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08)
낙향문사전-308화(308/494)
제308화. 항주 유람2016.09.13.
다음 날 아침, 손빈 일행은 황산을 떠나기로 했다.
황산에서 목적지인 항주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일행이 갑자기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어, 그러니까 우리가 올 때는 모두 여덟 명이었지?”
화사는 손가락을 짚어 가며 숫자를 셌다.
황산에 올 때는 손빈과 노군, 신의, 장강어옹 그리고 사수연과 당월아에 탈혼도와 화사를 포함해서 여덟 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서린과 다섯 아이들이 왔고…….”
거기에 섬옥수 오르한과 북해십이비 열두 명이 한꺼번에 늘어났고 경희 군주와 청랑검 위가진, 그리고 시녀 항아까지 있다.
“그럼 모두 마흔 명?”
“서른이야.”
당월아가 화사의 계산을 정정해 주었다. 아직 산학을 배우지 않은 화사가 손가락 열 개로 접었다 폈다 하며 세다가 그만 헷갈린 모양이었다.
“서른이라도 마찬가진데? 마차에 자리 없어.”
화사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나마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검희는 세지 않은 숫자였다.
“저쪽이 가져온 마차 있잖아.”
당월아가 경희 군주를 보며 말했다. 깨어난 경희 군주는 말없이 손빈의 말을 따랐다. 어떤 시도도, 도발적인 말도 없었다.
청랑검 위가진과 시녀 항아는 끝까지 경희 군주 곁에 남아 있기를 청했다.
손빈은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무인이 고개를 숙이며 검까지 내려놓는 충정을 어찌 차마 꺾으랴?
문득 생각이 난 손빈이 ‘그러고 보니 소하라는 분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위가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라고 답했다.
“두 대라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열다섯 명씩 타? 그리고 난 저년이랑 같이 안 타는 거 알지?”
화사가 투덜거렸다. 경희 군주 일행이 타고 온 마차는 황산 초입 인근 숲 속에서 발견했다. 제법 크고 화려했지만 아무래도 열다섯 명이 타기는 무리다.
“우리는 말 가지고 왔어요!”
북해십이비 중 한 명이 말했다.
“아, 그렇군요.”
손빈이 반색을 하는데 다른 북해십이비가 말했다.
“하지만 난 저 아이들이랑 같이 가고 싶어. 머리카락 색 좀 봐. 너무 예쁘잖아! 말에 태워 가면 안 될까?”
“난 소궁주님이랑.”
북해십이비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서로 꺅꺅거리며 떠들었다. 조금 나이가 있는 편인 나란과 델베는 자꾸만 서린을 쳐다본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이 또래의 젊은 아가씨들이라 손빈이 웃는데, 문득 노군이 옆에서 말했다.
“북해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 타고 따라오라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어깨를 으쓱하고 노군이 말했다.
“말 타는 거 생각보다 힘들거든. 게다가 젊은 아가씨들이라면…….”
그 말에 손빈은 십분 동감했다. 자신도 말 타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해십이비는 어려서부터 말에 대단히 익숙하다. 그러나 이곳의 예법은 그렇지 않다. 특히나 멀리서 온 손님에게 할 대접은 더더욱 아니다.
“우선 가까운 마을까지만 이대로 가지요.”
손빈은 결정을 내렸다.
“그곳에서 마차를 더 구하면 될 겁니다.”
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황산을 떠난 손빈 일행은 가까운 큰 마을에서 두 대의 마차를 더 구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건 누가 누구와 함께 타느냐는 문제였다.
∴
손빈 일행이 나눠 탄 네 대의 마차는 천천히 항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한 마차에 탄 손빈은 흘깃 옆을 쳐다보았다. 경희 군주는 위가진과 항아 가운데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손빈의 마차에 탄 사람은 신의와 노군, 그리고 경희 군주 일행이었다. 물론 고삐는 노군이 잡았다.
북해십이비는 각자 원하는 대로 서린이나 사수연, 혹은 다섯 아이들이 탄 마차에 나눠 탔다.
덕분에 이 마차만 사람이 적었는데, 경희 군주와 북해십이비가 함께 타지 않도록 의도한 탓도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손빈은 고개를 돌려 뒤에 매어 둔 말들을 보았다.
북해십이비가 타고 온 열세 마리의 말은 마차마다 서너 마리씩 뒤에 매었다. 훈련이 잘된 말들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마차와 보조를 맞춰 달리고 있었다.
