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A Scribe Who Retires To The Countryside RAW novel - Chapter (325)
낙향문사전-325화(325/494)
제325화. 한밤의 방문자2016.11.12.
서원은 금방 일상을 되찾았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도 틈만 나면 항주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도 며칠이 지나자 뜸해졌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서원에서 노는 것도 똑같았다. 항주에서 친해진 아이들이 서원으로 놀러오는 경우도 있었고, 마을 아이들과 다 같이 주변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작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하루 종일 활기차던 서원도 그제야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겨 들었다.
“그래서 당장은 못 온다는 거지?”
노군이 찻잔을 홀짝이며 묻는다.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다들 바쁘신가 봅니다.”
아미파의 법허 신니와 무당파의 현허 진인은 손빈에게 서찰을 보냈다. 감사의 뜻과 함께 현재 상황을 전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쁘긴 뭐가 바빠. 봉문 했으니 오히려 할 일이 없을 텐데.”
노군은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아미파와 무당파는 앞으로 삼 년간 강호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속가제자들이나 연관된 무관과 상단 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불가와 도가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송을 받기도 했다.
“오히려 몰려드는 뒤처리 때문에 눈코 뜰 새도 없을 거예요. 봉문이라는 게 그냥 문을 닫아건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요.”
옆에서 찻잔을 든 노부인 당운영이 웃으며 말했다.
스스로 봉문 한다는 것은 문파의 모든 정책과 계획이 뒤집히는 파격적인 일이다. 뒤따라야 할 일들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
“법허 신니께서도, 그리고 현허 진인께서도 당분간 서원을 찾아오시긴 힘들 거예요.”
아미의 법허 신니나 무당의 현허 진인 모두 각파의 정신적인 지주 같은 존재들이다. 이런 어지러운 때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
“당문이나 남궁세가는? 모용세가에서도 오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아, 그쪽도 당분간은 힘든 것 같더군요.”
손빈이 찻잔을 손에 쥐고 대답했다. 서원으로 온 서찰 중에는 당문 총괄군사 당화련, 남궁세가의 남궁향, 그리고 모용세가의 모용진과 모용린에게서 온 것이 있었다.
“그럴 거예요. 지금 공손세가가 고사 직전이니까요.”
혁련세화가 말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문과 제갈세가에 이어 남궁세가까지 공손세가와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절연을 선언했어요. 그리고 공손세가와 가깝던 상단들도 전부 거래를 끊어 버렸거든요.”
공손세가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북쪽의 제갈세가와 남쪽의 남궁세가, 그리고 당문과 손잡은 모용세가가 서쪽에서 공손세가를 포위한 형국이었다.
처음에 상황을 관망하던 상단들은 천하오대상단이 공손세가와 거래를 끊었다는 것을 알자 즉시 등을 돌렸다.
그렇게 자금이 말라 버리니 공손세가를 따르던 문파들마저 흔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공손세가의 영역은 이미 제갈세가와 모용세가, 남궁세가에 넘어갔다고 봐야 해요. 남은 건 공손세가가 자리한 합비 정도일까요? 혁련세가에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공손세가인데 설마 이 정도로 흔들리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공손세가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남궁세가와 함께 장강 물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손세가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들 바쁠 수밖에 없어요. 오고 싶어도 못 올 거예요.”
당화련은 당문 총괄군사다. 남궁향도 남궁세가에서 중용되고 있으며 철검 모용진과 모용린은 모용세가의 핵심이다.
혁련세화의 말처럼 오고 싶어도 못 오는 형편인 것이다.
“어쩐지 다들 바쁘네요.”
손빈이 웃으며 남의 일처럼 말했다. 사실 남의 일이긴 하다. 서원은 한가하고 아무 문제도, 바쁜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노군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누구 때문인 것 같으냐?”
노군의 말뜻을 손빈이 모를 리 없다.
“아, 물론 따지고 보면 저도 조금은 책임이…….”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노군이 말한다.
