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10)
낙향문사전-310화(310/494)
제310화. 북경으로2016.09.20.
황궁에 들어갈 방법을 묻는 손빈의 말은 확실히 의외였다. 그것도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아무런 말썽 없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노군은 힐끔 아이들과 북해십이비를 살폈다. 강린과 강민을 둘러싸고 꺅꺅 즐거워하느라 여념이 없다.
“황궁엔 왜…….”
“죽이러 갈 거면 내가 갈까?”
낭랑한 화사의 목소리가 노군의 말을 끊었다. 노군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사를 바라보았다.
화사를 쳐다본 사람은 노군만이 아니어서, 화사의 목소리가 슬며시 낮아진다.
“죽이러 가는 거, 아니었어?”
“죽이면 어찌 될 것 같냐?”
진지한 표정으로 노군이 묻는다. 화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워서 벌벌 떨겠지, 뭐. 이딴 짓도 다시는 할 엄두를 못 낼 거고. 사파에선 그렇게 하면 다들 알아서 긴다는데…….”
말하던 화사가 손빈의 눈치를 보며 묻는다.
“……아냐?”
화사의 물음에 손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화사가 황실을 그저 덩치만 좀 큰 사파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황실이란, 그리고 국가란 문파나 기타 조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실 국가는 누구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난해한 집합체다.
황실의 정통성, 사대부들의 이상(理想), 그리고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통치 체재 아래 존재하게 하는 대의(大義)와 수십만 황군으로 대표되는 무력까지.
역사상 무수한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이에 대해 논하였으나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화사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매우 다양한 접근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화사가 납득할 만한 단순하고 명확한 대답이다.
잠시 생각하던 손빈은 화사에게 말했다.
“황제가 죽어도 황실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황실을 전부 죽이면 되잖아?”
“그래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손빈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까마득히 먼 핏줄을 찾아서라도 황제를 다시 세울 터이고, 조정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황실의 어림군과 수십만 황군은 물론이요, 천하 각지의 사대부들과 선비들, 심지어 평범한 상인과 농부 들까지. 말 그대로 온 천하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화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미 망했거나 곧 망할 나라라는 의미거든요.”
황제는 제국의 자존심이자 때로는 제국의 정통성 그 자체다. 황제 시해는, 설령 제아무리 나름의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천하는 맹렬하게 분노할 것이며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망조(亡兆)가 든 나라거나, 이미 없어진 나라가 아닌 한.
“그랬다면 우리가 움직일 필요도 없겠지요.”
손빈이 나지막이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화사는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생각해 봐도 지금 이 나라가 금방 망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야?”
“할 수 있는 건 있습니다.”
“그게 뭔데?”
화사의 표정이 밝아진다. 손빈이 말만 하면 당장 실행할 것 같은 기세라 손빈이 미소를 지었다.
“탈혼도 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입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아주 멀리 떠나 사는 것이지요. 북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예 서역으로 가는 방법도 있고요.”
“으음. 북해나 서역이라…….”
극단적인 가정이었지만 화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원 아이들, 아니 여기 있는 아이들도 다 같이 간다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화사가 아이들을 힐끔 바라본다. 손빈은 가만히 웃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제가 황궁에 가려는 것이니까요.”
“그래? 정말?”
손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사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됐네. 괜히 걱정했잖……. 어?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는데?”
손빈이 문제가 없다고 하자 화사는 바로 흥미를 잃었다. 벌떡 일어나서 아이들 쪽으로 가는 화사를 바라보며 노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멍청한 건지, 지혜로운 건지…….”
“바보는 아니에요.”
당월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화사가 이 말을 들으면 기뻐할지, 화를 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흠, 어쨌든.”
노군이 헛기침을 하곤 진지한 표정으로 손빈을 돌아본다.
“그거, 꼭 네가 가야 하냐?”
“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손빈은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하지만 도와주실 수 있다면…….”
“그럼 내가 가마.”
