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17)
낙향문사전-317화(317/494)
제317화. 황궁 심처(深處)2016.10.15.
창음각의 공연은 중지되었다. 공연을 지켜보던 황실의 귀인들은 금의위의 보호 아래 즉시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북방 경계의 상황이 다급해진 것 아니냐고 걱정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 조짐도 없었으니 별일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실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의위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고, 내관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설마 황궁에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인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급박한 상황이라면, 황제 한 사람의 안전을 위해 황실 전부를 버리는 일조차 비일비재했던 것을 이제까지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실의 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이 일이, 심지어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저기…….”
큰 눈망울을 가진 아가씨가 불안한 눈으로 말했다. 청명정 소속의 예인이었다.
“우리, 괜찮겠지?”
그러나 방 안에 있는 예인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들 역시 상황을 모르고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비상 신호가 울리자 예인들 역시 강제로 이동해야 했다. 본래라면 공연이 끝나고 청명정으로 돌아갔겠지만, 황궁의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아무도 통과할 수 없었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금의위의 지시에 따라 예인들은 황궁의 한 궁으로 옮겼다. 궁이라 해도 조금 큰 저택 정도에 불과한 데다가 평소에 쓰지 않던 곳이어서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낡고 불편한 곳에 강제로 옮겨진 예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일 큰 방에 전부 모였다.
침상이며 의자 그리고 적당한 장식 위에 앉은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뛰어난 예인이라지만 아직 연소한 아가씨들에 불과하다. 어떤 아가씨는 무섭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다독이며 서로의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말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예인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말을 꺼낸 아가씨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까 그 연주, 정말 끝내주지 않았……. 왜, 왜들 그래?”
그제야 자신을 향한 시선을 깨달은 아가씨가 당황한 표정이 된다. 옆에 있던 친구는 톡 쏘듯 대답했다.
“으이구, 지금 그런 얘기나 할 때야?”
하지만 핀잔을 날렸던 아가씨도 곧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대단하긴 했지. 그건 정말이지……. 대단했어.”
그녀의 말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예인들의 공통된 감상이었다. 아가씨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다른 사람 연주 들으면서 울어 본 게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요즘은 그냥 비교만 하게 되거든. 쟤는 나보다 잘하네, 저건 저렇게 연주하면 안 되는데, 뭐 이런 거 말이야.”
“맞아, 맞아. 대부분은 그냥 그런가 보다 싶고 말이야. 예전 같은 그런 감동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오늘은 다르더라.”
예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들은 살짝 어깨를 떨거나 혹은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는 본능 탓일까?
아가씨들은 순식간에 조금 전의 연주에 대해 열을 올리며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예인들로선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걔는 누구야?”
누군가의 말에 다시금 조용해진다. 그건 이곳에 있는 모두의 궁금증이었다.
“손려라고 해.”
대답은 다른 예인 아가씨가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말을 꺼낸 아가씨는 사뭇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처음 온 애야. 아까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얘기 좀 해봤는데, 얌전하고 괜찮은 애더라고.”
“손려?”
“처음 들어. 좀 서툴러 보이던데, 청명정에 온 지 얼마 안 됐나?”
“혹시 소주님들은 알지 않을까?”
예인들은 즉시 시끌벅적 이야기를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야 할 당연한 질문이 나온 건 잠시 후였다.
“그런데 걔, 지금 어디 있어?”
아가씨들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손려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왜 없지?”
“어디 갔어?”
“설마 길을 잃은 건…….”
“뭐?”
손려의 이름을 알고 있던 예인 아가씨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그, 그럼 큰일이잖아? 어디 잘못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이곳은 황궁이다. 평소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보통 큰일이 아닌데, 하물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불문곡직하고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아가씨들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걱정이 쏟아져 나온다.
“혹시 손 씻으러 간 거 아냐?”
“아냐. 내가 방금 갔다 왔는데 아무도 없었어.”
“어떡하지? 지, 지금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그건 안 돼. 나가지도 못하잖아.”
