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07)
낙향문사전-307화(307/494)
제307화. 수습 혹은 확대2016.09.10.
안개가 걷히자 황산의 혼란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운무에 갇혀 있을 때와 달리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긴 문파들은 침착하게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시야가 넓어지니 충돌하기보다는 서로 거리를 두고 피해 가는 일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황산의 비보’에 대한 더 이상의 다른 실마리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엔 이미 상당수의 문파들이 물러난 뒤였다.
결국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황산에서 생존한 문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객잔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사대정파와 오대세가는 그날 즉시 황산에서 떠날 것을 결정했다.
“내일까지는 있어야겠다.”
부상자들을 돌보는 신의는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손빈 일행은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할 수 있었다.
아미파는 법허 신니의 인도로 황산을 떠났다.
장문인 혜월 사태는 죽립을 깊이 눌러쓴 채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했지만, 법허 신니는 떠나기 전에 노군과 손빈을 찾아와 깊은 감사를 전했다.
“거봐. 내가 말했지? 법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노군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노군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당파 역시 황산을 떠나기 전에 서린과 손빈을 찾아와 정중한 예를 표했다.
무당칠절은 물론이고 장문인 청수 진인, 그리고 서린의 사형 현허 진인도 찾아왔다.
나이 많은 현허 진인은 손빈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손빈이 그 예를 사양하느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서린은 현허 진인을 다시 한 번 꼭 안아 주어 늙은 사형, 현허 진인의 눈을 젖게 만들었다.
“언제든지 찾아 주십시오, 사숙.”
무당칠절의 일절, 청양 진인은 서린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 청양, 사숙께 부끄럽지 않도록 힘써 정진하겠습니다.”
말하는 청양 진인의 모습을 보고 노군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 눈빛에서 청양 진인이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디뎠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린이 보여 준 칠성검진에서 그가 무언가 크게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응, 고마워요. 아저씨.”
밝은 얼굴로 서린은 손을 흔들었다. 그런 서린에게 무당의 도사들은 깊이 고개를 숙여 정중한 예를 표했다.
혁련세가는 전대 패검 혁련위가 찾아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끝이었지만, 남궁세가는 전대 뇌검 남궁천과 함께 남궁향과 남궁소유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다.
“남궁 소저.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서찰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손빈이 남궁향에게 작게 속삭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손빈이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말한 터라 남궁향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기다릴게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남궁소유도 이별을 아쉬워하며 꼭 다시 찾아와 달라고 말했다. 비록 황산오화에 들지는 못했지만 당월아와 함께 일부 사람들에겐 매우 인기가 높던 그녀가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당문의 총괄군사이자 황산오화로 꼽혔던 당화련은 당월아를 한번 꼭 안아 준 후, 손빈에겐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황산을 떠났다.
제갈세가는 놀랍게도 필옹 제갈련과 가주 철필 제갈관, 그리고 역시 황산오화 중 한 명인 제갈경이 직접 찾아왔다.
“정말 고마워요.”
제갈경은 화사와 당월아에게 반짝이는 시선을 보내며 감사와 선망의 분위기를 감추지 않았다. 화사가 사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당월아는 여느 때처럼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제갈경의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와 ‘꼭 찾아가 보고 싶어요.’ 공격에 화사가 그만 ‘어, 그, 그래.’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모용세가는 가주 군자검 모용명과 철검 모용진, 그리고 모용린이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다.
모용린은 손빈에게 은밀히 이렇게 말했다.
“제갈세가와 당문에서 엄청난 제의가 있었어요.”
모용린은 웃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앞으로 오대세가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가 있을 거예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손 공자님 덕분이겠지요?”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말한 것이 공손세가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탈혼도는 화사 곁으로 돌아왔지만 귀견수라는 ‘간다.’는 간단한 전언만 손빈에게 남기고 떠났다. 혈봉을 남겨 놓고 온 그의 마음을 손빈은 십분 이해했다.
청혜 사태는 자혜문을 이끌고 북경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청혜 사태는 경희 군주를 보살펴 줄 것을 손빈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사매의 업보는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그러니, 꼭 부탁합니다.”
경희 군주는 쓰러져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 신의 말에 의하면 피로와 탈진으로 인한 충격이라고 했다.