“몸은 어떠냐?”
문득 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마차를 모는 노군의 뒷모습이 보인다.
“괜찮습니다.”
“흠.”
손빈의 답에 노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파월이식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펼쳐 낼 수 있는 건가?”
말없이 앉아 있던 경희 군주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위가진이나 시녀 항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알아차렸지만 손빈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곳이 황산이 아니었다면 조금 달랐을 것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마음대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뭐랄까,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이라서요.”
엄밀히 말하자면 손빈의 파월이식은 사자혁의 그것과 다르다.
사자혁이 자신의 현천결로 월광만천을 이루어 내었다면, 손빈은 어디까지나 ‘빌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빈은 스스로가 사자혁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사자혁은 아직도 거대한 거인이며, 자신은 그의 어깨에 올라앉아 먼 곳을 내다볼 특권을 얻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만 뭐, 문제없다는 뜻인 줄 알겠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국경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거냐?”
다시 노군이 묻는다. 손빈이 말한 북방 경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손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능하면 거창하게 부탁드린다고 쓰긴 했습니다만.”
그 말에 경희 군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한마디 말로 손빈은 제국의 국경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손빈의 목소리는 경희 군주를 향한 것이었다. 경희 군주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손빈의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제 힘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아는 분의 호의에 부탁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니까요.”
그 누구라도 혼자 설 수는 없다. 그것이 비록 현천의 무제라 할지라도, 혹은 그 대단한 선대 옥룡이라 할지라도.
“아마 그래서 그런 것이겠지요.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순수하게 기대어 올 때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은요.”
서원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한 점 경계도, 의심도 없이 자신을 향해 안겨 든다.
그 마음이 상실감에 빠져 있던 손빈을 일으켜 주었고, 그 눈빛이 목적을 잃은 손빈에게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 아이들의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들이 손빈에게 준 것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져도 갚을 수 없을 정도다.
“보인다.”
마차를 몰던 노군이 말했다.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대도시 항주의 풍경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였다. 곧 만날 아이들의 미소를 떠올리며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
*
*
항주에 들어선 손빈 일행은 미리 이야기해 둔 객잔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선생님!”
“우와, 선생님!”
손빈을 발견한 소소와 앵앵이가 달려왔다. 손빈은 몸을 굽히고 팔을 벌렸다.
팍.
소소와 앵앵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힘차게 손빈에게 안겼다.
“선생님! 여기 멋있어요!”
“엄청나게 커요!”
소소와 앵앵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손빈 옆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래. 그랬구나.”
그 모습이 유독 귀엽고 고마워서, 손빈은 아이들을 한 명씩 보듬어 주었다. 아이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작은 팔로 손빈을 꼬옥 안아 준다.
노군도 아이들을 껴안아 주었고, 장강어옹이나 탈혼도도 슬쩍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의는 혹 그사이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아이들 입을 벌려 보기도 했다.
“꺄하하하.”
화사는 아예 앵앵이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며 뱅글뱅글 돌았다. 사수연이나 당월아도 아이들을 유난히 꼬옥 끌어안는다.
“수고하셨습니다, 세화 소저. 당 부인께서도요.”
손빈은 당운영과 혁련세화에게 감사를 표했다. 혁련세화는 미소 지었다.
“뭘요. 저희도 어제야 간신히 도착했어요.”
“그러셨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런데 이 아이들은…….”
혁련세화와 당운영 뒤에는 열댓 명이 넘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이도 다양해서, 서린과 비슷한 또래가 있는가 하면 앵앵이보다 어린 아이도 있다.
“앗, 이 귀염둥이들은 뭐야?”
“아이가 또 있어!”
손빈 뒤에서 북해십이비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혁련세화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기 그게, 같이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좀, 있어서요.”
서원의 아이들이 항주로 간다고 하자 청원은 난리가 났다. 아이들이 자랑스레 이야기를 한 때문인데,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옆집 아이들까지 같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호연무관에 청탁이, 아니 애원이 쏟아졌다. 아이들의 등쌀에 시달린 부모들은 혁련세화의 본가인 호연무관에 간청했고, 대대로 청원에 뿌리를 내려 온 호연무관은 그들의 부탁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항주는 어른들도 가 보기 힘든 곳이다. 사람들의 청탁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어른들이 같이 안 온 것이 어쩌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결국 혁련세화는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사정을 들은 혁련세화의 양부 혁련공이 나서서 기꺼이 전부를 지원해 주었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아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손빈이 없는 동안 서원의 일은 모두 혁련세화에게 맡겨 놓은 터다. 그녀는 손빈 말고 유일하게 정식으로 초빙된 서원 선생님이기도 하니까.
