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24)
낙향문사전-324화(324/494)
제324화. 영웅불후(英雄不朽)2016.11.08.
손빈 일행은 아이들과 함께 청원으로 돌아왔다.
멀리 청원이 보이자 아이들은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아이들은 그 무엇보다 보고 싶던 모습을 발견했다.
“아빠!”
“엄마!”
가족들이 마을 입구에 마중 나와 있었다. 마차가 서자 아이들은 전력으로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어이구, 내 새끼.”
가족들은 아이들을 와락 안아 주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다던 말도 무색하게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른들도 아이들도 서로 부둥켜안고는 금방 눈물과 웃음이 범벅이 되어 버린다.
“그래, 이래야지.”
노군도 눈물 어린 눈동자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래야 되는 법이야.”
그 모습을 보며 손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숙부와 숙모께도 인사를 드렸다.
잠시 후, 아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손을 잡은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손빈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손빈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화사는 눈물을 훌쩍이기까지 했다.
“우리도 가요.”
사수연의 말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서원으로 돌아왔다.
서원에는 뜻밖에도 전대 패검 혁련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빈의 인사에 긴 수염을 기른 전대 패검 혁련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아무도 없는 서원에서 무슨 청승이야?”
노군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전대 패검은 짧게 답했다.
“아무도 없어서.”
“응? 그게 뭔 소리…….”
전대 패검 혁련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마치 정원 한복판에 기둥이라도 세워진 듯하다.
혁련세화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혁련공의 양녀다. 혁련위는 가문의 어른이자 그녀에게 큰아버지가 된다.
“수고했다.”
짧은 말이지만 전대 패검 혁련위에겐 충분히 긴 대답이었다.
혁련세화가 미소를 짓고, 혁련위는 고개를 돌려 손빈 일행을 향했다.
전대 패검 혁련위의 시선이 청랑검 위가진에서 잠시 멈췄지만, 그것뿐이었다. 경희 공주에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움직여 가던 혁련위의 시선이 오르한과 북해십이비를 향했다.
“윽.”
그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북해십이비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혁련위의 관심은 오르한에게 있었다.
“섬옥수인가?”
섬옥수 오르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혁련위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패검이군.”
이미 전대 패검이 되었지만 섬옥수 오르한은 혁련위를 여전히 패검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재미있군.”
혁련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뒤따라 들어선 탈혼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황산에선 제법 고생했다던데……. 괜찮소?”
능청맞은 음성으로 탈혼도가 묻는다.
말없는 혁련위와 탈혼도의 시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강렬한 혁련위의 눈빛을 받으며 탈혼도가 피식 웃는다.
“할 말 있으면 노려보지만 말고 한판 뜨든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좀 찌뿌드드하던 참인데 잘됐군.”
말하는 탈혼도의 눈빛은 대단히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전대 패검 혁련위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든.”
혁련위의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탈혼도 역시 그에 못지않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노군이 나지막이 말했다.
“서원에선 하지 마라. 혼난다.”
“저기, 나도 해도 돼?”
화사의 목소리에 탈혼도와 혁련위가 동시에 돌아본다.
“나 이젠 흡정공 안 써. 그니까 그냥 소수로만 할게. 안 돼?”
‘그냥 소수’가 아니다. 검희의 절기를 응용한 화사의 소수는 이제 예전과는 아득히 달라져 버렸다.
“넌 또 왜?”
노군이 탈혼도와 혁련위의 질문을 대신했다.
“나 열심히 해야 해. 요즘 너무 먹기도 했고…….”
당월아에게 다시 도전하려면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당월아가 그림 그린다고 딴 데 신경 쓰는 요즘이 기회다.
노군은 푹 한숨을 쉬었다.
“……멀리 가서 해라.”
말하던 노군이 문득 고개를 돌린다.
“넌 어디가?”
그건 장강어옹에게 한 말이었다. 장강어옹은 어느새 어깨에 낚싯대를 걸고 휘적휘적 서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강에.”
어쩌면 들을 필요도 없던 대답이 돌아왔다. 서원을 나서는 장강어옹의 뒷모습을 보던 전대 패검 혁련위가 노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겠소.”
“그래. 아, 일은 잘 끝났으니 걱정 말고.”
혁련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손빈 일행이 돌아온 것을 보는 순간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빈과 혁련세화를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혁련위는 서원을 나섰다.
“저놈, 그걸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군.”
노군이 중얼거렸다. 황산의 번천지계를 알고 있던 외사의 고수들이라면 당연히 뒷일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 일이라면 세화 소저를 통해 미리 서찰을 보내 드렸는데요?”
손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항주를 떠나기 전에 손빈은 외사의 몇몇 고수들에게 간략하게 일의 결과를 알렸다.
혁련위에게는 혁련세화가 서찰을 썼고, 당문의 당화련에게는 당월아가, 무당파에는 서린이, 그리고 아미파 법허 신니에겐 청혜 사태가 서찰을 보냈다.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그리고 혈봉에게는 손빈이 직접 서찰을 썼다.