사실 군주라는 신분을 제외하면 그녀도 평범한 여인일 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약한 애는 때리지 않지만 재수 없는 것들은 예외’인 화사가 그녀를 용서할 리도 없었지만.
청랑검 위가진과 시녀 항아는 일곱 외사 고수의 공격을 막아 낸 후유증으로 역시 경희 군주와 같이 치료 중이었다.
무당파를 도와주었던 장강어옹도 다시 합류했다.
“넌 집에 안 가?”
노군이 그렇게 구박했지만 장강어옹은 태연했다.
“붕어가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다.”
그러니까 장강이건 청원의 북강이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노군은 툴툴거렸다.
“그러니까 여자가 없지.”
물론 장강어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공손세가는 사람들이 철수하기도 전에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화산파와 소림마저 떠나자 대부분의 문파들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갑자기 나타난 열두 명의 아가씨들과 그들의 이국적인 용모가 조금 화제가 되기는 했으나 이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문파들이 부상자들을 마차에 싣고 속속 황산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붐비던 객잔들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몇몇 작은 문파만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남아 있긴 했지만 이 소동이 끝났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제법 많은, 그러나 ‘재보’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금자들과 무수한 부상자들을 남긴 채 ‘황산의 비보’에 얽인 혼란은 막을 내렸다.
*
*
*
대륙의 북부에 펼쳐친 초원 지대.
바위와 돌이 많아 초원이라기보다는 건조한 황야에 가까운 그곳에 엄청난 숫자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유목민들의 천막과 달리 사방에 창과 활이 번득이는 그것은 북방 민족의 용사들이 치는 사냥용 천막이었다.
성년이 된 북방의 용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것이지만 전쟁이 나도 역시 똑같은 천막을 친다. 그리고 사실 북방 민족들에게 사냥은 훌륭한 전투 훈련이기도 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숫자다. 수만이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숫자의 천막들이 군집을 이루어 모여 있는 그 모습은 마치 황야에 도시 하나가 들어선 것처럼 웅장하고 방대하기까지 했다.
모두가 여기저기서 모여든 다양한 북방 민족들의 천막이었다.
하늘 위에서 돌고 있는 훈련된 매들과, 이곳저곳에 모아 놓은 수백, 수천의 사냥개들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따각, 따각.
흰 수염을 기른 깡마른 얼굴의 노인, 서방의 네르구이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모닥불 곁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눈매의 장군, 북방의 알탄은 네르구이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여어, 네르구이. 사냥은 많이 했나?”
따각, 탁.
북해 사방장군 중 한 사람, 서방의 네르구이는 말에서 내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이 짐승이나 사냥할 때인가?”
“그럼 뭘 해? 전쟁이라도 나면 모를까, 할 건 사냥밖에 없는데 이럴 때 안 하면 언제 하겠나?”
알탄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짧은 창으로 굽고 있던 고기를 쿡 찔러 보았다. 불길을 줄인 은은한 모닥불 위에서 가죽을 벗긴 사슴이 통째로 구워지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데? 한동안 사냥을 안 했던 곳이라 그런지 살이 아주 제대로 올랐어.”
북방의 알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국경 지역이어서 남쪽을 자극할 만한 대단위 사냥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풍성한 사냥감들 덕에 다른 부족들 역시 하루 종일 사냥을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밤이면 곳곳에서 고기 굽는 냄새와 잔치가 끊이질 않는다.
“알탄, 넌 북방은 어떻게 하고 이곳에 와 있는 거냐?”
깡마른 얼굴의 네르구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탄에게 말한다. 알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난 자식 놈이 있잖아. 나도 이제 늙었으니 이 기회에 슬슬 사냥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노년을 보내려고.”
“느긋하게 노년이라.”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장군, 남방의 군트부르가 구워지는 사슴을 보며 말했다. 네르구이에겐 인사도 없었다.
“사냥 나갈 틈도 없이 바쁜 사람 앞에서 잘도 말하는군. 그렇게 느긋하면 날 도와라.”
군트무르는 남방, 즉 이 지역을 책임지는 사방장군이다. 여러 부족들이 모인 이곳에서 무슨 일만 났다 하면 그를 찾으니, 사실 그는 이중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기 구워 주잖아.”
알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바쁜 건 네가 아니라 네놈의 아들인 구유크겠지.”
구유크는 군트무르의 아들이자 실무를 담당하는 용사다. 구유크야말로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바야마는 어디 갔나?”
