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04)
낙향문사전-304화(304/494)
제304화. 악몽2016.08.30.
서린의 홍진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청랑검 위가진을 항해 내리꽂혔다.
어마어마한 내력이 담긴 홍진만리였지만 청랑검 위가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면 안 된다.
“타하!”
청랑검 위가진이 기합을 내지르는 것과 함께 그의 칼이 푸른 기세를 내뿜었다. 그리고 덤벼든 서린의 불진과 그의 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앙, 카가가강.
서린의 불진과 청랑검의 칼이 격돌하며 불꽃을 튕긴다. 불진과 칼의 충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도 있어!”
탓.
화사가 즉시 움직였다. 서린이 공격을 시작했으니 대화는 이미 결렬이다. 지금 상황에선 한시라도 빨리 경희 군주의 화통을 탈취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파바바밧.
화사뿐만이 아니었다. 노군과 사수연, 당월아와 검희까지 즉시 경희 군주를 향해 짓쳐 들었다. 청랑검 위가진과 항아를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경희 군주가 든 화통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역시.”
사박, 사박.
천천히 정자 안쪽으로 물러서며 경희 군주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되네.”
콰광, 쾅.
터져 나오는 폭음과 충격음을 뒤로한 채 경희 군주는 정자의 난간으로 다가섰다. 뒤에서 벌어지는 격전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사박.
경희 군주는 두터운 기둥에 손을 대고 난간 위로 올라섰다. 구름의 바다에 잠긴 황산의 절경이 그녀의 눈 아래 가득 펼쳐진다.
쿠웅.
때마침 커다란 충격으로 정자가 은은히 흔들렸다. 경희 군주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녀의 시야에 쓰러진 청랑검 위가진과 시녀 항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은 정자 기둥에 각기 처박힌 채 주저앉아 있었다.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것뿐이다. 그들의 검은 아예 부러진 채 저 멀리서 나뒹군다.
“네 장난질은 이제 끝났다.”
노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의 검 소령이 주인의 분노에 응답하듯 나지막이 울었다.
“그러니 그 화통을 이리 넘겨라.”
“후후후.”
경희 군주는 웃었다. 그리고 화통을 든 손을 정자 바깥쪽으로 뻗었다.
휘이이이잉.
강한 바람이 그녀의 옷소매를 펄럭이고 화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천인단애가 바람을 막아 주던 안쪽과 달리, 정자 바깥쪽은 매서운 강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소매를 뒤흔드는 바람은 경희 군주마저 휘청이게 했다.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로운 형상이었다.
“내가, 넘겨줄 것 같아?”
바람에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말하는 경희 군주의 음성은 사뭇 도발적이었다.
으득.
“네가 아직도…….”
노군이 이를 갈았다.
“이제 그만하게, 사매.”
나지막이 불호를 외며 청혜 사태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더 이상 사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제발 순순히 화통을 넘겨주게. 그러면 이들도 사매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걸세.”
그녀의 말이 옳았다. 청랑검 위가진과 시녀 항아가 무력화된 지금 경희 군주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경희 군주 역시 무력화되고 화통은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라 신중할 뿐이다.
하지만 경희 군주는 조소했다.
“그래? 하지만 저들은 눈빛만으로도 당장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사수연이 말했다.
“누구도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후후.”
경희 군주가 다시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돼? 저 남자는…….”
힐끗, 경희 군주는 턱짓으로 손빈을 가리켰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손빈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손빈은 경희 군주의 말에 조용히 정자를 향해 걸어왔다.
저벅, 저벅.
그가 멈춰선 곳은 서린 앞이었다. 손빈은 화난 눈동자로 서린을 내려다보았다. 서린이 주춤거리며 말했다.
“형…….”
짜악.
서린의 고개가 돌아갔다. 손빈이 그의 뺨을 친 것이다.
“아이들과 같이 가겠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손빈은 분노한 목소리로 서린에게 말했다. 손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죽게 된다면, 자신도 죽겠다는 뜻이다. 그 모든 책임을 서린 혼자 짊어지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네 멋대로 덮어쓰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너야말로 마음대로 희생하려고 하지 마. 다시는, 다시는 이런…….”
손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뺨에 손을 댄 서린은 울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응, 미안. 다신 안 할게, 형.”
와락.
손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서린을 끌어안았다.
서린은 후끈거리는 뺨에 손을 댄 채로 손빈의 가슴에 가만히 고개를 기댔다. 달아오른 뺨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서린을 감싸 안았다.
“아주 보기 좋네.”
조롱 가득한 경희 군주의 목소리가 손빈을 일깨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사락.
손빈은 서린을 놓아주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서린의 눈동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준 후, 손빈은 가볍게 눈물을 닦고 몸을 돌려 경희 군주를 보았다.
펄럭.
강풍이 경희 군주의 옷소매를 뒤흔든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당월아에게 무엇인가 작게 속삭였다.
당월아가 뒤로 물러서고 사수연도 옆으로 비켜선다. 손빈은 앞으로 나섰다.
