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298)
낙향문사전-298화(298/494)
제298화. 안개가 걷히다2016.08.09.
신의를 안은 오르한이 사수연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 뒤로 북해십이비가 차례로 도착했다.
오르한은 신의를 가볍게 놓아준 후 사수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궁주님.”
그녀를 따라 북해십이비 역시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다.
“소궁주님!”
무릎 꿇은 오르한을 보며 사수연은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북해십이비와 달리 오르한은 소궁주에게 예를 표할 의무가 없다.
다만 오르한 자신이 한, 사수연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일어나세요, 오르한. 그리고 너희도 일어나렴.”
오르한이 일어서고 북해십이비가 몸을 일으킨다. 사수연을 바라보는 북해십이비의 표정은 빛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르한의 눈빛은 사뭇 격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락.
사수연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오르한을 끌어안았다. 오르한은 잠시 놀란 듯하다가 곧 조심스럽게 사수연을 마주 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오르한.”
귓가에 들리는 사수연의 목소리에 오르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오르한의 표정은 장성한 손녀를 껴안는 할머니처럼 흐뭇하기만 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도 기쁨의 표현이리라.
잠시 재회에 젖어 있던 오르한은 가만히 물러섰다. 그리고 손빈을 향해 다시 한쪽 무릎을 꿇는다.
“오르한이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무릎 꿇은 북해십이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르한과 북해십이비의 예에 손빈은 당황했다.
“저기, 이러실 필요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르한은 고개를 들고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북해의 아들딸 중에 그 누가 감히 푸른 늑대께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손빈을 바라보는 오르한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방금 기뻐하며 눈물짓던 푸근한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도저히 사양할 분위기가 아닌지라 손빈은 속으로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일어나세요.”
“네.”
오르한과 북해십이비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예를 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와, 더 멋있어진 거 같아요.”
“소궁주님이 잘해 주셨나 봐요. 그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데요?”
“그사이 키 큰 거 아니에요?”
북해십이비 아가씨들의 인사가 손빈에게 쏟아지고, 델베와 나란은 주위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찾는다.
“아, 서린은 잠시 다른 곳에 있습니다. 나중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손빈이 말했다. 그들이 북해에서 유독 서린을 귀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델베와 나란은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가만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정중한 태도로 오르한에게 말했다.
“이곳까지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르한 님.”
오르한은 미소를 지었다.
“푸른 늑대께서 청하시는데 오지 않을 사람은 없지요. 빙제께서도 기꺼이 수락하시고 저와 북해십이비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네.”
오르한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은 푸른 늑대께서 명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지만 어쨌든 손빈은 오르한에게 감사를 표했다.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북해에 한번 오시는 것이 어떠냐고 빙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손빈의 대답에 오르한은 미소를 짓고는 사수연을 돌아본다.
“소궁주께도 빙제께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칠비와 이비께서도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르내와 나미라는 눈물까지 글썽이더군요.”
사수연의 눈앞에 그리운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사수연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네. 고마워요.”
오르한은 가만히 손을 뻗어 사수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로 사수연을 보던 오르한이 고개를 돌려 손빈을 향한다.
“그럼 이제 저희는 무엇을 할까요?”
“네?”
손빈은 의아한 눈빛으로 신의를 돌아보았다. 신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들은 나를 도와 환자들을 지키고 혹여 싸움이나 습격이 없도록 감시해 주면 되네. 안개 탓에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 곳곳에 횃불도 밝혀 주고.”
“우웅, 결국 집 보기 같은 거네?”
“재미없어.”
투덜거리는 아가씨들 사이로 오르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의를 향한다.
“서찰을 잃어버렸다 하지 않았던가?”
“그렇네.”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고도 말했지?”
“내가 그 서찰을 본 것은 아니니까.”
“그럼 내용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자네와 함께 있고 싶어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신의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었네. 그래서 같이 오자고 한 것일세.”
너무나 당당한 신의의 대답에 오르한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결국 신의는 오르한을 속인 것이다. 오르한이 막 화를 내려는데 신의가 오르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나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 자네를 속인 것은 미안하네.”
먼저 사과를 해 버리니 화를 낼 명분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분노가 가신 것은 아니다.
“자넨 의원이 되어 어찌 경솔히…….”
“아이들을 좋아하나?”
“뭐?”
난데없는 신의의 질문에 오르한이 눈살을 찌푸린다.
“나는 본래 버릇없는 아이들이 싫었네. 하지만 이상하게 요즘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씩씩하게 마당을 뛰어노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아졌지. 자네는 어떤가?”
“귀여운 아이들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나?”
오르한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게다가 씩씩하기로 따지면 어디 북해의 아이들에게 비할까? 그에 비하면 이곳 아이들은 다들…….”
“그런가?”