하지만 손빈은 억울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강호 무림은 큰 풍파에 휩쓸렸을 것이다.
물론 상황은 지금과 아주 달랐겠지만.
“됐다. 그리고 어차피 뇌검은 올 거다. 그놈은 유독 남 바쁠 때 보란 듯 놀러 다닐 놈이거든.”
노군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가 말하는 뇌검은 전대 뇌검 남궁천이다. 서원에서도 늘 능청스러웠던 남궁천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갈세가에서도 서찰이 왔다며?”
“아, 네. 화사 소저와 월아 소저 앞으로 온 것입니다만…….”
서찰을 보낸 사람은 황산에서 본 제갈세가의 제갈경이었다. 황산오화로 꼽히기도 했던 그녀는 화사와 당월아에게 서찰을 보냈다.
‘존경하는 언니’ 앞으로 보낸 그녀의 서찰은 간단한 안부와 꼭 만나러 가고 싶다는 내용뿐이었지만, 서원으로 정확히 온 것으로 보아 외사에 대해 파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세가의 일이 정리되면 필옹 제갈련 님과 함께 오겠다는군요.”
“그럼 당분간 올 놈은 뇌검뿐인가…….”
노군은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북해십이비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마주쳤다.
“왜?”
퉁명스러운 노군의 말에 북해십이비 중 한 명이 묻는다.
“뇌검이라는 분, 강한가요?”
유창한 남쪽 말로 그녀가 물었다. 섬옥수 오르한의 엄명으로 서원의 수업을 들은 결과였다.
활달한 북해의 아가씨들에게 서원의 수업은 그다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집중력이 대단한 데다 다들 총명해서 금방 실력이 늘었다.
“뭐, 강하다고 할 수 있지.”
그건 노군만이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외사의 그 누구도 결코 전대 뇌검을 경시하지 못한다.
“그분 오시면, 한번 비무 해 봐도 돼요?”
그 말에 노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죽는다.”
남궁천은 봐주는 게 없다. 북해십이비가 장래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면 비무 중에 살수를 쓰는 것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전부 덤벼도 십 초도 못 버텨. 그러니 너희는 빈이 수련이나 열심히 봐라. 딴생각 말고.”
“우우우.”
북해십이비가 불만의 소리를 높였지만 노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옹은 곧장 강으로 향했다. 등불 아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곧 하나 둘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어차피 손빈이 수련할 때 다시 모일 것이라 그다지 아쉬운 표정들도 없었다.
손빈은 방에서 아이들이 낸 숙제를 살피고 내일 가르칠 것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잠시 정원으로 나왔을 때, 손빈은 마침 밖으로 나오던 사수연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가셨군요.”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손빈을 발견한 사수연도 미소를 지었다.
“네. 신의 님 일을 좀 도울 것이 있어서요.”
불빛 아래 미소 짓는 사수연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손빈은 잠시 말을 잊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후후.”
문득 사수연이 웃음을 흘린다. 손빈은 화들짝 깨어났다. 당황한 손빈을 향해 사수연이 웃는 얼굴로 말한다.
“예전 생각이 나네요.”
“예, 예전이라면…….”
“처음 손 공자님을 만났을 때요.”
사수연은 손빈을 보며 말했다.
“그때도 손 공자님은 그런 표정이었어요. 조금 놀란 듯하면서, 약간은 당황한 눈빛이었지요.”
손빈도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무한 황학루에서 봉변을 당하던 바로 그때다. 당연히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서 사수연을 만난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그랬던가요?”
“네.”
사수연은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 손빈을 쳐다보았다.
“그때로부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지요.”
“고마워요.”
문득 들리는 사수연의 목소리에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별빛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 손 공자님이 주신 것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들 뿐이에요.”
손빈은 죽어 가던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그뿐이랴? 북해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할아버지 빙제의 마음을 여는 것도 손빈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머니 가려와 아버지 사자혁의 진심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따뜻한 온기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수연의 말은 한 점 부족함 없는 그녀의 진심 그대로였다.