“군주님.”
손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끝났습니다.”
끝났다는 손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희 군주 혼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화통을 내어놓고 자비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훗. 그래, 맞아. 모두 끝났지.”
경희 군주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손빈이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녀가 황산에서 시행한 일들은 실패했다. 외사는 여전히 건재하고, 손빈을 무너뜨리지도, 손에 넣지도 못했다.
물론 번천지계는 계속 시행되리라.
하지만 황제는 더 이상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모두 끝난 것이다.
파라라락.
강풍이 경희 군주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흔든다.
“그러니 이리로 내려와 화통을 넘겨주시지요. 그곳은 위험합니다.”
손빈이 경희 군주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거짓이나 위선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위험하다고?”
경희 군주의 말에 손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후후. 넌 아직도 날 모르네.”
경희 군주는 웃었다.
이 남자는 모르리라. 여기서 내려간 후에 경희 군주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난 항상 위험했어. 좋은 옷을 입어도, 화려한 황궁에 있어도, 언제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어. 내 운명을 쥔 사람이, 내가 아니니까.”
이를 갈며 경희 군주가 말했다.
누군가의 한마디 말로, 그저 가벼운 변덕만으로도 그녀의 운명은 요동칠 수 있었다.
머나먼 북방 민족에 보내지는 것도, 혹은 황궁 심처에 격리된 채 덧없이 죽어 가는 것도.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내 뜻이 아니야.”
나직한 음성으로 경희 군주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손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끝은.”
빛나는 눈동자로 경희 군주는 말했다.
“내가 선택하겠어.”
“군주!”
사락.
경희 군주의 하얀 손이 정자 기둥을 놓았다.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경희 군주를 바라보는 손빈의 놀란 눈동자, 그리고 그녀를 향해 뻗은 그의 손.
그 모두를 하나하나 눈동자에 새기며 경희 군주는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파라라락.
매서운 강풍이 삽시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검붉은 화통은 그녀의 손을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마도 곧 어딘가에 부딪혀 박살이 나리라.
경희 군주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을 맞이할 운명을 기다렸다. 모든 것을 단숨에 끝내 줄 자애로운 죽음을.
“사매!”
외치는 여인의 목소리에 경희 군주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아미의 무복을 입은 청혜 사태가 서슴없이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보았다.
‘어째서?’
파바바박.
매서운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와중에도 경희 군주는 혼란스러웠다.
청혜 사태가 경희 군주를 향해 똑바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희 군주가 놓아 버린 화통이 아니라, 바로 경희 군주 자신을 향해서.
쉬익.
떨어져 내리는 경희 군주를 향해 청혜 사태는 엄청난 빠르기로 접근해 갔다.
파라라락.
‘웃.’
매서운 강풍 속에 경희 군주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놓칠 뻔했지만, 결국 청혜 사태는 간신히 경희 군주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팍.
청혜 사태는 허공에서 경희 군주와 부딪히듯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며 자세가 헝클어졌다.
“지금 뭐하는……!”
그 와중에도 경희 군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친다.
“시끄러워!”
청혜 사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죽어! 넌 반드시 살아서…….”
파라라라락.
‘큭.’
맹렬한 강풍 속에서 청혜 사태는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이 한순간에 자신과 경희 군주의 생사가 걸려 있는 것이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아야 해!”
그렇게 외치는 동시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혜 사태의 귓가에 들려왔다.
“상효, 이절.”
우우웅
빙검의 환영 몇 개가 청혜 사태의 아래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와는 달리 매우 적은 숫자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쉬쉬쉭.
빙검이 청혜 사태를 향해 짓쳐 든다. 청혜 사태는 한 손으로 경희 군주를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검을 빼들었다.
“타하!”
쉭, 콰아앙.
청혜 사태가 내지른 검은 빙검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리고 그 충격에서 터져 나온 반탄력으로, 청혜 사태는 절벽 쪽으로 몸을 날릴 수 있었다.
탁.
비쭉 튀어나온 바위 모서리를 청혜 사태의 손이 단단히 그러쥔다. 검은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하아, 하아.”
청혜 사태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발밑으로 아찔한 높이의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마터면.’
손빈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대로 사매의 죽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혜 사태는 힐끗 경희 군주를 보았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듯했다.
휙.
경희 군주를 단단히 붙든 청혜 사태는 바위 봉우리 정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청혜 사태는 금방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맞이하기는커녕 정자 난간에 옹기종기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앗, 저기. 그쪽, 그쪽이야!”
화사가 몸을 반쯤 난간 밖으로 내놓은 채 소리친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비슷하게 난간에 바싹 붙어서 절벽 아래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앗! 살살하라고. 부서지면 어떡해!”
“그럼 네가 해.”
당월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사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미안. 하지만 살살 좀 해 줘. 나 가슴 떨린다고.”
당월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통, 통.
거센 바람 속에서 검붉은 화통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화통 사방에는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철전들이 마치 감싸듯 떠 있다.
우우웅.
