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22)
낙향문사전-322화(322/494)
제322화. 이름 없는 부마도위2016.11.01.
태감은 황제의 개인 집무실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숙인 그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집무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태감은 즉시 눈을 뜨고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개인 집무실에는 황제뿐이었다. 태감은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부르셨습니까?”
황제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갔네.”
태감은 묵묵히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 어떤 중대사라도 길게 고민하지 않던 황제가 지금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순왕에게 자식이 있던가?”
문득 황제가 물었다.
순왕은 황제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친왕(親王) 중 한 명이다. 이곳 북경에 있는 대저택, 왕부(王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들은 없으며 딸이 둘 있습니다.”
태감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황실 권력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럼 경희 군주를 순왕의 양녀로 들이고 공주의 작위를 내리게. 군주여서야 상대와 격이 맞지 않을 테니.”
의아한 기색이 태감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작위를 받은 경희 공주는.”
덜컥.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에 수놓은 금빛 용무늬가 불빛 속에 일렁인다.
“북방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하게. 이 정도면 그 아이가 공주의 작위를 받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
북방으로 보냈다는 것은 곧 천하의 안위를 위해 희생했다는 뜻이다. 누가 보더라도 친왕의 양녀가 되어 공주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부마도위는 누구라 기록할까요?”
공주의 배필이 부마도위다. 더없이 고귀한 작위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필요한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황제가 반문한다. 태감은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누가 공주의 배필이 될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공주를 북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북방의 긴장이 해소되고 나면, 그 공주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는 자조차 없으리라.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기록될 부마도위의 이름은 무명(無名)이다.
형식적인, 그리고 북방 이민족이 분명한 부마도위의 이름 따위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테니까.
경희 군주 역시 마찬가지다.
군주의 작위를 가졌으나 공식적인 관직은 없다. 그러므로 그녀의 얼굴을 아는 대신도 거의 없고, 어디까지나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황실의 사람들도 경희 군주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복마전 같은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 보면, 더 이상 상관없는 그녀에 대해서는 곧 잊게 되리라.
“북방에 전령을 보내 당분간 경계 태세로 상황을 지켜보라 전하게. 더 이상 저들을 압박하거나 회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전하고.”
태감은 깊이 허리를 숙여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이로써 북방 경계의 긴장은 사실상 해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 그리고.”
황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소하의 목을 베게. 그와 깊이 연관된 자들도 모두. 그러면 적어도 경희, 그 아이를 과도히 놀려 준 것에 대한 사과 정도는 되겠지.”
단지 경희 군주의 신뢰를 저버리고 황제에게 붙었다 해서 소하를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무제의 길을 걷는 자’와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었으니 외사를 적대했던 ‘번천지계’를 주도한 자들은, 소하를 포함하여 이제 황제에겐 걸림돌일 뿐이다.
후환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하라는 숨은 의도를 태감은 정확히 파악했다.
“알겠습니다.”
태감은 다시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이제 ‘번천지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될 터이다.
대수롭지 않게 몇 사람의 생사를 결정한 황제는 옷깃을 여미고는 몸을 돌렸다.
“이만 자겠네.”
잠이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손빈이 한 말이 아직도 그의 마음에 작은 불을 지펴 놓고 있었으니까.
“화탄은 어떻게 할까요?”
태감이 물었다. 황제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가볍게 손을 저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모두 거두라는 의미다.
이 침전의 곳곳에는 화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단번에 이 침전을 날려 버릴 정도의 숫자가 말이다.
황제 자신의 침전에 화탄을 설치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노년의 황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시했다.
태감은 황제의 뒷모습을 향해 예를 올리려 했다. 침실로 발길을 걸어가던 황제가 문득 발을 멈추지만 않았다면.
“그곳이, 청원이라 했던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황제가 묻는다.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태감은 황제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렸다.
“네, 그렇습니다.”
“청원이라…….”
어둠 속에서 잠시 중얼거리던 황제가 말했다.
“멀군.”
황제는 몸을 돌려 다시 침실로 향했다. 태감은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
*
*
황궁의 정문은 남쪽의 오문(午門)이다. 오문 위에 세워진 붉은 누각 앞에서, 금의위 위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칭.
작은 쇳소리가 위사의 귓가를 스쳤다. 금의위 위사는 즉시 몸을 돌리며 창을 겨누었다.