“정말, 고마워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손빈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천만에요.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소저께서, 그러니까…….”
지금의 이 마음을 무엇이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이 감정으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게, 그러니까, 그……. 소저께서 계신 것만으로도 기, 기쁘다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던 손빈은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했다. 덕분에 사수연의 뺨이 붉어지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래도 다행입니다.”
애써 웃으며 손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부탁은 지킨 것 같으니까요.”
마지막 순간 사자혁은 ‘연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손빈으로 하여금 사수연의 일에 서슴없이 나서게 했다. 심지어 용봉지회에서 재회했던 사수연이 손빈을 외면했을 때라도.
그러므로 그것은 손빈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손빈이 마주한 것은, 어딘가 어두운 사수연의 눈빛이었다.
“저기…….”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은 손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수연이 말했다.
“그것뿐인가요?”
“네?”
“당신이 저를 위해 한 모든 일들이, 다만 아빠의 부탁 때문인가요?”
호칭이 변했지만 손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손빈을 바라보는 사수연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아닙니다.”
손빈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답고 슬픈 사수연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빈은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수연 소저를…….”
파박.
갑자기 들려온 거친 소리에 손빈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손빈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검희였다. 새하얀 옷을 입은 그녀가 손빈 뒤쪽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언제나 천천히 내려오던 그녀가 곤두박질치듯 땅에 주저앉은 것이다.
“검희 소저!”
손빈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땅에 주저앉은 검희는 고개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손빈을 보았다.
“그가 오고 있어.”
“네?”
반문은 당연했다. ‘그’라니? 누굴 말하는 것일까?
“누구…….”
콰앙.
“오빠!”
서원의 문이 세차게 열렸다. 노부인 당운영이 서원을 개축하며 달았던, 낮에 늘 열려있는 문이 부서질 듯 소리를 낸다.
“화사 소저?”
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람은 화사였다. 화사는 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 났어! 지금 얼음덩이가……. 어? 분위기 좋을 때였어?”
사수연과 손빈을 번갈아 보며 화사가 말했다. 사수연의 놀란 표정이 사라지고 뺨이 붉게 물든다.
“화사 소저. 무슨…….”
손빈이 무슨 일이냐고 채 묻기도 전이었다.
“뭐냐? 왜 그래?”
“형! 괜찮아?”
노군과 서린의 목소리가 서원 뒤쪽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탈혼도와 당운영, 그리고 당월아는 물론이고 혁련세화까지 서 있었다. 오르한과 북해십이비도 함께다.
분명히 아까 숙소로 간다고 사라진 사람들이다. 게다가 혁련세화는 집에 간다더니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아, 저기 저는 방금 서린이가 불러서…….”
안절부절못하던 혁련세화가 머뭇거리며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콰앙.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원 정원으로 날아왔다. 노군과 서린이 반사적으로 손빈 앞으로 튀어나왔다.
“받아야 합니다!”
손빈이 외쳤다. 그림자들을 향해 짓쳐 들던 노군과 서린도 손빈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파박.
노군은 유연하게 몸을 틀며 날아오는 사람을 받아 냈다. 그는 검붉은 무복을 입은 사내였는데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것은 물론이고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심지어 의식마저 없다.
“뭐야, 이놈. 그놈이잖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노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군이 받아낸 ‘그놈’은 바로 혈룡문의 무사, 한월이었다. 손빈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한월이 있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파라락.
아니나 다를까? 손빈이 고개를 들자 귀공자처럼 차려입은 젊은 옥룡이 서원을 향해 내려섰다.
슥, 차창.
한월을 내려놓은 노군과 서린, 그리고 당월아와 사수연이 손빈 앞을 가리고 젊은 옥룡을 막아선다. 세 자루의 검과 불진 하나가 순식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검희와 손빈의 목소리는 거의 동시에 흘러나왔다. 그리고 노군은 잠시 후 정원에 내려서는 젊은 옥룡의 상태가 무사, 한월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턱.
“헉, 허억.”