당월아의 하얀 손이 움직일 때마다 화통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튀었다. 철전들에 부딪혀 가며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곡예처럼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조심해. 제발 조심.”
화사가 초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청혜 사태는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청혜 사태는 정자 한쪽에 경희 군주를 조심스럽게 기대어 앉혔다. 정신을 잃은 경희 군주의 안색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일어서던 청혜 사태는 검희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경희 군주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희는 가만히 청혜 사태를 보다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청혜 사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손빈을 보았다. 손빈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화통에 온통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가 경고해 주지 않았으면…….’
손빈은 당월아에게 말했다. ‘경희 군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라고.
당월아는 그 말을 즉시 전음으로 모두에게 전했다. 손빈이 경희 군주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행은 전음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화통은 당월아가 이미 주변에 배치해 놓은 철전을 이용해 회수하기로 했고, 경희 군주를 구하는 것에는 기꺼이 청혜 사태가 나섰다.
―차라리 내가 화통을 잡고 검희의 절기나 네 철전으로 날 돕는 게 낫지 않아? 쟤는 그냥 놔두자고. 자기가 죽겠다는데 왜 구해 줘야 돼?
화사가 그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당월아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렇게 하면 손 공자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
그 말에 화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경희 군주를 확보하는 건 대단히 유용한 패가 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경희 군주를 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청혜 사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럼, 다들 준비해.
당월아가 그렇게 말한 직후, 과연 경희 군주는 몸을 던졌다.
그러나 준비하고 있는 외사의 고수들 앞에서 그녀의 극단적 선택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화사가 초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서린이 문득 눈동자를 빛낸다.
“지금이야!”
휘릭.
서린이 소리치며 불진을 휘둘렀다. 화사가 깜짝 놀라는데, 불진이 일으킨 기운이 검붉은 화통을 움켜쥐고 위로 솟아오른다.
탁.
“잡았어!”
난간 밖으로 거의 몸을 내밀다시피 한 사수연이 화통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즉시 당월아에게 건네주었다.
당월아는 철전의 제어를 풀어 버리고 화통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면밀히 살폈다.
“어때?”
화사가 묻는다.
“이 줄을 잡아당기면 쏠 수 있는 것 같아.”
“그럼 뭘 기다려? 어서, 어서.”
재촉하는 화사 옆에서 당월아는 손빈을 보았다.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월아는 화통을 하늘로 향하고 서슴없이 줄을 잡아당겼다.
펑.
폭음과 함께 불꽃이 하늘로 솟았다. 엄청난 연기가 주변으로 퍼졌지만 그 사이로도 밝은 불꽃은 똑똑히 보였다.
피이이이이―.
화통에서 쏘아진 불꽃은 피리 소리와 함께 긴 꼬리를 끌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푸른 하늘에 꽃송이 같은 붉은 연기가 피어났다.
팡.
푸른 하늘에 피어난 붉은 꽃송이는 잠시 바람을 따라 흐르는 듯하더니 곧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붉은 색이 완전히 희미해질 때까지도 다른 신호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화사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응답이 없어? 아까는 있었잖아.”
“기다려 봐.”
당월아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분명 금방 응답이 있었다.
눈이 좋은 서린과 사수연이 그 방향을 주시하고, 다른 사람들은 혹시나 해서 사방을 돌아보지만 붉은 신호에 응답하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손빈도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살피지만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큭큭큭.”
초조해하는 일행의 귓가에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자 난간에 기대앉은 경희 군주가 고개를 떨군 채 웃고 있었다.
“왜 웃지?”
사수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경희 군주는 고개를 들었다.
“우스워서.”
“뭐가?”
경희 군주는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헛된 발악을 하는 게.”
사수연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경희 군주를 향해 걸어갔다.
사박, 사박.
챙.
사수연의 검, 미명의 칼날이 반짝였다. 그대로 경희 군주에게 걸어간 사수연은 칼끝을 경희 군주의 눈앞에 가져갔다.
슥.
“말해.”
싸늘한 눈빛으로 사수연이 말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지?”
자신의 눈앞에서 반짝이는 칼날을 한번 바라본 경희 군주는 고개를 들었다.
“말 그대로야. 너희는 헛된 발악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던 경희 군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방금 전 스스로 죽으려 했던 여자에게 위협이라니, 뭔가 착각한 것 아니야?”
“죽음은 쉽고 삶은 어렵지.”
싸늘한 사수연의 목소리가 경희 군주에게 떨어져 내렸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너는 끔찍한 삶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하게 될 거야.”
경희 군주를 내려다보는 사수연의 눈빛은 가히 절대자의 그것이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의 눈빛.
“좋아.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사뭇 도발하듯 사수연을 노려보며 경희 군주가 말했다.
“왜 응답이 없는지 알아? 왜냐하면 저 화통은 그저 예비였기 때문이야.”
“예비?”
“그래. 첫 신호를 보낼 화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부서졌을 경우를 대비한 예비. 그러니까…….”
경희 군주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사수연을 보며 말했다.
“취소할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