그러니 혁련위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는데도 서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겠지. 강호 무림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까.”
중얼거리던 노군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이거 다른 놈들도 와 보는 거 아냐?”
“저기…….”
아미파의 청혜 사태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께서 꼭 한번 찾아오시겠다고…….”
노군은 일그러진 눈살을 펴지 못했다. 법허 신니의 성품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 물론 아미파의 일을 수습해야 하니 당장은 아니겠지만.
“에이, 어디 피해 있어야 하나?”
투덜거리는 노군에게 사수연이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저…….”
“뭐야. 북해에서도 오냐? 이만큼 오고도 또?”
노군의 말에 사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어쩌면 그 설마가 사실이 될 수도 있지만 사수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북해에 다녀오는 것도 어떨까 해서요. 할아버지께서 꼭 놀러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
북해라면 노군도 솔깃하다. 일단 북해의 말들이 무척 마음에 드는 것이다.
“좀 멀긴 한데…….”
노부인 당운영과 함께 가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혁련세화의 말이 그 생각을 멈추게 했다.
“방금 아이들하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또 어딜 간다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요?”
혁련세화의 지적은 정확했다.
“나중에 더워지고 서원이 쉬면 그때 가요. 저도 북해는 꼭 한번 가고 싶거든요.”
날씨가 더워지면 서원은 쉰다. 물론 그때도 아이들은 모여들어서 놀곤 하지만.
“북해? 거기 맛있는 거 많아?”
화사가 대뜸 관심을 보인다. 노군이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맛있다기보다는 특이한…….”
“맛있어요!”
서린의 외침에 노군의 말이 끊어졌다. 화사는 반색을 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는 추운 건 좀…….”
탈혼도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화사는 이미 당월아를 향하고 있었다.
“너도 갈 거지?”
“난 바빠.”
“그래서 안 가?”
당월아는 화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화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
살짝 짜증이 섞인 당월아의 대답에도 화사는 좋아라 했다.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당분간 손님이 이어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허탈한 목소리로 노군은 그렇게 말했다.
노부인 당운영과 서원의 부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손빈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차를 준비했다.
“후우우.”
노군은 찻잔을 들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구나.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이지.”
손빈은 웃었다. 과거 천외사성 외에는 그 누구도 맞서지 못했던 외사의 고수, 노군이 마치 옆집 할아버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웃냐?”
노군이 눈살을 찌푸린다.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방금 그런 생각을 해서요.”
“그래?”
어깨를 으쓱하며 노군이 고개를 돌린다. 부엌에선 어느새 음식 냄새가 풍겨 오고, 호기심 많은 북해십이비가 서원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푸근한 표정으로 노군이 문득 손빈에게 말했다.
“고맙다.”
“저도요.”
손빈은 웃으며 말했다. 노군도 피식 웃는다.
쏴아아.
정원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지난다. 피어오르는 차향 속에 노군은 계절의 풍류를 만끽하고 있었다.
“저, 그런데 어르신.”
느긋하게 있는 노군에게 문득 손빈이 말했다. 노군은 고개를 돌렸다.
“혈마는 어찌 되었을까요?”
그건 정말이지 난데없는 말이었다.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혈마라니? 그놈은 네가 쫓아냈잖아.”
귀견수라의 몸을 차지했던 혈마는 이제 없다. 마검 혈랑도 손빈의 백로 앞에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라, 사라진 혈마 말입니다.”
“아, 전대 혈마 말이냐?”
황학 진인에게 패배한 전대 혈마는 자질이 뛰어난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도구처럼 키우고, 그 속에 혈마로 각성하기 위한 안배를 해 놓았다.
그런데 혈마는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마검 혈랑마저 남긴 채.
홀로 남은 어린아이는 세상에 내려와 혈봉 금사련을 만났다. 그 아이가 바로 귀견수라 아랑이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알 도리가 없다.
싸운 흔적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제압당해 끌려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당월아가 말했지만, 황학 진인에게도 쉽지 않았던 혈마를 압도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니 전대 혈마는 결과적으로 어린 귀견수라를 놔두고 사라진 셈이다. 혈랑검마저 넘겨준 채.
“나도 이상하긴 하지만 이제 그놈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어차피 죽었을 테니까.”
“죽어요?”
손빈이 묻자 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혈마는 당대에 한 놈뿐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혈마가 나타났다는 건 전대 혈마가 죽었다는 뜻이야.”
분명히 혈마는 귀견수라의 몸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니 노군의 말대로라면 전대 혈마는 이제 없다.
“그리고 혈랑검도 네가 부러뜨렸잖아.”
노군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마검은 혈마를 이끌어내는 도구 같은 것에 불과하니까 어떻게든 다시 비집고 나올지도 모르지만.”
마검 혈랑을 잃은 것은 혈마에겐 엄청난 타격이다. 하지만 혈마는 본질적으로 세상의 이면에 속한 존재다. 그리 간단하게 없어지진 않으리라.
“어쨌든 신경 쓸 것 없다. 괜한 걱정이야.”