노군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뒤를 잇듯 쏟아져 나온다.
“저도 가겠어요.”
“나도요.”
“형. 나, 나!”
“황궁은 예전에 가 본 적이 있어서 좀 안다.”
사수연과 당월아, 서린의 목소리 사이로 신의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필요하면 내가 동행해도 좋다.”
손빈을 바라보는 사람은 신의만이 아니었다. 장강어옹과 탈혼도는 물론이고 오르한까지 손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늑대께서 원하신다면 이 한 목숨…….”
“아니, 괜찮습니다.”
오르한의 말에 손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원주님, 어떻습니까? 방법이 있을까요?”
손빈은 고개를 돌려 화월에게 물었다. 화월은 무언가 곰곰 생각하더니 눈을 들어 손빈을 바라본다.
“잠깐 고개를 돌려 보시겠어요? 네, 저쪽으로요.”
화월의 말에 손빈은 의아해했지만 그녀 말대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다시 절 보세요.”
손빈은 화월을 보았다. 진지한 눈빛의 원주 화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손빈을 쳐다보았다.
“흐음, 이 정도면…….”
손빈을 꼼꼼히 바라보던 화월이 미소를 짓는다.
“방법이 없지는 않겠네요.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방법요.”
“그럼 나는?”
노군이 얼른 말한다. 그러나 화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어옹께서도, 탈혼도 님도, 그리고 신의께서도요.”
“그럼 저는요?”
사수연이 묻는다. 하지만 화월은 고개를 저었다.
“소궁주께서는 다른 의미로 안 돼요. 그리고 북해의 소궁주시니 황궁에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화월의 말에 사수연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당월아 소저도 안 되고요.”
당월아가 묻기도 전에 화월이 말했다. 당월아는 입도 열어 보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럼 나는요?”
실망하는 당월아 옆에서 서린이 냉큼 묻는다. 화월은 빙긋 웃었다.
“칠현금, 배우다 말았지요?”
서린이 아차 하는 표정이 된다. 확실히 손빈과 같이 칠현금을 배우려 했지만, 결국 강민과 놀다가 끝났다.
“그럼 서린 공자님도 안 돼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화월의 말에 서린도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저기, 연주를 해야 하는 건가요?”
혁련세화가 물었다. 옆에 앉은 당운영도 궁금한 듯 화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화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연주를 못 한다면 어떻게 황궁 창음각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겠어요?”
노군은 즉각 화월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창음각에서 공연하는 예인 중 한 명으로 손빈을 들여보내려는 것이다.
“다만 황상께서 참석하실지는 잘 모르겠어요. 황상께서 개최하시는 것이긴 해도, 사실은 황실 분들을 위한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창음각 공연은,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황실 내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궁 바깥출입이 어려운 태후와 황비, 그리고 비빈과 귀인 들을 위로하기 위한 행사인 것이다.
그제야 일행은 화월의 말에 납득했다. 이들 중에서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손빈밖에 없으니까.
“저, 아까 다른 의미로 저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무언가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수연이 묻는다. 화월은 빙긋 웃었다.
“너무 아름다우시거든요.”
“네?”
사수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화월이 말을 이었다.
“창음각 공연에는 비빈과 귀인 들 외에도 황실의 다른 분들도 많이 참석하세요. 왕작을 받은 친왕이나 군왕은 물론이고, 제후들이나 왕자들도 있지요. 만일 소궁주께서 창음각에 나타나신다면 그 모든 분들이 소궁주님을 차지하려고 들 거예요.”
화월이 사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미인계를 염두에 두고 계시다면, 효과는 확실하겠네요.”
“그, 그렇지는…….”
예기치 못한 형태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사수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왜 안 돼?”
이번엔 당월아가 물었다. 화월의 답변은 간단했다.
“면사 안 벗으실 거잖아요.”
당월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빈 앞에서도 용기가 필요한데 어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면사를 벗을까? 당월아에겐 일고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황궁에 들여보내 줄 것 같나요? 아, 그러고 보니 벗으신다 해도 안 되겠네요.”