신의의 안색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나 내가 아까 만져 본 바로 자네는 이미 출산 시기가 지났네. 그러니 안타깝지만 아이를 갖는 건 포기해야겠군.”
“무슨 소리!”
오르한이 발끈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화가 나있던 참이어서 오르한은 그대로 신의에게 쏘아붙였다.
“내 배로 낳아야만 내 아이인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내 아이일세. 아이를 원한다면 양자든 양녀든 얼마든지 들이면 될 것을 어찌 함부로 포기한다는 말을 하는가? 핏줄에 연연하는 이 땅의 답답한 인식이란 도무지…….”
말하던 오르한은 문득 말을 멈췄다. 손빈과 사수연은 물론이고 북해십이비 전부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신의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르한에게 묻는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네. 내가 잘못 생각했군. 그럼 우리 아이들은 몇 명이 좋겠나?”
오르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와 동시에 북해십이비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우와, 스승님 멋져요.”
“스승님. 힘내세요!”
환호하는 북해십이비에게 오르한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소궁주! 그게 아닐세.”
어색하게 웃던 사수연은 신의를 한번 돌아보고는 오르한에게 말했다.
“저기, 뭐랄까. 신의 님은 참 좋은 분이시니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벌써 자녀 계획까지 말씀하시는 건 조금 성급하신 게 아닌지…….”
오르한은 좌절했다. 자신은 그저 신의의 잘못된 인식에 반박한 것뿐인데 자녀 계획을 말한 것이 되어 버렸다.
손빈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고 신의는 진지하기만 하다. 게다가 북해십이비는 저희끼리 꺅꺅거리고 난리다.
그나마 나이가 좀 있는 델베와 나란이 동정의 눈빛으로 오르한을 쳐다볼 뿐이다.
오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여기서 오르한이 해명을 늘어놔 봤자 오히려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다.
“푸른 늑대님.”
“네?”
아직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손빈이 움찔하며 오르한에게 대답한다.
“다른 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아, 일단은 신의 님이 말씀하신 것 정도면…….”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르한은 손빈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손빈이 엉겁결에 마주 예를 표하는데, 신의가 오르한에게 다가왔다.
“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르한이 묻자 신의가 답한다.
“나를 데려가야 하지 않겠나?”
“다른 사람을 찾아보게.”
오르한은 신의를 외면하며 쌀쌀맞게 말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신의는 자신에게 이 수모를 당하게 만든 당사자다. 그를 안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 나더러 다른 여자에게 안겨 가란 말인가?”
신의의 그 큰 눈썹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오르한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싫다면 걸어오게. 내 북해십이비 중 몇을 호위로 남겨 둘 테니…….”
“단 일각 만으로도 환자의 목숨은 생과 사를 넘나드네.”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신의가 말했다.
“내가 지체된 탓에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이 꺼지게 되면 어찌하려는가? 자네가 지금 많이 격앙된 것은 알겠으나 그 때문에 타인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겠나? 자네는 그런 사람인가?”
“큭.”
오르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신의의 말이 옳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찌 외사의 고수이자 북해십이비의 스승이라 자부하겠는가?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어진 신의의 말이었다.
“나를 데려가게. 자네에 대한 오늘의 무례는 내 평생을 두고서라도 갚을 테니.”
오르한은 인상을 썼다. 이 남자는 평생이니 하는 말을 어찌 이리도 가벼이 내뱉을까?
“참고로 말하지만 내가 평생을 두고 갚겠다는 말을 한 여인도 자네가 처음일세.”
신의를 잠시 쳐다보던 오르한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에게 이길 방법은 없는 듯했다.
“알았네. 자네 말대로 하지.”
오르한은 몸을 돌려 손빈과 사수연에게 예를 표했다. 북해십이비도 예를 표하고, 손빈과 사수연 역시 정중하게 답했다.
“그럼.”
사수연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건넨 후에 오르한은 한 팔로 신의를 안았다.
안기 직전 오르한이 신의를 한번 노려보았지만 신의는 태연하기만 했다.
탓.
오르한과 신의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북해십이비도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손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을까요? 오르한 님이 적잖이 화가 나신 듯한데…….”
“괜찮을 거예요.”
사수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오르한 님이 직접 신의 님을 모시고 가셨으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시고요.”
‘아.’
손빈은 사수연의 말뜻을 깨달았다. 오르한은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어찌 보면 본심은 아닌 것이다.
‘신의 님. 힘내십시오.’
속으로 신의를 응원하는 손빈은 내심 그가 부러웠다.
언제쯤 자신은 그렇게 당당하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아,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아요.”
문득 사수연의 목소리가 손빈을 일깨웠다.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희뿌옇던 태양이 선명한 원을 드러내고 주변도 아까보다 확실히 밝아져 있었다. 풍경 또한 이전보다 더 멀리 보인다.
“그렇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곤 사수연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가 볼까요?”