“두 분이 정말 수고하셨군요.”
손빈이 혁련세화를 위로하는데 문득 아래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말했다.
“나 여기 간다니까 우리 언니는 울었어.”
머리를 둘로 땋은 그 여자아이는 옆에 있는 다른 여자아이에게 종알거렸다.
“왜? 너 못 본다고?”
“아니, 자기도 못 가 봤는데 내가 간다고.”
손빈은 시선을 내렸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되묻는다.
“너네 언니 곧 결혼하지 않아?”
“응. 그래서 어른은 못 간다고 했더니 울었어.”
“우린 엄마랑 아빠랑 싸웠는데.”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중얼거렸다.
“엄마가 화를 내니까 아빠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 결혼할 때 무슨 약속을 했다나……. 뭐, 그래서 대신 나라도 보내라고 했지만.”
아이들의 말에 손빈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니?”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직 손빈이 낯선 듯했다.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난 세화 선생님하고 같은 서원의 선생님이야.”
“알아요.”
가장 앞에 있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데…….”
손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 과거시험에서 똑 떨어졌다고요.”
어색한 손빈의 미소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여자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손빈을 보았다. 그 거리낌 없는 눈동자에 손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오늘부터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거겠지?”
아이들의 눈이 기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손빈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렴. 만나서 반가워.”
그 환한 미소에 아이들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아이들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저, 그런데.”
혁련세화의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이분들은 누구신지…….”
손빈은 그제야 혁련세화가 경희 군주 일행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빈은 우선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아이들이 서로 종알거리며 흩어지자, 손빈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이분은 경희 군주십니다.”
“……누구시라고요?”
혁련세화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혁련세화의 놀란 얼굴이 제법 볼만해서 손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경희 군주십니다.”
물론 혁련세화도 백인록이나 황산의 비보, 그리고 경희 군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을 데려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지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저기, 반갑습니다. 저는 혁련세화라고 해요.”
혁련세화는 드물게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여 경희 군주에게 예를 표했다. 비록 황실의 예법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정중한 인사였다.
그러나 경희 군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련세화 역시 그녀의 처지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면 객잔에선 머물지 못하겠네요.”
손빈을 보며 혁련세화가 말했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머물 곳이 문제다.
새로 합류한 아이들까지 쉰여덟에 이르는 엄청난 대가족이 된 데다가 경희 군주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련세화는 금방 답을 찾아냈다.
“지금으로선 예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네? 무엇이…….”
손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혁련세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께서 예원에 대해 알게 되실 텐데요?”
“아, 그거요?”
손빈은 웃었다.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뒷말이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손빈이 상관없다니 문제는 없다. 혁련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원주 화월은 한 손을 뺨에 대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 공자님이시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녀는 미안한 표정의 손빈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여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그사이에 이렇게 아이들을 많이 만드실 줄은 몰랐네요.”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화월이 말했다. 아이들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화월의 모습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젊음인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월 역시 아직 젊은 나이다. 원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아니, 저기 그런 게 아니라…….”
“농이랍니다.”
당황하는 손빈에게 화월은 가볍게 웃음을 보내고는 살짝 허리를 굽혀 아이들을 보았다.
“안녕. 난 너희 선생님 친구란다. 항주에 온 걸 환영해.”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화월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은 맛있는 걸 준비해야겠네?”
“우와아아아!”
아이들의 인사가 함성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
예원의 원주 화월은 손빈 일행을 위해 별채를 준비해 주었다. 지난번에 머물렀던 곳이 아닌, 방이 많고 널따란 마당까지 있는 커다란 별채였다.
조금 이른 점심을 대접받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손빈 일행은 아이들과 함께 항주 구경에 나섰다. 물론 경희 군주 일행은 예원에 남았다.
항주 유람을 나선 손빈 일행은 모두 쉰다섯 명이었다. 아이들만 서른둘에다가 호기심 많고 쾌활한 북해십이비까지 있으니 시끌벅적한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우와! 선생님, 이거 봐요, 이거!”