“누구냐!”
그 목소리에 좌우에 있던 다른 위사들이 마찬가지로 반응했다. 날카로운 창이 순식간에 주위를 겨눈다.
그러나 정작 수상한 자는 없었다. 사방은 여전히 환한 불빛으로 가득할 뿐이다.
“무슨 일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교위가 묻는다. 위사는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위는 즉시 성벽 아래, 오문을 지키는 금의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수상한 그림자는 없고 금의위들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개를 든 교위는 오문 좌우에 서 있는 다른 누각들을 살폈다. 역시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소리였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 교위에게 위사가 답했다.
“쇳소리 같았습니다만…….”
후우욱.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건 금의위들마저 눈을 찌푸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깃발이 펄럭이고 횃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돌풍은 갑자기 잦아들었다.
“쯧.”
손으로 바람을 막던 교위는 혀를 찼다.
이곳은 높은 성벽과 좌우로 막힌 담 때문에 가끔씩 이런 돌풍이 일어나곤 한다.
위사가 들었다는 쇳소리 역시 이런 바람 탓에 난 것일 터이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검을 거두며 교위가 말했다.
금의위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경계를 계속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던 위사도 아무 말 없이 이전처럼 경계 태세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슥.
교위는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횃불에 환하게 빛나는 누각의 모습 탓인지 오히려 밤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탁탁탁.
갑작스러운 발소리가 교위의 주의를 끌었다. 교위가 고개를 돌리자 금의위 위사 하나가 급히 뛰어 올라와 군례를 올렸다.
“통상 경계로 돌아가라는 지휘사님의 명입니다.”
“그래?”
그건 비상 상황이 해소되었다는 뜻이다. 교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금의위들 역시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알았다.”
교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경계 태세를 재배치했다.
사방을 대낮같이 밝히던 횃불이 내려가고, 금의위 일부가 성벽을 떠났다.
사방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고, 그렇게 황궁은 다시 밤의 어둠 속에 조용히 잠들기 시작했다.
∴
파라라락.
바람 소리와 함께 황궁의 거대한 정문, 오문이 손빈의 발 아래로 지나간다. 검희의 팔에 안긴, 정확히 말하자면 반쯤 들려 나가는 손빈은 그 거대한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문이라…….’
오문은 황제가 출입하는 황성의 정문이다. 좌우를 둘러싼 붉은 성벽 위에 있는 누각들을 합쳐 오봉루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황제 외에 오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과거에서 최고의 자리인 장원, 방안, 탐화를 차지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문은, 과거 시험에 임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영예로운 특권이자 상징인 것이다.
‘아차!’
손빈은 문득 황제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간언을 하느라 그만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회시의 채점관을 감찰하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회시 감독관의 부패를 고발할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린 손빈은 혀를 찼다.
“왜?”
문득 검희가 묻는다.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지금 와서 다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다. 손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끝난 일입니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제 다시 황성으로 돌아올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
“그래?”
검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른쪽 누각의 지붕을 가볍게 박차고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후우우욱.
‘우어억.’
그건 정말이지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다. 아까는 잘 몰랐는데, 눈앞에서 그 거대한 천안문이 아래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다.
천하 권력의 정점이며, 하늘 아래 모든 부(富)가 모여드는 붉은빛의 금지된 성[紫禁城].
그 성으로 들어가는 천안문이 지금 손빈의 눈 아래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파라라락.
거친 바람 속에서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천안문 너머로 보이는, 동서로 뻗은 천가(天街)와 남북을 잇는 어도(御道).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넓은 길이 손빈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자금성과 천안문을 등져야만 볼 수 있는, 끝없이 뻗은 크고도 넓은 길[大道]. 그 길을 보며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끝없는 밤하늘과 아득한 땅이, 그리고 보석을 뿌려 놓은 것 같은 북경의 야경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
*
*
손빈 일행은 청명정에서 북경 외곽의 예원으로 옮겼다.
즉시 북경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정치하는 것들은 본래 믿을 수 없으니 어찌 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노군의 주장 때문이었다. 신의 역시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청명정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많았다.
손빈도 개인적으로 어서 청명정을 떠나고 싶어 했기에, 그날 밤 바로 북경 외곽의 예원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이 북경의 예원인가요?”