“그럼 어떡해?”
달칵.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예인들은 즉시 입을 다물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바로 청명정의 비연이었다.
“아, 비연 님.”
그녀를 발견한 예인들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가 바로 울상이 된다.
“비연 님, 비연 님! 큰일 났어요.”
“어떡해요, 비연 님.”
“비연 님!”
영문을 모르게 된 사람은 비연이다. 갑작스러운 예인들의 반응에 비연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조용히.”
그건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예인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다.
“여긴 황궁이야. 다들 조용히 해.”
차가운 비연의 목소리에 모두가 숙연해진다. 비연은 고개 숙인 예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비연 님. 손려가……. 우리 손려가 없어요.”
한 예인이 울먹이며 말한다. 비연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언제 봤다고 갑자기 ‘우리 손려’인가?
다른 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비연으로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다.
“정말이에요. 아무 데도 없어요. 손 씻으러 간 것도 아니고요.”
“어떡해요. 걔는 여기 처음인데 혹시 길이라도 잃었으면 큰일…….”
“조용.”
다시 시끄러워지려는 아가씨들을 비연이 진정시켰다.
‘정말이지 이게 무슨…….’
비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런 연주를 듣고 나면 누구라도 그녀, 손려에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게다가 손려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데다 누가 보기에도 서툴러서 은근히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같은 청명정의 예인들이라면 감싸 주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리라.
“손려는 괜찮아.”
나지막한 비연의 말에 아가씨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정말요?”
“아, 비연 님이랑 같이 있었구나.”
“걔는 지금 어디 있어요?”
긴장이 풀린 예인들은 금방 참새 떼처럼 지저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엄한 비연의 목소리에 예인들은 얼른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세히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인지라, 비연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손려는 먼저 나갔어.”
대번에 예인 아가씨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먼저요? 언제요?”
“어떻게 나갔어요? 지금 난리 났잖아요.”
“혼자 나갔어요? 길 안대요?”
쏟아지는 아가씨들의 질문에 비연은 조용히 답했다.
“연주가 끝난 후에…….”
아가씨들은 얼른 입을 닫고 비연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손려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황실 분들의 요청이 빗발쳤어.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을 정도로.”
요청이 빗발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비상 신호 덕분에 대부분은 무산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황자들의 요청은 제법 심각했다. 나중에라도 만나고 싶다는 오황자의 부탁은 순수한 동경에 가까웠지만 자신들의 궁으로 오라는 삼황자나 사황자의 전언은 대단히 고압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곤란한 것은 바로 이황자였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것은 둘째치고, 그는 내관을 보내는 대신 친히 비연을 찾아왔던 것이다. 지금이 비상 상황이라는 것조차 이황자의 염두에는 없는 듯했다.
“그래서 손려를 먼저 내보낼 수밖에 없었어. 평소 잘 아는 내관들 몇 분이 특별히 힘을 써 주신 덕분이야. 너희에겐 미안하지만.”
예인 아가씨들은 비연의 설명에 납득했다.
황실 귀인들의 요청이라지만 결국 저들에게 예인은 한 송이 꽃에 불과하다. 아무 때나 마음 내키면 꺾고, 언제든 흥미가 다하면 버릴 수 있는.
비연은 그런 황실의 권력으로부터 예인들을, 심지어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보호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비연이 손려를 내보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물론 지금이 보통 상황은 아니지만, 비연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아는 아가씨도 아무도 없었지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는 괜찮아요.”
예인 아가씨 한 명이 얼른 말했다.
“그럼요. 정말 잘됐네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맞아요. 진짜 다행이에요.”
예인 아가씨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비연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려, 아니 손빈은 아직 황궁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예인들보다 먼저 황궁을 벗어나긴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 손려가 연주한 곡, 뭐였어?”
걱정이 사라지자 다시 여유를 찾은 듯, 어떤 아가씨가 문득 물었다.
“몰라. 처음 듣는 곡이던데?”