화월이 당월아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소궁주님과 똑같은 이유로요.”
당월아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평가 같은 건, 설령 그 사람이 왕작을 받은 제후라 해도 당월아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창음각 공연이라…….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긴 하다만.”
문득 신의가 말했다. 신의는 이전에 창음각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황실의 귀빈으로서 초청받아 간 것이다. 물론 그때의 신의에겐 별 관심 없는 일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던 신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남자 예인도 들어갈 수 있었던가?”
“가만, 그러고 보니…….”
노군도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황궁은 크게 공적인 업무를 보는 외조(外朝)와 황실의 생활공간인 내정(內廷)으로 나뉜다.
창음각은 그중에서도 내정에 속한 건물이다.
“그럼 빈이도 못 들어가는 거 아냐?”
내정은 기본적으로 금남의 성역이다. 의원이나 황실의 인척 등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예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연히 손빈도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칠현금을 연주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 아직 말씀 안 드렸나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화월이 말했다.
“여장하셔야 해요.”
“네?”
손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화월은 방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여장, 하셔야 해요.”
‘아.’
그제야 손빈은 화월이 아까 자신의 얼굴을 왜 그토록 꼼꼼히 살펴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방법이 없지는 않겠다’고 한 말의 의미도.
“아, 하하. 설마 그런…….”
손빈은 혹시나 하고 화월을 바라보았다. 화월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손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결코 농담이 아니다.
“크흠.”
짐짓 헛기침을 하며 노군이 얼굴을 돌린다. 아까 화월이 노군, 어옹, 탈혼도, 신의를 제외시킨 이유도 이제는 분명했다.
‘휴, 하마터면.’
노군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손빈을 위해서라지만 여장 같은 건 결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스로도 못 봐 줄 꼴일 텐데 그 모습을 하고 어찌 황궁에 들어가랴?
시선을 외면하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노군을 본 손빈의 어색한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저, 저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손빈은 도움을 바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손빈을 보는 여성들의 눈빛은 이미 화월과 똑같았다.
기대와 흥분으로 희미한 열기까지 느껴지는 반짝이는 눈동자들.
그중에서 혁련세화의 눈동자가 유독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은 그저 착각일까?
“아, 하하, 하하하.”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손빈 일행은 둘로 나누어졌다. 혁련세화와 노부인 당운영은 아이들, 그리고 북해십이비와 함께 항주에 머무르기로 했다. 오르한과 장강어옹도 함께였다.
“제가 돌아오기 전에 청원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지요?”
손빈의 당부에 혁련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염려 마세요. 그리고 이미 혁련세가에 서찰을 보냈으니 청원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항주에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원도 비우기로 했다. 만의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혁련세가의 초청이라면 아무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호연무관과 소은표국도 기꺼이 협조할 테고요.”
아무리 지방 소도시라지만 마을 하나를 텅 비우는 것은 사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혁련세가라면 가능했다.
“조금 먼, 경치 좋은 곳에서 마을 잔치를 하는 거라고 말하면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
청원에서 혁련세가의 이름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호연무관의 딸이자 혁련세가의 양녀가 된 혁련세화는 마을의 자랑이자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이라면, 물론 여전히 일부 무리는 있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감사합니다.”
손빈은 진심으로 혁련세화에게 감사했다.
자신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이미 뼛속 깊이 실감한 바다. 설령 과하다 하더라도 만의 하나를 대비해야만 했다.
“천만에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걸요.”
혁련세화는 방긋 웃었다. 그러다 슬쩍 경희 군주 일행을 쳐다보았다.
“저분들은, 괜찮겠지요?”
경희 군주 일행도 항주 예원에 남는다. 손빈은 대답했다.
“오르한 님과 어옹께서 계시니 괜찮을 겁니다.”