아미파의 청혜 사태가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청혜 사태는 황산에서 자혜문을 이끌고 먼저 북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혜 사태를 보며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넌 왜 왔냐?”
“얼마 전 황성 부근에서 괴이한 일이 있었더군요.”
청혜 사태는 노군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북경 시내에 있는 문파들이 때아닌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혜문도 당분간은 문을 닫기로 했지요.”
괴사의 배후가 무림의 고수일 것이라는 의혹은 당연했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과거 황족의 유혼이라거나, 혹은 동창의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떠돌았지만 말이다.
덕분에 북경 시내에 있던 무관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제자들이 떠나고 문을 닫는 곳들도 속출했는데, 아미파의 자혜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노군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셨겠지요?”
“크흠.”
노군은 헛기침을 하며 청혜 사태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청혜 사태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분간 문을 닫으려 했으니까요.”
문주인 경희 군주가 없으니 불가피한 일이다. 명분이 생겼으니 청혜 사태나 아미파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청혜 사태는 고개를 돌려 손빈을 향했다.
“손 공자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손빈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청혜 사태는 정중하게 합장하며 예를 표한다.
“아미파의 제자로서 사매의 일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폐가 되겠으나, 당분간 제가 사매를 돌보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청혜 사태가 말하는 사매란 바로 경희 군주다. 손빈은 일행을 슬쩍 돌아보았다.
노군이 어깨를 으쓱하고 사수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린이나 탈혼도, 그리고 특히 화사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차와 함께 나온 다과를 먹느라 바쁘다.
“그렇게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당분간 폐를 끼치겠습니다.”
청혜 사태는 손빈에게 예를 표했다. 손빈이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실례합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곳 북경 예원의 소주, 가연이었다. 이전 항주 회합에서 한 번 지나가듯 본 예인이다.
“아, 어서 와!”
화사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키가 큰 가연이 빙긋 웃었다.
“불편한 건 없어요?”
“응, 괜찮아.”
가연의 태도는 사뭇 털털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화사의 마음에 들었는지 두 사람은 제법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청명정에서 서찰이 왔어요.”
품에서 가연이 서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항주 예원에서 온 것도요.”
“정말?”
화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얼른 서찰 둘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 당월아에게 건넨다.
“빨리 읽어 봐. 어서.”
재촉하는 화사를 당월아가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난 바빠.”
한 손에 가늘고 긴 붓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책자를 든 채 당월아가 답했다.
요 며칠간 당월아는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손빈으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슬쩍 살펴본 바로는 대강 형태만 그려놓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실 가슴이 덜컹했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되었다.
당월아가 그린 사람 모습이란 것이, 얼굴 대신 타원을 대강 그려놓은 정도에다가 형태 또한 뭐가 뭔지 알아보지 못할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몇 년간은, 아니 어쩌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손빈은 생각했다.
“제가 읽겠습니다.”
손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사에게 말했다.
“아, 그래?”
화사는 손빈에게 서찰을 건넸다. 생각해 보면 본래 손빈 앞으로 온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저는 차와 다과를 좀 더 가져올게요.”
가연은 그렇게 말하며 물러났다. 화사가 고맙다며 손을 젓는 사이, 손빈은 서찰을 열었다.
첫 번째는 청명정의 비연이 보낸 것이었다.
“황실에서 북방 경계의 통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단아하고 정확한 비연의 글씨를 눈으로 따라가며 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역과 통행도 재개되었고, 국경의 경계도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군요.”
물론 백 일이나 이어진다는 북방 이민족들의 사냥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황군 역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든지 출전 태세를 갖춘 상태다.
하지만 치솟던 긴장은 확실히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이 징계를 받았군요.”
손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용을 살폈다.
황성 주변에서 일어났던 괴이한 일은 그저 단순한 괴사로 치부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동창과 금의위가 책임을 면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황성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공(功)과, 괴이쩍은 일들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과(過)를 고려하여 그들은 몇 달간 녹봉이 삭감되는 징계를 받았다.
“그래? 살살 쳤으니까 크게 다치진 않았겠지만…….”
화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부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관리도 못할 짓이네. 다치고 징계당하고……. 좀 불쌍한데?”
그들을 불쌍하게 만든 장본인인 화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빈은 다음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황실에서……. 커험.”
