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재미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내심 머리를 쥐어뜯던 손빈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고민하다가 천금 같은 기회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 우선 자연스럽게 대화를…….’
“크흠. 수, 수연 소저.”
“네?”
사수연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본다. 손빈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날씨가 참 좋군요.”
“네?”
그건 확실히 실언이었다. 자연스럽게 한답시고 일단 날씨 이야기를 꺼냈는데, 과도한 긴장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날씨가 좋다’는 말이 나와 버린 것이다.
듣는 사수연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방에 안개가 자욱한데 날씨가 좋다니?
사수연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날씨가 좋다는 말은 생뚱맞기 그지없다.
혹시 무슨 다른 의미가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이상한 것도, 위험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저, 죄송해요.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는 사수연을 보며 손빈은 속으로 절규했다.
‘으아악.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이건 전혀 좋은 날씨가 아니잖아.’
사수연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사방에 안개가 가득하니 납득이 가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날씨가 안 좋네요.’라고 말하기도 이상하다. 사실 어찌 보면 지금 날씨는 마치 수묵화의 한가운데 들어온 듯 신비롭기까지 하니까.
“아, 저기.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
설명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미 실패다. 손빈이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는데, 문득 사수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슥.
그녀의 손이 검 손잡이에 가 닿는다. 그리고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소궁주님!”
“아.”
사수연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진다.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바로 섬옥수 오르한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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