황궁 제례악은 전통과 예법을 철저하게 지킨다. 그 외에도 황궁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곡은 엄격한 예법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반면 창음각에서 연주되는 곡은 비교적 자유롭다. 심지어 통속극이 공연되는 경우도 있는데, 어디까지나 높은 분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다.
“우리 손려가 지은 곡일까?”
“아니야.”
대답은 비연이 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예인들에게 비연은 나지막이 말했다.
“항주 예원에 있는 한 연습생이 지은 곡이라더군. 아직 곡의 이름도 없다고 해.”
낮에 손빈의 연주를 미리 들었을 때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고금곡으로 바꿀까 했지만, 곡이 손빈, 아니 손려의 모습과 정말 잘 어울려서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손빈도 강린의 곡을 전부 기억해 냈고.
“연습생이?”
“와, 이거 무서운 후배인데?”
예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까 그거, 연주해 볼까?”
누군가 문득 말했다. 예인들에겐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악기도 다 놔두고 왔잖아.”
예인들이 가져온 악기는 전부 창음각에 있다. 아무리 작은 소(簫)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당연히 숨겨 왔지.”
예인 아가씨가 웃으며 치마를 펄럭이자 안에서 작은 소가 나왔다.
“저기, 내가 시를 붙여 봤는데 어때?”
다른 아가씨가 즉석에서 시를 붙여 곡조를 흥얼거렸다. 다들 예인들이라 곡은 이미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다.
“아아, 꽃처럼 웃음 짓던 그 사람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첫사랑의 두근거림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 시는 그 곡조와 정말로 잘 어울렸다.
예인들은 작은 소의 부드러운 음률에 맞춰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크게 노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저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예인들의 눈동자는 다시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아아, 온 동네 가득하던 고향의 복사꽃은, 오늘도 그곳에 피어 있을까?”
황궁 깊은 곳, 낡고 커다란 별궁에서 예인들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비상 신호가 울리고 공연이 중지된 직후, 황실 귀인들과 청명정 예인들은 금의위의 호위와 감시 속에 급히 창음각을 떠났다.
그러나 창음각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다름 아닌 이황자였다.
단호한 이황자의 뜻 앞에서는 금의위들조차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잠시라는 조건을 달아, 금의위는 창음각을 호위하며 이황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황자님의 뜻이 진정 그러하시다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창음각 안에서 비연은 조용히 대답했다. 공연을 위해 열어 두었던 사방의 창문 역시 이미 닫혀 있었다.
“제가 그 아이의 의향을 물어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는지요?”
이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면 되네. 하지만 내가 진심이라는 것도 분명히 전해 주게나.”
비연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이황자의 뜻을 받들었다. 차라리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적당히 넘겨 버렸을 텐데, 이렇게 고개까지 숙이며 진심으로 부탁하면 오히려 더 난감하다.
게다가 상대는 이황자 아닌가?
비연이 나가고 난 후 이황자는 뒷짐을 지고 서서 묵묵히 결과를 기다렸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심장은 숨길 수 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성년식을 치른 이후 이토록 가슴이 뛴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사락.
문득 들려온 인기척에 이황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은 그가 기대하지도, 각오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너는, 누구냐?”
이황자가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들어온 사람은 온화한 분위기의 한 젊은 청년이었다. 단정하고 제법 고급스러운 문사 차림을 한 젊은 청년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청년은 결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적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 젊은 청년은 지금 황궁 금의위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이 자리에 선 것이니까.
슥.
문사 차림의 청년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실 예법은 아니지만 대단히 정중한 인사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본의는 아니나 잠시 무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황자를 바라보는 문사 청년의 눈동자는 더없이 깊고 청명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황자 역시 무엇인가를 눈치챘다.
그의 청명한 눈동자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소리를 쳐서 금의위를 부르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나 이황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문사 차림의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이황자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이황자는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빛나는 이황자의 눈동자가 그의 기백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앉으시게.”
이황자는 연주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창음각의 의자를 청년에게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주한 다른 의자에 앉는다.
사박.