사수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손빈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월아 소저의 말대로 그들이 수세로 돌아섰다면 손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만일 함정이라면…….”
손빈은 싱긋 웃었다.
“저는 수연 소저만 있어도 좋습니다만, 소저께서 원하시니 그리하도록 하지요.”
그 말에 사수연은 살짝 가슴이 뛰었다.
물론 그런 뜻이 아닌 것은 알지만, 어쩐지 고백의 말처럼 들리는 건 그녀 스스로에게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바스락.
손빈은 사수연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서찰들을 꺼내어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손빈도 내심 아까의 대화를 다시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까의 참상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해 보니 무엇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나마 유야무야 지나간 것이 다행이지.’
만일 사수연이 손빈의 의도를 알아차렸더라면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잡념을 떨치려는 듯 손빈은 진지하게 서찰을 살폈다. 그리고 사수연은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잠시 잊은 채 그런 손빈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
어쩌면 그 표현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빈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조금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도, 빛나는 눈동자도, 굳게 다문 입과 단정한 턱선까지도. 바라볼수록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설산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 그 지독한 한기에서 자신을 건져 준 것도 모자라, 오직 자신을 위해 땅끝에서 북해까지 달려와 준 사람.
아무 의미도 없던 이 세상에서 사수연에게 온기를 느끼게 해 준 단 한 사람.
사수연은 손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문득 고개를 든 손빈의 눈동자가 사수연과 마주쳤다.
사수연이 눈을 깜빡하는데 손빈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앗.’
사수연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손빈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서찰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세상에, 이런 상황에 내가 무슨 생각을…….’
지금은 손빈을 보며 넋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사수연은 잠시 책임을 망각한 자신을 책망하곤 슬그머니 손빈을 살폈다. 혹시나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손빈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서찰을 살피는 데 집중해 있었다.
‘휴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수연은 곧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바스락.
뒤에서 서찰을 넘기는 소리가 난다.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사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당황했던 그녀의 가슴이 다시금 따뜻한 온기로 차오르고 있었다.
*
*
*
콰앙.
폭음과 함께 괴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밀려난 듯 보이던 괴인은 한순간 허공에서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틈을 노리는 듯하던 다른 괴인 역시 어느새 운무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어딜!”
무당칠절 중 일절 청양 진인이 외쳤다. 그는 즉시 괴인을 뒤쫓으려 했으나 뒤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따라가면 안 돼.”
청양 진인은 발을 멈췄다.
잘생긴 미소년 서린이 짐승의 꼬리 같은 불진을 가볍게 휘둘렀다.
기이하게 서리던 푸른 기운이 씻은 듯 사라지고 불진 홍진만리는 곧 서린의 품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수고했어, 아저씨.”
서린은 씨익 웃었다. 조금은 버릇이 없는, 어린 청년 같은 모습이었지만 청양 진인은 그런 서린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사숙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어, 갑자기 왜 그래?”
청양 진인의 예에 서린이 오히려 당황스러워한다. 그러나 청양 진인의 예를 이상하게 여기는 무당 도사들은 이미 없었다.
서린의 그 놀라운 위용을 직접 목도한 바다.
게다가 서린은 무당의 도사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런 그에게 어찌 감히 ‘외인’ 운운하며 무례를 저지를 것인가?
“이야아! 정말 대단한 칠성검진이었어요. 엄청나요!”
무당칠절 중 막내 진명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청양 진인은 그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꾸중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도 내심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우와, 어떻게 그런 칠성검진이 있을 수 있지요? 이러다 이거 천하의 그 누구도 깨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칠성검진이 되는 거 아니에요?”
서린이 함께한 칠성검진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처럼 거침이 없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칠성검진을 이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태극의 묘리에 따르는 칠성검진의 특성상, 조금만 더 유지했다면 그 기세와 위력이 하늘에 닿을 수도 있겠다 여긴 사람은 다만 진명만이 아니었다.
“그렇게는 안 돼. 한계가 있잖아. 그리고 일단 빈이 형한테도…….”
“한계라니? 어떤 한계 말씀입니까?”
일절 청양 진인이 단박에 관심을 보인다.
자신보다 칠성검진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 자부하던 그에게는 절대 그냥 흘릴 수 없는 말이다.
덕분에 서린이 뒤에 말한 ‘빈이 형한테도 안 통할 거고’라는 말은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칠성검진을 이루는 사람들의 한계지. 칠성검진의 기세가 스스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국 검진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거든. 음, 그러니까 마치 건물에 기둥이 괜히 서 있는 것 같아도 그거 없으면 다 무너지는 그런 이치랄까…….”
“그, 그런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굳은 표정으로 청양 진인이 묻는다.
분명 서린은 칠성검진을 익힌 바가 없다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칠성검진의 한계를 단숨에 꿰뚫어 본단 말인가?