“멋있어! 멋있어!”
“아우 예뻐라.”
“소궁주님! 이건 뭐예요?”
그저 항주 시내를 지나고 있을 뿐인데도 아이들과 북해십이비에겐 모든 것이 놀라움과 기쁨과 흥분이었다.
혁련세화와 당운영은 물론이고 화사와 서린까지 아이들에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 모두 얼굴엔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특히 화사는 여자아이를 들어 올려 어깨에 앉혀 주어서 남자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오르한이나 북해십이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아이들과 친해진 그녀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항주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게다가 그녀들 역시 항주의 화려함과 다양한 물건들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있어서 아이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덕분에 남자들, 특히 아이들에게 화사를 빼앗긴 탈혼도는 노군과 장강어옹, 신의와 함께 뒤에서 걸어가야 했다.
“입 찢어지겠다. 그만 좀 웃어라. 이놈아.”
문득 노군이 탈혼도에게 말했다. 화사를 보며 미소 짓고 있던 탈혼도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의가 한마디 했다.
“노군, 너도다.”
신의는 노군을 보며 말했다.
“영매, 영매 노래를 부르더니 보기만 해도 그리 좋으냐? 아주 입이 귀 밑에 걸렸구나.”
“크흠.”
노군이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한다.
“나는.”
깡마른 표정의 장강어옹이 신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네게 아무 말도 안 하겠다.”
신의가 드물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약재를 구하러 간다며 사라지던 신의가 오늘은 일행과 함께 있었다.
“선생님.”
노군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장아가 조용히 말했다. 늘 졸던 장아도 지금은 눈이 말똥말똥하다. 장아는 반짝이는 오색 장난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 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가 보지 뭐.”
노군은 장아의 손을 잡고 휘적휘적 가게로 들어갔다.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손빈이 웃었다.
“다들 좋아하네요.”
옆에서 들린 사수연의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돌렸다. 사수연은 밝은 표정으로 손빈에게 말했다.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사수연은 손빈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뒤쳐지는 아이가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네. 그렇군요.”
손빈이 답했다.
“월아 소저는 조금 바빠 보이지만요.”
“안 바빠요.”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신경이 바짝 선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이들 숫자를 세고 있는 거예요.”
사수연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혹 빠진 아이들이 없나 해서요. 아마 지금은 아이들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일걸요?”
“아, 그렇군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꼼꼼한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숫자가 서른둘이나 되고, 게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니 당월아는 몇 번이고 다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아이들도 월아 소저를 정말 좋아해요.”
사수연이 말한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아 소저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거든요.”
사수연의 목소리엔 아련한 그리움이 깔려 있었다. 손빈은 고개를 돌려 사수연을 보았다.
“제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절 사랑한다는 걸, 제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절 아껴 주셨어요.”
사수연의 목소리는 가만히 이어졌다.
“하지만 제 기억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건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황산에서도 어머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요. 어머니는…….”
사수연의 목소리에 작은 한숨이 섞였다.
“어머니는 행복하셨을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으셨을까요?”
“네.”
한순간의 주저조차 없는 그 대답에 사수연이 손빈을 돌아본다. 타인은 결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에 감히 답을 낸 손빈의 표정은, 그러나 더없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파월삼식은.”
손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소저의 어머니를 향한 그 사람 나름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게 해 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감사의 고백 말입니다.”
사자혁은 가려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 결과가 바로 파월삼식이다.
그러므로 파월삼식은 가려를 향한 사자혁의 무뚝뚝한, 그러나 지극한 마음의 고백이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전하는 단 한 번의 고백.
“그러니 아마도 소저의 어머니께서는.”
손빈은 사수연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분명,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사수연의 눈동자에 핑 하고 눈물이 차오른다.
“그렇군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사수연이 말했다.
“그랬, 었군요.”
그 거대한 천인단애에 새겨진 파월삼식의 흔적, 그것은 바로 아버지 사자혁의 마음이었다.
아내 가려에게 보내는 무뚝뚝한, 그러나 그 무엇도 지울 수 없는 깊디깊은 연서(戀書). 그것이 바로 파월삼식이었다.
눈물을 참지 못한 사수연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손빈은 가만히 걸음을 멈추어 그녀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아이들과 북해십이비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오후의 항주 거리는 따뜻한 햇살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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