깡마른 네르구이가 다시 묻는다. 바야마는 동방을 지키는 사방장군이다. 그도 이곳에 와 있었다.
“아, 바야마 찾으러 왔었나? 빙제님 곁에 있을걸? 왜냐하면 사르내가 거기 있으니까.”
알탄이 고기를 살피며 말했다.
“사르내?”
“왜, 있잖아. 그때 빙궁을 지휘했던 시녀장 말이야. 요즘 바야마가 그 여자에게 한참 구애 중이라고 하더군.”
네르구이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놈이? 선대 빙후님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없는 줄 알았더니.”
“너처럼 독신을 선언한 건 아니잖아.”
알탄의 말을 이어 군트무르가 끼어들었다.
“시녀장 사르내라……. 바야마의 구애를 거절했다던 그 여인인가?”
“뭐? 그게 정말이야?”
고기 굽던 알탄이 고개를 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방의 바야마는 그 중후한 매력으로 북해 모든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군트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바야마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군.”
“우하하하. 이거 바야마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겠군. 그 여자 이름이 사르내라고? 잘했다고 선물이라도 보내 줘야겠는데?”
“선물은 안 받을 거다.”
군트무르가 고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지금 다른 부족들이 한 번이라도 사르내를 만나려고 난리다. 선물이 하도 쏟아지는 통에 아예 전부 거절하고 있다더군.”
“뭐? 왜? 곱게 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로 예쁘진 않았는데?”
알탄의 말에 군트무르가 피식 웃는다.
“네 취향이 아닐 뿐이지. 어쨌든 사르내는 남쪽과의 교역을 총괄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그녀를 만나서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쪽과 교역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서.”
남쪽과 본격적인 교역을 시작한 이후 북해는 전에 비할 바 없이 풍성해졌다. 게다가 북방 민족들이 걱정하던, 거만한 남쪽의 행패도 거의 없었다.
주변의 다른 부족들로선 대체 어떻게 교역을 하고 있는지 그 비결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덕분에 우리 빙궁의 영향력도 커졌다. 다들 어떻게든 우리와 교류하고 싶어 해.”
북방 민족들은 본래 독립적이다. 때문에 무수한 부족으로 갈라져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로선 당연한 일이다. 하늘 아래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어째서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북해 빙궁의 성공은 그들을 자극했다. 그런 와중에 푸른 늑대의 이름으로 열린 이 사냥 축제는 그들을 모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북방 부족들을 통합한 전설적인 푸른 늑대의 이름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응?”
고기를 굽던 알탄이 멀리 초원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곧 피식 웃음을 짓는다.
“뭔가 했더니 남쪽 놈들이군. 이번엔 제법 높은 놈이 온다고 했던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점 같은 것이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남쪽의 깃발을 올린 한 무리의 기마였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알탄은 구별해 낸 것이다.
북방 부족들이 이곳에 모이자 당연히 남쪽은 난리가 났다. 처음엔 무슨 장군의 사자가 오고, 그다음엔 북방을 총괄하는 대장군이 보낸 사자가 왔다.
사자는 거만한 태도로 당장 해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빙제가 ‘네놈의 목을 잘라 대답으로 보내면 예의를 좀 배우겠느냐?’고 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북방 경계는 제국의 수도와 가깝다.
만일 자신의 실수로 사고가 터진다면 일족이 전부 처형당하고도 남을 대죄다. 게다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병력이 모여 있는 것도 그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또 왔나? 대답해 줘도 믿지 않을 거면 왜 자꾸 오는지 모르겠군.”
깡마른 네르구이가 그 작은 점을 보며 혀를 찬다. 몇 번이고 사자들이 왔지만 빙제의 답은 한결같았다.
북방 민족의 전통적인 대단위 사냥 축제.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러나 남쪽 사자들은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야 했다. 북방 경계에 이토록 많은 병력이 집결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볼 때는 그럴 수밖에 없지. 네르구이 네가 남쪽의 황제라면 믿겠나? 이렇게 모여서 그냥 사냥만 하는 거라면 말이다.”
남방의 군트무르가 말했다. 네르구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군트무르를 돌아보았다.
“믿지 않는다. 그러니 싸워야지. 저렇게 사자니 뭐니 보내 봤자 무슨 소용이냐?”