“그냥 보이던데? 그리고 아저씨들이 워낙 정확하게 움직여 줘서 파악하기도 쉬웠어.”
서린은 나름 무당칠절을 칭찬한 것이겠지만 청양 진인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서린의 번뜩이는 천재성을 이제야 확실히 인식한 것이다.
“서린아.”
뒤에서 노도사 현허 진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할아버지!”
대번에 환한 표정이 된 서린이 한달음에 현허 진인에게 달려간다.
“잘했다. 정말 고맙구나.”
현허 진인의 칭찬에 서린이 웃는다.
“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서린의 물음에 현허 진인이 장문인 청수 진인을 바라본다. 잠시 말이 없던 청수 진인은 조용히 말했다.
“무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사숙님들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사숙님들’이라 한 것은 현허 진인과 서린을 일컬음이다.
현허 진인은 청수 진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서린에게 말했다.
“들었지? 이제 무당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서린은 현허 진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자, 잠깐만요.”
부른 사람은 막내 진명이었다. 손빈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그가 다급히 서린에게 다가온다.
“저기, 저도 사숙조님과 같이 가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일절 청양 진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 철없는 막내가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것이다.
“같이? 왜?”
서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니, 저기 그게.”
우물거리던 진명이 서린에게 고개를 가까이 하며 나지막이 말한다. 물론 그런다고 못 들을 사람은 이곳에 없지만.
“그 면사로 얼굴을 가린 당문의 아가씨요. 그때 보니까 사숙조님과 같이 계시던데,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나요?”
“사귀는 사람은 없는데?”
그저 당월아의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녀가 ‘나는 전부 그분의 것이야’라고 말한 사람.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진명은 대번에 밝은 얼굴이 된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혹시 어떤 유형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음, 마음이 따뜻하고 강한 사람?”
“그거 잘됐네요.”
진명이 좋아라 하며 말한다.
“저도 마음이 따뜻한 데다가 제법 강한 편에 들거든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무당칠절에 든다는 것은 진명의 뛰어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막내라 불리는 것은 나이와 배분 탓이지 실력 때문이 아니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어떻게 사숙조님이 소개 좀…….”
“진. 명.”
묵직한 청양 진인의 목소리가 진명에게 떨어져 내린다. 진명은 얼른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감히 사숙님께 그 무슨 무례더냐? 게다가 잡념을 버리라고 내 누누이 말했거늘!”
청양 진인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진명의 목이 더욱 쑥 들어간다.
아무리 도가에서 출가의 계율이 그리 엄하지 않더라도 대놓고 환속을 언급하는 건 확실히 지나친 일이다. 진명 딴에는 서린 핑계로 무림에 나와 볼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말이다.
“아, 나는 괜찮아.”
서린이 말했다. 구명줄을 발견한 진명이 반색하는데 서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형은 좀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아. 우선 열심히 수련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수련요? 얼마나요?”
진명이 묻자 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최소한 나를 이길 수 있을 정도?”
순식간에 진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방금 서린의 위용을 보았는데 그것을 넘어서라니, 아예 평생 무당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과도 같았다.
“아니, 사숙조님. 그건 너무…….”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뒤에서 이를 갈며 청양 진인이 말한다. 마치 천신 같은 강렬한 눈동자를 빛내며 청양 진인은 진명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 오늘 사숙님의 무위를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네게 그것을 전부 전해 줄 터이니 수련이 끝나기 전에는 무당산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갈 줄 알아라.”
진명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런 진명의 어깨를 서린이 가볍게 두드린다.
“잘됐네, 형. 열심히 수련해서 강해지기 바라.”
서린은 활짝 웃었다. 그러곤 다른 도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그리고 이곳을 나갈 때까지는 어옹 할아버지가 도와주실 거야. 어옹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오냐.”
주름 가득한 어옹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린의 칠성검진을 목도한 그도 흥분으로 인해 얼굴에 붉은 기가 돈다.
“그럼 안녕. 다들 잘 있어요.”
탁.
도사들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서린은 그대로 몸을 날려 짙은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아, 저기 사숙조님! 사숙조님!”
진명이 애타게 불러 보지만 대답은 없다.
낭패한 표정으로 진명이 어쩔 줄 모르는데, 청양 진인이 몸을 똑바로 세우더니 서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예를 올린다.
“사숙께서도 부디 평안하시기를.”
다른 도사들도 일제히 청양 진인을 따라 예를 표했다. 진명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같이 예를 올려야 했다.
장문인 청수 진인은 긴 한숨을 쉰 후에 천천히 예를 표했다. 그런 그의 어깨에 사숙 현허 진인의 주름진 손이 얹혔다. 그 따뜻한 온기가 청수 진인의 복잡한 심정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느덧 황산에 자욱하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청수 진인의 마음에 가득하던 미혹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