두 사람이 텅 빈 창음각에서 마주앉았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문사 청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이황자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번천지계’에 대한 설명이 끝났을 때, 이황자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황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군.”
‘번천지계’는 경우에 따라 내전 상황까지 각오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이런 일을 조정의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그것도 은밀히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설령 정치적으로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 황제라 해도 반발이 심할 것이고, 만일 다음 황제에게로 문제가 넘어가게 되면 조정이 온통 혼란에 빠질 정도의 일이다.
“헌데 이 일을 내게 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황자가 문득 말했다.
“혹시 이 일을 막아 달라는 것이라면…….”
현재 이황자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은밀히 소문을 흘려 신하들의 여론을 형성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효과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용한 어조로 청년이 말했다.
“이 일은 제 방식대로 대처할 것입니다.”
“자네의 방식?”
문사 차림의 청년은 미소 지었다.
“정치적 해법이지요.”
이황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청년이 말하는 ‘정치적 해법’이란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내게 이런 말을…….”
“알고 계셨으면 해서입니다.”
문사 차림의 청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 때문에, 보살펴야 하는 자신의 백성을 적대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본래 이황자에게 이 일을 알릴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이 일이, 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임을 청년은 알아차렸다.
미래의 절대 권력자에게, 아무런 선입견도 이해관계도 없이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
잠시 침묵하던 이황자가 문득 말했다.
“한 가지, 듣고 싶은 것이 있네.”
강렬한 눈빛으로 이황자는 물었다.
“자네는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그것은 이황자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물론입니다.”
문사 차림의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주저함이나 머뭇거림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터가 무너지면 그 무엇도 서지 못합니다. 저 역시, 하늘의 뜻을 받아 만백성을 보살피는 황실의 그늘에 기대어 사는 필부에 불과합니다.”
문사 청년의 말이 진심임을 이황자는 알 수 있었다.
“고맙네.”
이황자 역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문사 차림의 청년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문사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도 좋다는 허락은 아직 없었지만 이황자도, 청년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 잠깐.”
돌아서려는 청년을 이황자가 불렀다. 이황자는 천천히 일어서서 문사 차림의 청년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 손려는, 자네의 육친인가?”
문사 차림의 청년이 움찔하는 것은 이황자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설마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애초에 이황자가 이 청년의 말을 듣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청년의 눈빛은, 칠현금을 연주하던 그녀, 손려의 눈빛과 쏙 빼닮아 있었으니까.
뿐인가? 은연중에 풍겨나는 분위기하며 어색하게 웃는 모습마저 그녀와 비슷하다.
“그녀를 내게 줄 수 없겠나?”
그야말로 진심을 담아 이황자는 말했다.
“절대 한순간의 욕심이 아닐세. 맹세컨대 내 결코 그녀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죽는 날까지 항상 소중히 아껴 주겠네.”
문사 청년이 다시 한 번 움찔했지만, 이황자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사뭇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크흠.”
문사 차림의 청년은 헛기침을 했다. 잠시 침묵하던 청년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살짝 어깨를 떨고 나서 청년은 말을 이었다.
“황자님과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황자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이미 각오하고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닮은, 감탄할 만한 기백과 청명한 눈동자를 지닌 이 청년과 이야기하며 이황자는 직감했다.
그녀, 손려는 황실이나 권력 따위와는 무관한, 마치 속세를 벗어난 신선들과도 같은 세계에 속한 여인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청년의 말은 이황자의 직감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은 단지 잠깐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마음에 둔 정인이 있습니다.”
정인(情人). 이황자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택해 준다면.”
눈을 뜬 이황자는 문사 차림의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반드시 그녀를 황후로 만들어 주겠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으로 말일세.”
그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선언이었다.
만일 이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황자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황자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진심을 보인 셈이다.
“쿨럭.”
그러나 이 대담하고 진심어린 선언을 듣는 문사 청년은 갑자기 기침을 했다. 이황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안 되겠는가?”
“거절합니다.”
일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청년의 눈빛 역시 단호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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