해마다 이뤄지는 대단위 사냥은 북방 민족의 전통이다. 게다가 한번 시작하면 백 일은 보통이다.
그러나 그 전통을 굳이 위험한 국경 지역에서 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자들에게 주어진 빙제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푸른 늑대께서 사냥터를 점지해 주신 대로 따라갈 뿐이다.’라고.
종교 색 강한 그 대답에 남쪽 사자는 이를 갈고 물러나야 했다. 자칫 이들의 전통을 모욕했다간 그날로 진짜 전면전이 일어날 테니까.
그 이후로 사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렸다. 회유와 압박을 병행하는 동시에 특별한 움직임, 예를 들어 기습 준비 같은 것을 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서 남쪽의 경계심만 자극하는 건 무의미하다. 당장 국경을 넘어서…….”
“국경을 넘자고?”
고기를 굽던 알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전면전이나 다름없다.
“매일 음흉한 계략만 짜는 주제에 왜 이리 성급하냐? 너는 그 성질 좀 죽여라. 지난번에도 제일 먼저 노발대발하더니만…….”
네르구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알탄을 노려보았다.
“내가 아무 일에나 그러는 건 아니다.”
“아, 예 예. 그러시겠지요. 서방의 네르구이께서는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분이니까요. 소궁주님과 관련된 것만 아니면 말이지요.”
침묵이 흘렀다.
알탄이 말한 ‘소궁주’는 바로 사수연이다. 선대 빙후의 손녀이자 선대 소궁주 가려의 딸이며, 민간에선 이미 ‘북해의 여제’라고 공공연히 불리는 여인.
“쩝.”
알탄이 혀를 찼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소궁주님 일이라면 나라도 흥분할 수밖에 없으니.”
사방장군이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알탄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자 네르구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소궁주께서 무사하신지, 푸른 늑대께서 이런 명을 내린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해. 소궁주께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네르구이가 여기에 달려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군트무르는 ‘명령’이 아니라 ‘청’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괜히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무엇보다 네르구이의 심정에 십분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알탄 말대로 전쟁이라도 벌어지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알탄이 중얼거렸다. 짧은 말이었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소궁주 사수연과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늑대, 손빈.
사방장군 넷을 전부 합쳐도 그 한 사람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것은 사방장군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소궁주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이 더 있는 편이 항상 나은 법이지.”
네르구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말에 올랐다.
“하아!”
따가닥, 따가닥.
말을 탄 네르구이는 즉시 빙제가 있는 천막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알탄은 혀를 찼다.
“혼자 바쁘네. 그러고 보니 칠비가 빙제님과 같이 왔던데, 별일이 있는 건 아니지?”
고기 익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트무르가 대답했다.
“특별한 일은 없다. 아마 이 기회에 남쪽에 가 볼 생각인지도 몰라. 칠비는 워낙 독특한 사람이니까. 저쪽이 타겠다. 뒤집어라.”
칠비는 젊고 호기심이 많으며 자유분방하다.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라면 남쪽에 가 보고 싶다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남쪽으로 간다고? 으이챠.”
두세 사람의 장정이 들어야 할 큰 사슴을 알탄 혼자 뒤집는 사이 군트무르가 말을 이었다.
“빙제님의 허락만 있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일이 끝나면 상인들 틈에라도 섞여 슬그머니 들어가면 될 테니까.”
“그래? 흐음, 남쪽이라…….”
중얼거리던 알탄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던 군트무르가 물었다.
“가고 싶나?”
“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알탄에게 군트무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칠비가 간다면 호위 겸 해서 같이 가도 상관없을걸? 어차피 사방군세야 다들 아들이나 후계자에게 맡겨 놓았고…….”
“쓸데없는 소리.”
두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알탄이 말했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북해의 사방장군이 남쪽으로 간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만의 하나 남쪽에서 신분이 드러날 경우 일어날 파장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빙제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알탄은 말없이 고기를 뒤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군트무르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했지만 지금 알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히 보였다.
“자, 다 됐다.”
알탄이 창끝에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끼워 내밀었다. 그러나 군트무르는 알탄을 빤히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 나 요즘 고기 안 먹네. 아들놈이 뭐라 해서.”
알탄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진다. 그럴 만도 했다. 기름을 녹여 가며 은근한 불에 천천히 고기를 굽는 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러나 군트무르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냄새가 좋아서.”
알탄의 우락부락한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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