경희 군주는 이미 모든 저항을 포기한 상태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오르한과 장강어옹, 게다가 북해십이비까지 있으니 염려할 것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예원의 방비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 괜찮을 것 같네요.”
혁련세화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웃었다.
“잘 다녀오세요.”
손빈은 북경으로 가야 했다. 일단 창음각의 공연을 주관하는 청명정이 북경에 있다. 물론 황궁도 북경에 있고.
함께 가는 사람은 노군과 서린, 사수연, 당월아, 그리고 화사와 탈혼도로 정해졌다.
신의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유사시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한 이유였다.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혁련세화가 정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뭘 보고 싶었다는 것인지 손빈은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혁련세화도 이대로 물러나진 않는다.
“손 공자님이 예쁘게 단장하시면 제법 어울릴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크흠.”
손빈은 짐짓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 못 들은 척 넘어가고 싶었지만 뒤에서 문득 당월아가 말했다.
“그림, 그려 올까?”
혁련세화가 단박에 반색을 한다.
“그릴 줄 알아요?”
당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기억하는 건 자신 있어.”
그림은 실력 있는 화가에게 시키면 된다. 당월아의 기억만 명확하다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기, 그런 건 제가 좀…….”
손빈이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이미 혁련세화와 당월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벌써 그림의 크기나 바람직한 색조, 구도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손빈은 당월아에게 여장한 모습을 절대 보여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왜곡될지도 모르고…….’
기억이란 정확한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쉽게 고쳐지고 덧씌워진다. 과장이나 미화, 혹은 왜곡은 물론이다.
이러다 잘못하면 손빈 자신이 꽃을 들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발그레한 뺨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인도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윽.’
생각만으로도 손빈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게다가 당월아는 은근히 손빈의 말을 안 듣는 면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제일 낫다.
“언제든 출발하실 수 있어요.”
예원의 원주 화월이 말했다. 손빈 일행이 북경 청명정으로 가기 위한 준비는 그녀가 이미 끝내 놓았다.
그러나 손빈은 화월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원주님, 괜찮겠습니까? 만일 청명정이…….”
손빈은 말을 흐렸다.
최악의 경우, 청명정이 황실에 넘어갔을 경우 또한 생각해야 한다고 손빈은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예원이 외사와 모든 관계를 끊고 당분간 숨어 있을 것도 말이다.
“비연은 제 오랜 친구입니다.”
화월이 나지막이 말했다. 비연은 청명정을 주관하는 예원의 부원주다. 손빈 역시 예전 예원 십이소주의 회합에서 그녀, 비연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비연은 구중궁궐에서나 볼 법한 고색창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꽤나 도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풍월루를 주관하는 부원주 효설의 어깨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옷차림과 꽤나 대비가 되기도 했다.
“만일 비연이 예원을, 버렸다면…….”
화월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청명정의 비연과 화월, 그리고 풍월루의 효설은 예원에서 함께 자라난, 말 그대로 오랜 친구다.
비록 원주와 부원주로 갈라지며 간극이 생겨나긴 했지만 친구의 본심만은 예전 그대로일 것이라고 화월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때로 배신당한다. 매사에 거리낌 없던 화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그때는…….”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부드러운 손빈의 목소리가 화월의 말을 끊었다. 화월은 고개를 들어 손빈을 바라보았다. 손빈은 화월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예원의 일에 간섭함이 옳지 않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애하는 예인께서 이토록 슬퍼하시는 일이라면, 조금은 나서고 싶어지는군요.”
화월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살짝 목이 메었지만 대답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부탁드리겠어요.”
떨리는 음성으로 화월은 말했다. 비연에 대한 판단과 그 처분을 손빈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아까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럼 갈까요?”
손빈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들하고 작별 인사를 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까요.”
어젯밤 간신히 아이들을 설득하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사라졌다간 원성을 감당 못 할 것이다.
손빈과 일행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화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꼭 모아 쥔 그녀의 두 손만이, 그녀의 안타까운 진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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