젊은 옥룡의 머리는 흐트러졌고 옷은 찢어져 있었다. 상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쁜 숨을 내쉬던 그는 고개를 들어 손빈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검희를 보았다.
“역시 여기에 있었…….”
희미한 미소를 짓던 젊은 옥룡이 휘청 균형을 잃었다. 손빈은 급히 앞으로 나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소. 하지만 그보다…….”
젊은 옥룡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멋들어진 귀공자 같은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오고 있소.”
그의 말에 노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그러나 노군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젊은 옥룡만이 아니라 손빈과 검희, 그리고 화사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라도, 설령 황제가 나타난다 해도 그런 표정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직후, 노군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 천천히 번져 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감각을, 그리고 그 기세를.
“후후후후.”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어둠 가운데 퍼져 갔다. 그러나 그것은 듣는 모든 이들을 섬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달빛 아래 천천히 드러나는 하얀 얼굴,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선과 빛나는 눈동자.
젊은 옥룡과 똑같은, 그러나 더욱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는 그는 바로 옥룡, 전대 옥룡이었다.
탁.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그는 가볍게 서원 입구에 내려섰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서원 앞에 선 옥룡의 옷깃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마치 거짓말 같은 그 모습은, 그러나 결코 잘못 본 것도, 환상 같은 것도 아니었다.
촤락.
옥빛 부채가 그의 손에서 펼쳐지며 입을 가린다. 분명히 젊은 옥룡이 쓰던 옥빛 부채가 지금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박.
옥룡은 서슴없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마치 느긋하게 감상하듯 옥룡은 젊은 옥룡과 손빈, 그리고 일행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놀랍군. 검희야 그렇다 치지만 실패작까지 있었다니.”
아득.
옥룡의 시선이 멈춘 대상은 화사였다.
화사는 이를 갈았다. 움켜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기억,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옥룡에 대한 공포와 분노는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슥.
문득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사는 깜짝 놀랐다. 탈혼도가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다가와 그 큰 손으로 화사의 하얀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괜찮다.”
탈혼도는 화사를 똑바로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괜찮아.”
“응.”
화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탈혼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공포나 분노에 내몰려 있지 않았다.
“후후후.”
옥룡이 웃었다.
“이건 흥미로운데? 설마 탈혼도 네가 화사를 고쳤을 리는 없고……. 역시 이건.”
번득이는 옥룡의 시선이 손빈을 향했다.
“너야?”
슥.
사수연이 옥룡과 손빈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옥빛 부채 뒤에서 옥룡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수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옥룡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너도 아직 살아 있었네.”
옥룡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서는 숨기지 않은 조소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검희의 빙검에 가슴을 꿰뚫리고도 살아 있다니…….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그저 끈질긴 걸까?”
빠득.
사수연이 이를 갈았다. 설산에서 있었던 일들이, 그 절망과 참담한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할 사실이, 사수연에게는 있었다.
“어디 있어?”
사수연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씹듯이 내뱉었다.
“아빠는…… 어디 있어!”
피식.
작은 소리였지만 그건 분명 조소였다.
“넌 그렇게 떼쓰는 것밖에 못 하나? 네 아빠를 왜 내게 묻는 거야?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싸늘한 시선으로 사수연을 바라보며 옥룡이 말했다.
“네 손으로 직접 찾아. 설산을 전부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아득.
사수연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검, 미명이 울기 시작했다.
우우웅.
슥.
“잠시만.”
사수연을 제지하듯 손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손빈이었다. 사수연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손빈은 사수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 손빈은 옥룡 너머, 여전히 어두운 서원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아주 잠시만…….”
저벅.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어떤 기세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만.”
묵직한,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딸을 놀리는 건 그 정도면 충분하다.”
“흥.”
옥룡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저벅.
그가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체격과 강렬한 눈동자가 등불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
손빈을 향해 그가 웃었다.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 없던 사람. 단 한 번도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
그가, 사자혁이 지금 손빈 앞에 서 있었다.
────────────────────────────────────