손빈은 헛기침을 했다. 서찰엔 황실의 귀인들이 ’손려’를 찾고 있다는 것과, 청명정의 예인들도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치장을 도와준 소주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서, 손려가 실은 남자였다느니, 그게 아니라 남자가 되고 싶어서 평소엔 남장을 하고 다닌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고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손려에게 남자가 있어서 혼인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손려를 꼬여 낸 남자에 대한 성토와, 행복하게 잘 살라는 축하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왜 그래? 목이 막혀? 차 줄까?”
화사의 말에 손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황실에서……. 크흠, 경희 군주에게 공주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당월아의 시선을 짐짓 외면하며 손빈은 얼른 다음 내용으로 건너갔다.
경희 군주의 이름에 화사의 인상이 구겨지는데, 손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용을 살폈다.
“역시 북방의 이민족에게 보낸 것으로 했군요. 그리고 부마……. 크어험. 커험.”
손빈은 다시금 기침을 했다. 그러곤 얼른 화사에게 말했다.
“차 좀 주시겠습니까?”
“응, 여기.”
화사가 차를 건넨다. 손빈은 차를 마시며 사수연과 당월아의 시선을 피했다.
“근데 말이야.”
차를 마시는 손빈을 보며 화사가 말했다.
“그년이랑 혼인할 거야?”
손빈은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반쯤은 뿜었다.
“네?”
차가 입으로 흘러나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화사는 놀라는 손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경희 군주 말이야. 뭐, 난 맘에 안 들지만 굳이 취향이라면야…….”
“아닙니다!”
손빈은 얼른 소리쳤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진정하십시오, 수연 소저. 월아 소저도요!”
치솟아 오르던 당월아의 면사가 천천히 가라앉고, 서리가 번져 가던 사수연의 찻잔이 멈춘다.
그 와중에 분위기도 모르는 청혜 사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공자께서 강호 무림의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에 오신 것으로 알았습니다만…….”
청혜 사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영웅호색이라 하나 이런 식으로 사매를 취하시는 건 좀…….”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대로 있다간 공사를 구분 못 하고 기회를 틈타 여자나 탐내는 한량이 되는 건 물론이고, 졸지에 원하지도 않은 유부남이 될 판이다.
“어떻게, 아니 누가 그러던가요?”
최대한 침착하게 손빈이 물었다. 화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얼음덩이가. 어젯밤에 비무 했거든. 요즘 좀 열심히해야 할 것 같아서……. 아, 멀리 나가서 했으니까 걱정 마.”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설마 검희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검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다.
“그건, 그저, 명분입니다.”
진지하게 화사를 바라보며 손빈은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했다.
사실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지금도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인 사수연이나 당월아의 시선은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다.
“정치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경희 공주님과, 크흠, 혼인하겠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정말?”
화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얼음덩이는…….”
“저는 분명히 ‘그녀를 제게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한 글자도 틀림이 없도록 손빈은 말했다. 여기서 대강 얼버무렸다간 후환이 더 두렵다.
“그건 혼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희 군주의 신변을 제가 맡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황실과 외사가 화친을 했다는 상징 같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금 다르겠지만, 어차피 큰 틀에선 마찬가지다.
“아, 상징……. 그러니까 인질 같은 거?”
화사의 말에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비슷합니다.”
사실 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손빈의 살길이었다.
“그런 거구나. 난 또…….”
화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날카롭던 사수연과 당월아의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손빈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희 소저는 이런 일을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오해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검희는 세상일을 잘 모른다. 그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어서 분위기는 다시 조금 전의 편안함을 되찾았다.
손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이곳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적이 될 뻔한 위기를, 어쨌든 간신히 넘긴 듯했다.
“수고했네.”
화사가 웃으며 손빈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 수고했다는 칭찬이었지만, 손빈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렇게 대답하며 손빈은 노군을 보았다.
노군은 이미 알고 있다. 황실에 들어가기 직전, 손빈과 함께 논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노군이 정작 여기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노군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노군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그 살벌한 기세 속에 발을 들일 용기는 노군에게도 없다. 어설프게 자신이 나서느니 손빈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홀짝.
차를 마시며 노군이 딴청을 부린다. 신의는 아예 처음부터 모른 척 묵묵부답이다.
그 모습을 보며 손빈은 생각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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