노군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혈마에 관해 노군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으니 그의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럴까요…….”
그러나 손빈은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무엇 때문이냐고 물으면 정작 할 말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지금은 우리 밥을 신경 써야 하지 않냐? 생각해 보니까 서원에 먹을 만한 게 남아 있을까?”
손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 서원을 비운 참이다. 남아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문제보다, 혹여 상한 것을 먹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이다.
노부인 당운영을 비롯해서 서원에 있는 여성들은 상식이 부족하다. 다들 거대 문파나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사람이 혁련세화인데, 그녀는 지금 서원에 없다. 호연무관과 혁련세가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조금 전 떠난 것이다.
“자,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손빈은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노군은 혀를 찼다.
“우리 중에 가장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빈이라는 것도 좀…….”
고개를 젓던 노군은 신의를 보았다. 신의는 묵묵히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약재 중에 혹시 먹을 거 없냐?”
“사 오는 게 빠르다.”
대단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신의의 대답에 노군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장을 봐야 밥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
*
*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운남의 설산은 마치 푸른 하늘을 향해 솟은 칼날 같았다.
아득히 높은 하얀 산봉우리들과,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얼음 위에 형성된 설원은 대자연의 신비 그 자체였다.
쿵.
나지막한 굉음이 하얀 설원에 울려 퍼졌다.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가질 정도의 소리였지만, 그러나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운남 토착민들이 금단의 성역으로 숭상하는 옥룡설산이었기 때문이다.
쿠릉.
묵직한 소리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눈 덮인 설원을 나지막이 떨게 하던 굉음은 기어이 하얀 설원 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쩌저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설원이 갈라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한 부분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과 얼음은 곧 새하얀 격류가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마치 설산이 분노하는 듯한 엄청난 격류가 지나고 잠시 후, 흩날리던 눈이 가라앉고 나자 거대한 얼음의 단면이 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얼음 조각들이 단면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후우.”
긴 숨결과 함께 새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부드럽게 일렁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그린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남자는 자신의 발아래 까마득히 펼쳐진 설산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여기저기 찢어진 하얀 비단옷마저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빌어먹을 풍경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는걸.”
연인에게 밀어를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는 설산의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봐. 내가 나갈 수 있다고 말했지?”
저벅.
그의 뒤쪽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귀공자와는 대조적으로 건장한 체구를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누구라도 잊지 못할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내. 그는 깊은 얼음 동굴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격류의 흔적. 조금 전 떨어져 나간 얼음과 눈이 할퀴고 간 상흔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사내, 사자혁이 말했다.
“글쎄?”
그린 듯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 옥룡이 어깨를 으쓱한다.
“백 년? 아니면 수십 년? 또 모르지. 기껏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그렇지는 않다.”
사자혁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계절이 다르니까.”
“아아, 그러네.”
옥룡은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그를 아는 자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왕이면 한 이삼백 년쯤 지났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 어쩌면 넌 전설 같은 걸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네.”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옥룡은 사자혁을 보았다.
“그가 네 책을 썼다면 말이지.”
사자혁은 피식 웃었다.
“내려가자.”
발밑은 까마득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 우선 이 설산을 내려가야겠지. 이번에 내려가면 당분간은 절대 올라오고 싶지 않아.”
옥룡은 고개를 젓고는 습관적으로 손을 품에 넣으려다 멈췄다.
“아 참. 이제 없지.”
그가 아끼던 옥빛 부채는 이제 없다. 사자혁의 파월삼식에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옥룡은 사자혁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도 못 들었잖아? 내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을 텐데.”
“내가 아니면 너도 죽었을 거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사자혁이 대꾸했지만 옥룡은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난 이미 혈마의 대법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었어. 아니, 혈마보다 더 잘 알고 있지. 널 이곳에 오게 한 것도 이미 그 준비를 끝내 놨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나는 죽지 않아.”
“내가 구해 내기 전까진 의식마저 잃고 있었던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매우 자신만만하군.”
사자혁의 말에 옥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시 묻지만, 대체 왜 날 살린 거야?”
옥룡의 눈동자가 사자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대한 얼음들 틈에서 정신을 차린 옥룡이 처음 사자혁에게 한 말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자혁은, 천향루의 독 기운으로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널 살려야 하게 됐잖아. 왜지? 날 죽이러 온 것 아니었나?”
“복수는.”
사자혁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나는 다만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사자혁은 말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내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정말이지.”
옥룡은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시시한 남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 그 빛나던 현천의 무제는 진짜로 사라져 버렸네.”
그러나 그 조소에 더 이상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사자혁 역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자. 할 일이 많으니.”
“그래.”
그렇게 답하며 옥룡은 고개를 돌려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럼 우선은 내 자리를 계승한 놈부터 찾아야겠지? 아직까지 피의 능력이니 뭐니 하며 헛짓거리나 하고 있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그러나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옥룡이 말했다.
“죽여 버리겠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자혁은 발아래 펼쳐진 설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후우우욱.
그제야 깨어난 듯 불어오는 설산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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